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의심
이튿날 이른 아침, 청조는 도성을 향해 홀로 떠났다. 품에 보퉁이를 꼭 안고, 혼자 떠나는 자신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재환을 다독이고는 길을 떠났다. 주막에서 대풍창에 걸린 병자들이 도성으로 향하는 것을 본 사람을 만났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왠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꼭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뒤, 드디어 도성으로 들어온 청조는 재환이 말했던 옥류관이라는 기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름이 낯설지 않다 했더니, 두 해 전에 찾아갔던 그 기방이었다. 사람으로 분주한 저잣거리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청조는 문득 낯선 인상의 사내를 발견했다.
“아저씨?”
분명 아저씨였다. 고리대금업자를 피해 달아났다던 아버지의 친우분이 분명했다.
“아저씨! 아저씨, 저 청조입니다. 아저씨!”
자신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저씨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 아저씨의 얼굴이었다. 고리대금업자에게 쫓기어 도성까지 들어온 모양이었다. 한데, 고리대금업자에 쫓기어 야반도주를 한 사람치고는 그 차림새가 몹시 화려했다.
양반들이나 입을 법한 색이 화려한 비단 도포에 매우 고가로 보이는 흑립을 쓰고 있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하였지만 분명 아저씨의 생김새였다. 아마 도성에 올라와 일이 잘 풀렸나보다 생각하였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당시 몸이 많이 좋지 않았던 아주머니가 고생이라도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던 청조는 좋아 보이는 아저씨의 얼굴에 한시름을 놓았다.
* * *
“하앙, 하앙, 아아아앗! 서방님, 이년 죽습니다! 아앗, 서방님! 하읏, 하읏, 하아아앙!”
“곧 죽는다는 년이, 허억, 교성소리 한번 야살스러운 것이 좋아서 자지러지는구나! 하아, 요망한 년! 그딴 거짓은 그만 집어치우고, 다리나 더 벌려 보거라.”
킬킬대던 익태가 머릿장을 부여잡고 상체만 엎드린 채 서 있던 여인의 머리 타래를 손으로 확 채어 들며 명령했다. ‘아으으으흥’, 한껏 비음을 내지른 여인은 다리를 조금씩 더 벌렸다. 다리를 양쪽으로 한껏 벌리고 서자, 익태를 향해 뻗고 있던 둔부가 더욱 위로 들리며 허리가 더 큰 곡선을 이루었다.
둥글게 휘며 오목하게 패인 허리의 곡선 위로 익태의 땀이 뚝뚝 떨어졌다. 쫄깃쫄깃한 여인의 속살에 제 양물을 찰지게 쳐대던 익태는 흥에 겨운 듯 입꼬리를 비죽 올려댔다. 그리곤 여인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허벅지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한쪽 다리가 들리자, 여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외발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섰다. 한껏 벌어진 음문 사이로 기름을 바른 듯 양물이 쑥쑥 들락거렸다. 사내가 주는 쾌감에 여인은 스스로 자신의 젖가슴을 잡고 주물럭거렸다. 한 손으로는 머릿장을 힘껏 움켜쥐고, 다른 손으론 한껏 부풀은 젖가슴을 쥐어짜듯 비틀어댔다.
한참 비틀어대던 젖가슴을 이제는 가만가만 문지르듯 빙글빙글 돌리고는 단단하게 꼭지가 선 유두를 검지로 살살 긁었다. 하지만 그도 성에 차지 않는지, 아예 납작해지도록 꽉 쥐어 잡은 젖꼭지를 사정없이 비비며 쭉쭉 잡아당겼다. 강한 자극이 주는 쾌감에 껄떡 껄떡 숨이 넘어왔다. 껄떡거리는 숨 뒤로 바로 ‘아항’ 대는 교성 소리가 뒤따랐다.
“아항, 나리! 서방님! 이날 이년을 죽이기로 작정하셨나이까? 하앙! 서방님! 이대로는 이년 딱 죽을 참입니다! 어찌, 어찌 이리 사나우십니까! 아흐흥! 이년 죽습니다앙!”
여인의 야살스런 입놀림에, 익태는 찰박거리는 교합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여인의 뒤를 격렬하게 쳐댔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지, 여인은 간간히 입술을 축이며 스스로 제 젖가슴을 사정없이 짓무르고 주물렀다. 사내의 양물을 더 깊게 받아들이고자, 엉덩이를 뒤로 힘껏 밀어대면서도 입으로는 나 죽는다 소리를 질러댔다.
흥! 매화 네년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기생답지 않게 도도하게 굴더니, 역시 닳고 닳은 노류장화(路柳墻花)일 뿐이구나. 방중술이며, 말로 사내를 기쁘게 하는 법도 제법이야.
익태는 들고 있던 여인의 다리를 내려 준 후, 자신을 향해 힘껏 쳐든 둥근 엉덩이를 쳐다보았다. 백옥 같은 엉덩이골 아래로 빠르게 진퇴를 반복하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제 양물을 바라보던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곧이어 두 손으로 여인의 엉덩이를 잡아 음문을 잔뜩 벌려대고는, 제 양물을 잡아 삼키는 그곳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익태의 시선에 여인은 엉덩이를 색정적으로 흔들며 부끄러운 척 콧소리를 냈다.
“아이잉, 그렇게 쳐다보시니 소첩이 부끄러워 딱 죽을 판입니다.”
“큭, 네까짓 천한 년이 부끄러움을 안다 하는 것이냐? 네 이곳을 본 사내가 나뿐만이 아닌 것을 내 모르지 않는다.”
“하앙, 섭섭하여요.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아흐흥, 서방님 앞에서 이년의 마음이 늘 수줍은 소녀와 같사옵니다. 허니, 아흐흥,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아앗!”
“킥, 그러하냐?”
익태는 머릿장을 부여잡고 엎드리듯 서 있던 여인의 어깨를 잡고 위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사내의 양물을 아래에 꽂은 채, 여인의 상체가 벌떡 일으켜졌다. 똑바로 서게 되면서 더 이상 머릿장을 잡고 버틸 수가 없자, 여인은 팔을 뒤로 돌려 익태의 단단한 둔부를 부여잡고 섰다. 뒤에 서 있던 익태가 매화의 젖가슴을 양손 가득 쥐고 농락하기 시작하자 여인의 코로 가쁜 숨소리가 들락거렸다.
“네가 움직여 보거라.”
익태의 한마디에, 매화는 다리 사이에 품은 사내의 양물을 잔뜩 조였다. 손으로는 익태의 둔부를 단단히 그러잡고, 다리를 조금 더 벌려 몸의 중심을 딱 잡고 섰다. 준비가 끝나자 매화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먼저 엉덩이를 사내의 사타구니에 비비며 크게 원을 그렸다. 원을 그리며 사내의 것을 물고 있는 제 음부를 조였다 풀었다 강약을 주니, 어느새 익태의 목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울렸다.
한참 돌리던 원을 이번에는 반대로 돌려주었다. 원을 그리며 비비던 것을 멈추고 이번엔 슬쩍슬쩍 몸을 앞 위로 움직였다. 자신의 물건을 꽉꽉 조여 가며 앞뒤로 허리를 움직이는 여인의 몸짓에 익태는 쾌감을 느꼈다. 허나 금세 감질이 난 익태는 바로 여인의 젖가슴을 꽉 부여잡고 가열차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익태가 뒤에서 힘껏 쳐댈 때마다 여인의 아랫도리가 앞으로 팡팡 튕겼다. 이대로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까 여인은 뒤로 돌린 손으로 익태의 둔부를 꽉 잡았다. 하지만 아랫도리가 심하게 튕길 때마다 잡고 있던 손이 땀에 미끄러졌다. 여인은 다리에 더욱 힘을 주고 익태의 둔부며 허벅지를 마구잡이로 잡아채며 버텼다.
“아흐흥, 아흥, 아, 나리! 이것입니다! 아흥! 이년이 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여 주셔요, 이대로 죽여 주시와요! 하으윽!”
힘찬 움직임을 끝낸 익태가 여인의 몸에 한껏 씨를 뿌렸다. 기운을 발하고 쪼그라든 양물을 여인의 몸에서 쭉 빼내자, 여인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뭐하고 앉아 있느냐?”
“예?”
“네 안에 든 씨물을 빼내야 하지 않느냐?”
“예?”
매화는 수치스러운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다 곧 제 안으로 중지를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익태의 의중을 알아챈 매화는 그를 향해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곧 제 안에 집어넣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가느다란 교성을 내질렀다.
“그래서 씨물이 다 빠지겠느냐? 좀 더 잘해 보거라.”
킬킬거리는 익태의 한마디에 입술을 앙다문 매화가 검지에 이어 약지까지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일부러 허리를 더욱 격하게 들썩이며 앙앙거렸다. 안을 빠르게 들락거리며 벅벅 긁어대는 손가락에 누런 씨물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마침내 허리를 바짝 쳐들고, 끊어지는 교성 소리로 마무리를 지은 매화는 마른 영견으로 손가락이며 체액으로 더럽혀진 제 아래를 대충 닦아내었다.
“그래, 잘하였다. 그럼 이제 물어라.”
“예에? 아직 더 하시렵니까?”
“그래. 오늘 딱 죽는다더니, 네 아직 안 죽었지 않느냐? 내 오늘 기필코 네년을 죽여주마.”
킬킬대는 익태의 얼굴에 매화가 억지웃음으로 답하였다. 정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내가 오늘 기방에 든 지가 벌써 오래였다. 등청도 하지 않고, 대낮부터 찾아와 벌써 몇 시진 째 이러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매번 찾아와 온갖 호화로운 술과 음식으로 대접받고, 한양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인 자신에게 수청을 들게 한 지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평소에는 유난히 깔끔을 떨어대며 고고한 선비 흉내를 내다가도, 무언가 한번 불퉁이 나면 발정 난 개종자마냥 이리 사람을 몰아세우고 수치를 주며 즐겼다. 난색을 표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 더 미치고 팔짝 뛸 판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정의 새로운 외척 세력인 그를 모르는 이는 이 도성에 아무도 없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이 익태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의 부원군이었다.
얼마 전 역모죄로 일가가 몰락한 영의정 대감이 귀양을 갔다. 영의정 대감이 억울하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그 일가가 몰락한 배경 뒤에 익태가 있는 것은 세 살배기 어린이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귀향을 떠난 영의정 대감 대신 새로운 영의정으로 승차한 그의 아버지와 익태의 횡포가 어찌나 심한지 백성들의 고초가 말이 아니었다. 허나, 누구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
조정의 내로라하는 신료들도 그들의 부와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은 앞장서서 전조를 횡령하고, 공납을 부풀려 몇 배로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국법을 악용하여 양민들에게서 경작지를 탈취하고, 소작농에게서 소작료를 팔 할이나 걷어갔다. 오죽하면 차라리 굶어 죽지, 절대 부원군 댁 소작은 안 하겠다는 탄식이 농민들에게서 흘러나왔을 정도였다.
그나마 귀양 가신 영의정이 계셨을 적엔, 그의 횡포와 전횡을 어느 정도 막아 주기라도 하였으나 이젠 아무도 이 부자의 전횡을 막을 자가 없었다. 만인지상인 전하께서도 꼼짝 못 한다는 영의정인데, 저희 같은 노류장화(路柳墻花) 팔자야 오죽하겠는가.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그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당히 허리를 펴고 선 익태가 자신의 눈앞에 축 늘어진 양물을 들이대자, 자글자글한 남근을 징그럽게 바라보던 매화는 결국 섬섬옥수를 들었다. 가늘고 유려한 손가락으로 사내의 양물을 들어 고환부터 잘근잘근 문질러 준 후, 두 손으로 기둥을 잡고 귀두 끝을 손톱으로 살살 긁어주었다. 이내 양물이 점점 그 크기를 키워 단단히 솟아오르자, 혀끝을 날름거리며 선단 끝부터 차근차근 핥아주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몸으로 무릎 꿇은 매혹적이 여인이, 제 양물을 붙잡고 물고 빠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썩 좋았다. 크큭, 매화야, 기억하느냐. 내 관직에 오르기 전, 네 소문을 듣고 이 기방엘 왔었지. 철없고 권력 없는 어린 도령이라, 그때 네가 내 수청을 거절하였었다.
한데 이제 어떠하냐? 네가 무시하던 어린 도령 발아래, 음란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양물이나 빠는 네 심정이 참으로 궁금하구나. ‘하아아아’, 만족의 탄식이 길게 흘렀다. 익태는 소름 끼치는 만족감에 부르르 떨며 매화의 입안에 사정하기 시작했다. 우웩거리며 입을 빼려는 매화의 머리채를 꽉 쥐고 제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자, 매화에게서 토기 올라오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익태의 사타구니에 코를 박은 매화가 그의 허벅지를 세차게 두드렸으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까칠한 거웃이 코에 닿고, 기둥이 목젖을 건드리자 토기가 격하게 올라왔다. 매화는 토기를 참지 못하고 익태의 허벅지를 더욱 세게 쳐댔다. 하지만 킬킬거리며 즐거워하는 익태는 잡아챈 머리채를 결코 놓지 않았다.
“주인나리, 주인나리!”
한창 즐거운 때 저를 부르는 청지기의 부름에 흥이 팍 깨져 버렸다. 익태는 잡고 있던 매화의 머리채를 휙 놓아 버렸다. 드디어 그의 손에서 해방된 매화가 영견에 입을 대고 토악질을 해댔다.
“무슨 일이냐! 내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보내겠다, 미리 기별을 해 놨거늘. 이 늦은 시각에 예까지 찾아와 상전의 흥을 다 깨 놓는 이유가 무엇이냐!”
“주인나리,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궁에서 주인나리를 찾으십니다. 전하께서 급히 듭시라 하교하셨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예, 주인나리. 어서 서두르셔야 할 것입니다.”
“알겠다.”
곧 인정이 울릴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익태는 사실 도운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자신을 붙잡고 하소연하던 누이의 처량한 모습이 생각나 화가 치밀었다. 첫날밤 소박맞은 자신의 누이가 아직도 처녀인 것은 궐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를 두고, 익태는 궁의 나인들이 희희덕대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도 있었다.
감히 지엄한 중전마마를 두고 농을 일삼는 그것들을 잡아다 주리를 틀어 버렸으나 화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의 어여쁜 누이에게 치욕을 주는 도운에게 불쾌감을 넘어서 분노를 느꼈다. 누구 덕에 지금껏 살아남아 그 자리에 올랐는데 감히! 입궐하기 위해 청지기가 가져온 관복을 차례대로 입고 각대를 허리에 차는 동안에도 익태는 좀처럼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쾅! 분을 이기지 못한 익태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나오자 청지기가 얼른 섬돌 위에 놓인 목화를 잡아 주었다. 이내 섬돌을 성큼성큼 내려온 익태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관모를 씌워주고 주인의 뒤를 따랐다. 익태가 자리를 뜨자, 섬돌 아래에서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서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들고 섬돌 위를 올랐다.
“매화아씨, 서가입니다.”
“들어오게.”
청조가 안으로 들어섰지만 벌거벗은 매화는 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비단 금침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몸 닦고 나면 허리 좀 주물러줘. 전에 자네가 해 준 그 쑥 찜질이 아주 효능이 좋더구먼.”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유, 정말 힘들어서 못 해 먹겠어. 좋아해 주는 척하는 것도 진짜 신물 나.”
“많이 고단하십니까?”
“흥, 고단한 정도가 아니네. 기술이 좋고, 오래가면 뭐하나? 얄팍한 것이 길이까지 짧은 것을.”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흥, 서방도 있는 여인이 못 알아듣는 척은. 음경의 길이 말일세. 사내의 음경이 어디 두께만으로 여인에게 기쁨을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어림없지. 두껍기만 해서 뭐하나, 도달하지를 않는 것을. 이건 뭐, 두께야 그렇다 쳐도 저 길이로 내 안까지는 어림도 없네.”
“……예.”
청조는 망측한 소리를 주절거리는 매화의 말을 흘려들으려 노력했지만 발그레하게 변하는 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끔 기방의 여인들은 너무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청조는 열이 올라오는 뺨에 손바닥으로 두어 번 부채질을 한 후, 김이 펄펄 올라오는 물에 영견을 푹 적셨다. 충분히 젖은 영견을 꽉 짠 다음 매화의 끈적이는 몸을 닦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자네가 부탁한 것 말이야. 대풍창 병자들. 도대체 그런 무서운 병을 얻은 이들을 찾아 무얼 하려 하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그들이 용마봉에 있다는 것 같아. 뭐, 그런 병자들이 사대문을 통과하여 도성으로 들어오는 건 말도 안 되고. 용마봉 어디로 숨어들었다고 어제 오신 판부사 영감이 말하는 걸 들었어.”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씨.”
“뭘, 그냥 주워들은 대로 말해 주는 것을. 아흠, 나른하구먼. 나 좀 잘 테니, 찜질이나 계속해 줘.”
“예, 아씨. 편히 주무셔요.”
“아, 그리고. 며칠 뒤에 단오인 거 알지? 청포 물 좀 넉넉히 준비하고.”
“예, 준비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찾고자 했던 정보를 얻은 청조는 들뜬 마음으로 매화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 나갔다. 단오가 지나면 용마봉에 올라야겠다. 마음은 벌써 저 용마봉을 오르고 있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으니 조금만 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까지 먼 길을 걸어왔는데, 겨우 며칠쯤이야.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은 청조는 손을 더욱 바지런히 놀렸다.
* * *
도운은 연못을 따라 걸으며 며칠 전 중전과의 합방을 반추했다.
장지문이 열리자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야장의만 입은 중전이 술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도운은 예화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식 맛을 느낄 수도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된 지가 이미 두 해였다. 헌데 희한하게도 중전에게서 나는 분 냄새만은 미치도록 후각을 자극하여 토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전하, 신첩에게도 한 잔 주시렵니까? 오늘 신첩이 취하여 보고 싶사옵니다.”
취해 보고 싶다며 은근 저에게 다가오는 중전을 피해 도운은 몸을 뒤로 젖혔다. 손으로 은근히 코를 막으며 술이 넘치도록 담긴 주전자를 중전의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자신의 앞으로 밀려온 주전자를 노려보던 예화의 표정이 한순간 표독하게 변하다 금세 비 맞은 강아지마냥 애처롭게 변하였다.
“오늘 대비전의 부름을 받았사옵니다. 왕실의 후사를 근심하시는 어마마마의 면전에서, 신첩이 망극하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왜요? 그대가 망극할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다 대비마마의 아드님 잘못이다 그리 고하지 그랬소?”
“전하, 정녕 신첩에게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신첩이 무얼 잘못하였나이까? 그러하면 그러하다 말씀을 해 주세요. 고치겠나이다.”
“글쎄요.”
“작금 궁에는 우세스러운 말들이 떠돌고 있사옵니다. 전하를 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 떠돈다 하옵니다. 전하를 두고 하는 망측한 소리에 신첩의 가슴이 다 문드러집니다. 어찌 그런 것들을 두고만 보시옵니까?”
자신을 근심하는 척 애처롭게 말하는 예화의 모습에 도운의 입가가 비틀렸다. 자신을 비하하는 그 추문들이 다 어디서 어떻게 흘러나오는지 자신이 정녕 모르는 줄 아는구나.
“무슨 소리? 내가 저 내시 놈들처럼 고환이 없다는 소리? 아니면 내 물건이 불구라 서지 않는다는 소리? 그도 아니면 밤마다 어린 소환을 데려다 남색을 즐긴다는 소리? 네가 그중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전하!”
“그만!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예화가 도운을 향해 몸을 들이밀자 코를 막은 도운이 이를 가는 듯 소리쳤다. 그의 호통에 애꿎은 치마를 말아 쥔 예화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무나 모욕적이었다. 한 해도 아니고 벌써 국혼을 올린 지가 두 해였다. 정녕 중전인 저에게 이래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이 나라 여인 중, 가장 높은 품계를 지닌 가장 고귀한 여인이 저였다. 그런 저에게 이래서는 아니 되는 일이었다.
“그 계집 때문이시옵니까? 전하께서 저를 이리 홀대하시는 이유 말입니다!”
“계집?”
“예! 산에서 보았던 그 더러운 창기년 말이옵니다!”
씩씩거리는 예화의 눈에서 불꽃이 튈 듯하였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간 쌓아온 분노와 수치심이 한 번에 폭발했다. 분노에 찬 앙칼지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신첩이 모르는 줄 아셨습니까? 그 계집이 어떤 계집인 줄 정녕 모르는 줄 아셨습니까! 전하께서 그 창기년을 데리고 밤마다 무슨 짓을 벌이셨는지 모르는 줄 아셨습니까! 품으셨지요? 그 천한 년을 품으셨지요!”
도운은 앙칼지게 소리치는 예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다 차갑게 대답했다.
“품었지.”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도운의 모습에 예화의 화가 더욱 커졌다. 분노에 달아오르는 예화의 당돌하고도 오만한 모습에 도운은 더욱 신랄하게 지껄였다. 감히 네가 무엇이관데, 저의 행실을 따지고 드느냔 말이지.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일었다.
“그 여인을 데리고 밤마다 무엇을 했느냐고? 그래, 내 금침을 깔 여유도 없이 여인을 차가운 바닥에 깔고 너희들이 불구라 말하는 내 물건을 박고 또 박아대었다. 되었느냐? 날이 새는 것도 모르고 여인의 아랫도리 맛에 취하여 오후가 지나도록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한 적도 허다했지. 그러니 그것은 엄연히 말하여 밤마다 한 짓은 아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내 물건이 시시때때로 벌떡벌떡 잘만 서댔거든.”
도운의 키득거리는 소리에 예화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래서, 그 더러운 몸뚱이를 못 잊어 저를 이리 홀대하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스스로 욕정받이라고 칭하시던 더러운 창기년입니다. 예, 저도 알지요. 십 년이 넘는 긴 세월, 산에 홀로 갇히시어 들끓는 사내의 욕망을 어찌 감당하셨겠습니까? 그 욕망을 배출하느라 그년의 아랫도리에 달라붙어 지내신 것, 신첩 다 이해하옵니다. 허나, 배출구는 배출구로 이미 그 소임을 다하였습니다! 이제 쓸모가 없어져 마땅히 처분된 그런 존재이옵니다. 헌데, 그런 천한 년과 저를 비교하시다니요? 그런 계집의 더러운 몸을 그리워하시어, 저를 마다하시다니요!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무섭게 달려드는 예화의 얼굴이 매우 낯설었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궁에 들어온 지가 벌써 두 해를 꽉 채웠으니 무심한 저가 밉기도 하겠지. 허나, 그에 관해 예화에게 동정심을 느낄 만큼 자신에겐 감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진 대신 분노는 늘 충만했다.
청조를 일러 창기년이라 매도하고, 천한 것이라 부르짖는 행태에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만큼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청조를 일러 욕망의 배출구라 칭하고, 청조의 자리를 당연한 듯 저의 자리라 말하는 예화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너야말로 감히 나의 청조와 네까짓 것이 비교가 된다 생각하느냐.
“오늘 중전께서 많이 고단하신 듯합니다. 헛소리를 다 하시는 것을 보니. 내 이만 침전으로 돌아갈 것이니, 홀로 편히 침수 드시오.”
장지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왕의 모습에 내관들이 우왕좌왕 앞다투어 섬돌 아래로 내려서 목화를 대령했다. 내시가 잡아 주는 목화에 발을 거칠게 쑤셔 넣은 도운은 곤룡포를 휘날리며 성큼성큼 앞을 향해 걸었다. 불현듯, 끈적끈적한 기운이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도운은 발걸음을 멈추고 교태전을 잠시 돌아봤다.
그날 이후, ‘욕정받이’라는 말을 외치며 부들거리던 예화의 모습이 이상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운은 수면 위에 비친 검은 사내를 바라보며 그 단어를 곱씹었다. 욕정받이, 그 말을 중전이 어찌 아는가? 자신이 청조를 일러 욕정받이라 칭했던 사실을 어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어를 곱씹자, 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운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세 해 전, 산에서 보았던 청조의 존재를 왜 이제 와 끄집어내는가? 청조에 관한 말은 익태가 했겠지. 그래, 익태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제 처녀 딱지를 떼 주지 않는다, 독수공방이 서럽다 읍소하니 제 누이를 위로하려 익태가 말을 하였겠지.
그럼, 익태는 ‘욕정받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가? 그 말을 그의 앞에서 내뱉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아니, 아니, 그런 적은 결코 없었다. 실수로도 청조를 두고 그 단어를 말한 적이 없었다. 남 앞에서 그 단어를 내뱉은 적은 오직 단 한 번, 단 한 번뿐이었다.
단 한 번, 청조가 한 내관을 따라 산으로 왔던 그 날, 그 순간뿐이었다. 형님과 한 내관의 어리석음을 경멸하고 한 내관을 따라온 가식적인 여인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그 단어를 오누이가 알고 있는지. 의심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꼭 살아남으시어 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궁으로 돌아가시거든, 절대 아무도 믿지 마소서. 꼭, 이 유모의 말을 잊지 말고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아무도 믿지 말라던 유모, 유모는 무언가를 알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궁금했다.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그 말은, 가장 믿고 있는 자부터 경계하고 의심하라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면 위의 검은 사내가 저를 비웃으며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전하, 도승지 영감께서 오셨습니다.”
“신 도승지 전하의 명을 받잡고 들었사옵니다.”
“찾았느냐?”
수면을 노려보던 도운은 익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하문하였다.
“아직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아직…… 아직이라.”
여전히 수면을 노려보며 도운은 ‘아직’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아직, 아직이라고!”
불현듯 고함을 치는 도운의 모습에 겁에 질린 궁인들은 쩔쩔매었다. 그와는 다르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익태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요히 서 있었다.
“도승지는 그 말밖엔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인가? 찾지 못하는 도승지의 무능함을 탓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숨어 지내는 능력이 탁월한 청조를 치하해야 하는가? 내 찾아오라 한지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죽었으면 그 시체라도 끌고 오라 하였어. 헌데, 아직이라. 과인더러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나주지방에서 비슷한 이를 본 적이 있다 하여 사람을 보냈사온데, 확인 결과 찾으시는 여인이 아니었사옵니다. 망극하오나, 조금만 더 말미를 더 주시옵소서.”
도운의 날카로운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걸음을 옮겨 익태의 코끝까지 다가온 도운은 허리를 굽혀 그의 두 눈을 무섭게 마주 보았다.
“가거라. 가서 찾아와. 딱 석 달의 기회를 더 줄 것이야. 그 전에 찾지 못하면 네 목을 길게 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예, 전하.”
뒷걸음으로 물러나던 익태의 평온한 얼굴은 뒤를 돌자마자 무섭게 가라앉았다. 결국, 그깟 천한 계집의 행방을 묻고자 이 밤 재미를 보던 자신을 궁에까지 들게 하였던 것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오늘은 분명 예화와의 합궁 날이었다. 헌데 그깟 천한 계집 하나 때문에 어여쁜 누이의 눈에서 또 눈물을 뽑아댔을 것이다. 뿌드득, 이 가는 소리와 함께 턱주가리가 꿈틀하였다.
예, 전하. 석 달 안에 반드시 눈앞에 대령하여 드리지요. 그 천한 년의 시체를. 이를 가는 익태의 입술에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돌아가는 익태의 뒷모습을 매섭게 바라보는 도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번 든 의심은 그를 보자 야금야금 그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닦달을 해대는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에서 충심을 가장한 불순함이 숨어 있는 듯했다.
의심 뒤엔 의문, 의문 뒤엔 의심이 번갈아 찾아왔다. 과연 청조는 왜 떠났는가? 청조는 정녕 저를 스스로 떠났는가?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자니 저를 떠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을 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여인이 아니었다. 익태가 저에게 거짓을 고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제 누이를 위해 청조를 떼어내고 싶었겠지. 그렇다면 비녀는…… 비녀는 어찌 익태의 손에 있고, 은장도는 어찌 알았단 말인가.
‘이제 쓸모가 없어져 마땅히 처분된 그런 존재입니다.’
처분되었다며 예화가 소리치던 말이 떠올랐다. 혹, 저자가 청조에게 해코지한 것은 아니겠지. 불현듯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머리를 강하게 흔들며 불길한 생각을 털어냈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침전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란스런 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이러지 마. 그만해. 흐엉, 왜들 이러는 거야?”
“흥, 몰라서 묻느냐? 멍청한 네놈이 일을 이리 망쳐 놓고도 왜 이러냐는 말이 나와? 네놈이 전하께서 조금 어여뻐 해 주신다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지 뭐냐?”
“승하하신 의경 세자도 그렇고, 전하께서도 왜 이런 천치를 끼고도시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그만, 그만해.”
소란스런 소리를 따라가니, 소환들 서넛이 청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른 소환들에게 둘러싸인 채, 속고의만 입고 있는 청의 몸은 다 젖어 있었다. 소환들은 각자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와 청을 향해 물을 한 바가지씩 끼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상선은 놀라 뛰어가려 했지만, 곧 도운에게 저지당했다.
“이놈 때문에 대제학 영감과 상제(尙除: 청소담당 내시)나리에게 통박을 받은 걸 생각하면, 아우 씨!”
열이 바짝 오른 소환 하나가 바가지를 던져 버리곤 아예 물통을 들어 올려 청에게 물벼락을 끼얹었다. ‘아푸, 아푸’, 입에 들어간 물을 뱉어내며 얼굴에 흐르는 물을 닦아내던 청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네 이놈들!”
보다 못한 상선의 호통에 식겁한 소환들이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상선의 뒤로 보이는 무서운 전하의 얼굴을 발견하곤 이내 몸을 달달 떨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저 아이이게 물벼락을 주고 있었느냐?”
“저,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소환들은 내가 하문하면 그 말을 하라 그리 교육받는 것이냐? 죽이라 하면 양물 핑계를 대며 또 살려 달라 읍소하겠지?”
“망극, 망극하옵니다, 전하.”
“무슨 일로 이 야심한 밤에 저 아이에게 물벼락을 주었느냐 물었다.”
엎드린 소환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던 중, 몸집이 가장 큰 놈이 자신들의 행실에 대하여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청이가 사사건건 저희 일을 망쳐 놓아 그랬사옵니다. 소인들은 궁 안 소제를 담당하는 소환들이옵니다. 금일, 하루 종일 집현전 소제를 깨끗이 하였는데, 청이가 물동이를 엎어 학사 나리들의 서책이 젖어 버렸사옵니다. 그 일로 대제학 영감께서 크게 노하시어 저희가 엄한 벌을 받았사옵니다.”
“예, 전하. 평소에 물동이를 잘 엎어뜨리는 것만이 아니옵니다. 말을 해 주어도 곧잘 잊어버리고, 맡은 소임을 다 끝내지 못하여 저희 소환들이 모두 함께 벌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옵니다. 그 일로 저희가 정신을 차리라, 청이가 엎어 버린 물로 벌을 주고 있었사옵니다.”
소환들이 앞다투어 청의 과실을 탓하자, 청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를 보던 도운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리 폐만 끼치는 소환이 어찌 지금껏 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느냐? 상선, 내 저 아이가 평소 덤벙거리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동무 소환들에게까지 이리 민폐를 끼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저런 쓸모없는 소환 따위를 거둬 먹이고자 궁의 재산을 축내고 있었던 것인가?”
“망극하옵니다. 전하.”
“내 청이 저 아이가 누군가를 닮았다 하여 간식 몇 번을 하사하였더니, 저 아이가 그것을 총애로 오해하고 제 맡은 일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어린놈이 뒷배를 믿고 건방이나 떨어대다니. 내 이 일을 그냥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제 그만 물러가거라.”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왕의 뒷모습에 소환들은 엉거주춤 일어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홀로 남아 물을 뚝뚝 흘리던 청은 입술을 삐죽거리다 억울한 듯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었다.
어젯밤 ‘이 일을 좌시하지 않겠다.’ 엄포를 놓으신 전하 때문에 청은 하루 종일 좌불안석이었다. 평소보다 실수도 더 많이 하고, 하루 종일 긴장하여 엄지를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었다. 청의 모습을 본 다른 소환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또 도끼눈을 뜨고 멍청한 동무를 질책하였을 것이나, 오늘만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청이, 전하께서 부르신다.”
청은 하루 종일 가슴을 졸이다 취침시간이 다가오자 겨우 긴장을 풀었었다. 이대로 넘어가 주실지 모른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아니, 저 같은 별 볼 일 없는 소환 따위 벌써 기억에서 사라지셨을 것이다. 겨우 안심하고 잠을 이루려던 순간 자신을 부르는 상선 영감의 목소리에 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하의 침전으로 향하는 내내 손발이 어찌나 떨리는지, 달달달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상선 영감을 따라 이윽고 전하의 집무실인 사정전에 이르렀다. 장지문이 열리자 어좌에 앉아 계신 전하가 보였다. 청이 다가와 읍하고 서자 도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오너라.”
앞장선 도운은 행랑을 건너 더욱 사적인 공간인 만춘전으로 건너갔다. 그 뒤를 졸래졸래 따르던 청은 어찌나 가슴이 쿵쿵 뛰어대는지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만 같았다. 만약 궁에서 내쳐진다면 자신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병아리 눈물만큼이나 적은 양이지만 그나마 녹봉으로 받는 보리쌀 석 되가 식솔들에게는 절실하였다. 궁에 든 지 일곱 해, 그동안 저를 찾아온 아버지만 일 년에 두어 번씩 뵈었다. 이제는 얼굴도 희미한 식솔들의 얼굴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올랐다.
“네가 궁을 나가야겠다.”
털썩, 청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무 놀란 마음에 진짜로 졸도해 버렸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찔끔거리며 뜬 눈앞에 천장이 맞바로 마주 보였다. 여기가 어딘가 생각하다 사르륵 서책 넘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바로 눈앞에 서책을 읽고 계신 전하의 붉은 용포가 보였다. 청은 그제야 전하의 면전에서 자신이 대 자로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났느냐?”
“저, 저, 전하…….”
“죽여 달라고?”
히끅, 딸꾹질을 시작한 청을 보고 도운이 헛웃음을 뱉었다.
“청아.”
“예, 전하.”
“네가 궁을 나가, 나를 위해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할 수 있겠느냐?”
“소, 소인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이 궁에 너 말고 달리 믿을 사람이 없구나.”
“그럼 소인을 내치시는 것이 아니옵니까?”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침까지 튀어가며 묻는 아이의 얼굴에 도운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아니다.”
“소인은 멍청이인지라 감히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엇을 하면 되는지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뭐든 하겠사옵니다.”
“네 도승지의 얼굴을 아느냐?”
“예, 먼발치에서 몇 번 뵌 적은 있사옵니다.”
“그러하냐. 그럼 내일 해가 뜨면 바로 출궁하거라. 그리고 도승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감시하거라. 그가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빠짐없이 내게 보고를 올리거라.”
“그리만 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그래. 이제부터 내 보름에 한 번씩 잠행을 핑계로 저자에 나갈 것이다. 그때 나에게 보고를 하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운은 서안 위에 엽전 꾸러미가 든 주머니를 올렸다.
“가져가서 요긴하게 쓰거라.”
커다란 주머니를 열어 본 청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것은 너무 많사옵니다, 전하.”
주머니에서 작은 엽전 꾸러미를 꺼내 들은 청은 주둥아리를 잘 갈무리하여 다시 서안 위에 올려 두었다.
“흥, 아니 받는다고는 안 하는구나.”
“그것이…… 이제 소인이 궁을 나가면, 녹봉도 못 받을 것이고 또, 소인이 집으로 가면 군식구 입이 느는 것인데, 아니 받기에는 소인의 처지가…….”
“되었다. 농이다.”
쩔쩔매는 아이가 우스워 농이라 말하였지만, 도운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서워 청은 어찌할 줄 모르고 계속 쩔쩔맸다. 식은땀을 흘리는 아이를 보던 도운은 주머니를 열어 엽전 한 꾸러미를 더 꺼내어 아이의 앞으로 던져주었다.
“가는 길에 고기라도 충분히 사 가거라.”
작게 명하는 목소리에 청의 눈이 깜박거렸다.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분이라 무서우신 분이시지만 나쁜 분이 아니었다. 궁에 떠도는 나쁜 풍문들은 모다 전하를 모르는 것들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적어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청은 엎드려 감사를 전한 후 엽전 꾸러미를 소맷부리 안으로 잘 갈무리하고 만춘전을 나섰다. 봄에만 이용한다는 만춘전에 봄이 가득 여물어 있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한 전각을 걸어나가며 청은 코를 킁킁거렸다.
* * *
단옷날이 되자 청조는 한참 분주했다. 오전 내내 창포물을 끓여 기생들의 머리를 감기고, 손질을 해 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참 분주하게 오가는데, 기방으로 낯선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이보게.”
낯선 사내들을 피해 안채로 걸음을 옮기던 청조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재환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나으리! 무사히 들어오셨습니까?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진 않았을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잘 들어왔네. 상단 행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러셨습니까? 잘되셨습니다. 얼굴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상처가 다 회복되고 기력이 돌아와서 그런 게지.”
“예, 암요. 너무 잘되었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여인의 얼굴에 재환은 마음 한구석이 싸르르하게 울렸다. 만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밖에 안 된 여인의 웃음이 마음속에 깊이 박혀 들었다.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 곳곳에 붙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본 행수가 저를 따로 불러 노발대발했었다.
사정이 있는 줄은 알았으나 역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도와주지 않았음이라, 안절부절못하는 행수를 설득하면서도 여인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만약 행수가 저를 관아에 고발이라도 한다면 다시는 못 볼 고운 얼굴이었다. 이곳에서 기다리라 청해 놓고 그리될 수는 없었다.
재환은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구슬렸다. 재환의 설득에 너구리 같은 행수가 이리저리 저울질을 하다 결국 그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재환은 신분을 회복하면 상단에 큰 도움을 주기로 약조하고, 또 약조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신분이 들통 날 경우 상단에 피해를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기로 약조를 하고 겨우 상단에 남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위험 속에서도 이리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또한, 자신의 말대로 기방에 남아 저를 기다리던 여인이 너무 고마웠다. 오는 길에 우연히 들었던 식솔들의 소식에 내내 마음이 착잡하던 참이었다. 허나 여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괴란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되었다.
“이보게! 서가! 어디 있어? 내 머리 언제 감겨 줄 거야?”
“예, 아씨. 지금 가고 있습니다. 나으리, 소인이 이만 가봐야 합니다. 노곤하실 터이니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알았네, 가서 볼일 보게.”
청조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여인은 급히 자리를 떠 버렸다. 청조가 지나간 자리에 창포 향이 오래도록 남아 재환의 마음을 간질였다.
마음과는 다르게 단오가 지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재환은 청조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어렵사리 도성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저를 도와줄 지인들을 조심스럽게 만나기 시작했다. 뜻이 있으나 힘이 약한 자들과 제 아버지의 성품을 흠모하고 존경하던 유생들을 만나며 작금 조정 돌아가는 일을 살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기방으로 돌아오던 늦은 밤, 우연히 놋쇠 대야를 들고 가는 청조를 발견했다.
“이보게.”
“나리.”
“이게 다 무엇인가?”
“아, 아씨들 몸을 닦아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
“몸을?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재환이 팔목에 감겨 있는 줄을 따라 대롱거리는 주머니를 가리키자, 청조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말린 쑥입니다. 이것을 넣고 훈증한 후,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 어혈이 풀리어 아씨들이 곧잘 찾습니다.”
“이봐, 서가. 추월아씨 방에 손님 나가셨네. 아씨 몸이 많이 끈적거린다니 어서 서두르게.”
“예, 아주머니. 곧 준비해 가겠습니다. 나리,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럼, 지금 시각이 얼마나 늦었는데. 그런데…… 자네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예, 그럼 소인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쁜 듯 대야를 들고 총총히 사라지는 청조를 보자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눈치로 미루어 봤을 때, 방사의 흔적이 남은 유녀들의 몸을 청조가 닦아 주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숙하지 못한 유녀들이 감히 제 더럽혀진 몸뚱이를 누구에게 닦으라고 시키는 것인지 분통이 터졌다. 거기에 저 말린 쑥은 또 뭐란 말인가.
더러워진 여인들의 몸을 닦고 팔다리를 주무르는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이곳에서 기다려 달라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청조를 맡아 줄 곳을 알아봐야겠다며 재환은 여인이 사라진 곳을 속상한 듯 바라보았다.
이튿날, 청조는 바지런히 주먹밥을 쌌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참기름과 잘게 다진 시래기, 고사리, 곰취 등과 같은 나물을 넣고 소금 간을 하여 꽉꽉 뭉쳐 주먹밥을 수북이 만들었다. 다 만들어진 주먹밥을 대나무 잎에 하나하나 일일이 싸며 서방님을 생각했다. 사냥 나가실 때 싸드리면 늘 맛있다 웃어 주시던 모습이 생각나 그리움이 몰려왔다.
오늘은 드디어 용마봉에 오를 참이었다. 그간 먹는 것이 부실하시진 않았을지 걱정되어 새벽부터 일어나 주먹밥부터 만들었다. 조롱박으로 만든 물통에 식혜와 물까지 가득 담아 보퉁이 안에 잘 갈무리하곤 길을 나섰다. 밖은 벌써 푸르스름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 보퉁이는 무엇인가?”
“나리. 어디 출타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밤새 어디 좀 다녀오는 길이네. 헌데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가는가?”
“예, 용마봉에 다녀오려 합니다.”
대문을 나서던 청조가 보퉁이를 안고 있는 모습에 재환은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서방을 찾아 어디론가 또 훌쩍 떠나 버리려 하는 줄 알고 놀란 가슴이 발아래까지 떨어지는 줄 알았다.
“용마봉은 왜?”
“그곳에 서방님께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다녀오려 합니다. 바지런히 걸으면 날이 지기 전에 다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이 가세.”
“예? 나리, 나리.”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던 재환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서방을 찾아 어디론가 떠날 줄 알았던 이가 용마봉에 다녀온다 하기에, 떨어졌던 가슴을 겨우 추어올리던 참이었다. 헌데 저 단아한 얼굴로 제 서방을 찾으러 용마봉에 오른다니,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뉴월 볕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바람은 선선하였으나 산세가 험한 용마산을 오르고 있자니 구슬땀이 한 방울씩 흘러 떨어졌다. 한참을 올라가던 청조가 잠시 쉬어가자며 재환을 불렀다. 필시 아침도 못 드시고 산에 올랐을 텐데, 저리 땀까지 흘리시니 너무 송구하여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나리,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잠시 앉으셔서 요기하시지요.”
바위에 걸터앉은 청조는 손에 든 보퉁이에서 대나무 잎에 싸인 주먹밥과 물을 꺼내 건네주었다. 재환은 머리에 깊게 눌러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바닥에 가지런히 놓고, 대나무 잎에 쌓인 주먹밥을 받아 들었다.
“처음 보는 주먹밥일세. 이렇게 먹으니 맛과 향이 좋은 것이 참 신기하네.”
“그러십니까? 저희 서방님께서 좋아하시던 음식입니다. 사냥 나가실 적에 토끼 고기를 말려 만든 육포와 이렇게 주먹밥을 만들어 싸 드리면 그 맛이 참 좋으시다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러한가?”
“예, 오늘 서방님을 만나게 되면 드리려 싸 왔습니다. 혹시 끼니라도 거르고 계신 건 아니실지…… 너무 걱정되어 밤새 잠을 이루기도 힘들었습니다.”
말하기가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제 서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여인은 분명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재환은 서방을 그리워하는 청조의 마음을 엿보는 것이 꽤나 힘들었다. 괴로움에 주먹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퉁명스런 말이 나갔다.
“자네 서방도 자네를 그리워할까?”
“예?”
무슨 뜻인지 물어오는 여인의 맑은 표정에 재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 자신이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서방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을 순간 일그러뜨리고 싶었었다. 실망을 안겨 주고 싶었다. 이런 파렴치한 마음을 사죄해야 한단 생각에 청조를 돌아보던 재환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서둘러 청조를 뒤로 빼돌리고는 그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
재환의 호통에 사내와 여인 한 명이 몸을 흠칫 떨었다. 온몸에 흰 면포를 칭칭 두른 두 사람은 자신들의 얼굴을 숨기며 움츠러들었다. 대풍창! 대풍창에 걸린 문둥이들이었다. 문둥이들이란 저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의 간까지 빼먹을 정도로 도의를 저버린 위험한 자들이었다. 재환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대고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들, 어서 물러가지 못할까! 천형을 받은 몸으로 감히 사람들 앞에 나서다니! 썩 물러가라.”
“그러지 마십시오, 나리!”
청조는 칼을 뽑아 들려는 재환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당황한 재환이 주춤하는 사이 청조가 앞으로 나서며 급히 말을 꺼냈다.
“놀라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제가 그대들을 찾아 예까지 올라왔습니다. 혹여, 저희 서방님을 아십니까? 키가, 키와 덩치가 여기 이분과 비슷하십니다. 허고 얼굴에 검은 아니, 두 해 전까지는 검었지만, 지금은 댁들처럼 흰 면포를 감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예? 혹여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목소리는 낮고 굵으시고, 또…… 또…… 활을 잘 쏘시고…….”
대답 없는 병자들의 시선이 청조와 재환이 먹다 남은 주먹밥에 쏠려 있었다. 배가 몹시 주린 듯, 그들은 청조와 재환의 눈치를 보면서도 주먹밥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켜댔다. 엉거주춤 서 있는 병자들의 배에서 배고픔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자 청조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허기가 지십니까? 여기, 다 드십시오. 이 보퉁이 안에 더 많이 있습니다. 물과 식혜도 있습니다. 다 가져가십시오. 모다 드셔도 됩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서방님을 보셨는지, 그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재환은 병자들에게 보퉁이를 넘기려는 청조의 손을 확 채어가며 저지했다.
“무슨 짓인가? 대풍창이 무슨 병인지 모른단 말인가? 하늘이 내린 형벌일세. 가까이 가다 천형이 옮을 수도 있어! 너희들은 이 여인의 물음에 먼저 답을 하거라. 그러면 내 이곳에 보퉁이를 내려놓고 떠날 것이다. 허나, 그 전에 한발자국이라도 움직이거든 이 칼이 먼저 너희들의 목을 벨 것이다. 어서 대답하거라!”
“어, 업슴다아.”
“뭐라는 것이냐?”
“업습니다아.”
사내가 대답을 하려 노력했지만, 병증이 제법 심한 듯, 짓물러 뒤집힌 입술에서는 말이 어눌하게 나왔다.
“아.”
병자의 말을 알아들은 청조는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보게, 괜찮은가?”
“예, 예에. 괜찮습니다. 그들에게…… 보퉁이를…….”
목이 막힌 청조가 겨우 보퉁이 이야기를 하자 재환은 보퉁이를 그들의 앞으로 굴려주었다. 허겁지겁 보퉁이를 품에 안는 병자들을 바라보던 청조의 눈에서 뚝,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짠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보아하니 기름진 음식을 먹기는 힘들 것 같으나, 혹여 산에서 짐승을 잡아먹더라도 꼭 기름을 제거하고 살코기만 드셔야 할 것입니다. 혹여 산에서 생활하시며 방풍, 마황, 박하 또는 형개나 치자 등을 구할 수 있으면 함께 넣고 잘 달여 드십시오. 열사를 빼주어 병증에 효험이 있다 합니다.”
보퉁이를 품에 안고 돌아서는 병자들을 향해 넋이 나간 청조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병자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한 후 자리를 떴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청조는 계속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넋이 나간 청조를 바라보는 재환의 눈빛은 매서우면서도 애절했다. 손이 땀으로 끈적거리고 입술은 바짝 말랐다.
“자네의 서방이, 혹 대풍창을 앓고 있었는가? 대풍창 병자인가?”
무겁게 질문하는 재환을 바라보는 청조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눈동자에 곧 눈물이 차올랐다.
“……모르겠습니다.”
흐윽,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른다 하소연하는 청조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대풍창에 걸리신 것인지 아니 걸리신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왜 저를 두고 떠나셨는지, 얼굴 생김새가 어찌 생기셨는지, 함자가 무엇인지, 본관이 어디인지,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흐윽,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청조가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울음소리에 섞여 간간히 흘러나왔다. 청조는 제 가슴을 두어 번 툭툭 쳐대기만 할 뿐,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숨을 참으며 끅끅댔다. 재환은 청조가 하는 말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여인의 슬픔은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적나라한 슬픔이 재환의 가슴을 더욱 후벼 팠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청조의 서방은 지어미를 떠난 것이 틀림없었다. 볼 수는 있으나 만질 수 없는 연기 같은 자였다. 존재는 하나 형체는 없는 그런 연기 같은 자가 자신의 여인을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 자를 찾아 이제껏 온 나라를 떠돌았단 말인가? 용서가 되지 않았고, 가련한 여인이 더욱 탐이 났다.
곁에 없는 그런 자보다 곁에 있는 자신이 이 여인을 더욱 아끼고 보듬어 줄 자신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서라도 저는 꼭 신분을 회복해야만 했다. 신분을 회복하여 여인을 제 곁에 둘 것이다. 그것은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되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오른쪽 눈동자가 살짝 비껴 있는 사내의 말에 익태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그년이 도성에 들어왔다? 확실한 것이냐?”
“예, 나리. 오늘 소인이 저잣거리에 나갔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여인이 분명합니다. 그간 여인의 행방을 뒤좇던 아이들의 말로는 달포 전쯤 해서 도성으로 들어온 듯하다 합니다.”
“그래?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놓쳤단 말이지?”
“송구합니다. 저자에 사람이 많아 빠르게 쫓았지만, 눈앞에서 놓쳤습니다. 한데…….”
“한데?”
“그것이, 곁에 웬 남정네가 함께 있었습니다.”
“남정네?”
“예, 삿갓을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얼굴까지는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그 여인과 함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
흥, 요망한 년이 새 사내를 만났다? 흐흐, 비웃듯 내뱉던 작은 웃음소리가 어느새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호탕한 웃음으로 변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떠십니까, 전하. 오매불망 기다리는 전하의 욕정받이가 새 사내의 맛을 알았답니다.
“아이들을 더 풀어라. 저잣거리 곳곳에 아이들을 풀어 그년을 꼭 잡아 오너라. 한 번 나타났으니,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예, 나리!”
이튿날부터 수많은 무사가 수시로 익태의 집안을 들락거렸다. 손마다 긴 장검들을 꿰어찬 험상궂은 무사들이 청조를 찾아 저잣거리와 동네를 샅샅이 살피고 다녔다. 하지만 행인들을 추궁해대는 모양새나 행태는 무사보다는 무뢰배에 가까웠다. 무사들이 익태의 집안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청은 바삐 저자로 달려갔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저잣거리 주막에 도착한 청은 주모를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낄낄거리며 술 한 잔 걸치고 있는 남정네들 사이에서 비음 섞인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청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웃음소리를 따라 후덕한 풍채를 지닌 주모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그곳으로 바로 다가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거 아나? 글쎄 전하께서 요즘은 남색에 빠지셔서 밤마다 어린 내시를 불러다가 그냥 밤새 쑤시고 자시고, 아침이면 그 내시가 걷지도 못하고 업혀 나간다나 뭐라나.”
“아유, 아유 망측해라! 백성들 죽어 나가는 건 살피지도 않고, 사내 후장 맛에 빠져서는! 그런 비역질에나 빠진 놈이 왕입네 떵떵거리고 용상에 앉아 있으니, 아유, 그러니 나라 꼴이 이 모양 아니야!”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저 궁궐 깊은 곳에 아주 호사스러운 아방궁을 만들어 놓고는 아주 주색에 빠져 살았다자녀. 전국 팔도에 있는 그 뭐냐 기적, 그 기적에 올라 있는 기생년들 중, 아방궁에 한 번 안 가본 기생이 없다는 거야. 아방궁 짓고, 기생년들한테 처바르는 그 금전이 다 어디서 나온 거겠어. 그것이 뭐냐 거시기, 우리 같은 백성들이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혀서 바친 것들이지. 그것들로 날마다 궁에 들어앉아 잔치나 벌이고 말이야. 밤낮으로 주색에 빠져서는, 우라질! 이제는 계집질도 모자라 비역질까지 하느라 아주 우리를 쥐어짜지, 짜! 그게 백성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거지, 뭐여!”
“두말하면 뭐해! 입만 아프지. 그 망할 왕이 우리 의경 세자 저하도 잡아먹고 저 용상에 앉은 거 아녀! 응? 의경 세자 저하께서 살아 계셨어 봐, 저 영의정인지 개의정인지가 백성들 고혈을 이리 빨아먹었겠어? 다른 양반들은 또 어떻고! 다 같은 놈들이여, 다 같은 놈들. 아흐, 성질나. 한잔 따라봐!”
듣자 듣자 하니 이 인간들이! 남정네들과 주모가 소리 높여 험담하는 소리에 청의 분노가 들들 끓어올랐다. 볼을 잔뜩 부풀린 청은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들! 네놈들이 감히 뉘를 두고 험담이냐!”
변성기도 제대로 오지 않은 맑고 높은 목소리로 짐짓 힘을 주어 호통을 치자, 술잔을 들이키던 사내가 사레가 들린 듯 컥컥댔다.
“이 어린놈이 실성을 했나! 어디서 감히 소리를 질러, 소리를 지르길! 떽!”
“네놈들이야말로 실성한 것이냐! 감히 지엄하신 전하를 두고 함부로 입들을 놀리다니! 정녕 강상죄로 관아에 끌려가 볼기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느냐!”
“아니, 그래도 이놈이!”
팔을 걷어붙이며 다가오는 험상궂은 남정네의 모습에 청의 어깨가 움찔했다. 허나 곧 바짝 독이 오른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고 눈을 힘껏 부라렸다. 결국, 머리통을 쥐어박힌 청은 맞은 곳을 부여잡고 더욱 사납게 사내를 노려보았다. 억울한 듯 코를 벌름거리며 콧김까지 씩씩 뿜어댔다.
“아니 근데도 요 쥐방울만 한 놈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인데 이리 시끄러운가?”
머리통을 한 대 더 쥐어박으려던 사내는 갑자기 껴든 젊은 양반의 모습에 기가 죽었다. 여기서 저희들이 임금과 양반을 두고 불경한 말들을 지껄인 걸 알면 바로 의금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호통을 치던 아이는 젊은 양반의 등장에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의기양양한 듯 저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리. 송구합니다요.”
혹시나 저 어린놈이 주둥이를 나불댈까 눈치를 살살 보던 남정네들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그들의 모습에 청의 콧대가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소환의 모습이 우세스러워 도운은 코웃음을 쳤다.
“따라오너라.”
“예, 전, 전 아니 나리.”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청이 도운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지만, 도운은 쳐다만 볼뿐 손도 대지 않았다. 도리어 안주로 나온 전을 청에게 밀어주었다.
“전하께서는 술을 아니 좋아하시옵니까?”
“안 좋아한다.”
무 자르듯 대답하는 도운의 모습에 청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한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무엇이 이상하냐?”
“소인은 전하께서 약주를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사옵니다. 주전부리도 늘 저에게 모다 내어 주시니 잡수시는 걸 좋아하지도 않으시고 또, 그, 그 밤일도…… 아니 좋아하시는데, 왜 사람들은 전하께서 주색을 좋아하신다 말하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양물도 없는 어린 네가 남녀 간의 방사에 대해 뭘 아느냐?”
“예? 그것이 아니오라…….”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할 말을 찾는 청에게 도운은 무심한 듯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그런 말을 하더냐?”
“예, 소인이 진정 억울하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전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너무 많사옵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하지만…….”
오는 길에 보고 들었던 말들이 없지 않았으니 청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 주막에 들어서도 저를 보고 비역질에 빠진 한심한 왕이라는 소리를 제일 먼저 들었다. 밤마다 불러들인다는 어린 내시는 아마 청을 말하는 것이겠지. 아직 어린아이가 자신 때문에 그런 더러운 추문이나 듣게 되다니. 청이 역시 저 같은 미친 왕보다 다정했었다는 의경 세자가 훨씬 그리울 터였다. 씁쓸함에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물었다.
“의경 세자가 너를 많이 어여뻐하였느냐?”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전에 소환들이 그러지 않았느냐? 의경 세자가 너를 많이 봐주었다고.”
“예, 승하하신 의경 세자께서 소인의 편의를 많이 봐주셨나이다.”
“어떻게 봐주었느냐?”
“그것이, 소인이 동궁전에 있을 적, 지금보다 훨씬 자주 넘어졌사옵니다. 어지럼증도 심하여 자주 쓰러지곤 하였는데 의경 세자께서 소인에게 탕약도 내려 주시고 강건해지라 보신탕 같은 것도 가끔 하사하시곤 하셨사옵니다.”
듣다 보니 청의 말이 참으로 이상하였다. 마음에 품은 궁녀도 아니고, 기껏 어린 내시 하나가 아프다 하여 탕약에 보신탕까지 하사하였다니. 심지어 의경 세자가 살아 있을 적이면 이 아이 나이 이제 겨우 열두 살, 혹은 열한 살이나 되었을 시기였다. 생각을 하다 보니 더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의경 세자가 살아 계실 적 네가 초를 담당하였다 하였지? 초를 담당하는 것은 상촉의 일이 아니냐? 한데 나이 어린 네가 왜 그 일을 하였느냐?”
“예? 그거야 상촉 나리의 일이지만, 원체 그분께서 일일이 켜시는 것은 아니옵니다. 저희 같은 어린 소환들은 지시가 있으면 그저 따르면 되는 것이옵니다.”
“그래?”
도운은 차근차근 대답하는 어린 청의 말간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너도 의경 세자가 그립겠구나. 나를 보며 의경 세자를 떠올리겠지?”
“예에? 전하와 의경 세자 저하께서 닮지를 않으셨는데, 어찌 전하를 보며 의경 세자 저하를 떠올릴 수 있사옵니까?”
아니라며 입술을 오므리는 아이의 표정을 보자 도운은 헛웃음이 나왔다. 닮지 않았다니, 바보도 속지 않을 거짓이었다. 허나 도운은 아이의 빤한 거짓말이 싫지 않았다.
“닮지 않았다? 모다 귀신이라도 보는 듯 내 얼굴을 바라보는데 닮지 않았다? 맹한 줄만 알았더니 거짓말을 참 잘하는구나.”
“아니옵니다. 참말이옵니다. 전하와 세자 저하의 이목구비는 같사오나, 그래도 전혀 다르시옵니다.”
“어찌 다르냐?”
도운의 하문에 청의 작은 머리통이 갸웃거렸다.
“그것이 모든 게 다르옵니다. 걸음걸이나 용안에 서린 빛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옵니다.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께옵서는 강건하신 전하와는 다르게 얼굴빛이 늘 창백하시고, 자주 두통을 호소하셨사옵니다. 걸음걸이도 가끔 비틀거리는 것이, 호방한 전하와는 다르십니다. 그리고 말투가 딱딱하신 전하와는 달리 늘 다정하게 말씀하셨으나, 가끔 혀가 마비되신 듯 어눌하게 말씀하실 때가 있었사옵니다.”
“그게 사실이냐?”
“예에, 소인이 분명히 기억하옵니다. 그 시절 소인의 얼굴 또한 많이 창백하여, 소인의 얼굴을 보시곤 너의 얼굴이 꼭 내 얼굴마냥 창백하구나 하고 말씀하시곤 하셨사옵니다.”
“너를 보고 내 얼굴마냥 창백하다 그리 말했다? 그렇게 창백하였느냐?”
“예, 전하. 백분을 칠하신 듯, 늘 창백하시었습니다.”
청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운은 이내 익태에 관해 물었다.
“그래, 도승지의 집은 잘 살펴보았느냐? 뭔가 이상한 점이 있더냐?”
“그것이, 잘은 모르겠으나 단오가 지난날부터 집안에 무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옵니다. 그 전에도 간간히 들락거리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떼로 몰려다니며 집안을 들락거립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못 보았고?”
“따로 흩어져 다들 어찌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보통 저잣거리에 나가옵니다. 종이를 들고 다니며 길 가는 여인들과 비교하는 것이 누군가를 찾는 듯 보였사옵니다.”
청조를 찾고 있는 것이겠지. 석 달 안에 데려오지 못하면 목을 치겠다 엄포를 놓았으니, 목숨을 유지하려면 열심히 찾고 있겠지. 허나, 떼로 몰려다니며 저잣거리에 나간단 말이지. 멀리 지방이 아니라 저자에 나간단 말은, 청조가 도성에 있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익태가 어떤 단초를 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청조가 도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손에 식은땀이 고였다.
“청이 네가 직접 그 용모파기에 그려진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 꼭 보거라. 보고 생김이 어찌 생겼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어라 말을 하는지 듣고 와 나에게 소상히 말을 전해야 하느니라.”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다른 이상한 점은 없더냐?”
“이상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게, 도승지 영감께서 기방엘 자주 출입하십니다. 초저녁에 듭시어 그곳에서 아예 밤을 지새우실 때가 종종 있사옵니다. 소인이 인정이 울리기 직전까지 기다려 보았는데, 나오시는 것을 뵙지 못하곤 하였사옵니다.”
“그래? 기방이라. 또 다른 것은 없더냐?”
“예, 그것이 영감께서 출입하신 가택이 하나 있사옵니다. 어마어마하게 으리으리한 기와집인데, 영감뿐만 아니라 영의정 대감께서도 함께 출입하시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누구의 집인 줄 아느냐?”
“그것은…….”
청은 작은 이마를 찡그리며 작은 머리통을 기우뚱거렸다.
“그것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길 가는 이를 붙잡고 물어보니, 누가 사는 가택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는 것이 좀 이상한지라…… 소인이 말씀 올리는 것이긴 한데…….”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청은 주눅이 들어 작게 중얼거렸다. 전하의 특별임무를 받잡고 열심히 뛰었건만, 올리는 말마다 별 볼 일 없는 소식이라 망극하여 몸들 바를 몰랐다.
“그 가택이 누구의 가택인지 소상히 알아보거라.”
“그 가택을 말씀이시옵니까?”
도운의 명에 청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그래, 잘 알아보거라. 네가 기대 이상으로 잘하고 있느니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도운의 칭찬에 헤헤거리던 청은 짐짓 예를 차려가며 바닥에 코를 박고 엎드렸다.
“아무래도 내가 찾는 여인이 도성 내에 있는 것 같네. 멀리 보냈던 이들에게 도성으로 돌아오라 전갈을 보내고, 내일부터는 도성 안을 집중적으로 살피게. 무조건 도승지보다 먼저 찾아야 하네.”
“예, 전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청을 만나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 도운은 내금위장에게 명을 내렸다. 익태에 대한 의심이 싹트는 그 순간, 도운은 내금위장에게 제일 먼저 청조를 찾으라는 명을 비밀리에 내렸었다. 그나마 내금위장을 빼면 주위에 아무도 믿을 만한 자가 없었다. 혹시라도 청조를 찾지 못할까 마음이 조급했다.
궁으로 돌아온 다음 날, 도운은 눈을 감고 청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부터 끈적끈적하게 올라오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터라 갑갑했다. 청의 창백한 얼굴이 꼭 저를 닮았다고 말했다는 형님의 말씀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백지마냥 창백한 얼굴에 자주 넘어지는 청, 그리고 그 모든 게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닮아 있다는 형님의 말씀.
희미하지만 그의 창백했던 얼굴이 기억났다. 하지만 형님이 자주 넘어졌다는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릴 때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은 거의 유폐되다 싶은 생활을 하였기에 형님과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제가 어찌 태어났는지, 태어난 날 낮에 있었던 일식에 관해서는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즈음 밤하늘에 떠 있었다던 불길한 징조에 대해서 유모가 수차례 설명을 해 줬었다.
또한, 자신이 형님의 운명을 도둑질하고 있다고도 수차례 설명해 주었다. 형님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신의 존재를 속이기 위해 복면을 하고, 귀도가 지나고 있는 산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것이라 설명도 해 주었다. 허나 그저 그리 알고만 있었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형님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왜 이제껏 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모다 형님을 죽인 자신의 죄를 질책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잡아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도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대비전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왕의 방문에 대비전이 소란스러웠다. 자신의 일가를 몰락시킨 원망스런 아들이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반가운 것이 어미의 마음이었다.
“주상께서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평생을 아니 발걸음하실 것처럼 가시더니, 이 어미를 다 찾아주시고.”
원망스러운 듯 말을 하지만 궁녀를 시켜 얼른 다과상을 차려오라 명하는 모후의 얼굴에 그리움이 한 자락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도운은 그 그리움이 온전히 저를 향한 그리움이 맞는 것일까 생각하다 생각을 멈추었다. 갑자기 지겨워졌다. 모후의 의중을 의심하는 것도, 의경 세자와 저를 저울질하는 것도 모다 지겨워졌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들렀사옵니다.”
“무엇입니까?”
무엇인지 아직 저의 마음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선뜻 말을 못 하는 도운에게 대비가 다과를 권했다.
“주상, 좀 드시지요. 대비전 생과방 나인들의 솜씨가 제법 야무집니다. 마침 주상이 좋아하는 다과를 만들어 두었지 뭡니까. 달달한 것이 입에 잘 맞으실 것입니다.”
도운은 앞에 놓인 다과를 바라보았다. 만두과, 매작과, 모약과 등 의경 세자가 생전 좋아했다던 유밀과(油蜜菓)가 종류별로 가득 담긴 백자 접시 옆에 수정과가 함께 놓여 있었다. 자신은 어릴 적부터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극적인 계피 향도 좋아하지 않았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유밀과보다 청조가 만들어 주던 고소한 다식이 더 좋았다. 향이 강한 수정과보다 청조가 만들어 주던 상쾌한 식혜가 더 좋았다.
하지만 의경 세자가 좋아하던 유밀과는 어느새 자신이 좋아하는 유밀과가 되어 있었다. 그가 즐겼다던 수정과는 어느덧 자신이 즐기는 수정과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먹어 봤자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지만, 손도 대기 싫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다 지겹다 생각했는데. 자신에게서 의경 세자를 찾아대는 인간들에게 또다시 신물이 넘어왔다.
“의경 세자 말이옵니다. 어릴 적 자주 넘어지곤 하였습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갑자기 궁금해졌사옵니다.”
“예, 영이 그 아이가 자주 넘어지곤 하였지요.”
죽은 아들이 생각나는지 대비의 눈가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소자가 의경 세자의 생명을 갉아먹었다는 말이, 의경 세자가 자주 넘어지는 것과 관계가 있사옵니까?”
“예, 영이 그 아이가 자주 넘어지기도 하였지만 늘 창백하고, 어지럼증이 심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주상의 얼굴에서는 늘 빛이 났지요. 세자의 정기를 모다 흡수해서 그런 것이라, 관상감에서 전하께 말씀을 올렸습니다. 의경 세자와 주상의 관상이 같은 것은 하나의 운명을 둘로 쪼갠 것과 다름없다 하였어요. 해서 쪼개진 운명이 하나가 되기 위해 주상이 세자의 운과 정기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 세자를 살리기 위해 둘을 떼어 놓아야 한다 말했습니다.”
말을 하며 대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관상감에서 말이옵니까?”
“예, 그래서 그 당시 관상감에서 부제조의 직책을 맡고 있던 영의정의 집으로 주상을 보낸 것입니다. 그 후, 세자의 상태가 호전되는 듯싶었으나, 어느 날 세자의 다리가 마비되어 걷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주상을 삼각산에 보낸 것입니다. 세자를 살리기 위해. 허나,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미 우리 영이는 죽었는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도운을 바라보던 대비가 자애로운 목소리를 냈다.
“주상.”
“…….”
“그러니 주상께서 잘하셔야 합니다. 주상은 어찌 되었든 성군의 자질을 지닌 형님의 생명을 갉아먹고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십니다. 형님을 죽인 패륜을 저지르고 왕위에 올랐으니, 이것은 반정이나 다름이 없어요. 주상이 탄생하던 날, 자미를 잡아 삼킬 듯 붉게 타오르던 객성이 이미 그러한 주상의 죄를 예고하였지요. 많은 이들의 거센 주청에도 승하하신 선대왕께서는 주상을 살리려 노력하셨습니다. 그러한 부왕의 노력과 주상을 향한 부정을 항시 잊으시면 아니 되십니다.”
피식, 도운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물레방아 돌리듯 돌고 도는 이야기였다. 반정, 패륜, 죄인! 자신을 대하는 모든 이들의 시선과 생각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저를 끔찍한 죄인으로 몰다가도, 유밀과를 들이대며 저에게서 의경 세자를 찾아댔다. 진정으로 지겨웠다.
“그때, 복면을 만들었다던 성수청 무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하늘의 뜻을 잘못 읽은 무당년을 족치려 함이지요. 누가 왕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지 점괘 하나 제대로 못 읽는 그런 선무당이, 감히 그 세 치 혀로 조정을 농락하였지 않습니까? 흥, 패륜이고 반정이라. 자식에게 패륜과 반정을 논하시는 것이 부정이고 대비마마의 모정이시옵니까?”
“주상, 왜 이러십니까? 어찌 그런 경박한 언동으로 이 어미를 욕보이시는 것이오? 정신을 좀 차리세요. 정신을! 밖에 나가 보십시오. 수많은 백성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올바른 왕이 바로 서질 못하고 껍데기만 왕인 자가 왕위에 올라서니, 백성들의 삶이 억울한 것이 아니요!”
“그럼 그때 소자를 그냥 죽이시지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죽으라고 산에 내다 버린 놈, 그냥 단칼에 편히 죽이시지 그러셨습니까! 다 알면서도 소자를 죽이지 않은 선대왕과 대비마마야말로 역심을 품은 것이지 않고 무엇이옵니까!”
“주상…….”
분노하여 소리치는 도운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경악에 찬 대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도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스로 장지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알 수 없는 벽으로 주변이 둘러진 듯하였다. 아무도 믿을 자가 없는 이 넓은 궁에 홀로 고립된 도운의 마음이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청조야, 청조야…… 대체 지금 어디에…….”
나지막이 속삭이던 도운은 궁궐 깊은 곳, 연못가를 향해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 * *
용마봉에 다녀온 이후 어딘가 모르게 맥이 빠진 청조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도성으로 들어올 적 느꼈던 예감이 틀렸다는 것을 안 순간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이 덮쳐왔다. 하지만 자신이 이리 누워 있는 순간에도 서방님께서 도움을 필요로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청조는 억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며칠 사이 살이 내린 여인의 얼굴을 보는 재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괜찮은가? 얼굴이 아직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더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우선합니다. 이리 누워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기방 아씨들에게 물어 다른 정보를 듣거든 바로 떠나렵니다.”
“내가!”
재환은 청조의 마른 어깨를 격하게 부여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도와준다 하지 않았는가? 좀 더 이곳에 있게.”
“아닙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리께서는 하셔야 할 크고 중요한 일이 있으신데, 제가 염치없게 기대려 하였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아니, 내 꼭 찾아줄 것이네. 그러니 혼자 떠날 생각 말게. 그건 절대, 절대 아니 되네.”
청조는 저를 붙잡는 확신에 찬 재환의 말이 고마웠다. 두 해가 넘도록 전국을 떠돌아다녔지만 저를 위해 서방님을 찾아준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꼭 찾아 줄 거라는 확신이 가득 찬 말에 마음이 무너지고 기대고만 싶어졌다. 그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러시지 마십시오.”
“내 말대로 하게. 만약 자네가 떠난다면 그때는 나도 함께 떠날 것이네.”
“......”
“내 아는 이에게 부탁하여 자네가 머물 자리를 알아보고 있으니, 그때가 되면 이 기방에서도 나오게.”
“그리하지 마십시오. 나으리, 나으리.”
청조는 할 말만 하고 뒤돌아 버린 재환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렸다.
꼭 찾을 것이다. 꼭 찾아 서방의 실체를 직접 확인시켜 줄 것이다. 지어미를 버린 파렴치한 사내의 본질을 꼭 확인시켜 줄 것이다. 확인을 시켜 주고 나서, 그리고 나면…… 그리고 나면, 재환은 그 말만 계속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잠시 길을 멈추고 어지러운 마음을 갈무리한 재환은 친우를 만나기 위해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길을 나섰다. 궐 안 깊은 곳에 유폐되어 있는 누이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친우였다.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가던 재환은 골목 어귀를 도는 순간 검을 찬 무리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손에 든 종이를 재환의 앞으로 내밀었다. 혹 자신을 알아본 것일 수도 있었다. 슬며시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이 옮겨가려는 순간, 종이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에 재환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여인 본 적 있나?”
“글쎄, 본 적 없소.”
“정말이야? 며칠 전 이 여인과 저잣거리를 지나지 않았나? 그때 이 여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내와 인상착의가 비슷한데?”
“못 봤다 하지 않소! 내 갈 길이 바쁘니 이만 물러나시오!”
무사들 사이를 밀치고 지나치는 재환의 심장이 쿵쿵 울렸다. 청조였다. 그림의 여인은 분명 청조가 맞았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봤다는 걸로 봐서, 며칠 전 용마산에 다녀오던 길에 여인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두 해 전, 우연히 여인을 구해 주었던 일이 떠올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청조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분명 이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삿갓을 다시 깊게 누른 재환은 발걸음을 빨리하였지만, 은밀하게 저를 쫓는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는 자신의 신분은 물론이거니와 청조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재환은 계속 걸음을 옮기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였다.
마을을 벗어나 으슥한 산길에 이르자 재환은 작정을 한 듯 뒤를 돌아섰다. 다섯이서 무리를 지어 따르던 사내들은 어느 순간부터 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버젓이 자신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멈춘 재환이 뒤를 돌아서자,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거, 이거, 확실히 이상하구만. 여인을 모른다면서, 우리를 이런 으슥한 곳까지 유인한 이유가 뭐냔 말이지. 정녕 여인을 모르는 것이 맞아?”
“그 여인을 왜 찾는가?”
“그건 말해 줄 수 없고. 어서 그년이 있는 곳이나 말해.”
그년이라…… 재환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에 손을 둘렀다.
“뭐야? 지금 해 보겠다는 것이여? 괜히 힘 빼지 말고 순순히 부는 것이 좋을 것을, 허억.”
전광석화처럼 공격해 들어오는 재환의 검 놀림에 무사들은 긴장하며 칼을 빼 들었다. 챙! 챙! 서로를 견제하며 칼과 칼이 부딪쳤다. 재환이 위를 찌르면 그들은 아래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러면 재환은 아래를 막고 다시 옆을 찔렀다. 재환은 다섯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수를 펼쳤다. 재환의 춤을 추는 듯 유려한 검술에 무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협공을 시작했다.
재환은 저를 향해 휘두르는 사내의 검을 가볍게 피하고, 상대를 잡아 방패막이로 삼아 나머지 사내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동료가 방패막이가 되었어도, 사내들의 공격은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결국, 방패로 삼았던 이가 죽어 버리자 다시 불꽃 튀는 칼부림이 시작됐다. 하나, 둘, 신들린 것만 같은 재환의 검술에 상대가 하나씩 죽어 나갔다.
네 번째 무사의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한 번에 깊게 베어 버리자, 죽어 가는 이의 몸에서 튄 피가 재환의 도복에 긴 핏물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어느 것이 상대의 피고, 어느 것이 자신의 핏자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재환 역시 많은 상처를 입었다. 힘겹게 상대하던 무사가 쓰러지자 재환은 바닥에 칼을 꼽고 몸을 지탱했다.
저녁노을을 뒤로하고 선 재환은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꽉 누르며 숨을 헐떡였다. 긴 혈전 끝에 이제 마지막 한 놈이 남았다. 상처를 입고 피를 뚝뚝 흘리는 상대에게서도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말을 해라. 네놈들이 도대체 누구기에 그 여인을 찾는 것이냐?”
“알고 싶거든 그년이 어디 있는지부터 말을 해라.”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내가 마침내 서로를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둘 다 남은 힘을 쥐어짜 마지막 일격에 실었다. 재환은 한 팔을 내어 주고 상대의 가슴에 정확하게 검을 꽂았다. 드디어 마지막 상대가 쓰러지자, 기운이 다한 재환은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검에 베인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손가락을 타고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 꼴을 보면 청조가 또 놀라겠지. 하하,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재환은 바보 같은 놈이라 스스로를 비웃었다. 분명 여인은 이런 저를 두고 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재환은 또다시 여인의 간호를 받을 수 있는 사실에 들뜬 자신의 바보 같은 모습을 마음껏 비웃었다. 어둠이 몰려오는 시각, 재환은 겨우 몸을 일으켜 마지막 혈전을 벌인 상대의 가슴에서 힘겹게 검을 뽑았다.
계곡 사이로 바람이 새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쉬지 않고 나왔다. 핏물이 한 방울씩 뚝뚝 흘러 땅에 흔적을 남기자 재환은 옷을 찢어 대충 상처를 동여맸다. 눈앞이 빙글거리고 입술은 바짝 말라오면서도, 청조의 해사한 얼굴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여인을 지켜야 한다. 청조에게 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혹시라도 보는 눈이 있을까 주위를 살피며 긴 길을 돌아와 겨우 기방의 담을 넘었다.
담에서 털썩 떨어지는 재환을 발견한 청조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놀라 뛰어와 저를 부르는 여인의 울먹이는 얼굴이 너무 어여뻤다. 여인은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걱정하며, 자신만을 부르고 있었다. 재환은 겨우 손을 들어 청조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고는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