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14화 (14/25)

14. 발톱

멀리 궁이 보이기 시작하자 막녀는 청조에게 씌워준 장옷을 꼼꼼히 여며 얼굴을 거의 가려버렸다. 어찌 된 일인지 궁의 입구를 지키는 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도운이 먼저 열린 문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 뒤로 남현은 주위를 단단히 살핀 후 문을 닫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도운의 뒤를 바짝 쫓았다.

“서방님, 이곳이 어디입니까?”

가려진 장옷 사이로 화려한 전각들이 스쳐 지나가자 청조가 작게 물었지만, 도운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어둠 사이로 계속해서 화려한 전각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도운은 굳게 닫힌 솟을대문 앞에 섰다. 다시 한번 남현이 앞장서 굳게 걸린 빗장을 걷어내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이 내린 작은 마당에 낯선 여인 셋이 서 있었다. 여인들을 마주한 도운은 그제야 등에서 청조를 내려 주었다. 도운의 곁에 기대선 청조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들을 보자마자 당황하여 허리를 숙였다. 뉘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화려한 당의와 가르마에 올려 있는 봉첩지가 귀한 신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오셨사옵니까?”

“나와 계셨습니까?”

“예, 지금쯤 오실까 싶어 나와 보았습니다. 이쪽이옵니다.”

도운이 직접 청조를 부액하며 툇마루에 오르자 궁녀가 바삐 문을 열어 주었다. 작지만 세간이 잘 정리된 방 안에는 이미 두꺼운 금침이 깔려 있었다.

“앞으로 여인이 지낼 방이옵니다. 시각이 늦어 미리 기수 배설해 놓았사옵니다.”

“고맙습니다, 마마.”

도운이 먼저 혜빈에게 고맙다 인사를 전하자 그에게 기대어 서 있던 청조가 주춤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분명 마마, 마마라 하였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마냥 꼬이고 있었다. 청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도운은 계속해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청조의 허리를 곧바로 펴주었다. 자신의 손길에 깜짝 놀란 듯 토끼마냥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여워 도운은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곳 수련재의 주인이신 혜빈마마이시다. 당분간 이곳에서 너를 돌봐 주실 것이다.”

“소, 소인, 서가 청조라 하옵니다, 마마.”

“이 사람은 혜빈이라고 하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예? 자, 잘 부탁드리옵니다, 마마.”

몹시 당황하여 이렇듯 말을 더듬는 청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여쁘고 재미있는지, 청조를 바라보던 도운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도운의 모습을 바라보는 혜빈의 심경은 복잡했다.

그가 저런 미소를,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내라는 것을 금일 처음 알았다. 승하하신 의경세자께서도 자신을 향해 한번 보이지 않던 여인을 향한 애정 넘치는 눈빛이었다. 제 서방의 생명을 갉아먹고, 저의 일가를 무너뜨리고 또 자신의 인생을 지옥 불로 떨어뜨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내가 짓는 작금의 표정에 심기가 불편하였다.

감히 저래도 되는 것인가? 저 사내가 감히 저렇듯 행복한 표정을 지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더 이상의 불경한 마음이 들기 전 혜빈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예, 편히 침수 드십시오.”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한 후 싸늘히 돌아서는 혜빈을 도운의 목소리가 잡았다.

“혜빈마마, 고맙습니다.”

불손한 태도인 것을 알지만 혜빈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 버렸다. 도운 역시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 버리는 혜빈을 탓하지 않았다.

“서방님, 이곳이 어디인 것입니까? 혹시…….”

“혹시 궁이냐고?”

“……예.”

“이리 오너라.”

도운은 금침에 청조를 눕혀 주었다. 누운 몸 위로 부드러운 비단 금침을 덮어 준 후, 청조의 작은 손을 찾아 손에 꼭 쥐었다.

“청조야,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거라.”

“예.”

도란도란 시작한 말이 충격적인 이야기로 끝이 나자 청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더 떠질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떠진 눈이 깜박거릴 틈도 없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청조야.”

“저, 저, 전하.”

도운의 부름에 청조가 자리에 바짝 엎드리며 전하라는 말만 계속해서 더듬거렸다.

“청조야, 일어나거라.”

“저, 전하.”

“일어나라 하지 않느냐!”

도운은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앞에 엎드린 청조의 어깨를 꽉 잡았다. 강제로 청조의 몸을 일으킨 후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똑바로 마주 보는 청조의 두 눈이 불안함과 충격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에게 나는 무엇이냐?”

“저에게, 저에게…….”

“진정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대답해 보거라.”

엄한 도운의 눈빛을 마주 보는 청조는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만 깜박거렸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이신 분이었다. 이 나라의 주인이신 분이었다. 감히, 감히 제 주제에 올려다볼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눈앞이 아롱거리기 시작하더니, 어찌할 새도 없이 눈물이 그득 차올랐다.

“나를 찾아 왜 용마봉에 올랐느냐? 그 복면 아래 내 얼굴이 썩어 뭉그러진 병자인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느냐? 네가 원한다면 그리하마.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그 병을 받을 것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무서운 병입니다. 하늘이 내린 벌입니다! 너무나 두려운 병입니다. 입에도 담지 마십시오. 그런 무서운 말을 입에 담은 벌로 천형이 옮을까 소첩이 너무 무섭습니다. 너무 두렵습니다.”

도운의 커다란 손에 어깨가 꽉 잡힌 청조는 자신의 두 손을 그러모았다. 제발 그런 말은 한 서방님에게 천형을 내리지 말아 달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그러모으고 누군가를 향해 빌고 있었다.

“그럼 대답하거라. 내가 누구냐? 정녕 너에게 나는 무엇이냐!”

“누…… 누구…….”

“내가 너에게 무엇이냐! 말을 하거라!”

청조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진정 이분이 누구신지, 갑자기 머릿속이 멍하여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

“서, 서방님…… 서방님이십니다.”

“그래, 내가 너의 서방이다. 그 복면 아래 어떤 얼굴이 있든 내 존재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네가 그리 말했다. 아니냐?”

“그, 그것은…….”

“대답하거라. 아니냐?”

“…….”

“대답을 하거라!”

엄히 채근하는 말에 결국 청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작게 끄덕이던 고개를 어느 순간부터 세차게 끄덕이고 있었다. ‘예, 저의 서방님이십니다, 저의 서방님이십니다.’ 그 말만 되풀이하며 속삭이는 청조의 눈에서 어느덧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뿐이다. 나는 너의 서방이고 도운일 뿐이다. 그 외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울지 마라. 앞으로 내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 늘 내가 너의 뒤에 있으니 당당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예에…….”

눈물이 흐르는 청조의 뺨에 입 맞추어 준 도운은 청조의 깊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미안하다. 처음 산에 오른 널 오해하고 보듬어 주지 않은 것이 미안하고, 나처럼 현실에 절망하지 않은 널 원망하고 핍박한 것을 사무치게 후회한다. 그날, 홀로 산나물을 뜯으러 간 널 따라나서지 못한 것을, 너를 두고 홀로 그곳을 떠난 것을, 또 너를 오해하여 홀로 어둠 속을 방황하기만 한 나 자신을 죽도록 원망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청조야 그중,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말이다.”

잠시 말을 끊은 도운은 도포 안쪽에 매달려 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청색 비단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비녀를 꺼내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절반으로 부러뜨렸던 청조의 목비녀였다. 아교로 억지로 이어 붙인 후, 중간을 비단 천으로 단단히 감아 다시 아교로 고정해 놓았었다. 가운데가 불뚝해져 버린 것이 이제 다시는 머리에 꽂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사무치도록 후회한 것은 너를 내 단 하나의 지어미라 한 번도 말해 주지 못한 것이었다.”

얼마나 청조를 그리워하며 만지고 쓰다듬었는지, 듬성듬성 거칠게 깎여 있던 목비녀가 이제는 반질반질 윤이 흘렀다. 자신의 손바닥에 놓인 목비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조는 고개를 들어 도운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고백에 청조의 입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졌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아롱아롱 차올랐다.

“내가 너를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만큼 많이 은애한다. 죽을 날까지, 죽어서도,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너뿐이다. 몇 겁의 생을 산다 하더라도 내가 은애하는 단 하나의 지어미는 청조 너 하나뿐이다. 내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새벽, 너 하나뿐이다.”

속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는 도운의 입술이 떨렸다. 어찌할 새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참으며 도운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 마음을…… 끝내 전하지 못할까, 끝내 너를 찾지 못할까 봐, 내가 그것이 정녕…… 너무 두려웠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과 동시에 청조의 입에서 서러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운은 흐르는 눈물을 가볍게 닦아 주고 청조의 입술을 혀로 가볍게 훑었다. 피딱지는 사라졌지만 아직은 건조한 입술이 혀끝에 까슬함을 남겼다.

“내 고백에 대한 대답은 아니 해 줄 것이냐? 내가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너의 앞에서는 일개 사내일 뿐이다. 은애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이리 떨리는 일이란 말이다.”

부끄러운 듯 미소 짓던 도운은 청조의 손을 들어 제 가슴에 대어 주었다. 쿵, 쿵,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듯, 강하게 요동치는 맥이 손끝에 느껴졌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낀 청조는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 도운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오직 서방님뿐입니다. 하늘 아래 은애하는 분은 오직 서방님뿐입니다. 영겁(永劫)의 시간이 흐른다 하여도, 제 마음만은 닳아지지도 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을 굳게 약조 드릴 것입니다.”

눈물로 고백을 마친 청조는 다시 도운에게 입을 맞추었다. 늘 소극적이기만 한 청조의 담백한 입맞춤에 도운은 청조의 작은 몸을 담뿍 끌어안았다. 작은 입맞춤 하나에도 손끝이 저릴 만큼 떨렸다.

함께 있는 애달픈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밤은 지나고 있었다. 밤이 지나는 것은 이만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이기에, 이 밤이 지나는 것이 더욱 아쉬웠다. 품에 안긴 청조의 작은 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야 했다.

“이제 그만 처소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너를 숨겨야만 해. 허나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내가 모든 것을 돌려놓을 것이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야. 그때가 되면 이렇게 비열하게 너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

“괘념치 않으니 비열하다 하지 마십시오. 서방님의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한들 괘념치 않습니다.”

“아니, 나는 너를 절대 숨어 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못난 사내라 해도 너를 숨어 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라.”

“예, 믿습니다. 늘 믿었습니다.”

청조가 도운의 품을 더욱 파고들자, 도운은 연인의 몸을 꼭 부둥켜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내 수일 내에 다시 올 것이니, 그때까지 끼니 거르지 말고 탕약도 잘 먹고 있어야 한다. 알아듣느냐?”

“예, 잘 먹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잘 쉬며 서방님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방을 나서기 전, 다시 한번 청조를 품에 꼭 안은 도운은 청조의 마른 등을 쓸어 주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 마른 등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져 한참을 쓸어 준 후 방을 나섰다. 청조를 두고 돌아서는 발길이 몹시도 쓸쓸했다.

* * *

이튿날 정무를 위해 근정전 어좌에 앉은 도운은 대신들 사이로 익태의 뻔뻔한 낯짝을 발견했다. 관자놀이에 길게 찢겨진 상처가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달라붙어 기어가는 모양새였다. 지렁이만도 못한 놈이 꼭 제 모양새 같은 상처를 달고 서 있었다.

“도승지는 이제 몸이 좀 우선 한가?”

“예, 전하. 심려를 끼쳐드려 망극하옵니다.”

“그래, 우선하다니 잘되었네. 아주 다행이야.”

암, 다행이지. 부디 강건하거라, 부디 튼튼하거라. 그래야 부러뜨리는 맛이 있으니. 차가운 눈빛으로 익태를 내려다보는 도운의 입가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비소가 서리다 금세 사라졌다.

“호구 조사는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것은 다소 시일이 걸리는 일이옵니다. 도성뿐이 아니라 지방의 가구까지 모다 조사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도 두 계절이 걸리는 일이옵니다.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시면,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를…….”

“지방의 일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도성의 호구 조사가 어찌 두 계절이나 걸리는 일인가! 경들은 대체 과인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오? 일을 하명한 지가 언제인데, 과인이 묻지를 않으면 일의 진척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닌가! 책임자가 누구인가? 지금까지 정리된 문서를 들고 와라!”

도운의 역정 가득한 명에 푸른 관복을 정제한 두 사내가 근정전에 들었다. 그들이 내민 그간의 조사내용이 담긴 장부를 휙휙 넘겨보던 도운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 조사가 사실 그대로인가?”

“예, 전하. 소신들이 일일이 발로 뛰어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핏, 비웃음이 명백한 왕의 웃음소리에 몇몇 대신들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자에서나 볼 수 있는 시정잡배 같은 비웃음이었다. 산에 갇혀만 살았다더니, 천성이나 배움이 모자란 왕의 언행은 왕으로서의 품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다소 상스러웠다.

“홍문관의 부수찬 들라 하라.”

뜬금없는 왕의 명에 부수찬이 기다렸다는 듯 근정전으로 들었다. 따로 명을 한 것도 아닌데 치자색 비단이 곱게 깔린 붉은 목판을 들고 있었다. 도운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부수찬은 목판을 든 두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도운은 비단 위에 놓여 있던 장부를 손에 들고 휙휙 넘겨보았다.

“한 치의 거짓이 없이 작성되었느냐?”

“예, 전하. 신 홍문관 부수찬, 전하의 명을 받아 한 치의 거짓 없이 자세히 조사해 기록했나이다.”

두 장부를 펴 놓고 비교하는 도운의 의중을 알아챈 몇몇 대신들이 좌불안석이라, 깊게 눌러쓴 관모 안으로 땀이 축축하게 배는 것을 느꼈다.

“섬골에 사는 막달, 처의 이름은 육례이고 아들 다섯에 딸이 하나라 기록되어 있구나. 아들의 이름은 막이, 막돌, 삼식이, 석이, 점박이고 홀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한데 부수찬이 가져온 장부의 막달은 막이, 막돌 이렇게 아들이 둘뿐이고, 두 해 전 부친상을 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운은 조사원이 가져온 장부의 다음 장을 넘겨 내용을 줄줄이 읽은 후, 부수찬이 가져온 내용 또한 줄줄이 읽었다. 장부가 한 장씩 사락거리며 넘어갈 때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도운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내용을 큰 소리로 읊었다. 도운이 한 소절씩 내용을 읽을 때마다, 대신들은 점점 습기가 차오르는 관모 속 두피가 간지러워 미칠 듯했다.

두 장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딱 짜 맞춘 듯 동일인물에 대한 조사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이는 필시 조사원의 행적을 따라가며 부수찬이 호구 조사를 했다는 증거였다. 왕이 저희의 목을 조르려 뒤에서 저런 꼼수를 부리고 있었다.

“말을 해 보아라. 두 조사내용이 어찌 이리 다른가?”

어느새 장부를 다 읽은 도운은 대신들을 향하여 조용히 물었다. 조용히 물었으나 강한 힘이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감히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낮게 깐 그의 목소리는 위압과 함께 공포를 주었다. 시정잡배 같은 모습인 줄 알았더니, 그보다는 발톱을 숨긴 채 먹이를 희롱하는 산짐승의 교묘함이었다.

“전하, 소신들은 조사한 내용 그대로를 기록했사옵니다. 아마도 조사과정에서 약간의 착오가, 악!”

변명을 지껄이는 조사원의 머리로 힘껏 던진 장부가 날아가 부딪히자, 조사원은 이마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약간의 착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느냐! 집집마다 셋에서 다섯 이상의 장정이 차이가 난다! 여덟 세의 어린 사내아이를 열여덟 세의 장정으로 착각한 네 눈이 과연 정상이냐! 그것이 약간의 차이더냐! 이런 천하에 둘도 없는 천치가 감히 관직에 있다, 뻔뻔하게 관복을 입고 관모를 썼더냐!”

쩌렁쩌렁 근정전을 울리는 도운의 포효에 대신들은 감히 아무도 나서지 못하였다.

“어느 누가 사사로운 이익을 보려 이런 거짓 장부를 올리라 했느냐!”

“사사로운 이익이라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전하. 그깟 호구 조사에 저희 같은 조정 신료들이 어떤 사익을 취할 수 있겠사옵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섬골에 사는 막달을 들라 하라!”

근정전 안으로 등이 굽은 까무잡잡한 사내가 눈치를 보며 걸어 들어왔다. 안 그래도 굽은 등이 높으신 분들의 시선에 위축되어 더욱 굽어 있었다. 언제 빨았는지 모를 꾀죄죄한 흰 적삼의 소맷부리에는 엊저녁 먹다 흘린 간장 국물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네가 섬골에 사는 막달이냐?”

도운의 질문에 막달이란 사내는 바짝 엎드려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조아려댔다. 하늘 같은 나라님 앞에 엎드려 있자니 손이며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후들후들 떨려왔다.

“예, 예, 저, 전하. 쇠, 쇤네가 마…… 막달이, 이옵니다.”

“막달은 자리에서 일어나 과인의 하문에 거짓 없이 대답하라. 네 집에 저자들이 호구 조사를 하러 들렀던 것을 기억하느냐?”

엎드렸던 막달은 고개를 삐죽거리며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도운이 가리키는 관원들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관원의 얼굴을 확인한 후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기억한다고 아뢰었다.

“작금 너의 집에 사내는 너와 너의 다섯 아들, 그리고 네 아비까지 모다 일곱이다. 네 아들의 이름은 막이, 막돌, 삼식이, 석이, 점박이 이렇게 다섯이 맞느냐?”

“예에? 아, 아닙니다요. 쇤네에겐 아들이 넷 있었는데, 몇 해 전 마을에 두창이 돌아 그중 둘을 잃었습니다요. 위에 두 아이인 막이와 막돌은 살았으나, 아래 두 아이인 삼식이와 석이 놈을 잃었습니다요.”

잃어버린 아이들이 생각나는지 막달은 코를 훌쩍이며 더러운 소맷부리로 코를 닦아냈다.

“그럼 점박이는 누구냐?”

“점박이는 쇤네의 집에서 기르는 개인뎁쇼?”

“개를 기르느냐?”

“예, 돌아오는 말복에 잡아 온 식구 목구멍에 기름칠이라도 해 보려, 쇤네가 몇 달 전 이웃에서 한 마리 얻어왔습니다요. 털이 점박이 모양이라 아들들이 그 이름으로 부릅니다요.”

“그래? 그럼 네 모시는 아비가 있는 것은 맞더냐?”

“없는뎁쇼. 재작년 가을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요.”

“그 사실을 저 관리들에게 똑바로 전하였느냐?”

“예, 전하. 틀림없이 사실을 고했습니다요. 예, 암만요.”

막달은 혹여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을까 도운이 묻는 말에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 그럼 네 식솔의 머릿수를 늘려 누가 사사로운 이익을 보았는지 그 시시비비를 이제부터 가르면 되겠구나.”

도운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근정전 안에 줄지어 서 있는 조정 신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막달은 들으라. 네 식솔 중 군역의 의무가 있는 십육 세 이상의 사내가 너를 포함하여 총 일곱으로 조사되어 있다. 허나 네 말대로라면, 십육 세 이상의 장정은 너와 너의 두 아들인 막이와 막돌까지 셋뿐이다. 맞느냐?”

“예, 암만요, 맞습니다요. 셋이가 맞습니다요.”

“그럼 이제껏 나라에 군역을 어찌 바쳤느냐?”

“그, 그것이…….”

막달은 잔뜩 주눅 든 모양새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정 신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막달은 가감 없이 말하라. 과인이 너의 처지를 자세히 듣고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아 주려 함이다.”

“그, 그것이, 전하. 사실 쇤네는 이제껏 빚을 내면서 장정 여섯 명의 몫으로 군역을 냈습니다요. 나라에서 나온 분들이 그리 내라 하시니 그리 하였는데…… 허나 그것이 어찌하여 일곱으로 변하였는지는 쇤네가 도통 알 수 없는지라…… 그럼 설마, 이제부터 일곱의 몫을…… 내야 하는 것입니까? 아이고, 그것은 정녕 쇤네더러 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요.”

“네가 이웃에서 점박이를 데려왔으니, 일곱이 된 것이 아니냐.”

“예에? 허, 허나, 그것은 개새끼이온데…….”

놀란 마음에 고개를 번쩍 쳐든 막달은 저를 보며 웃고 있는 도운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막달은 고개를 들고 나를 보거라.”

감히 어찌 하늘 같은 임금의 용안을. 막달은 조아린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고 침만 꿀떡 삼켰다. 이미 무더위가 시작된 계절, 더위와 긴장으로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조금 전 잠시 엿본 임금의 수려한 용모에 더욱 기가 죽었다.

감히 저희 같은 양민들은 우러러볼 수도 없는 귀티라는 것이 자르르 흐르는 것이, 쳐다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막달은 땀이 흥건한 손을 바지춤에 대충 비비며 닦았다.

“고개를 들라 하지 않았느냐?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라.”

“…….”

“어서!”

도운의 근엄한 명에도 막달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차마 고개도 올리지 못하고 눈동자만 대굴대굴 굴렸다. 어쩔 줄 모르고 엎드려 덜덜 떠는 막달의 모습에 도운은 그를 닦달하기를 멈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과인이 너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니다. 네가 바닥에 몸을 조아릴 이유가 전혀 없으니 일어나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 일어서거라.”

도운의 부드러운 명에 막달은 그제야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너에게 고개를 조아릴 사람은 바로 나다. 허나, 내 임금 체면에 너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나를 잡아먹으려 벼르는 저 인간들에게 나를 물어뜯을 빌미를 주는 것이다. 내 너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저들에게 그런 빌미를 줄 수 없어, 너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없구나. 대신 이 자리에서 너에게 진심으로 내 잘못을 전하고, 백성들에게 사죄한다.”

“그…… 그게 영 무슨 말씀이신지…… 쇠, 쇤네는…… 자…… 잘…….”

도운의 사죄에 막달은 말을 더듬었고, 조정 신료들은 술렁였다. 저마다 왕의 의중을 살피느라 머릿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익태 역시 도운의 의중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가 변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변하였다. 옳지 못한 변화였고, 분란을 야기할 변화였다.

“너는 이 나라의 근간이다.”

“예에? 그것이 무슨 큰일 날 소리이십니까? 쇤네 같은 천한 것이 어찌…….”

“이 세상에 천한 백성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너희 정직한 백성들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일군 농사로 이 나라의 양반들과 내가 편히 먹고사는 것이지.”

파격적인 왕의 말씀에 막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도운을 바라보았다. 수려하고 위풍당당한 왕은 자신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이 나라의 양반이란 너희 백성이 마련해 주는 곡식이 없다면 그냥 굶어 죽을 하등 쓸모없고 멍청한 것들이다. 게으른 것들이 그 고마움도 모르고 뻔뻔하게 가진 것을 더 내놓으라, 거짓 장부까지 꾸며 군역에 조세까지 몇 배나 더 불려 받아왔단 말이지. 입으로만 공자 왈, 맹자 왈 지껄이면서 뒤로는 도적질할 궁리나 하는 양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그러니 굳이 귀천을 따진다면, 귀한 존재는 바로 너희들이다.”

저들이 귀하다 함은 반대로 말하면 천한 것은 자신들, 바로 사대부들이란 말이었다. 이 나라의 주인이자 나라의 근간은 저런 천한 것들이 아니라 바로 사대부인 자신들이었다. 한데 왕은 지금 사대부이자 양반인 자신들을 싸잡아 도적에 비유하며 천한 것들보다도 하등 쓸모없는 인간으로 얕잡아 보고 있었다.

젊은 왕의 직설적인 언행에 대신들의 심기가 심히 불편했다. 하지만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대신들의 얼굴은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 임금은 배고 백성들은 물이라 하였다. 너희들은 나를 물 위에 띄울 수도 있지만, 깊고 차가운 수심 아래로 가라앉힐 수도 있지. 그것이 너희의 힘, 백성들의 힘이다. 너희들의 힘은 그만큼 강한 것이니라. 그에 반해 나는 너희들이 일으키는 풍랑 한번에도 쉬이 뒤집어지는 나약한 배일뿐이다.”

도운은 어좌에서 일어나 막달의 앞까지 직접 걸어 내려왔다.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임금의 모습에 몸이 잔뜩 굳어 버린 막달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허니 나는 너희 백성보다 한참 모자란 자, 너희들이 마음먹으면 물속 가장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버리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이다. 허나, 나는 또한 너희들이 수면 가장 높은 곳에 띄워준 배, 너희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금일 너와 백성들에게 깊이 사죄한다. 왕으로서 올바르게 정치하지 못하고, 못된 것들의 폐단을 눈감았던 일을 깊이 사죄하느니라.”

진지하게 사죄의 말을 전하는 도운의 눈빛에 막달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르 거리는 울림을 받았다. 저절로 두 손이 공손히 모아졌다. 저자에 떠도는 풍문과는 너무도 달랐다. 중인도 아니고, 양반도 아니고, 하물며 만인지상인 나라님의 사죄를 받았다. 이제 우리네 고단한 삶이 변할지도 몰랐다.

“나는 너희들이 풍랑을 일으키지 않고, 유유자적 떠도는 잔잔한 물결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또한, 너희들의 잔잔한 물결로 나를 평온한 뭍으로 인도해 주길 바라느니라.”

“가, 가, 감읍합니다요, 전하.”

감히 나라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막달은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양반들의 말투를 얼추 흉내 내보았다. 그런 막달을 향해 도운은 시원하게 웃어 보이더니 다시 어좌로 돌아가 앉았다.

“다들 들으라. 너희들로 인해 몇 배로 불어난 군역과 조세 부담에 허우적거리는 농민들이 신분을 버리고 스스로 천민이 되거나, 권문세가에 투탁하고 승적(承嫡: 서자가 적자로 됨)하는 등 악폐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악폐에 양민들이 줄어들고 있음에도, 너희들은 그 모자란 궐액을 또다시 양민들에게서 보충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빼앗은 조세로 누구의 곳간이 미어터지는지, 누가 사익을 취하였는지 그 시시비비는 이제부터 가려보면 알겠지.”

저희들을 도적 취급하고 천민 아래로 깔보는 왕의 언행에 심기가 불편한 것도 잠시, 대신들의 이마에 다시 땀이 차올랐다. 혹시라도 진정 저희들의 탈세가 드러난다면, 그것을 빌미로 다른 착취의 흔적까지 줄줄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었다.

“이번 일은 전하의 하교를 받은 관리가 그 일을 제대로 수행치 못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함이 틀림없다 사료되옵니다. 이는 비단 하교를 전달받은 말단 관리뿐 아니라 그 하교를 전달한 자의 책임이 크옵니다. 허나 이 일로 청렴한 다른 대신들까지 피해를 봐선 아니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모두 어찌할까 가슴을 졸이던 찰나, 태연자약한 익태의 목소리가 근정전에 울렸다. 익태의 말이 울리자마자 사방에서 이를 동조하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예, 전하. 이는 이번 전하의 하교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저들의 잘못이 크나이다. 이를 다른 대신들과 엮는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저기서 통촉해 달라 울부짖는 조정 신료들의 꼬락서니가 진심으로 가소로웠다. 꽁지 빠진 새마냥 위신 없는 모양새로 제 살 궁리를 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가증스럽고 우세스러웠다. 그런 대신들을 깔보는 도운의 적나라한 비웃음이 근정전에 크게 울렸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그럼 그대들이 말해 보오. 과인이 저들을 어찌 징치해야 옳겠소?”

“전하의 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저 둘을 파직시키고, 그 상관인 정랑에게 책임을 물어 함께 파직시킴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하, 겨우 말단 관리 셋을 파직시킨다. 그것으로 되겠는가?”

“허면…….”

“이번 일은 호구, 토전, 조세, 부역을 담당하는 호조의 잘못이 제일 크다. 비단 과인이 호구 조사를 명하지 않았어도, 호조에서는 이미 제대로 된 장부를 가지고 그 기준에 맞추어 군역을 거뒀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 허나 자신의 책무를 간과했을 뿐 아니라 더욱 많은 군역을 거둬들이고자, 실제 머릿수를 조작한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다. 그들의 잘못에 풍년이 들었음에도 굶어 죽는 자식을 가진 백성들의 통곡이 담장을 넘고 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과인을 속이고 백성의 고혈을 빼먹은 죄는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다. 이에 호조의 으뜸 담당자인 호조판서는 이 사태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 있다. 도승지는 들어라.”

도운의 부름에 익태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허나 바닥을 내려 보는 그의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네, 전하.”

“그간 잘못된 호구 조사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혈을 흘렸겠는가! 내 이를 바로잡고, 이제라도 그 잘못을 반성하도록 기회를 주고자 특별히 하명을 하였건만, 다시금 이런 거짓 조사로 과인을 능멸하였다. 왕의 명을 이리 가벼이 여기는 저들의 마음이, 이 나라의 왕인 나에 대한 역심이 아니고 무엇이냐! 또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총 책임자가 누구냐! 바로 도승지 그대이니라. 왕명 하나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무능한 도승지의 책임이 없다 어찌 말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앙앙불락, 마음 깊은 곳에서 도운의 말에 대한 깊은 불만과 불쾌감이 차올라 익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허나,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에게 너무 불리했다. 지금은 고개를 숙일 때였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소신의 불충과 책임이 크옵니다.”

“오늘부로 호조판서 이하, 호조에 속해 있던 모든 관원의 직을 파하고, 멀리 유배하라. 죄인들이 이제껏 부당히 모은 재산은 국고로 환수토록 할 것이며, 그 식솔들은 양반의 족보를 파기하고 양민이 되어 평생 군역과 조세의 의무를 지게 하라. 또한 명을 제대로 이행치 않은 저들을 단속하지 못하고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도승지에게도 책임을 물어, 당분간 자택에서의 근신을 명한다.”

너무 부당한 처사라 말하고 싶었지만,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아무도 나서지 못하였다. 아직은 어리기만 한 젊은 왕이 그간 칼을 갈고 있었다. 그동안 왕의 눈을 가리고, 모든 백성들의 비난이 왕을 향하도록 그리 애를 썼건만. 자신들의 대패였다. 패배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도운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앞으로 신분에 상관없이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은 출생과 사망을 거짓 없이 신고할 것을 명한다. 이는 호구 조사만을 담당할 새로운 직을 만들어 관리할 것이되, 누락되는 부분이 없도록 관리해야 할 것이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거짓 신고를 하는 자 역시 엄히 벌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새로 등용될 호조에서는 직에 필요한 인력을 포함하여 이를 행할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하고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보낸 폭풍 같은 시간은 통촉해 달라 외치며 끌려나가던 호판과 말단 관리의 비명소리로 절정을 맞다 끝이 났다. 푸르게 변한 얼굴의 몇몇 대신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근정전을 기어 나오다시피 떠났다.

근정전을 떠나 근정문을 나서던 익태는 부들부들 달아오른 눈으로 근정전 너머 어딘가에 있을 도운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감히 네놈이. 산에 묻혀 죽을 운명의 놈을 임금의 자리에 올려 주었더니, 은혜도 모르고 키워준 주인을 물어?

큰소리로 혀를 찬 익태는 관복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모두 불안, 불만, 분노를 느끼고 궁을 떠날 때, 오직 한 사내, 막달만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발을 재게 놀려 집으로 돌아갔다. 금일 자신이 겪었던 일을 빨리 아무나 붙잡고 말하고 싶어 주둥아리가 근질근질하고 엉덩이가 다 곰실거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막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운은 남현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믿을 만한 수하들을 시켜 의정부 대신들을 중심으로 감시를 붙이게. 일거수일투족을 놓쳐선 아니 될 걸세.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거라 믿네.”

“예, 전하.”

근정전을 나온 도운은 남현에게 따로 명을 내리며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상선과 지밀상궁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과연 무슨 명을 저리 은밀하게 내리는지 둘 다 궁금하여 귀가 이쪽으로 잔뜩 쏠려 있었다. 저 쥐새끼 같은 것들이 무슨 말을 누구에게 옮기려 저리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도운의 입가에 썩을 듯한 비소가 걸리다 곧 사라졌다.

* * *

저녁 무렵 막녀의 뒤를 따라 혜빈이 방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런 혜빈의 방문에 놀란 청조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혜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만류했다.

“그럴 것 없네. 편히 앉으시게.”

“망극하옵니다, 마마.”

“몸은 좀 어떠한가?”

“우선하옵니다. 이제 탕약을 먹을 이유도 없을 정도입니다.”

청조의 앞에 자리를 잡은 혜빈은 막녀가 곁에서 올리는 탕약 그릇을 직접 들고 청조에게 전해 주었다.

“그래도 전하께서 걱정하시니, 따뜻할 때 어서 들게.”

“예, 마마.”

문득 탕약을 건네는 혜빈의 고운 손이 눈에 들어왔다. 청조는 괜히 자신의 거친 손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어졌다. 고초를 겪으며 입었던 손등의 상처는 이미 다 나았지만, 오랫동안 노동으로 고생한 청조의 손은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갈라진 손톱 아래의 손가락뿐 아니라 손바닥까지 굳은살들이 딱딱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 산에 오른 예화의 손을 보고도 자신의 손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청조는 고운 혜빈의 손에 제 손끝이라도 닿을까 조심하며 탕약 그릇을 받아 들었다. 곱고 깨끗한 혜빈의 손은 감히 만져서는 안 되는 무엇인 것만 같았다. 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수그러드는 순간이었다.

한데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했다. 기방 여인들의 손 역시 곱고 용모 또한 혜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었다. 하지만 청조는 그녀들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혜빈의 시선을 느낀 청조는 얼른 생각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려 탕약을 마셨다. 탕약을 마신 후, 막녀가 건네는 편강을 받아먹는 청조를 바라보던 혜빈이 조용히 물었다.

“지내는 것은 어떠한가? 불편한 곳은 없는가?”

“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하는 일 없이 이리 방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 송구스러울 뿐이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일 것도, 송구할 것도 없네. 내 자네 덕에 우리 군주를 보게 되었으니 내가 감사하지.”

“그것이 어인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전하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청조는 혜빈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혜빈은 대답 따윈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아버지께서는 사비를 들이시어 목멱산 기슭에 쓸모없는 돌밭을 사들이셨네. 그리고 빚에 쫓기어 굶어 죽기 직전인 양민들을 모아 돌밭을 개간하게 시키셨지. 거친 돌밭을 개간하자니 농기구가 남아나질 않았을 게야. 그러니 농기구를 수리하고 만들어 써라 그곳에 대장간도 지어 주셨겠지. 대장간을 중심으로 움막이 하나둘씩 생기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네.”

“그렇다면 그들이 돌밭을 다 개간하고 그곳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사옵니까?”

“개간을 하긴 했지.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를 손에 든 여인들이, 대장간에서 만든 괭이를 손에 든 사내들이. 그네들이 가을 겨우내 그 넓은 돌밭을 직접 다 개간했네. 돌밭을 개간하라 하시고 품삯을 주었으니, 실로 내 아버지께서 겨우내 그들을 먹여 살린 것이지. 그리고 개간한 밭은 그들에게 소작을 주어 수확량 중 오 할을 받기로 하였네.”

“오 할이라니요!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시옵니다, 마마. 소인은 소작료로 오 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어 봅니다. 게다가 대장간까지 지어 주시다니요. 너무나도 감읍할 일이옵니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청조의 모습에 혜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탈하게 웃는 혜빈의 눈은 잔뜩 메말라 있었다.

“훌륭하면 뭐하겠는가. 그 소작료를 낼 농민들도 받을 아버지께서도 아니 계신데. 봄이 되어 파종할 일에 들떠 있던 양민들은 다 쫓겨나거나 역당으로 몰려 관비가 되었네.”

“예? 어째서…… 소인이 연유를 여쭈어도 되옵니까?”

“대장간에서 칼과 창을 만들고 있다 누군가 발고를 했네. 내 아버지께서 역모를 일으키고자 사병을 키우고 있다고 했어. 금군들이 직접 대장간을 뒤지고 칼과 창을 찾아내었지. 그 칼과 창으로 전하를 몰아내려 한다고 하였네. 과연 누가 그랬겠는가. 누가 발고를 하고 누가 칼을 숨겼겠는가.”

그 이후로 계속된 혜빈의 이야기에 청조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지난 몇 달간, 자신의 딸과도 만나지 못한 채 이곳 수련재에 갇혀 지냈다는 혜빈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전하는 그런 분이시네.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와는 다르게 무섭고, 잔인해.”

“저의 서방님…… 전하께서 모든 것을 되돌려 놓으신다 하셨습니다. 전하의 잘못이 없다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려놓겠다 말씀하시는 전하께서는 무섭고 잔인하신 분이 아니옵니다. 분명 곧 마마께 가족을 돌려드릴 것이옵니다. 억울하게 관비가 된 양민들도 머지않아 분명 신분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혜빈은 제 지아비의 편을 드는 청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메마르고 텅 비어 버린 눈동자였다. 혜빈의 마른 시선에 청조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네가 고개를 숙일 것은 없네. 자네에게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내 오라버니를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네. 진심으로 고마워.”

“오라버니시라면, 혹여 재환 나리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네.”

“나리께서는 잘 계시는 것이옵니까? 소인이 그분께 입은 은혜가 하해와 같사온데,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났사옵니다. 이 미천한 것의 목숨을 먼저 살려 주신 것은 나리이십니다. 소인, 그에 대해 응당 보답을 하였을 뿐 감사 인사를 들을 일이 아니옵니다.”

청조는 혜빈의 인사에 어찌할 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보답을 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네가 내 오라비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다면 나와 내 형제들은 소중한 형제 하나를 잃었을 것이고 내 부모님께서는 당신들의 든든한 아들을 잃으셨을 터이지. 그러니 내가 감사한 것이 맞네.”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여인의 붉은 얼굴을 바라보던 혜빈이 슬쩍 미소 지었다. 허나 미소는 곧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분명 고마웠다. 허나, 그 이면에 드는 자신의 추악한 감정을 혜빈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식솔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생각한다면 홀로 따듯한 방에서 지내는 것이 어찌 마음이 편안할까. 당(堂)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허나 자신은 합(閤)이나 각(閣)도 아닌 이곳 수련재(齋)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빈궁의 신분인 저였다. 비록 지존보다 품계가 낮다고는 하나 사사롭게는 왕의 형수였으니 응당 왕실의 어른이었다. 허나 이런 자신이 죄인의 여식이 되어 신분에 맞지 않는 재(齋)에 감금되었다는 것은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였다. 이 여인의 사내가 의경 세자의 목숨을 갉아먹지 않았다면, 작금 중전의 자리에 있을 여인은 분명 저였다. 애달프지는 않아도 존경하고, 흠모하였던 자신의 지아비로부터 지어미에 대한 애정을 받았을 것이다. 어설픈 세자빈의 작호가 아닌, 화려한 중전의 작호를 하사받고 교태전에서 그 품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의경 세자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진 것은 모다 이 작은 여인의 사내 때문이었다. 그런 사내를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는 여인의 존재가 껄끄러운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사내가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한 남의 아픔 따윈 모르는 듯, 제 사내만 바라보는 여인이 보기 싫어 짓궂게 굴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추악하고 악랄한 면을 다 이야기해 주었다.

허나 눈앞의 여인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돌려놓을 것이다.’ 그리 말하는 여인은 사내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이고 있었다. 애정은 조금도 식어 보이지 않았다.

“이만 가보겠네, 몸조리 잘하시게.”

“예, 마마.”

조금 더 있으면 저 여인을 닦달할 것 같았다. 악랄한 네 사내를 왜 아직 연모하느냐고, 그가 과연 양반의 신분도 아닌 너를 끝까지 지켜 줄 줄 아느냐고. 그리 묻고 다그칠 것만 같아 혜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싸늘하게 나가는 혜빈의 모습에 청조의 마음도 무거웠다. 서방님께서, 정말 저 고귀하신 분께 그런 잘못을 한 것인지, 왜 그러셨는지. 믿는 마음과는 다르게 이미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슬픔이 차올랐다.

서방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가 벌써 여러 날이었다. 끼니는 거르시지 않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걱정이었다. 온갖 산해진미가 다 있다는 궁에서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괜한 걱정을 한다며 저를 탓하던 청조는 어느새 똑같은 걱정을 하고 또 했다. 늦은 시각까지 이런저런 걱정으로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한참 잠에 빠져 있던 청조는 제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놀라 잠에서 깼다.

“서방님?”

“그래, 잘 있었느냐?”

“어찌 이리 금방 오셨습니까? 한참은 더 있어야 오실 줄 알았습니다.”

“네가 보고 싶어, 내 잠행을 나간다 상선을 따돌리고 몰래 이리 왔다.”

“정말이십니까? 정말 소첩이 보고 싶으셨습니까?”

도운은 자신의 뺨을 살살 보듬으며 물어오는 청조의 도톰한 입술을 물고 부드럽게 핥았다. 그간 탕약을 잘 먹고 잘 쉬었는지, 말라 비틀어졌던 입술은 예전의 촉촉한 입술로 돌아와 있었다.

“네가 나를 그리워했던 것의 딱 두 배만큼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소첩을 얼마나 많이 보고 싶어 하신 것입니까? 소첩은 그리워하다 죽을 뻔하였는걸요.”

생각지도 못한 청조의 곰살맞은 대답에 도운이 눈을 크게 휘더니 경쾌한 소리로 웃었다.

“참으로 이상타. 내 아직 너에게 잡아 주겠다 약조했던 겨울 여우를 못 잡아 주었는데, 네가 어찌 이리 여우 같은 소리로 나를 홀릴까.”

도운의 농에 청조는 맑은 웃음소리를 내다 그의 뺨을 살살 만졌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이셔요.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 것이어요?”

“어둠 속이라 수척해 보이는 것이니라.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네 몸조리나 잘하거라. 내 너를 업어보겠다 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

“예, 암만요, 서방님께서 하신 말씀은 어느 것 하나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무얼 하며 지냈느냐?”

“저녁에 혜빈마마께서 다녀가셨습니다.”

“혜빈마마? 마마께서 너에게 무슨 말을 하더냐?”

저를 보며 걱정스럽게 묻는 도운에게 청조는 저녁에 들었던 말을 전하였다. 도운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내 너를 잃고 진정 사방이 어둠뿐이었다. 이 궁에서 나를 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어. 다들 나에게서 의경 세자만 찾아댔었다. 대비마마께서도, 승하하신 선왕께서도, 혜빈마마도, 궁에 있는 모든 이들은 내가 아니라 형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익태가 찾아와 네가 나를 배신했다고 고했지. 그리고 난 후, 부끄럽게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청조야.”

“예, 서방님.”

저를 전하가 아닌 서방님이라 불러주는 청조의 목소리가 좋았다. 자신이 궁에 있든 산에 있든, 검은 복면을 쓰고 있든 익선관을 쓰고 있든, 청조에게 저는 언제나 서방님이고 도운일 뿐이었다.

“사람이란 혼자선 한없이 나약한 존재더구나. 너를 잃어버리고서야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마음의 빈틈을 뚫고 어둠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기분이었지. 그때 결심하였다. 혼자 어둠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나에게서 승하하신 형님을 찾아대는 저 인간들의 실망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그들이 절망 속에 허우적대는 꼴을 보면, 그러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다. 통쾌할 줄 알았느니라. 한데…… 하나도 통쾌하지 않더구나.”

“서방님…….”

“내 이제라도 바로잡으려 노력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다 잘될 것이다.”

“예, 믿고 있습니다.”

“청조야…….”

“예, 서방님.”

“청조야.”

“예, 서방님.”

도운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답하는 청조의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마주 대었다. 마주 댄 보드라운 입술을 슬쩍 혀로 할짝대며 지분거렸다. 도운이 아랫입술을 점점 강하게 빨아대자 신음하던 청조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은 도운은 청조의 혀를 지그시 누르고 비벼대며 자극했다.

청조를 안고 살며시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자연스레 속적삼 속으로 기어 들어가 맨살과 어깨를 쓸었다. 그렇게 어깨를 쓰다듬던 손이 속적삼의 목둘레 사이로 다시 빠져나왔다. 도운은 커다란 손으로 청조의 가녀린 뒷목을 강하게 움켜쥐고, 청조의 귓불을 입안에 삼키고 지분거리다 턱을 따라 내려와 목덜미를 물었다.

‘아흑’ 오랜만에 듣는 청조의 비음에 참지 못한 욕정이 터져 버렸다. 속적삼 속으로 들어가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손이 쑥 빠지더니 급하게 청조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지난 두 해 동안 제 안에 죽어 있던 여인에 대한 욕정이 무섭도록 커져 버렸다. 속적삼 아래로 드러난 청조의 하얀 어깨를 깨물며 지분거리다 목덜미에 코를 박은 도운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에게선 늘 기분 좋은 흙 내음이 난다. 이슬을 머금은 흙 내음, 우리가 함께하던 산 내음. 아느냐? 너의 향은 날 안정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참지 못할 정도로 발정이 나서 안달하게 만들기도 해.”

도저히 참지 못할 성욕에 도운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얼마 만에 맡아 보는 향인지 알 수 없었다. 토기가 올라오는 여인들의 분내 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후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향에 취해 숨을 깊게 들이쉬는 도운의 코가 청조의 목을 부드럽게 지나 점점 가슴으로 내려가, 마침내 치마말기 위로 불룩 솟아오른 가슴골에 박혔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켜는 도운의 뒷목을 청조는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보들보들한 살 내음과 청조의 손길에 취해 있던 도운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치마를 벗겨 버리던 도운의 저돌적인 행동이 순간 멈칫하였다. 드러난 청조의 두 다리가, 거의 다 떨어지고 없는 듬성듬성한 딱지 사이로 새로 올라온 연한 새살이 보였다. 그 상처를 보던 도운은 눈물을 삼켰다. 그의 손이 차마 새살을 만지지는 못하고 주위를 맴돌았다.

“오늘은 이만 자자꾸나. 내 너를 품에 안고 편히 잠들었다 갈 것이다.”

도운은 새살을 부드럽게 쓸어 주고는 다시 치마를 둘러주었다. 바들거리는 손으로 치마를 여며주는 커다란 손 위로 청조의 손이 겹쳤다.

“소첩, 이제 괜찮습니다. 다 나았습니다. 더 이상 아프지도 않습니다.”

“아니다…….”

“저 좀 안아주셔요, 서방님. 소첩이 서방님을 많이 그리워하였습니다.”

곱게 미소 지으며 제 뺨을 어루만지는 청조의 모습에 도운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망설임을 읽은 청조가 말없이 사내의 옷고름을 풀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도운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늘 저를 먼저 생각하는 여인. 늘 저를 위해 하루를 사는 청조였다. 여인의 몸이란 것이 사내와는 달라 한 번의 교접이 주는 부담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다.

교접에 익숙한 여인도 아니었고, 아직 몸이 여의치 않은 여인이었지만, 이런 순간조차 청조는 늘 저를 먼저 배려했다. 도운은 자신의 바짓부리의 대님을 풀어내고 이내 버선을 벗겨주는 청조의 마른 손을 꼭 잡았다. 손끝 마디마디에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이었다. 청조가 부끄러운 듯 손을 빼려 하자, 도운은 멀어지려는 손을 잡아당겨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이 밤, 두 번째로 벗겨낸 치마를 새벽이 오기 전까지 다시 입히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알몸이 된 두 연인의 몸이 연리지처럼 하나로 엮어 들었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입술을 부딪치는 두 연인의 입에서 서로를 탐하는 질척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바닥에 누운 여인의 몸을 올라탄 도운은 혀로 청조의 입안을 이리저리 휘젓는 동시에 허리를 부드럽게 돌려 여성을 자극했다.

자극과 쾌감에 숨이 막힌 청조가 코로 비음을 가느다랗게 흘렸다. 잠시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아준 도운은 아랫도리를 좀 더 사납게 비벼대며 청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허리를 거칠게 돌리다 한 번씩 꾹 누를 때마다 ‘아윽’ 청조의 신음이 울렸다. 신음을 쏟아내며 벌어지는 청조의 입술과 얼굴에는 분명 쾌락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만족한 듯 빙긋 웃은 도운은 청조의 벌어진 입속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고 치아를 훑었다. 청조는 자신의 입안으로 미끄러질 듯 들어와 자극을 주는 말캉한 혀를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젖을 빨 듯 물고 빨았다.

위아래를 정복당한 쾌락에 여인의 다리가 본능처럼 점점 벌어졌다. 이내 활짝 벌어진 중심으로 도운이 제 양물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된 비문이 곧 양물을 밀어내었다. 너무 서둘렀다. 오랫동안 관계를 하지 않은 청조의 몸에 자신이 너무 급하게 들이대었다. 몸을 뺀 도운은 급히 아래를 더듬거리며 손가락을 은밀한 입구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뻑뻑하기만 한 그곳을 끈기 있게 휘젓고 문질렀다. 살살 휘저으며 조금씩 입구를 넓혀가자 어느 순간 미끈거리는 애액이 손가락 사이로 모였다. 입구를 중심으로 모인 애액이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조금 더 밀고 들어가자, 좁은 길이 벌어지며 손가락을 야금야금 삼켰다.

“하아…….”

두텁고 기름한 손가락이 마침내 끝까지 들어가자 청조의 입에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시 손가락에 힘을 빼고 반응을 살핀 도운은, 청조가 안정을 찾아가자 손가락을 유려하게 구부리며 내벽을 긁어대고 비벼대기를 반복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반복될수록 점점 거칠어지는 숨결을 따라 청조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깊숙이 꽂은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입구를 늘리다 하나를 더 밀어 넣자, 청조의 잘록한 허리가 살짝 들리며 발가락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신음을 흘리는 붉은 입술이 잘 익은 앵두처럼 탐스러워 보였다. 깨물면 과즙이 터질 것 같은 그것을 입에 물고 아래와 함께 희롱하니, 청조의 들뜬 몸에 열이 올랐다.

아래의 입구와 내벽이 열로 가득 차, 도운의 손가락마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길쭉한 손가락을 따라 청조의 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애액이 뒤흔들리며 질척거렸다. 점점 더 음란하게, 점점 더 크게 질척대는 소리가 도운에게 때가 왔음을 알려 주었다. 도운은 손가락을 쑥 빼고는 바로 양물을 욱여넣었다.

“아흑, 하아.”

손가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굵은 사내의 양물이 좁은 길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입구가 벌어지는 아픔을 쫓아, 밀려들어오는 양물이 내벽을 쓸어 올리며 깊은 쾌감을 주었다. 청조는 고통에 대한 신음과 쾌락에 대한 뜨거운 한숨을 동시에 내뱉었다.

“아픈 것이냐?”

고통인지 쾌락인지, 알 수 없는 감각에 눈을 꼭 감은 청조는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아프면 꼭 말을 해야 한다. 내 욕심 채우고자 너를 아프게 하는 짓은 이제 안 할 것이다. 알았느냐?”

청조는 살포시 눈을 뜨고 걱정스런 얼굴을 한 도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진심으로 애틋하게 말을 하는 서방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 청조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곧 괜찮다는 뜻으로 도운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올렸다. 자신의 강골을 조여 오는 청조의 어여쁜 몸짓에 도운은 청조의 몸을 들어 올렸다.

도운의 중심 위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자, 더욱 깊어진 결합에 청조는 저도 모르게 순간 숨이 막혔다. 하지만 숨을 트일 새도 없이 도운의 입술이 덮쳐왔다. 여인의 몸 안에 자신의 분신을 파묻어 두고는 입술을 잡아먹을 듯 빨고, 혀로 입안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입술을 희롱하던 도운은 이제 청조의 작은 턱을 물고 힘껏 빨아들였다.

턱을 물고 있었던 입이 어느 순간 점점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선이 고운 여인의 목 이곳저곳을 한참 지분거리다 고개를 내린 도운은 그립고 그리워하던 청조의 부드러운 계곡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하아’ 도운의 뜨거운 숨결이 가슴에 부딪히다, 곧 말캉한 혀가 젖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대자 청조의 목이 점점 뒤로 꺾였다.

“하으윽.”

제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사내의 머리통을 그러안고 청조는 목대를 한껏 뒤로 꺾었다. 꺾인 목대가 쾌감에 꿀떡거리고, 가느다란 두 팔이 도운의 머리통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청조의 낭창낭창한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터져 버릴 듯 부풀어 오른 가슴을 한입 가득 문 도운의 양물이 안에서 꿈틀거리며 더욱 부풀었다. 자신의 안에 꽉 끼어 버린 양물의 부피감에 청조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슬슬 비비적거렸다.

도운은 자신의 양물을 뿌리째 몽땅 삼키고 들썩거리기 시작한 청조의 둔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청조의 몸을 흔들어 주며 움직임을 도왔다. 그의 손아귀 힘을 따라 여인의 몸이 점점 크게 들썩거렸다. 청조는 있는 힘껏 사내의 양물을 조이며 천천히 무릎을 세웠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자 청조의 아래로 터질 것 같은 붉은 양물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양물의 선단 부근만 살짝 머금은 채, 청조는 꼬챙이에 꽂아 버리듯 자신의 아랫도리를 사내의 기둥에 힘껏 내리찍어 버렸다. ‘아흐흥’ 단번에 양물을 삼키며 지르는 청조의 교성과 함께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마찰음이 적막한 공기를 갈랐다.

강한 힘으로 제 양물을 감싸 올리는 청조의 뜨거운 내벽에 도운은 말 못 할 쾌감을 느꼈다. 마치 불에 달군 쇠 방망이로 뱃속을 지지듯, 뜨겁게 달아오른 기둥이 제 안을 쓸어버리는 쾌감에 청조는 말 못 할 자극을 받았다.

“아흑, 서방, 서방님.”

“하아, 청조야, 청조야.”

청조의 들썩거리는 움직임이 더욱 커지고 빨라질수록, 서로를 부르는 두 사람의 입에서 열락에 들뜬 교성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청조의 움직임만으로는 절정에 다다를 수 없었다. 도운은 청조의 양팔을 자신의 목에 둘러주고, 양 허벅지를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감아주었다. 그렇게 여인의 허벅지를 잡고 벌떡 일어나자, 청조가 떨어지지 않으려 도운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벌떡 일어난 도운은 자신에게 매달린 청조의 등과 허리를 받치고 금침 위에 그대로 쓰러뜨렸다. 단단히 결합한 채로, 도운은 청조의 치골을 접어 올렸다. 청조의 허벅지가 가슴에 닿을 정도로 완전히 접히자, 도운은 팔을 둘러 접힌 허벅지와 함께 청조의 몸을 껴안았다.

청조 자신의 두 허벅지 사이에 낀 풍만한 젖가슴과 빳빳하게 선 유두가 사내의 단단한 가슴을 부드럽게 찔렀다. 도운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한 청조의 몸을 으스러트릴 듯 껴안고 한입에 입술을 삼켰다. 청조의 작은 입안으로 도운의 두툼한 혀가 현란하게 들락거리며 정신없이 빨아대고 깨물었다.

“아윽!”

정신없이 입맞춤을 받아내던 청조는 저돌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도운의 허릿짓에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릴 듯, 깊고 강렬하게 팔딱거리는 도운의 강한 움직임이 힘에 겨웠다. 마치 거센 풍랑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조각배마냥, 청조는 도운의 격렬한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힘껏 매달렸다.

사내의 억센 팔에 갇힌 채 밖으로 빠져나온 가느다란 종아리가 거센 풍랑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털렁거렸다. 격렬한 몸의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는 시선이 어지러웠다. 허리를 거세게 추어올리면서도 쉬지 않고 입술을 부딪쳐 목구멍을 막아대는 두툼한 혀에 숨이 찼다. 하지만 청조는 이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좋았다.

이 모든 것을 다 잊을 만큼, 정신이 혼미할 만큼 강한 육체의 향락에 빠져들었다. 쾌락에 몸을 맡긴 두 연인의 거친 숨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외설스러웠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방은 어느새 시큼한 정사의 냄새를 풍기고 요란한 방사의 소리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아하항, 입맞춤을 나누는 순간에도 코에서 울리는 여인의 간드러진 교성 소리. 입맞춤을 나눌 때마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며 질척거리는 소리. 사내의 거대한 양물이 여인의 좁은 구멍을 꿰뚫을 때마다 질질 흐르는 애액이 부대끼며 음란하게 찌걱거리는 소리. 공기를 가르고 살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퍽퍽 울리며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것 같은 허릿짓이,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움직임이 절정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강하게 돌진하더니, 어느새 청조는 뱃속에 퍼지는 뜨끈함을 느꼈다. 처음이었다. 제 안에 파정하는 서방님은 처음이었다. 파정으로 인해 뱃속에 뜨끈한 포만감을 느끼는 것도 처음이었다.

서방님이 주는 씨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청조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싸고 힘껏 조이며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했다. 도운이 한 번씩 허리를 잘게 떨 때마다, 안에서 꿈틀대는 양물이 물컹한 액을 한껏 싸지르며 제 안을 온통 범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에 왜인지 눈물이 차올랐다. 어느새 한 가득 고여 든 눈물에, 도운을 바라보는 청조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까만 먹물이 번지듯 이지러졌다.

“왜, 왜. 아픈 것이냐? 아픈 것이야? 잘못했다. 내가 잘못하였어. 그러니 울지 마라.”

청조는 깜짝 놀라 몸을 빼려는 도운을 붙잡았다. 그의 허리에 감은 다리를 더욱 강하게 조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 안에 머물러 주십시오.”

흐느끼는 청조를 품에 안은 도운은 몸을 굴려 청조를 마주 안고 옆으로 누웠다. 딱 붙은 몸이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몸통을 감고 있는 청조의 허벅지를 바싹 끌어당기고는 손가락으로 목부터 허리까지 척추를 길게 어루만져 주었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귓가에 다정히 소곤거리며 저를 쓰다듬는 손길에 청조는 어느새 울다 잠이 들었다.

* * *

호화롭기 그지없는 너른 정원에는 여름을 맞아 한껏 탐스럽게 달아오른 여름 화초들이 아름다운 자태로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멀리 바다 건너 이웃 나라에서 들여왔다는 희귀한 화초들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여러 대신이 둘러앉아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작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호구 조사를 시작으로 점점 관리들을 갈아치우고 있어요. 요직에 있는 몇몇 우리 사람들까지도 이미 파직을 당하였습니다. 어찌나 치밀하게 꼬투리를 잡아채는지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도승지는 아직 등청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얼 어찌하시려고 그러는지 어심을 가늠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다들 호구 조사 때 전하의 언행을 보셨지 않습니까? 우리 대신들을 그 천한 것들보다도 아래 취급을 하다니, 이는 성리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 사대부들을 배척하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냔 말입니다.”

왕권 강화라는 말에 대신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예, 이조참판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새로이 등용된 관리들을 보십시오. 모다 유배를 간 전 영의정을 따르고 흠모하던 젊은 유생들입니다. 전하께서 얼굴도 모르는 젊은 유생들을 어찌 알고 등용시키는 것인지…… 영의정을 찍어내고 그 세력들을 몰아내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영의정을 찍어낸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불안합니다. 불안해요.”

“어디 불안한 것이 그것뿐입니까? 대과를 직접 주관하시어 관리를 등용하겠답니다. 저희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새로운 인물들을 이용하여 주상이 제 힘을 키우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내금위장을 중심으로 주상의 친위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은 다 무엇입니까? 양민이고, 서얼이고 할 것 없이, 그 능력이 되는 이들은 모다 뽑아 교육시키고 있다 합니다. 이는 궁 안에서 금군 이외의 병력을 기르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거기에 학문을 중심으로 젊은 학자들을 모아 서적과 문헌을 연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과야 그렇다 해도 서적과 문헌을 연구하는 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답답하십니다! 작금 주상께서 반상의 도리를 뒤집으시고, 문과 무로 이루어진 임금의 친위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금일 있었던 경연만 하더라도, 주상이 내세운 젊은 학자들에 밀려 우리 대신들이 논리에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주상이 어떤 개혁을 주장한다 해도 결코 논리로 주상을 이길 수 없을 거란 말입니다! 주상이 제 세력을 넓히고, 점점 그 발톱을 드러내고 있어요.”

좌중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승지가 등청을 못한 지가 벌써 오래였다. 세력의 주축인 도승지가 빠지자 국정은 더욱 주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 어찌하면 됩니까? 요즘 주상을 칭송하는 말이 저자에 떠돌고 있다 합니다. 호구 조사에 관한 일이 빠르게 퍼지면서, 백성들이 주상에게 뭔가를 기대하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방책들을 논의해 봅시다. 이번 일로 백성들이 주상을 신임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이 주상을 믿고 날뛰면 곤란한 것은 우리입니다.”

‘어허, 어흠.’, 불편한 사실에 헛기침을 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익태는 홀로 유유히 차를 마셨다. 학식이 낮은 자신의 아버지 역시 대신들이 떠드는 소리에 휩쓸려 어찌할 줄 모르고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원체 이런 일에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은 아니시니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승지 영감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저들끼리 떠들썩하게 떠들던 대신들은 제일 상석에 앉아 저희들을 바라보던 중년 사내의 말에 잡담을 멈추었다. 좌중의 이목이 모다 익태에게 쏠렸다. 쏟아지는 시선에 익태는 가느다랗게 비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주상전하의 의중이야 빤하지요. 호구 조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매한 백성들이야 저희를 위해 군납을 줄여 주고 나아가 조세를 줄여 주려 하는 줄 알겠지만, 사실 주상이 호구 조사를 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세법개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세법개혁?”

“예, 세법을 개혁하여 우리 사대부들에게서도 세를 걷어 가려 함이지요. 양민들을 아무리 쥐어짠들, 원체 가진 것이 없는 그들입니다. 그들보다 가진 것이 월등히 많은 저희들에게서 세를 걷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국고가 되겠습니까? 그로 인해 왕권은 더욱 부강해질 것이고, 저희 사대부들의 힘은 더욱 미약해질 것입니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 핑계를 대지만, 그저 백성을 이용하여 저희에게서 부를 빼앗아가고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주상의 얕은 계책이지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조세와 군역은 양민들의 당연한 의무고 도리요. 우매한 그들을 지켜 주고, 먹여 주고, 다스리는 일만으로도 우리 사대부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우매한 그들을 다스려주고, 그 대가로 그들이 응당 조세를 바치는 것이 세상 만물의 이치이고 조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감사히 생각하여도 모자랄 판에 그들의 의무를 왜 우리에게서 받아가려 한단 말이오! 허, 산에서 천둥벌거숭이로 자라 미흡하기만 한 저를 왕위에 올려 준 은혜도 모르고, 이런!”

분기탱천한 이조참판의 말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분노에 익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우선, 병권. 병권을 손에 틀어쥐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권이라?”

“예, 저렇듯 주상의 힘이 점점 비대해지고, 그로 인한 폭정이 계속된다면 우리 대신들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전하께서 왕을 배라고 지칭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 배이지요. 작은 풍랑에도 뒤집히는 무력한 배. 무력(無力)한 배는 무력(武力)으로 뒤집어야지요. 현재 병조판서는 저희의 사람도 왕의 사람도 아닙니다. 무관 특유의 외골수인 사람인지라 회유하기도 힘든 사람입니다. 그러니 확실한 이가 병조를 장악하여 여차하였을 때, 궁을 점령해야 합니다. 금군과 주상의 친위대가 아무리 강한들 병력을 이길 수는 없겠지요.”

으음, 익태가 하는 말에 숨겨진 의미를 다들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수단이라 에둘러 말을 하였지만, 이는 반정을 뜻하는 말이었다. 실로 위험한 도박이었기에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허나 마지막 수단에 대한 대의명분이 필요하지 않은가?”

“명분과 구실이야 만들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전 영의정이 어떻게 자리에서 물러났는지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우선 지금은 병판을 잘라 낼 구실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그 후, 전라도 우수영에 만호로 나가 있는 안계희를 병판으로 만들면 되겠지요.”

“안계희? 그자가 누구인가? 꼭 그자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익태는 대답하지 않고 상석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고는, 쇳소리가 섞인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계희. 다들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한때 병조에 몸을 담고 있었고, 함경도에서 이적(夷狄: 오랑캐)와 맞서 싸우던 장수였습니다. 변방의 차갑고 거친 바람 속에서 이적의 침략을 막고 전장을 누비던 유능한 장수이자 관찰사였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이적의 침탈을 허락하였단 이유로, 장군의 신분에서 만호라는 신분으로 전락하여 전라도로 쫓겨나는 치욕을 당한 자입니다. 하여 승하하신 선왕 전하에게 불만이 많은 자이지요. 그자라면 병판의 자리에 앉기에 손색이 없을뿐더러 지금 주상의 치세에 가장 반기를 들 자이니, 틀림없이 우리와 분명 뜻을 함께할 것입니다.”

사내의 설명에 대신들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참으로 일리가 있었다. 허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허나 반정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후사가 없지 않소? 들리는 말에 전하께서 아직 중전마마와…… 흐음.”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전마마가 아니더라도 여인은 넘치도록 많으니. 세자빈 간택 시, 삼간택에서 탈락한 여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삼간택에서 탈락되었다 하나 법도 상, 모다 전하의 여인들입니다. 그중에는 이조참판 대감 댁 여식도 있지요. 국혼을 올린 지가 벌써 두 해가 지났습니다. 후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참판 대감 댁 여식을 궁으로 불러들인다고 한다면, 누가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여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열 여인 마다할 사내는 없지요. 그러니 금혼령을 내리고 새 후궁을 간택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 계신 대감들 중 여식을 가진 분들이 몇 분 계시지 않습니까?”

후궁과 후사. 여식을 가진 몇몇 대신들의 얼굴에 환한 빛이 흘렀다. 그중 여식이 삼간택에 들었던 이조참판의 얼굴이 가장 빛났다. 자신의 여식이 장차 보위를 이을 원자를 생산한다면……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나이든 대신들의 모습에 익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밥을 떠먹여 줘야 먹는 우둔한 영감들. 저와 큰아버님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못난 사람들이었다. 저런 자들이 나라의 근간이라 떠드는 사대부라니. 대신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상석에 앉은 중년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도승지 영감의 판단이 옳다고 사료됩니다. 길게 봐야 합니다. 앞으로 주상과의 싸움이 아주 길어질 것입니다. 조바심들을 내지 마시고, 지금부터 병판을 잘라 낼 구실을 먼저 만드시지요. 소인의 생각으로는 병판을 잘라 낼 구실은 역모보다는 군자금 횡령이 좋을 듯합니다. 작금 주상이 가장 촉을 세우는 일이니,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이 옳다. 호구 조사부터 시작하여 작금 주상의 관심이 모다 탈세와 횡령에 집중되어 있으니,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실현시킬 구체적인 방법을 각자 구상해 보십시오. 다들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시고, 닷새 후에 이 자리에 다시 모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인이 그때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먼저 일어나겠으니 계속해서 논의들을 나누시지요.”

상석에 앉은 중년의 남성은 자신을 가리켜 소인이라 칭하였지만, 대신들을 대하는 태도나 상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전혀 소인이라 칭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니었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대신들은 사내의 말에 저마다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유유히 일어나 자리를 뜨자 대신들은 한동안 남아 저들끼리 토론을 이어갔다. 그 중심에는 대신들 사이에서도 가장 어리고, 젊은 익태가 있었다. 익태의 아버지 영의정 역시 아들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시각 저녁 수라를 끝낸 도운은 산보를 나왔다. 저녁에도 계속되는 무더위에 청조가 잘 지낼지 걱정이었다. 이 무더운 여름날, 하나뿐인 어린 조카가 걱정된다는 핑계로 서빙고의 얼음과 잘 익은 수박 한 통을 수련재에 보냈었다. 그 얼음 넣고 시원하게 화채 만들어 먹으라 보냈는데, 수련재 나인이 뜻을 잘 알아듣고 청조에게 시원한 화채 한 그릇 내어 주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의금부 다모였던 여인이 제법 야무지게 청조를 돌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하면서도, 화채 한 그릇을 못 받아먹었을까 또 걱정하고 있었다. 같은 궁 안에 있는데도 그 거리가 어찌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쉬며 산보를 이어가는데, 노란 꽃밭이 나왔다. 언젠가 청조를 찾으면 함께 보려 심어 둔 금불초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아래, 노란 꽃잎들이 바람에 물결치는 모습을 바라보니 청조가 더욱 그리웠다. 여름이 오면 금불초를 한가득 꺾어 주겠다 약조했었는데. 자신의 미소를 닮은 황금빛 꽃 한 아름에 파묻혀 웃고 있을 청조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해졌다.

“전하.”

상념을 깨우는 남현의 목소리에 도운이 뒤를 돌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현의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있는 상선과 궁녀들에게 열다섯 보 이상 물러나라 명한 뒤, 도운은 남현을 거동하고 산보를 이어갔다.

“그들이 예의 그 기와에 모여 작당들을 하고 있단 말이지. 흥, 못난 자들. 그래, 아직도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는 못 알아내었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워낙 경비가 삼엄한지라 침입이 쉽지가 않사옵니다.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안채에 은거하기만 하니, 더욱 알아내기가 쉽지 않사옵니다.”

“청이 그 아이는 잘하고는 있는가?”

“예, 다행히도 아무 의심 없이 외거노비로 들어갔사옵니다. 아무래도 아이이고, 또래보다 작고 어려 보이니 별다른 의심 없이 지내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도 안채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터라 아직 이렇다 하게 알아낸 것은 없사옵니다.”

“모쪼록 조심하라 이르라. 그 아이가 몸이 약하고 잘 넘어지는지라 걱정이네.”

“예, 전하.”

“재환, 그자에게서는 소식이 있는가? 만날 이는 만났다 하던가?”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사옵니다. 도성에서 하 먼 곳으로 떠났으니 시일이 다소 걸릴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겠지. 수고하였네.”

태연하게 산보를 거니는 왕의 뒷모습에 상선은 발을 동동 굴렀다. 금일 중전마마와의 합궁 일이라 며칠 전부터 귀띔을 드렸으나, 또 저리 후원만 거닐고 계셨다. 여유로운 왕을 바라보는 상선의 마음은 애가 탔다. 오늘도 전하를 뫼시지 못하면 서릿발 같은 중전마마의 매서운 질책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청은 토론을 마친 대신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다들 누가 보기라도 할까, 흑립을 슬며시 앞으로 내린 후 주위를 살피며 대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영의정까지 대문을 나섰지만, 그의 아들인 익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대신이 떠나고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청은 대신들이 떠난 정자를 정리하라는 명에 바삐 정자로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타는 듯한 노을이 서쪽 하늘에 걸려 있더니 금세 달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달빛이 어찌나 곱고 환한지, 달빛에 반짝이는 정원과 정자가 유독 아름다웠다. 우와, 청의 입이 벌어졌다. 그 크기는 비록 궁궐의 정원만 못하지만, 화려함은 궁궐에서 보던 것 이상이었다.

처음 보는 화려한 자태의 화초들에 청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걸었다. 그렇게 정자로 다가가던 청은 갑작스런 인기척에 바삐 몸을 숨겼다. 익태의 뒤태는 어느 정도 익숙하여 알아볼 수 있었지만, 다른 이는 뒤태만으로 누구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둘은 함께 정자를 내려와 반대편 길로 걸었다. 반대에 안채로 이어지는 널판 문이 있으니 그곳을 통과하려는 모양이었다. 늘 닫혀 있는 문을 이용할 수 있는 자이니, 이 기와의 주인이 틀림없었다. 어둠 속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청은 목을 길게 빼고 크게 뜬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벌써 저만치 멀어져 버린 인영에 입술만 깨물었다.

에잇,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속으로 혀를 차는데, 유독 밝은 달빛에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분명. 뒷짐을 진 남자의 손에 익숙한 합죽선이 들려 있었다. 청은 몸을 앞으로 길게 빼고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밝은 달빛에 부딪혀 합죽선에서 무엇인가 반짝였다.

가지런히 모인 부챗살, 그 끝에 은으로 만든 고리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고리에 엮인 붉은 매듭을 따라 선추 끝에 걸린 박쥐 문양 비취 장식물. 대롱거리는 그 장식물이 달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검은 옻칠을 한 부채 겉대에도 박쥐무늬 자개가 정교하게 감입되어 있을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그것은 청이 잘 아는 합죽선이었다. 그리고 그 합죽선의 주인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에 청은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청은 입을 손으로 꽉 막고 잘 숨어 있었다. 어서, 어서 알려야 한다. 청은 작은 발을 동동거리며 기와를 빠져나왔다.

* * *

박쥐무늬 자개가 정교하게 감입된 화려한 가구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게 빛났다. 투실투실한 눈살에 가려진 얇은 눈으로 중년 사내는 익태를 바라보았다.

“아직 중전마마께 태기는 없느냐?”

“예, 그것이 아직.”

“예화가 아직도 처녀라더니 그 말이 정녕 사실이긴 하더냐?”

“…….”

“쯧쯧, 여인이 되어서 어찌 사내 하나 홀리지를 못할꼬. 도운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어릴 적부터 누누이 일러왔지 않느냐! 내 어린 도운을 괜히 너희 집으로 보냈겠느냐? 그리 기회를 주었거늘! 두 해나 사가에서 함께 지냈으면서 도운의 마음 하나 얻지를 못해! 하여 종종 산에 올라 도운의 맘을 휘어잡아 놔라 그리 일렀는데, 어찌 그것 하나를 못해!”

“송구합니다.”

“그 아이 이름이 뭐였지? 처…… 청.”

“청조입니다.”

“아느냐? 청조라는 그 여인조차 예화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내었다! 한데 예화는 지금껏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이야!”

“송구합니다, 큰아버님.”

쯧쯧. 사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익태를 흘기며 혀를 찾다.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던 그는 도운을 주상이라는 칭호로 서슴없이 낮추어 불렀다.

“세 해 전, 내 그 여인을 데리고 친히 산에 오를 적 주상이 그이의 속살에 빠져 다른 생각은 아예 못하도록 애정을 듬뿍 받으라 언질을 주었지. 그간 일부러 천하디천한 것들을 골라 산에 올려보냈으니, 그때쯤 주상의 심기가 아주 사나웠을 것이야. 딱 알맞은 시기에 내 직접 그 여인을 데리고 산에 올라섰다. 내가 왜 그리한 줄 아느냐?”

“여인에게 더욱 빠지게 함이 아니셨습니까?”

“그래, 그 이유가 제일 컸지. 꽤나 음전한 것이, 제법 머리도 좋고, 그 성품이 참하다 소문이 자자하였다. 게다가 외관 또한 어여쁘니 과연 사내를 홀리는 매력이 있었어. 그 여인을 보자 그간 창기들을 상대하던 도운이 어느 정도 빠져들 것이라 내 확신을 했다. 그가 누구이냐? 저 깊은 산속에 버려졌으나, 왕의 아들로 태어난 자. 제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한 그런 자였지. 그런 자에게 그간 일부러 천박함이 줄줄 흐르는 계집들을 보내었으니, 그 얼마나 수치를 느꼈겠느냐. 너도 알 것이다.”

“예, 큰아버님.”

“처음 그 여인을 보고 ‘욕정받이’ 어쩌고 하였지만, 곧 그 여인을 탐할 것이라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허나 내 그것에 대하여 아주 큰 기대는 없었느니라. 그저 그런 여인을 보낸 의경 세자에 대한 주상의 의심을 좀 키워주고, 왕실에 대한 원망을 좀 더 키우다 삐뚤어지면 더 좋고, 그러다 그것의 치마폭에 빠져 다른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면 금상첨화이고. 뭐, 그런 것이었지. 한데 내 기대한 것보다 그 여인이 훨씬 더 잘해 주었어. 주상이 그 치마폭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니. 그간 우리 생각대로 허수아비 왕으로 아주 잘 망가졌어. 한데…….”

한 내관이 차갑게 웃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손에 쥔 합죽선의 끝으로 서안을 톡톡 가볍게 내리치며 익태를 응시하는 눈길이 매서웠다.

“한데, 왜 갑자기 저리 돌변하여 정치를 하려 드는 걸까? 응? 생각 따위는 할 수 없는 금수처럼 자라라, 그 척박한 환경에 밀어 넣었는데도 말이야. 배고픔과 비참함을 경험케 하여, 저를 보살펴 주는 우리의 말만 듣고, 우리에게만 충성하도록 길들이느라 얼마의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사악하고 불길한 존재로 부모에게서조차 버림받고, 그 존재마저 부정당하게 만드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목숨을 위협받는다 생각할 정도로 형제를 불신하고 미워하게 만들었는데 말이야. 응? 말해 보아라. 그동안 광인마냥 잘 삐뚤어졌던 미치광이 왕이 왜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것이야!”

“송구합니다.”

“내 그를 가엽게 여겨 좋아하는 서책을 너무 많이 보내 주었던가? 아니면 너무 배불리 먹여 주었는가? 왜 제까짓 놈이 생각을 하고 정치를 하려 들어! 왜!”

서안을 톡톡 두드리던 합죽선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거세게 내리친 한 내관이 합죽선을 잡고 부르르 떨었다.

“후사를 봐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지? 후사가 있어야만 반정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 차라리 어린 왕이 수월하지. 예화가 수렴청정을 한다면, 요즘처럼 골치 아픈 일은 차라리 없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쉽지가 않습니다. 주상이 중전마마의 처소에는 아예 발걸음도 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예 여인을 멀리합니다. 대신들에게 후궁 간택령이라는 미끼를 주어 진정시켜 놓았지만, 솔직히 후궁을 들인다 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공론을 모아 주상을 압박해야 할 것이 아니냐! 멍청한 인간은 네 아비 하나로 족하다! 너까지 그렇게 굴면 어쩌자는 거야! 후사를 생산하는 일은 일국의 왕으로서의 직무이자 소임인 것을, 직무를 행하지 않는 왕에 대한 공론을 모아 주상을 압박하란 말이다.”

“예, 알겠습니다.”

“예화든 누구든 합궁만 시키면 될 일이 아니냐. 미약을 쓰면 될 것을, 왜 그리 미련하게 구는 것이야! 쓰거라, 아주 독한 것으로. 합궁한 여인의 배가 꼭 수태를 해야만 부른다더냐. 그냥 그렇게 만들면 될 것을. 태어날 아이가 무조건 아들로 만들어질 것처럼 말이다!”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공손하게 읍하는 익태의 모습에 역정을 조금 가라앉힌 한 내관이 다시 합죽선으로 서안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서안을 두드리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그 여인을 못 잊고 청승을 떤다 이거지.”

“예, 큰아버님.”

“흥! 내 신분을 불문하고 한 여인을 위하여 수절한다는 사내의 말은 처음 듣는구나. 참으로 우세스러운 일이 아니냐. 그 여인을 당장 찾아라. 도운이 그토록 목을 매고 있다니, 아직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년이야. 차라리 그년을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베갯머리송사로 도운의 눈을 좀 더 가릴 수 있었을 텐데. 후사도 더 빨리 보고 말이야. 그런 것을 제 욕정 하나 이기지 못하고 눈앞에서 놓치다니!”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익태를 노려보는 한 내관의 눈꺼풀이 광기로 덜덜 떨렸다. 그의 역정 앞에 익태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찾아라. 그 계집을 찾아. 그리고 왕의 허물도 찾아. 밤마다 어린 내시를 주물럭거린다는 일보다 더 치명적인 허물 말이다. 그의 허물을 퍼뜨려 이제껏 저 무지렁이들이 생각했던 대로 추접하고 무능한 임금의 인상을 계속 이어가게 하란 말이다. 민심은 곧 천심. 그들의 마음이 완벽히 돌아서야 반정의 명분도 쉽게 생기는 것이지, 알겠느냐?”

“예, 큰아버님.”

익태가 허리를 접어 읍하고 방문을 나섰다. 방을 나선 익태의 심기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흥, 베갯머리송사라니. 모르는 소리. 그 독한 계집을 모르는 소리.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난 척 지껄이기는.

허나 지금은 저 늙은이의 말에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저 늙은이의 말대로 예화가 후사만 생산한다면……. 아니, 꼭 예화일 필요도 없다. 후사만 있다면, 왕의 씨를 빌려 궁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의 어머니는 바로 중전인 예화였다.

예화가 수렴청정만 한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이제 정말 저의 천하가 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런 늙은이쯤이야 하루아침에 변사체로 발견되어도 누가 신경 쓰랴. 어차피 자신의 모습을 공공연히 밝히고 다닐 수도 없는 인간인데. 대문으로 향하는 익태의 얼굴에 비열한 미소가 가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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