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리움
재환은 힘겹게 눈을 떴다. 매캐한 뜸 향으로 가득한 방 어디선가 찰방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슬며시 돌려보자 청조가 젖은 면포를 꽉 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면포를 짜는 여인의 모습이 왜 이렇게 가슴에 아리듯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누구고, 왜 저 여인을 해하려 하는 것인지. 도대체 저 여인의 서방은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다. 청조는 재환의 눈이 떠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듯 다가왔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어쩌다 이리되신 것입니까? 얼마나 걱정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걱정을…… 하였어?”
“그럼요. 몸이 쾌차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리 다치셨습니까? 다행히 행수께서 도와주셔서 급히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만, 얼마나 위험하였는지 모릅니다.”
젖은 면포로 재환의 바짝 말라 버린 입술에 물기를 묻혀 주는 청조의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했다. 청조의 미간에 잔뜩 잡힌 주름을 바라보며 재환은 속에서 들끓는 의문을 잠시 눌렀다. 여인을 해하려는 무사들과 칼부림이 났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 고운 여인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 뻔하였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한다면 여인을 위험 속에 방치하는 셈이었다.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게.”
“예?”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아니 되네…… 자네를 해하려는 무리들이…… 있어.”
“그것이 무슨? 설마 그들에게 당하신 것입니까?”
“아니, 아니, 아닐세. 그들에게 당한 것은…… 아니야. 방을 보았네. 저자에 자네를 찾고 있는 사내들이…… 나가지 말게. 약조…… 약조해.”
“저를 찾는 방이 붙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약조…….”
“나으리, 나으리!”
약조라는 말만 겨우 되풀이하고 재환은 다시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잃자 청조의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 차올랐다. 정신을 잃은 그도 걱정이었지만, 저를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불안했다. 익태가 분명했다. 나리께서는 그들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하셨지만, 그들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어찌한담. 청조는 정신을 잃은 재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위해서라도 떠나야 했다. 자신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나리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다친 분을 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 정신을 잃은 재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던 청조는 결정을 내렸다.
나리께서 일어나실 때, 그때까지만 머물다 떠나자.
* * *
두 번째 잠행을 나왔을 때, 도운은 저에게 구걸하는 작은 오누이를 만났다. 산발을 한 머리는 태어나 한 번도 감지 못한 듯 엉켜 있었고, 얼굴이며 손등 위로 검은 때가 거북이 등딱지마냥 주름을 타고 쩍쩍 갈라져 있었다.
“네 이놈들, 비키거라.”
호통을 치며 제 앞을 가로막는 내금위장을 제지하고 도운은 작은 전냥 꾸러미를 꺼내 오누이의 바가지 안으로 넣어 주었다. 얼마 되지 않는 몇 푼에도 입이 쩍 벌어진 아이들은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아름다운 황혼을 배경으로 한 변두리 골목 풍경은 비참하고 처참하기까지 했다.
때가 꼬질꼬질한 아이들은 저렇듯 떼로 몰려다니며 양반들에게 구걸을 하였고,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양반들은 코를 막고 자리를 떠 버렸다. 적나라하게 대비되는 그들의 모습에 도운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마음이 번다했다.
도운은 심란한 마음으로 주막에 들어 청을 만났다. 청을 통해 익태가 찾는 여인이 청조임을 확인한 도운은 다시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를 만나고 있던 짧은 시각에도 혹 기다리던 소식이 없는지 조바심이 났다.
“내 청이 그 아이와 이야기하는 동안 아무 소식 없었던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없었사옵니다.”
“도승지 그자가 찾지 못한 것은 확실한가?”
“그것은 확실하옵니다. 오늘도 도승지의 무사들이 저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하옵니다.”
“반드시 그들보다 먼저 찾아야 하네. 반드시.”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내금위장의 모습에도 도운은 불안했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이들 중 그나마 믿을 만한 자가 내금위장일 뿐, 도운은 그도 완벽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상선은 중궁전과 내통하고 있었고 지밀은 대비전과 내통하고 있었다. 그간 자신의 처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은밀히 중궁전과 대비전으로 물어다 주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물어다 준 정보들은 중궁전을 통해 자신의 추문이 되어 궐내에 떠돌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추문 따위 어찌 되었든 상관없으니 그동안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허나 그런 추문들이 빠른 속도로 저자에까지 번지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자. 굳이 그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은 형편없는 왕이었는데, 추문을 퍼뜨려 그자가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궁으로 돌아가는 도중, 도운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저편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비단 도포를 입은 선비가 아이들을 발로 짓밟고 있었다.
“무슨 짓인가?”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상관 말고 가시던 길 가십시오.”
도운을 향해 엄하게 말을 한 사내는 아이들을 향해 다시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만두라 하지 않았는가! 아이를 상대로 이 무슨 추태인가?”
“아, 글쎄, 댁이 상관할 일이 아니란 말이오. 이 쥐새끼들이 내 전냥을 훔치었소! 개, 돼지만도 못한 버러지들이 감히 양반의 전냥을 훔쳐?”
도운은 또다시 발길질을 하려는 사내를 밀쳐 버린 후 내금위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금위장 남현이 도운의 앞으로 나서 검을 조금 빼었다. 검집에서 살짝 빠져나온 날카로운 검을 본 사내는 그제야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모시는 주인이 위험에 처하자 옆에 선 몸종이 바들바들 떨며 살려 달라 수선을 피우기 시작했다. 도운은 차가운 눈빛으로 젊은 사내를 한껏 노려본 후,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낯이 익은 것이, 자신이 전냥을 쥐여 준 오누이였다.
“너희들은…… 말해 보게. 왜 이 아이들에게 발길질을 하였는가!”
“내 말 하지 않았소! 이 아이들이 내 전냥을 훔쳐갔다고!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
“말해 보거라. 너희들이 이자의 전냥을 훔쳤느냐?”
제 여동생의 몸을 감싸고 발길질을 버티던 사내아이의 눈과 입술이 이미 부을 대로 부어 있었다. 그 정도로 맞았으면 고통스러울 만도 할 텐데, 아이는 핏물이 흐르는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억울한 듯 큰 소리로 고하였다.
“절대 훔치지 않았습니다. 안 훔쳤습니다.”
“이 맹랑한 거지 놈이 거짓을 말하고 있소, 저 아이의 손을 보시오. 내게서 훔쳐간 전냥을 들고 있으니.”
“손을 펴보거라.”
도운의 명에 아이가 작고 더러운 손을 펴 보였다. 아이는 자신이 청을 만나기 전에 주었던 전냥을 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이 전냥이 댁의 전냥이라 하는 것인가?”
“무슨 근거라니, 저 거지 아이가 내 곁을 지나갔소!”
이게 무슨 억지인가. 도운은 기가 막혔다.
“저 아이가 댁의 곁을 지나간 것과 저 전냥이 댁의 것이라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아, 이 양반이. 저 아이가 내 곁을 지나갔고, 전냥을 들고 있었소! 저 거지새끼가 저만 한 금전이 어디서 났겠소? 응당 내게서 훔쳤으니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이 전냥은 내가 이 아이에게 적선한 것이다. 내 몇 푼을 주었는지 그 개수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이래도 이것이 네놈의 전냥이라 우기겠느냐!”
도운의 고함에 주눅이 든 양반의 고개가 쏙 들어갔다.
“대체,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어차피 몇 전 되지도 않는 전냥이고 푼돈일세. 설령 아이들이 훔쳤다 하더라도 그깟 푼돈 때문에 어린아이들에게 발길질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깟 푼돈이라니. 푼돈이 아니라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훔쳤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지. 개, 돼지만도 못 되는 저것들이 감히 양반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어찌 참을 수가 있소?”
“뭐라?”
“내 그대가 어느 댁 자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이상하구려. 내 착각했을 수도 있지, 같은 양반으로서 이렇게 나를 몰아붙이는 댁의 의중이 참으로 의뭉스럽소. 저런 비천한 것들이야 양반들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빠서 두드려 패고, 기분이 좋으면 흥에 겨워 두드리라고 있는 것들이 아니요. 말마따나, 길 가는 똥개 새끼 한 마리를 내가 걷어찬다고 해서 그게 무슨 잘못이오? 참 유난스럽게도 구는구려. 이만 이거 놓으시오. 내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갈 터이니, 서로 알 만한 선비끼리 더 이상 얼굴 붉히지 맙시다.”
‘어흠.’ 헛기침을 크게 한 사내는 뒷짐을 쥐고는 갈 지(之)자를 그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양반의 거만한 걸음걸이를 쭉 지켜보던 도운은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내아이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어린 누이를 꼭 껴안고 보호하고 있었다. 오라비의 품속에 얼굴을 깊게 묻은 여자아이의 정수리가 오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너희들이 사는 곳이 어디냐. 데려다주겠다.”
아이들을 따라 들어선 골목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저녁때인데도 굴뚝에서 연기 올라오는 집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초가들은 겨우 바람만 막아 줄 정도로 초라하고, 그 안의 민심은 더욱 싸늘했다.
“집에 식솔이 누가 있느냐? 네 부모는 있느냐?”
“예.”
“부모는 무얼 하고 네가 나와 동냥을 하느냐?”
“양반댁 밭에 나가 일을 하는데요.”
“소작농이란 말이냐? 작년 한 해 풍년이 들었는데, 어찌 동냥질이냐?”
도운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을 못 하고 제 누이의 손만 꼭 그러쥐었다.
“하지만 먹을 걸 다 뺏어 갑니다.”
“뺏어 가? 누가 말이냐?”
“그야, 왕께서요. 모두가 그랬습니다. 나쁜 왕이라고. 우리 걸 다 뺏어 간다고.”
“나쁜 왕이에요!”
아이들의 말에 도운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이 이 작은 아이들의 먹을 것을 빼앗아 간단 말인가, 자신이.
“다른 형제도 있느냐?”
“동생이 더 있었는데, 작년 겨울에 굶어 죽었어요.”
사내아이의 대답이 도운의 마음에 퍽하고 박혀 들었다. 거적을 입혀놓은 듯한 아이의 집 앞에서 도운은 전냥을 더 내어 주었다.
“이 전냥으로 무어라도 사 먹고, 다친 곳을 의원에게 보이거라. 남 앞에서 자랑하듯 보이지 말고 꼭꼭 숨겨 두고. 알아듣느냐?”
“예, 나리. 고맙습니다.”
두 아이를 들여보내고 돌아오는 길, 별빛이 유난히 반짝여 도운의 마음은 더욱 비참했다. 하나하나 영롱하게 빛나는 별빛이 꼭 청조의 고운 마음을 가루 내어 뿌려 놓은 것 같았다. 고운 청조의 마음이 저를 질책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굶어 죽는 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덧 별빛이 저에게 내려와 속삭였다. 청조가 제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혹여 청조가 굶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무척이나 걱정됐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저에게 온 여인이었는데 이제 와 굶고 있지는 않을지. 도운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걱정에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마음같이 어두운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저를 망가뜨린 놈들, 저를 어둠에 먹히도록 만든 이들을 끌고 들어가려 하였는데, 정작 어둠에 끌려 들어간 것은 가엾은 백성들이었다.
“내가 곡식을 뺏어 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내금위장은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우둔한 아이들의 소리를 너무 새겨듣지 마시옵소서.”
“우둔한 아이들이 어디 있는가? 먹을 것을 빼앗겨 억울하고 배고픈 아이들이다. 내금위장은 내 눈치를 보지 말고 가감 없이 말하라.”
“그것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연 내금위장의 말에 도운은 자신이 얼마나 나쁘고 우둔한 왕인지 깨달았다. 영의정을 중심으로 백성의 고혈을 빼 먹는 악랄한 양반들을 눈감아주고 활개를 치도록 힘을 준 것은 자신이었다. 우습지만 이제 와 그들이 자신의 추문을 만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욕받이었다. 그들 대신 백성들의 분노와 원망을 받아 낼 욕받이, 허수아비 왕이었다.
역시 처음부터 왕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변명하고 우겨보아도 왕은 형님의 자리였다. 대비마마의 말씀이 옳았다. 자신은 패륜을 저질렀다.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형제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것으로 모자라 역모의 죄를 지었다.
형님에게서 왕위를 빼앗고 어진 왕의 불쌍한 백성들을 빼앗았다.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형제의 목숨과 왕좌를 빼앗은 자신의 죄를 가엾은 백성들이 모다 짊어지고 있었다. 죄를 지었으니, 잘해야 한다던 선왕의 죽어 가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백성에게 잘하는 일은 무엇이냐. 어찌하면 백성들에게 잘하는 것이냐, 청조야.
‘대풍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별빛이, 청조의 마음이 제 귀에 다시 속삭였다. 알았다, 청조야. 내 다시는 억울하게 굶는 이가 없도록 할 것이다. 배고픔을 못 이겨 너처럼 자신을 파는 여식이, 여인이, 누이가 없도록 할 것이다. 다시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곡소리가 담장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약조하마.
다음날 도운은 공납과 세법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올리라 명하고 그 기록을 모두 직접 살펴보았다. 살펴보다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풍년과 흉년에 상관없이 지방에서 걷어 들이는 공납의 양은 늘 일정하였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흉년이 들었다면 응당 그 양이 줄어야 할 것인데, 그 격차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군역과 조세 기록을 살펴보니 더 가관이었다. 누렁이는 누구고 개똥이는 대체 누구기에 집집마다 하나씩 이름이 올라와 있단 말인가? 호조판서를 불러 설명하라 하였으나, 어물어물 넘기려는 모양새가 뻔히 보였다. 이 궁에 믿을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저에게 진심을 보이는 조정 신료도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누구를 믿어야 하고, 진심을 가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그 후로 도운은 내금위장과 함께 더 자주 잠행을 나갔다. 저자 한복판에 나가 오가며 떠드는 백성의 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소리가 모다 청조가 저를 탓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 탓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 단 하나의 방법이 생각났다. 싹 갈아엎어야만 한다. 이 썩은 조정을 싹 갈아엎어야만 했다.
* * *
“저, 아씨.”
“응.”
속곳 한 장만 걸쳐 입은 채 엎드려 있던 매화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청조의 손길이 어찌나 야무진지,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아프면서도 시원한 것이 노곤함이 풀렸다.
“저, 아씨.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혹여 도승지 영감 댁 자제분을 아십니까?”
“도승지 영감? 도승지 영감에게 자식이 있었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자식이 없으십니까?”
“응, 몇 해 전 혼례를 올리시긴 했지만,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건 왜 묻나?”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시간이 흘렀으니 더 이상 도승지 영감이 아니실 수도 있었다. 청조는 차라리 익태라는 함자를 꺼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괜히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의심이라도 살까 조심스러웠다. 매화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두 해 전 익태가 도승지 댁 자제라는 것을 저에게 알려 준 사람이 매화였다. 그런 매화가 하는 말이니 분명할 것이다.
재환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어 갈 때 즈음, 청조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 아직 저를 해하려고 하는 익태의 존재라도 확인하려 했으나, 차라리 그냥 떠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롱 울리는 소리에 매화가 잠든 것을 확인한 청조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후 방을 나섰다. 바쁜 일정을 얼추 끝낸 청조는 저녁상을 들고 재환이 기거하는 방에 들었다.
“나리, 어디 출타하십니까?”
다 늦은 저녁, 청조는 도복을 갖춰 입은 재환을 보고 놀라 서둘러 소반을 내려놓았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근심 어린 얼굴로 물어오는 청조를 빤히 바라보던 재환은 여인의 뺨을 향해 다가가려는 손을 의식적으로 멈추었다.
“자네,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예?”
“자네 서방이 자네를 찾지 않는 것은, 이만큼이나 떠돌았음에도 찾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는 생각은 아니 드는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왜, 도대체 왜 그리 미련한가? 자네 서방이 말도 없이 사라지고, 그 서방의 친우가 자네를 해하려고 하고 있네. 무슨 뜻이겠는가? 자네를 버렸다는 뜻이 아닌가? 저를 찾다가는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 아닌가!”
“아닙니다!”
청조는 필사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열이 오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뺨이 실룩거릴 정도로 부정하는 여인의 모습에 재환의 마음은 무너졌다.
“그러실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제 서방님입니다. 제가 압니다!”
여인의 모습에 재환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안, 내 실언을 했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오늘 밤 자리를 비울 것이네. 내가 돌아오기 전에 절대 떠나지 말게. 그것만은 약조해 주게.”
“……어디를 가십니까?”
“다녀오거든 말해 주겠네. 자네 서방의 행방에 대한 단초를 얻어 올 수도 있으니, 절대 내가 돌아오기 전 떠나서는 아니 되네.”
“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방님의 행방이라니요?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저도, 저도 따르겠습니다.”
“아니, 여기에 있게. 나 혼자 다녀오는 것이 나을 듯싶어 그러하니. 꼭 기다리게.”
“허나 나으리!”
“기다리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 기다려 주게.”
행방에 대한 단초라는 말에 흥분한 청조의 얼굴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여인의 초조함이 자신에게는 불안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 멀리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여인의 시선에 재환은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싸움으로 다친 몸을 겨우 추스르고 나서야 자신의 상처에 대해 청조에게 사실을 말하였다. 여인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송구하다는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깨무는 여인에게 진실을 다그쳤다. 끝내 사정을 말하지 않는 여인에게 서방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말을 하자 여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안전을 이유로 사정을 말하라 다그칠 땐 꿈쩍도 않던 여인이, 서방을 끄집어내자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제 서방이 소중한 것일 테지. 재환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자신의 사정을 말하는 여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재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갔다. 삼각산, 복면, 그리고 사라진 시기. 여인이 숙명처럼 찾아 헤매는 서방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복면이 씌워진 채로 삼각산에 버려진 대군의 이야기는 일부 조정 신료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급 관리들이나 젊은 신료들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의경 세자의 목숨을 갉아먹는 대군을 그저 멀리 다른 곳에서 자라게 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사사롭게는 의경 세자의 친우였던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삼각산 깊은 곳에 사는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누구인지.
또한, 여인을 해하려 한다는 서방의 친우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파렴치한 그들이 이제는 여인의 존재까지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 하고 있었다.
가문을 위해,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 위리안치된 아버님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잘라 내야만 했다. 척박한 함경도 지사의 관비가 되었다는 제 식솔들을 위해, 궐 깊은 곳에 유폐되었다는 제 누이를 위하여 여인을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질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여도 여인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버림받았다지만 한때 주군의 여인이었던 여인을 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을 데리고 이대로 도망간다면. 만약 그렇다면. 여인을 데리고 평생 추세꾼을 피해 도망 다니며 힘든 삶을 이어가는 것보다, 이대로 가문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자신을 더 괴롭혔다.
저렇게까지 서방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청조의 어리석은 마음을 깨뜨리고, 서방의 정체를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얼마나 파렴치하고 위험한 사내인지, 왜 그대를 버렸는지, 왜 그대를 죽이려 하는지.
사실을 알게 된 후, 충격과 상처로 괴로운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 어느새 여인의 마음도 저를 향하겠지. 허나, 여인만을 바라보기에는 많은 일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이 고민을 시작한 이후, 단 하나의 생각이 재환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반정. 반정을 일으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여인을 취한다. 어차피 역모의 누명을 쓰고 있는 것, 이제 와 기정사실화 한들 뭣이 잘못인가? 무능한 왕과 간신들에 의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일은 뜻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스스로 반정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다 또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것은 아니 될 일. 재환은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 어지러워 잠시 멈추어 서서 질끈 눈을 감았다.
* * *
재환이 자리를 비운 동안 청조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서방님에 대한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행방에 대한 작은 실마리라도 나온다면 지체 없이 떠날 것이다. 그 길이 저승길이어도 상관없었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이라도 상관없었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알려 주십시오. 어디 계십니까, 서방님.
“아얏, 뭐하는 게야?”
“아, 소…… 송구합니다. 아씨. 제가 딴생각을 하다 그만.”
“됐네, 자네 요즘 왜 이리 넋이 빠져 있는 게야? 됐으니 오늘은 그만 나가 보게.”
“송구합니다, 아씨.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나가는 청조를 흘겨보며 매화는 혀를 쯧쯧 찼다. 몸이 몹시 고단하여 다리나 좀 주물러라 시켰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종아리를 꽉 꼬집어 버렸다. 아유, 신경질나라. 툴툴거리며 버선을 찾아 신는데 문이 활짝 열리며 익태가 들어왔다.
“아이 서방니임,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소?”
콧소리를 내며 착 엉겨 드는 매화의 몸짓에도 익태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스무일 전, 죽어 나자빠진 수하들의 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까짓 빌어먹을 년 하나 찾는 것이 무에 그리 힘든 일이라고, 장정 다섯이 죽어 나가느냔 말이다. 그년과 붙어먹었다는 그 사내놈의 짓이 분명할 것이었다.
골치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오랜만에 기방에 들렀더니, 매화가 툴툴거리고 앉아 있었다.
“뭐가 그리 심통이나 툴툴거리고 있었느냐?”
“글쎄 그것이, 어?”
익태를 바라보던 매화가 눈을 세모로 뜨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무언가 생각날 듯 말 듯 콧잔등이 간지러웠다.
“아, 맞다. 서방님을 말하는 것이었나 보구나.”
“뭐라는 것이냐?”
“그게, 저희 기방에 서씨 성을 가진 찬모가 있는데, 그 여인이 얼마 전 이년에게 도승지 댁 자제에 관해 묻더이다. 서방님은 자제분이 없으시니 당연히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이제 보니 서방님을 말하는 것이었소.”
“그것이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을 해 보거라.”
익태가 매화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낚아채며 채근했다. 매화는 갑자기 흥분한 익태의 모습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히 말을 꺼낸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이 두 해 전쯤인가? 그때 서방님의 함자를 물어보던 여인이 있어, 이년이 알려 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방님께서 도승지 댁 자제분이셔서 내 그리 알려 줬지요. 잊고 있었는데, 방금 서방님을 보니 생각이 나 버렸소. 그 여인이 저 서가 여인임을. 그때 서방님을 도승지 댁 자제라고 일러 준 것을 아직 그렇게 알고 있나 봅니다. 며칠 전에 그리 물어오는 것을 보니.”
익태의 눈이 번뜩이며 입꼬리가 무섭도록 삐쳐 올라갔다. 그래, 이곳에 숨어 있었느냐? 맹랑한 년.
“그년 지금 어디 있느냐?”
미치광이 같은 익태의 표정에 매화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청조가 있는 곳을 일러 주었다. 지금쯤 반빗간에 들어 음식 만드는 것을 돕고 있을 것이라는 매화의 말에 익태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온몸을 파고드는 환희에 얼굴이 징그럽게 번들거렸다.
쾅! 반빗간의 문을 억세게 열어젖히는 소리에 반빗간에 들어 있던 찬모들이 일제히 익태를 바라보았다. 여인들의 얼굴 중 낯익은 청조의 얼굴을 발견한 익태가 혀로 입술을 징그럽게 쓸었다. 점점 다가오는 익태의 모습에 청조는 들고 있던 뒤집개를 떨어뜨리곤 뒷걸음질했다. 허나 금세 구석으로 몰려 팔목이 잡혔다. 가녀린 팔목을 으스러지게 잡은 익태는 청조를 끌고 반빗간을 나섰다.
익태에게 질질 끌려가는 청조의 비명에 기생들이며, 이른 시각부터 기방에 들어 있던 객들이 일제히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왔다. ‘아이쿠, 그년 오늘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예쁨을 잔뜩 받겠구나.’, ‘예쁨이 아니라 씨물을 잔뜩 받아 녹아내리겠지.’ 고개를 쭉 빼 들고 여인이 끌려가는 모양새를 구경하던 양반들은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기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청조가 매화의 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만 봤다. 필시 뭔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터였지만, 저희들이 도와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매화는 잔뜩 흥분하여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서는 익태의 모습에 경기하듯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겁을 먹은 서가 여인이 방으로 끌려 들어왔다.
“서방님, 서방님! 왜 이러시오? 이 여인은 기생이 아닙니다. 허고 이미 서방이 있는 여인입니다. 고정하시고 놓아 주십시오. 예?”
“매화, 너 나가 있거라.”
“서방님!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제발 여인을 놔 주셔요.”
“이년이 그래도! 내가 좀 예뻐해 준다 하여 네까짓 천한 년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감히 기생 주제에 어디서 건방을 떠는 것이냐!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어서 나가거라!”
매화는 불안한 눈으로 청조를 힐끔 쳐다보곤 방을 나섰다. 도와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매화가 방을 나서자 익태는 청조를 보료 위에 내동댕이쳤다.
“왜 이러십니까? 나리.”
“흥, 왜 이러느냐?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으냐?”
“예, 알고 싶습니다!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산에서도 그렇고, 도성을 벗어나던 날에도 저를 죽이려 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자에 사람을 풀어 저를 찾고 계시는 것도 모다 알고 있습니다. 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왜긴 왜겠느냐? 네 서방이 원한 일이니 그런 게지. 찰거머리 같은 너를 떼어 달라 네 서방이 나에게 직접 부탁한 일이다.”
“거짓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지 마시고 서방님께서 어디 계신지 제발 알려 주십시오. 하면 다시는 나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하시어 제발,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익태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청조의 모습에 키득거리다 금세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도운, 그자가 이년의 어디에 그렇게 빠져 감히 저의 어여쁜 누이를 울리는 것이지 궁금하였다.
“멍청한 것. 아직도 모르겠느냐? 도운은 이미 예화와 혼례를 이룬 지가 오래다. 그런 도운의 곁에 너 같은 천박한 것이 달라붙으면, 그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하겠느냐? 너를 없애 달라 부탁한 것은 바로 네 서방이 맞는다는데도 그러는구나.”
“그러실 리 없습니다! 이제 보니 나리께서 무슨 짓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이지요? 도대체 서방님께 무슨 짓을 하신 것입니까? 말씀하여 주십시오!”
익태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대거리를 하는 청조를 가늘게 훑어보다 갑자기 입맛을 다셨다. 그래, 저 바락바락 대드는 얼굴이 곱기는 하지. 바짝 치켜뜬 눈이 요염하긴 하지. 저리 색기를 흘리며 달려드니 목석같던 이도 빠져들었겠지.
그렇게 그리워하던 몸뚱이가 이 사내 저 사내에게 더럽혀진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네 속살이 그리 쫄깃하다며?”
“예?”
“네 서방이 그리 말하였다. 네 속살이 어찌나 쫄깃하고 착착 감기는지, 그 맛에 너를 곁에 두었다고. 허나, 이제 필요 없으니 죽이기 전에 나에게 네 속살 맛이나 한번 맛보라 하더구나.”
“그러실 리 없습니다. 제게 거짓을 말하지 마십시오! 대체 서방님께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소리치는 청조를 향해 어느덧 도포를 벗어 버린 익태가 킬킬거리며 다가왔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는 이미 예화와 혼인을 했다고. 그것은 사실이니라.”
“이것 놓으십시오! 놔, 놔! 이것 놔!”
청조는 치맛자락 사이로 들어오는 익태의 손을 피해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다. 예상보다 거친 반항에 익태가 청조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귀가 윙윙거릴 정도로 강한 충격에 청조는 잠시 반항을 멈췄다. 눈앞이 빙글거릴 정도로 어지러웠다. 청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듯 머리를 흔들었다.
축 늘어지는 청조를 비웃으며 익태는 청조의 옷고름을 잡아 뜯어 버렸다. 그때 무언가가 튕겨 나갔지만, 저고리 앞섬 사이로 보이는 풍만한 가슴골에 익태는 무엇이 튕겨 나갔는지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청조의 뽀얀 젖가슴 두 덩이가 치마말기에 눌려 불쑥 솟아오른 모습을 보자 더욱 군침이 돌았다.
참으로 먹음직스러웠다. 익태는 치마말기를 풀 생각도 없이 힘으로 끌어내렸다. 꽉 묶여 잘 내려가지 않는 치마를 붙잡고 익태가 씨름을 하는 사이 정신을 바로잡은 청조가 바닥을 더듬거렸다. 이윽고 치마말기가 억지로 끌려 내려가자 탐스러운 두 젖가슴이 출렁이듯 튕겨 나왔다.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은 마치 백자 그릇을 엎어 놓은 듯 그 형태를 제법 유지하고 있었다.
오호라, 이거 생각보다도 훨씬 값진 몸뚱일세. 매화 년과 비할 바가 아니야. 저런 낡아빠진 저고리 뒤에 이런 육감적인 몸을 숨기고 있었으니 도운 그자가 정신을 못 차리지.
익태는 입맛을 다셨다. 저 큰 젖가슴을 한입에 물고 맛볼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사정감이 몰려와 몸이 떨렸다. 어서 한 입 맛보려 고개를 숙이던 익태는 갑자기 악에 받친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악! 네 이년!”
청조는 익태를 피해 얼마간 기어간 후, 급하게 치마를 추슬러 올렸다. 피가 흐르는 눈을 감싸 쥔 익태가 무섭게 일그러진 얼굴로 청조에게 다가갔다. 핏물이 흐르는 작은 은장도를 구명줄인 양 꽉 쥐고 있는 청조의 손이 바들거렸다. 피를 흘리며 점점 다가오는 익태의 끔찍한 모습을 피해 뒤로 슬슬 기었지만, 곧 벽에 부딪혔다.
안에서의 소란에 문이 벌컥 열렸다. 화려한 차림새의 여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이내 귀를 찢을 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서방님, 서방님, 이게 무슨 일이오? 어서 의원을 뫼셔라! 어서!”
“으아악! 네, 네 이년! 네 이녀언!”
여인들의 비명소리와 익태의 귀신들린 듯한 고함소리에 청조는 몸이 덜덜 떨렸다. 이윽고 기방을 지키는 무사들이 들어와 청조를 끌고 나갔다. 끌려나가면서도 청조는 손에 꽉 쥔 은장도를 절대 놓지 않았다.
서방님, 서방님. 대체 어디 계십니까? 소첩이 너무 두렵나이다. 너무 무섭나이다.
* * *
“그년 어디 있느냐!”
의원이 다녀가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익태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누구? 서가 여인 말이요?”
“그래! 그 계집 어디 있느냐!”
“의금부로 잡혀갔습니다.”
“의금부? 대체 누가 그년을 의금부로 데려가라 했느냐! 누가!”
익태가 고함을 지르자 얼굴에 피가 몰려 눈가의 상처가 욱신대기 시작했다. 간발의 차로 피하지 못했다면 은장도에 찔린 눈알이 그대로 뽑혀 나갔을 것이다. 한데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누군가가 청조를 의금부로 빼돌렸다. 화가 들끓어 올랐다. 당장 자택으로 데려가 죽을 때까지 고신하고 범하여도 시원치 않을 것을 빼앗기자 참을 수가 없었다.
역정이 가득 난 익태가 씩씩거리자 매화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알고 지낸 사내의 품성으로 보았을 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가 너무 빤하여 소름이 끼쳤다. 기방의 주인이신 행수 나리께서 기지를 발휘하시어, 의금부에 서가 여인을 발고했다.
만약 그리하지 않았다면 서가 여인은 당장에 익태의 사가로 끌려갔을 터였다. 그곳에서 아마 다리부터 분질러졌을 것이다. 익태에게서 도망칠 수 없도록.
* * *
함께 동문수학하던 친우의 도움으로 무사히 궁으로 들어간 재환은 인정이 울릴 때까지 궁 안에 숨어 있었다. 마침내 인정이 울리자, 재환은 어둠을 골라 밟으며 수련재에 침입했다.
“마마, 마마.”
“오라버니?”
재환의 모습을 보자마자 혜빈은 서러운 눈물을 터뜨렸다. 예전보다 훨씬 마르고 초췌해진 누이의 모습에 재환의 마음에선 울화가 치밀었다. 이 초라한 수련재에서 누이의 곁을 지키는 이는 겨우 지밀상궁 하나와 나인 둘이었다.
“마마, 송구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지내시게 하다니.”
“그런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강건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누이, 너무나 감읍하여 할 말이 없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도주 중 변을 당하신 것은 아닌지 하 걱정되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이 오라비가 곧 집안의 억울한 누명을 풀 것입니다. 제가 꼭 그리 할 것입니다. 이 오라비를 믿고, 이제 밤에 침수 편히 드소서. 꼭 제가 이 유폐를 풀어 드리고, 군주 마마를 뵐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오라비를 믿으시지요?”
“예, 믿습니다. 오라버니. 이 누이는 오라버님만 믿고 있습니다.”
흐느끼는 혜빈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재환의 눈앞에 청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어쩌면 두 여인이 참으로 닮아 있었다. 서방 복이 없는 기구한 팔자가 닮아 있었고, 자신이 지켜 줘야 하는 점이 닮아 있었다. 꼭 지킬 것이다, 모두 다 지킬 것이다. 재환은 스스로 다짐을 다졌다. 하나를 잃고, 하나만 지키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할 것이다.
“한데, 오라버니께서 어디를 가셨던 것입니까? 그날 사가에 아니 계셨던 것은 정말 하늘이 도우신 일이었으나, 대체 어디를 가셨던 것입니까? 오라버니를 추격했다는 병사들과의 칼부림 끝에 얼음장 같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말만 겨우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에 혹여 오라버니께서 잘못된 것은 아닌지 근심이 많았었습니다.”
“그것은…… 화성엘 갔었습니다.”
“화성이요? 그곳은 어찌 가셨습니까?”
“알아볼 일이 있어서 갔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에 모다 말씀드릴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 뒤로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재환은 궁을 빠져나오기 위해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기방으로 돌아왔다. 새벽이슬을 밟고 돌아온 재환은 잠시 잠자리에 들었다 행수의 다급한 부름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가 기방을 비운 사이 큰일이 있었네.”
“무슨.”
행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재환은 눈앞이 빙글 돌았다. 두 여인을 다 지키겠노라, 둘 중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바로 몇 시진 전에 맹세하였다. 한데, 자신이 지켜 줘야 할 여인은 스스로를 지키다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다고 했다.
“오늘부터 추국이 시작될 걸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추국이라니요? 겁탈을 당할 뻔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누가 믿겠는가? 아니 그전에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양반일세. 그냥 양반도 아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영의정 댁 자제인 도승지일세. 한낱 기방 찬모의 정조에 그 누가 관심이 있겠는가? 그의 목숨을 노린 일이라 주장하면 어찌할 방도가 없어. 자백을 받아낼 때까지 끝까지 고신을 할 걸세.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그나마 그 집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은 막았으니, 그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야. 자네를 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였어.”
행수의 구구절절 옳은 말에 재환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어찌해야 하나. 역모죄로 쫓겨 다니는 자신의 처지에 여인을 구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재환이 고민하는 사이 결국 추국은 시작되었다.
형틀에 손과 발목이 묶인 채 앉은 청조는 정강이 사이를 비집고 주릿대가 끼어들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도승지 영감을 왜 죽이려고 하였느냐?”
“죽이려 하다니요? 아닙니다, 절대 아니옵니다. 소인은 이미 서방이 있는 아녀자이옵니다. 한데 나리께서 소인을 욕보이려 하시니 소인, 정조를 지키고자 은장도를 휘두른 것뿐입니다. 결코, 나리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도승지 영감께서 그 지위가 고매하다 하시나 그것이 아녀자를 겁탈해도 좋다는 면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도사 나리, 부디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닥쳐라.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런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무엇을 고하라 하십니까? 소인 분명 사실을 고했습니다! 나리,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그래, 네 말이 맞다 치자. 허나 그렇더라도 너는 감히 사대부가의 양반을 죽이려 하였다. 네 정녕 정조를 지켜야겠거든, 은장도로 도승지 영감을 찌를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를 찌르고 자결함이 마땅히 옳은 것이 아니냐!”
도사의 호통에 청조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변했다. 이 무슨 부당한 말씀이신지, 너무 억울했다.
“나으리, 어찌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아무리 소인이 양반이 아니라지만, 부모께서 물려주신 목숨을 어찌 그리 마음대로 끊을 수가 있습니까? 양반이 아니라 하여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옵니다. 억울함이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이제 보니 네 말하는 본새가 참으로 사특하구나. 목숨에도 귀천이 있는 것이다. 한데 감히 네 목숨과 도승지 영감의 목숨이 어찌 같다 하겠느냐! 비단 도승지 영감뿐이 아니라, 이는 사대부 전체를 우롱하고 반상의 법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
“우롱이 아니옵니다. 그저 백성의 억울함을 들어 달라 청하는 것이옵니다. 중인도, 천민도, 여인도 모다 백성입니다. 영민하신 나리께서 부디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네가 정녕 아니 되겠구나. 여봐라! 주리를 힘껏 틀어라!”
드디어 시작된 고신에 청조는 입술을 악물었다. 허나, 아무리 입을 악물어도 입술 사이로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 다리가 분질러질 듯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악문 입술에서 비릿한 혈향이 풍기고 있었다. 몇 시진 째 계속된 고신에 결국 정신을 잃어도, 세찬 물벼락에 정신이 한순간에 돌아왔다. 깨어나자마자 다시 고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청조는 끝까지 입술을 깨문 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저년이 아주 독하고, 독한 년이구나. 여봐라! 무엇하느냐! 좀 더 힘껏 주리를 틀어라!”
“예, 나리!”
더욱 강하게 살을 파고드는 주릿대에도 청조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을 억지로 참는 청조의 마음은 불안했다.
뼈가 분질러지고 살이 타는 고신에 없는 죄도 자백하게 만든다는 의금부였다. 한번 끌려 들어오면 시체가 되거나 반병신이 되어 나간다는 의금부였다.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게 죄를 인정한다는 말을 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정말 두려운 것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인정했다 서방님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될까, 그것이 두려웠다.
혹시라도 죄를 인정할까, 청조는 입술을 꽉 깨물고 버텼다.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결국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옥사에 던져졌다.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먹은 치마가 축축하게 젖었다. 지푸라기가 너저분하게 깔린 더럽고 차가운 옥사 바닥에 뺨을 대고 누운 청조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서방님, 어디에 계십니까? 눈을 감으니 서로 함께하던 산속 초가의 모습이 펼쳐졌다. 너무 그립고, 너무나 돌아가고 싶었다. 함께했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리웠다. 저 멀리 저벅저벅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서방님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 가득 금불초를 들고 자신을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뭐라 했느냐? 여름이 오면 이 산에 널린 금불초를 몽땅 꺾어 너의 품에 한가득 안겨주마 하지 않았느냐? 널 위해 꺾어왔다, 청조야. 네 웃는 얼굴이 금불초를 닮았다는 네 아비의 말은 농이 아닐 것이다. 내 보기에도 네 미소가 참으로 금불초를 닮았다.’
서방님, 여름이 오면 저를 위해 금불초를 한가득 꺾어주겠다 약조하시고는 대체 어디를 가셨습니까? 도운의 꿈을 꾸는 청조의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첫 고신을 행한 후 사흘 이내에는 고신을 하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엄중히 정해져 있지만, 다음날에도 청조는 끌려나갔다.
“그래, 네가 그토록 정조를 지키려 한다는 네 서방은 누구냐? 왜 여기에 없는 것이냐?”
갑자기 질문이 바뀌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의금부 지사의 곁에 있는 사내가 보였다. 합죽선을 펼쳐 얼굴을 가린 사내는 익태가 분명했다. 익태는 눈을 중심으로 머리에 흰 면포를 칭칭 감고 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익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청조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분명 그가 시킨 일이었다. 자신이 서방님에 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일부러 시킨 일이었다.
“어허, 그 눈빛은 무엇이냐? 오라, 네 서방이 도승지 영감을 해하라 명하더냐? 감히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 댁 자제를 해하라 시키더냐? 네 서방이 누구냐? 누구냐 물었다!”
입을 꽉 다문 청조의 모습에 지사가 나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졸은 청조의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형틀에 단단히 묶고, 두 팔 역시 형틀에 묶었다. 마지막으로 두 무릎을 함께 묶어 허벅지가 딱 붙도록 고정시켰다. 준비를 끝낸 나졸은 청조를 흘끗 바라본 후 양손에 침을 탁탁 뱉었다.
침을 뱉은 양손을 차지게 비빈 후, 소곤이 착 감기도록 잡고는 높이 들어 올렸다. ‘시작합니다!’ 목소리를 높인 나졸이 곧바로 청조의 허벅지를 힘껏 내리쳤다.
허리가 앞으로 훅 꺾일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형틀에 묶인 가슴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대신 ‘억’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신음 뒤 바로 입술이 떨려왔다.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고통에 눈앞이 노래졌다. 하지만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 소곤이 다시 허벅지를 내리쳤다.
“말을 하거라! 네 서방이 누구냐? 그가 도승지 영감을 죽이라 사주를 하였느냐? 얼마 전 도망간 역당의 무리와 관계가 있는 것이냐!”
“그런 적…… 없습…… 니다.”
“네 서방이 누구냐! 어디 있느냐! 어서 이실직고하거라.”
“차라리 죽이십시오.”
“어허! 저것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저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역당과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음이다! 뭐 하고 서 있느냐! 더욱 치지 않고!”
‘예!’, 우렁찬 대답 소리에 이어 살을 강타하는 마찰음이 공기를 가르며 울리고 또 울렸다. 피에 절여진 치마가 허벅지에 척 달라붙자 더욱 찰진 소리가 났다. 이제는 신음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청조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죄를 고하라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방님께서 어떤 사정으로 그 험한 산중에서 홀로 복면을 쓰고 살고 있었는지는 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지 밝힐 수 없는 이유가 혹시 이런 관원들을 피해 살고 있던 것이었다면,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자신의 목이 떨어진다 해도 서방님에 관해선 아무것도 밝힐 수가 없었다. 결국, 정신을 잃은 청조는 다시 옥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