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10화 (10/25)

10. 푸를 청, 靑

재환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새로운 날이 밝아 있었다. 주위를 살피니 어제의 여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꿈을 꾼 것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이것이 꿈이 아님을 깨달았다. 부스럭 소리에 아래를 살펴보니, 가득 긁어모은 마른 낙엽 위에 얇은 면포 한 장을 깔아 만든 침상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필시 여인이 자신을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주위에는 여인의 짐으로 보이는 봇짐꾸러미들이 보였다. 바로 근처에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니 여인이 자리를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였다. ‘끄응’ 소리를 내며 겨우 몸을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털배자가 툭 떨어졌다.

“일어나셨습니까?”

마른 나뭇가지를 가득 안은 여인이 저를 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이리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이제야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때 여인을 구해 준 후, 단아하고도 고단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이틀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셔서 걱정이 크던 차였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우선하네. 도와주어 고맙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서 제가 더 감읍합니다.”

마른 나뭇가지 한 묶음을 내려놓은 여인이 거리낌 없이 다가와 흘러내린 배자를 여며 주며 배시시 웃었다. 재환은 돌아서서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더 얹는 여인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추우시진 않으십니까? 요 근래, 날이 꽤 추워 고뿔 드실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움막에라도 뫼시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찬 이슬을 맞게 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이리 부상까지 당하셨으니 더욱 섭생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인데.”

“괘념치 말게. 이리 구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네.”

“여기, 따듯한 물 좀 드시지요.”

재환이 몸을 일으키도록 부축한 청조는 서둘러 사발에 담긴 따뜻한 물을 숟가락으로 떠 주었다. 이어 물을 다 받아먹은 재환의 입가를 깨끗한 영견으로 닦아 준 후, 다시 자리에 눕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봇짐에서 보리 한 움큼을 꺼내어 작은 쇠 냄비에 담아 금세 죽을 끓였다.

청조는 끓인 죽을 다 받아먹고 다시 자리에 누운 재환의 환부를 깨끗이 닦고, 봇짐에서 백반가루를 꺼내어 상처 부위에 솔솔 뿌리고는 깨끗한 면포를 둘러 주었다.

“다행히 상처가 곪지 않고 잘 아무는 듯합니다. 날씨가 추운 것이 고생스럽습니다만, 대신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노숙을 자주 하는가? 백반가루나, 불을 피우고 요기까지 만드는 것이, 꽤 익숙해 보이네.”

“예, 사정이 있어 그러합니다.”

“혹여, 행상을 하는 건가? 여인 혼자의 몸으로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행상을 하는 것은 아니 옵니다만, 말씀대로 가끔 위험하기는 합니다. 그 위험에서 나리께서 한번은 구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근근이 다니고 있습니다.”

“그때 한양에 친정이 있다 하였지. 그럼, 이곳에 시댁이 있는 것인가? 시댁에서 친정을 왕래하며 지내는 것인가?”

“그것이…….”

대답하기 곤란해 보이는 청조의 표정에 재환은 질문을 멈추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종사관 시절 몸에 밴 습관대로 저를 구해 준 여인을 추궁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사정이 있을 것인데. 내가 추궁하듯 하였네. 괘념치 말게.”

“아닙니다. 사실 저의 친정이 있는 곳은 이곳 화성입니다.”

“그런가?”

“예, 행방불명된 소인의 서방을 찾고자 이곳저곳을 떠돌다 잠시 화성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서방이 행방불명되었다? 허면 관아에 가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예, 허나 사정이 있어 관아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소인의 목숨을 구해 주신 고마운 분이시지만, 사정을 다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재환은 조신하게 눈을 내리까는 여인의 모습에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사정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저 역시 매한가지였다. 걱정되는 얼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지켜 주어야 할 이, 밝혀내야 할 진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자 눈을 감았다.

여러 날이 지나고 마침내 재환은 겨우 운신을 할 수 있었다. 아직 허벅지에 입은 자상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청조가 구해 온 튼실한 나뭇가지를 짚고 천천히 움직일 수 있었다. 지난했던 꽃샘추위가 지나자마자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곧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청조는 봇짐을 바지런히 정리했다.

“그간 잘 입었네.”

짐을 정리하는 청조에게 재환은 입고 있던 털배자를 건네주었다. 털배자를 건네받은 청조는 아련한 눈으로 옷을 쓰다듬더니 곱게 접어 꾸러미 안에 넣었다.

“이제 어디로 가려 하는가?”

“도성 쪽으로 가려 합니다.”

“도성이라.”

청조는 정리된 봇짐 하나를 등에 이고, 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꼭 그러안았다.

“나리께서는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화성으로 가신다면 소인이 마을 입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재환은 걱정스럽게 저를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성이라. 저 역시 돌아가야 했다. 아직 도성에 남아 있는 제 누이를 위해 돌아가야 했다. 가서 모든 것을 되돌려야 했다. 목적지가 같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여인과 함께하고픈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허나 여인과의 동행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몰랐다. 자신 때문에 저 착한 여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나도 도성으로 가야 하네.”

“그러십니까? 잘되었습니다. 아직 상처도 다 회복하지 않으시어 걱정이었는데,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인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먼저 나와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순박한 여인은 잘되었다며 뽀얀 미소를 지었다. 재환은 괜히 죄의식이 들어 여인의 보퉁이로 손을 뻗었다.

“내가 들 테니 이리 주게.”

“아닙니다. 무겁지 않습니다. 아직 운신하시기에 편치 않으실 테니, 괘념치 마십시오.”

사내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지만, 청조의 말이 사실인지라 재환은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 걷기 시작했다. 옆에 바짝 붙어선 청조가 절뚝거리는 재환의 팔을 잡고 부축을 해 줬다.

“괜찮네. 짐도 무거울 테니 내 걱정은 말게.”

“나리가 빨리 걷지 않으시면, 도성에 늦게 도착할까 부러 그러는 것이니 마다하지 마십시오.”

뽀얗게 웃으며 농을 하는 청조의 고집에 못 이겨, 재환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앞을 향해 걸었다. 도성까지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 * *

사방을 둘러싼 횃불의 사나운 일렁거림이 도운의 차가운 얼굴에 역동적인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들의 얼굴에 비친 어두운 일렁거림을 바라보는 대비의 마음 또한 저 횃불처럼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일렁거렸다. 대전 앞, 차가운 박석 위에 거적을 깔고 흰 소복 차림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도운은 아랫것들을 시켜 따뜻한 차를 내놓았다.

“아직은 날이 꽤 춥사옵니다. 따뜻한 차라도 드시지요.”

인간미가 쭉 빠진 도운의 모습에 대비는 두려움을 느꼈다.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이지만 당최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얼굴 생김새만 같을 뿐 의경 세자와는 그 내면이 너무 달랐다. 석고대죄의 뜻을 모를 리가 없건만, 저에게 차를 들이미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전혀 그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주상, 정녕 이 어미와 혜빈을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버리다니요?”

“제 일가를 그리 처참히 박살을 내시고도 아니라고 하십니까? 지금도 의금부에서 날아오는 억울한 이들의 피비린내와 살타는 냄새로 궁 안이 이리 매캐합니다. 억울한 이들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이 주상에겐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 어미가 이런 몰골로 주상의 앞에서 빌고 있어요. 영의정을 찍어내고 외척을 몰아내려는 음해이고 음모입니다. 외척을 모다 몰아내고 주상이 얻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을 얻고자 함이냐고? 흥, 도운은 대비의 뻔뻔한 얼굴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음모가 아니라 역모였습니다. 대비마마와 혜빈마마의 가문이 저 목멱산 깊은 곳에 자신들만의 은신처를 마련하고는 역모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대장간까지 차려놓고, 저를 찔러 죽일 창과 칼의 날을 갈고 있던 놈들이옵니다. 그런 놈들의 수장이었던 영의정의 여식이 바로 혜빈마마이고 대비마마의 가문입니다! 생각을 해 보시옵소서. 소자가 무엇을 얻고자 함이겠습니까? 제 목숨을 얻고, 왕위를 지키고자 함이겠지요!”

“그것이 아니오! 모두 외척을 배척하려는 저들의 음모임을 왜 모르십니까? 주상의 외가입니다. 주상을 낳은 저의 가문이에요. 주상에게 칼을 들이밀다니요.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이 어디 있답니까? 제발 눈을 뜨세요, 주상!”

“저를 낳은 대비마마조차 소자가 죽길 바라셨는데, 외가라고 다르겠습니까? 제 눈은 똑바로 뜨여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도운의 차가운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났다. 아들의 위험한 눈빛에 대비는 주상의 옆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도승지를 노려보았다. 이제 겨우 스물 중반이 된 이였다. 저 어린 나이에 도승지라는 파격적인 승차를 한 젊은 관료의 얼굴엔 그야말로 사욕이 가득하였다.

“아니요, 주상은 지금 저 사특한 무리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유폐한 혜빈을 풀어주시고, 당장 치국을 멈추세요! 언제까지 혜빈을 저리 전각에 유폐할 작정이십니까? 그리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왜 아니 된다 하십니까? 저를 빼내 달라 혜빈마마께서 몰래 전갈이라도 보내더이까?”

“그것이 아닙니다. 왜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누구보다도 억울한 혜빈입니다. 가엽지도 않으십니까? 이번 일로 가족을 모다 잃었습니다. 저리 유폐되어 하나 남은 어린 군주마저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입니다. 주상, 부탁드립니다. 이 어미를 봐서라도, 군주만이라도 혜빈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윤허해 주세요. 아직 어린 군주입니다. 어미의 품이 얼마나 그립겠습니까?”

“소자가 왜 그래야 합니까?”

“주상.”

여전히 차갑게 빛나는 아들의 눈빛에 대비는 말을 잃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저를 대비마마라 칭하는 아들에게선 어미를 향한 효심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효심은 고사하고 어떠한 인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죽으라고 산에 갖다 버린 것도 아닌데, 어린 군주가 무엇이 걱정입니까? 보모들이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주상, 의경 세자의 안사람이었고, 의경 세자의 군주입니다. 의경 세자를 생각…….”

“의경 세자의 사람이지, 제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이를 가는 도운의 눈에서 독물이 뚝뚝 흐를 것만 같았다. 불빛에 일렁거리는 그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죽어 버린 의경 세자의 안사람이라는 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저에겐 그저 원수의 여식일 뿐이옵니다.”

“주상,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주상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제 아들입니다. 주상만 아니었다면, 주상!”

파삭. 대비에게 마시라 가져다주었던 찻잔이 도운의 손에 잡혀 힘없이 부서져 버렸다. 손안에서 부서진 사금파리가 손바닥을 깊게 찌르자, 흘러나온 핏물이 사금파리를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주상, 주상! 괜찮으십니까? 여봐라!”

“나 때문에 죽어요? 아직도 내가 그놈의 명을 갉아먹었다 질책하시고 계십니까? 돌아가신 선왕께서도, 대비마마께서도 착각들을 참 잘하십니다. 그놈이 뒈진 이유는 소자 때문이 아니지요. 당신들이 죽인 것입니다. 당신들이 내 자리를 빼앗고 주제도 안 되는 그런 팔푼이를 내 자리에 앉혀 놓으니, 저에게 자리를 돌려주고자 하늘이 알아서 데려간 거지요.”

“주상…… 어찌, 그런 불경한…….”

“그러니 더 이상 의경 세자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더불어 혜빈의 이야기도, 저 역당들에 대한 변명도 하지 마십시오.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땐 정말 다 죽여 버릴 것입니다. 유배 보낼 것들을 포함하여, 대비마마의 일가를 하나하나 이 손으로 직접 다 베어 버릴 것입니다! 대비마마의 원대로 전각에 갇힌 혜빈을 밖으로 끌어내어! 마마와 혜빈이 보는 앞에서 직접 다 베어 버릴 것이란 말씀입니다. 못 믿겠으면 한번 해 보시지요!”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대비의 모습을 무섭게 응시하던 도운은 벌떡 일어섰다.

“그나마 지난날 혜빈을 지켜 달라던 대비마마와의 약조가 있기에 한 번은 봐준 것이옵니다. 혜빈을 폐서인하지 않고 그리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으면 이제 그만 처소로 돌아가시지요. 추태 부리는 꼴을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습니다!”

야멸차게 돌아서는 아들의 뒷모습에 대비가 가슴을 움켜쥐고 밭은 숨을 내쉬다 거적 위로 쓰러졌다. ‘마마, 마마!’, 달려들어 부축하던 궁녀들이 어서 의관을 부르라며 급히 대비를 부액하여 등에 업었다. 젊은 나인의 등에 업힌 대비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전하, 무섭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저 사내는 대체 무엇입니까? 제 아들이 맞습니까? 어찌 한배에서 한 시에 나온 아이가 저리 다를 수가 있습니까? 꺽꺽,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몰아쉬며, 대비는 이미 승하하신 지아비를 찾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의경 세자와는 너무도 다른 아들의 모습이 너무 두려워 숨이 막혀왔다.

어두운 밤, 대전을 벗어난 도운은 깊고 깊은 후원으로 들어갔다. 베인 손에서 흐르던 핏물은 밤바람에 말라가고 있었다. 상처 입은 손을 치료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왕의 모습에, 멀리서 뒤따르던 내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궁궐 깊은 곳으로 끝없이 들어간 도운은 독기 가득한 눈동자로 비척비척거리며 연못가를 걸었다.

먼 옛날 선대왕 중 한 분께서 그의 왕후를 지극히 사모하시어 만들었다는 깊은 후원에 있는 비밀연못이었다. 도운은 오늘처럼 가슴속 구멍이 커지는 날이면 꼭 이곳에 나왔다. 연못가를 따라 걷고 있으면 수면에 비춰진 검은 사내가 늘 저를 비웃으며 따라왔다. 오래전 어느 순간부터 저를 조그맣게 비웃기 시작한 검은 사내는 이제 입까지 찢어지게 벌리며 저를 비웃고 있었다.

건방진 놈. 도운은 킬킬대며 저를 쫓는 사내를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날카롭게 견제하며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연못에라도 빠질 듯 늘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였다. 왕의 위태로운 걸음을 멀리서 바라보는 내금위장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왕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으나, 왕 자신으로부터 그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흑흑, 흑흑’ 깊은 후원 연못가 어디선가부터 울리는 귀신 울음소리에 도운은 고개를 들었다. 곡성을 따라가 보니 마른 수풀 사이에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푸른 의관의 작은 체구가 보였다. 서럽게 흐느껴대는 몸짓을 따라 둥그런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네 이놈! 뭐하는 짓이냐? 전하께서 거동하시는 것도 모르고, 이리 흉측한 몰골로 예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거라!”

히잇! 정적을 가르는 호통 소리에 몸을 뒤집은 소환은 곧 도운을 발견하곤 놀란 마음에 딸꾹질을 시작했다.

“저, 저, 저, 전하, 히끅.”

“어허, 뭐하느냐? 어서 예를 갖추거라.”

이어지는 상선의 호통에도 소환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허나 곧 정신이 돌아왔다. 화들짝 놀란 소환은 바닥을 구르고 있던 관모를 서둘러 머리에 쓰고 벌떡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저, 저,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죽여 달라? 그래, 어떻게 죽여줄까?”

“히끅, 저, 저, 전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오나, 히끅, 목숨만은 살려 주시옵소서.”

“죽여 달라더니, 이번엔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냐?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을 참 쉽게도 하는구나. 어찌할까? 죽이랴, 살리랴?”

“저, 저, 전하, 히끅, 소인은, 양물이 없어, 히끅, 온전한 사내가 아니옵니다. 허니, 살려 주시옵소서!”

우스운 놈이었다. 우습고 배알도 없는 놈이 제 양물이 없다며 ‘히끅’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떠는 소환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도운의 눈가에 가득 고였던 독기가 조금 사라졌다.

“양물 없는 것이 자랑이냐? 당당하게도 말하는구나.”

“자, 자, 자랑이 아니오라. 그저, 소인은 온전한 사내가 아니니, 한 입으로 두말을 하여도 아량을 베풀어 주십사 청하는 것이옵니다.”

“그만하거라. 뉘 앞이라고 가당치도 않은 말장난이냐! 전하, 송구하옵니다. 아랫것의 잘못은 윗전의 책임,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상선의 변명에도 도운의 눈은 소환에게 깊게 꽂혀 있었다. 어둠 속이라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청조를 떠오르게 하는 아이였다. 키가 비슷한 듯싶었다. 아니, 살짝 치켜 올라간 저 눈꼬리가 닮은 것도 같았다. 아니, 아니다. 이런 곳에서 몰래 숨어 우는 모습이 닮았다. 반빗간에 들어 혼자 눈물을 흘리던 여인의 모습이 생각나 버렸다.

“왜 울고 있었느냐?”

“예?”

“왜 울고 있었느냐 물었다.”

“그것이…….”

연유를 말하기 전부터 어린 소환의 콧구멍이 서러움으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고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

입술을 앙다물고 코만 벌렁거리는 소환의 모습에 상선이 도운의 눈치를 보며 통박을 주었다.

“그것이…… 다른 소환들이 저를 미워하고 따돌립니다.”

“너를 따돌린다고?”

“예, 그러하옵니다.”

억울한 듯 울먹거리던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자, 그 망극한 모습에 상선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였다.

“왜 너를 따돌리느냐?”

“소인이, 소인이 멍청하다고 그러하옵니다.”

“네가 멍청하냐?”

“예에…….”

소리 죽여 자신이 멍청하다 대답하는 어린 소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너를 어찌 따돌리느냐?”

“소인이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척을 하옵니다. 소인이 분명 여기 있사온데, 밥상에 제 밥그릇만 없습니다. 소인의 이부자리만 없사옵니다. 소인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아무도 들리지 않는 듯 대답하지 않사옵니다.”

도운은 울먹거리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했다.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동정이라는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려 하였다. 하지만 도운은 곧 아이가 아니라 저 자신을 동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이의 모습이 처음에는 청조 같더니 이제는 저 자신 같았다. 이 궁에서 너만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자신을 보는 사람도 없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청이라 하옵니다.”

“청?”

청조를 생각나게 하고 저를 닮은 아이의 이름은 또 하필 청이었다.

“혹, 맑다는 뜻이냐?”

“아니옵니다. 푸르다는 뜻이옵니다. 소인의 어미가 꾼 태몽에 푸른 뱀이 나왔다 하여, 청이옵니다.”

“푸른 뱀?”

“예, 소인의 어미가 푸른 뱀이 하 신기하다 생각하시어 고을의 동임에게 글을 얻어 소인의 이름을 청이라 지었습니다. 허나 이제 와 그것이 사내가 양물을 자르고 푸른 내시복을 입을 팔자를 말하는 것이었다며 아직도 슬피 우신다고 하옵니다.”

훌쩍거리며 묻지 않은 것까지 조잘조잘 나불대는 소환의 눈치 없음에 상선의 마음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분이시라, 늘 두려운 분이시다. 그런 분을 앞에 두고 조잘거리는 저 어린 내시를 어찌해야 할지 상선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저리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모습으로 소환을 바라보는 모습에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실컷 울다 가거라.”

가슴을 졸이던 상선의 걱정이 무색하게, 말없이 소환을 내려다보던 도운은 한마디만 남긴 채 침전으로 향하였다.

* * *

며칠 뒤, 추국장에 들린 도운은 거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죄인들의 처참한 모습을 건조하게 바라보았다. 머리가 깨지고, 살이 짓무르고, 뼈가 으스러진 이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겨우 앉아 있었다. 그중, 혜빈의 아버지인 영의정만이 대쪽 같은 모습으로 담담하게 도운을 마주 보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전하, 신 영의정 충신의 마음으로 간언 드리옵니다. 사특한 무리들의 세 치 혀를 잘라 내시고 임금의 도리를 다하여 백성들을 살피시는 올바른 군주가 되어 주시옵소서.”

“올바른 군주라. 그래서 역모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더냐? 과인이 네가 그리워하는 의경 세자처럼 올바른 군주가 못 될 듯싶어서?”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의경 세자께서는 이미 승하하신 분, 그분과 전하를 어찌 함부로 비교하겠사옵니까. 신, 그저 전하를 도와 전하의 치세가 반석 위에 올바르게 서기를 학수고대하였나이다. 역모라니요. 꿈에서조차 불경한 그 일을 신이 어찌 꾸밀수 있겠사옵니까?”

“이미 네가 목멱산에 숨겨 키우던 사병들의 무리가 다 발각이 났느니라. 또한, 이 일에 연루된 죄인들이 그들의 죄를 다 실토했다. 그런 주제에 주저리주저리 말은 번드르르하구나.”

“전하! 그것은…….”

“시끄럽다! 네가 자백을 아니 하여도 상관없다. 도승지는 들으라.”

“예, 전하.”

도승지를 부르는 말에 익태가 바로 다가와 조용히 읍하고는 영의정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이빨, 손톱, 그리고 발톱까지 모다 빠진 늙은 호랑이. 세력 싸움에서 진 늙은 호랑이를 측은히 바라보던 익태의 눈에 비웃음이 담뿍 담겨 있었다.

“추국을 끝내고, 죄인들에 대한 마땅한 형벌을 의논하여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예, 전하.”

도운은 영의정을 내심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명을 한 뒤 돌아섰다. 저를 바라보는 영의정의 곧은 눈빛에 슬슬 역정이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기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도운 저 자신도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음모라는 사실을 자신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저를 죽이려 역모를 꾸미든, 억울하게 음모에 빠져 비참한 모습으로 저리 앉아 있든 관심 없었다.

모다 상관없었다. 저에게서 의경 세자를 찾아대는 이들을, 저를 이토록 망가뜨린 이들을 새카만 어둠으로 끌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저만 올곧단 저 눈빛 따위, 저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건방진 눈빛 따위, 모다 절망으로 바꾸어 버릴 수만 있다면.

추국장에서 돌아오던 도운은 어린 내시 하나가 물이 가득 든 물지게를 메고 뒤뚱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뒤뚱거리는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싶더니, 금세 헛발을 내디딘 아이가 바닥에 철버덕 넘어지고는 물을 옴팡지게 뒤집어썼다. 넘어진 아이가 바닥에서 버둥거리자, 아이의 몸 위로 엎어진 물통에 그나마 남아 있던 물들까지 쏟아졌다.

‘아푸푸푸’, 버둥거리던 아이가 물이 쏟아지는 물통을 안고 버둥거리며 입속으로 들어간 물을 뱉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표정한 도운의 얼굴에서 ‘풉’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스며져 나왔으나 아무도 듣지 못하였다. 도운 자신조차도 웃음소리가 나왔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청이란 그 아이가 아니냐?”

“예, 전하. 청이 그 아이가 맞사옵니다.”

“저 아이가 자신을 가리켜 멍청이라 칭하더니, 왜 그러한지 알겠다.”

왕의 부드러운 말투에 당황한 상선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저 아이를 데려오라.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왕의 명에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던 상선은 겨우 대답을 하고 사라졌다.

강녕전에 들어앉은 도운은 눈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소환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왜 이 아이를 데려오라 일렀는지는 자신이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부르고, 찬물을 뒤집어쓴 몸이 추워 보이기에 따뜻한 차를 가져다줘라 일렀다.

“마시거라.”

“예, 예. 성은이 마, 망극하옵니다, 전하.”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그러쥔 아이의 모습은 이제와 보니 청조와는 사뭇 달랐다. 하긴,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사내는 사내. 사내의 생김새가 여인을 닮을 일은 없을 것이다.

흰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던 겨울의 청조를 닮은 뒤태, 여름의 청조를 닮은 까무잡잡한 피부. 문득문득 저를 홀리는 청조의 잔상에 이끌려 헐레벌떡 나인들의 뒤를 쫓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청조가 아니었다.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괴로움과 그리움은 더욱 커져갔다. 자신들의 어깨를 부여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미친 왕의 모습에 애꿎은 궁녀들은 모다 벌벌 떨었다.

한데 이제는 어린 소환에게서까지 청조의 잔상을 보고 있었다. 미친놈, 미친놈 했더니 이제는 정말 미친 왕이었다.

“너는 어찌 궁에 왔느냐?”

“소인의 집은 입이 너무 많았사옵니다.”

“입이 많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그것이…… 식량은 부족한데, 형제는 너무 많으니 먹을 것이 부족하였사옵니다. 하여, 소인의 아비가 소인을 궁으로 들여보내었습니다.”

소환의 대답에 도운은 언젠가 청조에게 물었던 그것을 아이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럼 먹을 것이 없어 궁에 들어왔다는 말이냐?”

“예, 전하.”

“그깟 먹을 것 때문에 네 양물을 자른 아비가 원망스럽겠구나?”

“예에? 아닙니다. 절대 아니옵니다. 소인의 아비가 양물을 자르다니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럼 무엇이냐?”

“동네 개한테 무, 물렸습니다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청은 점점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을 했다. 그런 아이를 보는 도운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먹을 것도 없었다면서 동네에 그런 개가 활보하도록 어찌 두었느냐? 진즉에 잡아 목에 기름칠이나 하지 그랬느냐?”

“예?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그 개는 양반댁의 개였사옵니다. 한데 저희 같은 평민이 어찌하오리까…….”

농처럼 던진 말에 돌아온 청의 대답에 도운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도운은 저도 모르게 몸을 청이 쪽으로 쭉 내밀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저희보다 신분이 높은 것이 바로 사대부가의 애완견이옵니다. 황소만 한 애완견이 소인의 목을 물어뜯는다 하더라도, 저희 같은 것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사옵니다. 그래도 소인은 운이 좋아 이리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서방님은 양반이시지 않습니까?’

청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상에 개만도 못한 목숨이 내 백성들이란 말이었다. 도운은 제 앞에 놓여 있던 다식을 물끄러미 보다 청에게 밀어주었다.

“가져다 먹거라.”

“아니옵니다, 전하.”

소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식을 거절하였지만, 뻔히 먹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소환 주제에 이런 주전부리를 제대로 얻어먹을 리 없었다. 아이를 보는 도운의 눈이 깊어졌다. 청조는 자신이 만든 다식을 한 번이라도 먹어 보았는지 문득 궁금했다. 산을 누비며 채집한 노란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은 참 별미였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채집한 송홧가루의 양이 얼마나 되었나 싶었다.

아마 자신이 먹을 양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한 번이라도 지금처럼 챙겨 주었다면 저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밀려드는 청조 생각에 다시금 귓가가 시끄러워지려 하고 있었다.

“가져가거라!”

역정이 난 듯 차갑게 일갈하는 소리에 놀란 청은 얼른 고개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다식을 집어 들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흥, 망극은 무슨. 되었다. 먹어 봤자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것 따위…….”

“예에?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너에게 한 말이 아니다. 그럼 네가 입궁을 하고, 다른 형제들은 호구하는 데 문제가 없느냐?”

“아니옵니다. 소인의 입 하나 던다고, 어찌 살림에 보탬이 되겠사옵니까?”

무언가 서러움이 밀려오는 듯 아이의 코가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소인에게 누이가 하나 있었는데, 쌀 열 섬에 윗마을 영감의 첩으로 들어갔사옵니다.”

“네 누이의 나이가 몇인데, 영감의 첩으로 갔느냐?”

“열여덟이었사옵니다. 한데 윗마을에 환갑을 넘긴 영감의 첩으로 들어갔사옵니다.”

마침내 아이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첩으로 갔다는 소리에 도운의 눈매가 더욱 어두워졌다.

“영감의 첩이라…… 그럼 네 누이도 영감한테서 도망치고 싶겠구나.”

이를 가는 소리가 뿌드득 울렸다. 도망가고 싶겠지. 첩의 자리가, 영감이 싫어 저를 위해 주는 젊은 사내의 손을 잡고 도망치고 싶겠지. 쭈그러진 양물을 가진 노인이 아니라, 튼실한 양물을 가진 젊은 사내와 배꼽을 맞추고 싶겠지. 오랫동안 조용하던 귓가가 윙윙거리기 시작하였다. 도운은 얼마 전 사금파리에 찔렸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예에? 도망이라니요? 당치 않으시옵니다.”

“뭐라?”

눈물을 흘리던 아이가 코를 훅훅 들이키더니 당황스런 목소리로 얼른 고하였다.

“아니옵니다. 그런 것이 절대 아니옵니다.”

“그럼 왜 우느냐? 너도 네 누이가 영감의 첩으로 지내는 것이 싫어 우는 것이 아니냐?”

“그건, 사실 첩이어서가 아니옵니다. 아직 꽃다운 누이의 앞길이 걱정되어 그러하옵니다. 소인의 누이가 첩으로 그 집에 들어간 지가 벌써 다섯 해이옵니다. 다행히도 모시고 사는 영감이 누이를 격하게 아끼시어, 소인의 누이 부족한 것 없이 그간 잘 살았사옵니다. 허나, 병환이 깊은 영감이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옵니다. 영감이 죽고 난 후, 아직 꽃다운 제 누이의 앞날이 걱정되어 그러하옵니다. 아이 하나 없는 누이가 누굴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옵니까? 영감이 죽고 나면 그 영감의 자손들이 제일 먼저 아이 하나 없는 소인의 누이부터 쫓아낼 것이옵니다.”

울음을 참는 아이가 ‘끄윽’거리더니 눈물 대신 콧물을 흘렸다. 아이 하나 없는 첩의 말로란 것이 그런 것이란 말이지. 청조에게 절대 제 씨물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던 일이 생각나 버렸다. 아이가 없는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허한 것인지 절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반상의 법도에 따라, 제 고귀한 자손을 천한 여인의 태를 빌려 낳게 하지 않으려는 얄팍한 마음뿐이었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청조의 배신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인정할 수 없었다. 청조는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 배신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만이 청조의 사내여야만 했다. 귓가가 너무 어지러웠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안색이 어두우십니다. 어의를 들라 할까요?”

“아니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 하지만 전하, 용안이 너무 어둡사옵니다. 상선 영감을 들라 할까요?”

“되었다지 않느냐! 물러가거라!”

“옛! 예, 전하. 그럼 소인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던 청이 뒤뚱거리더니 곧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엎어진 아이에게서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는 원체 그리 잘 넘어지는 것이냐? 아까도 그리 넘어지더니. 자꾸 그리 넘어지니 동무들이 너를 멍청하다 하는 것이 아니냐?”

“예에. 아주 어릴 때는 그러지 아니하였는데, 어느 날부턴가 저도 모르게 종종 넘어지옵니다.”

“나가 보거라.”

“예, 전하.”

뒤뚱거리며 나가는 청의 다리를 도운은 저도 모르게 유심히 살펴보았다. 집안에 먹을 것이 없었다더니, 잘 먹지를 못하여 저렇게 휘청거리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흉년에 아이를 잃어 그 부모의 곡소리가 담장을 넘었다던 청조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생김새가 닮은 것도 아닌데 저 아이는 이토록 청조를 떠올리게 했다. 생김새나 행동거지 그 무엇 하나도 청조를 닮은 것이 없는데 굳이 떠오르게 만들어 마음을 또 괴란 하게 만들었다. 도운은 서안에 팔꿈치를 괴고 시끄러운 귀를 막았다.

이튿날, 어쩐 일인지 도운은 청을 다시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그 아이를 부르는 이유는 자신도 잘 몰랐다. 전하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청은 자다 일어난 것인지 얼굴이 창백하고 눈이 때꾼하였다. 오다 또 넘어진 것인지 무릎에 다 털어내지 못한 흙이 조금 남아 있는 채로 강녕전에 들었다.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그래, 내 찾았으니 네가 예 있겠지.”

“무슨 일이 있으시옵니까?”

“너야말로 무슨 일이냐? 옷 꼴은 그것이 뭐고, 오다 또 넘어졌느냐?”

도운의 시선을 따라 제 옷에 묻은 흙을 발견한 청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바닥에 박고 조아렸다.

“전하, 소인이 아둔하여 전하의 침전을 어지럽혔나이다. 주, 주, 죽여주시옵소서!”

“흥, 죽인다 하면 또 제 양물을 들먹이며 살려 달라 빌 놈이 말은 참 잘하는구나. 되었으니 그만 고개를 들 거라.”

쭈뼛대며 고개를 드는 청의 얼굴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도운이 다시 하문하였다.

“너같이 덤벙거리는 것이 아직도 궁에 붙어 있다니 내 놀랍구나.”

“사실 소인, 쫓겨날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사옵니다.”

“무슨 일로?”

“그, 그, 그것이…….”

말하기 힘든 듯, 청은 눈알을 굴려대며 도운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엎드린 채 눈알만 굴려대는 아이의 머릿속이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말을 하거라.”

“저, 사실 소인이 불을 낼 뻔한 적이 있어…….”

“불?”

“예, 예.”

“어쩌다 불을 낼 뻔하였느냐?”

도운의 하문에 청이 꿀떡 침을 삼키었다. 엉덩이 밑으로 삐져나온 버선코가 긴장감에 꿈틀거렸다.

“소, 소, 소인이 저, 전에 동궁전에 배속되어 있었사옵니다.”

“동궁전이라면, 의경 세자 밑에 있었느냐?”

“예, 전하.”

서리가 내리도록 차가운 도운의 하문에 청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키었다.

“의경 세자라…… 그래, 계속해 보거라.”

“소인이, 동궁전에 속해 있을 당시 용초에 불을 켜는 일을 하였사옵니다. 한데…… 어느 날 소인의…… 발이 엉키어 그만…….”

“넘어져 불이라도 옮겨붙었느냐?”

“예에…… 불이 옮겨붙은 것까진 아니오나…… 소인이 넘어지는 바람에 넘어간 용초가 저하께서 보시던 서책 위로…….”

말끝을 흐린 아이의 콧구멍이 벌름벌름하는 것이, 또 울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의경 세자가 너를 동궁전에서 내쳤느냐?”

“예에? 아니옵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결코 그러신 적이 없사옵니다. 소인의 죄를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내시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제 식솔이 모다 참수를 당하여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는데, 의경 세자 저하께서 저를 감싸주시어 동궁전에 계속 남을 수 있었사옵니다.”

“의경 세자가?”

“예에, 전하.”

“그가 널 구해 주었다?”

“예에, 전하.”

두 눈을 말똥히 뜨고 대답하는 것을 보니, 청의 말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형님은 실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수년간 저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던 악랄한 인간을 궁 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뿐이랴, 모두 그를 어질고 바르다며 성군의 자질을 가졌다고 소리 높여 칭송했다. 이 아이도 결국 의경 세자를 그리워하고 있겠지. 왜인지 속이 뒤틀렸다.

“됐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에? 예, 예, 전하.”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도운의 모습에 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전을 나섰다. 침전을 나서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다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청이 고꾸라지려는 모습을 본 도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뒤뚱거리는 청에게서 먼 옛적,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시절의 형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청조를 생각나게 하고 저의 처지를 닮은 청은, 이제 어린 시절 형님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닮았는지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형님의 어릴 적 모습이 겹쳐 보였다.

* * *

도성까지 이제 겨우 반절을 왔다. 당초 넉넉잡아 열흘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재환의 운신이 불편하고 먹을 것이 떨어져, 청조는 열흘이 한참을 지난 지금도 도성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 재환의 상처도 거의 아물었고, 운이 좋게도 잠시 들른 마을 주막에서 품을 팔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하루만 더 예서 머물고 내일 일찍 출발하면 며칠 안에는 도성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주막에서 열심히 국밥을 나르던 청조의 가냘픈 손목을 누군가 우악스럽게 잡았다.

“아니, 이거 어디서 이런 물건을 데려왔어? 자네, 이리 와서 예 술 좀 따라 보게.”

얼굴의 반 이상이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인 사내가 버둥거리는 청조의 팔을 잡아당겨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이야, 이거 허리가 버들가지마냥 호리호리하고 낭창거리는 게, 엉덩이는 실한가 어디 확인 좀 해 볼까?”

“이게 무슨 짓이오! 이거 놓으시오!”

“아이고, 고년 앙탈은, 아익!”

청조는 제 엉덩이에 사내의 손길이 닿자마자 남자에게 뜨거운 국밥을 끼얹어 버렸다. 국밥을 뒤집어쓴 산적 같은 사내의 머리에 수북이 앉은 밥알들이 하나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신을 내려치려 휙 올라간 손을 청조가 노려보자, 사내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칫거렸다. ‘이, 이것이.’ 말을 더듬으며 더 높이 치켜든 사내의 굵은 팔목을 누군가가 공중에서 꽉 잡았다.

“넌 또 뭐야?”

“너야말로 누군데 남의 안사람에게 치근대는 것이냐? 부녀자를 희롱하는 자는 장 서른 대에 처한다는 것을 알고 그러는 것이냐, 모르고 그런 것이냐!”

제 굵은 손목을 죄어오는 악력에 국밥을 뒤집어쓴 사내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사내가 곧 살려 달라 애원하기 시작했다.

“잘못했소, 내 잘못했소이다. 이것 좀 놔 주시오!”

“다시는 내 눈앞에도, 이 주막에도 어슬렁대지 말거라!”

재환이 손을 놔주자 사내는 눈치를 보다 이내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쳤다. 주막에 앉아 국밥과 술을 마시던 다른 사내들은 낄낄거리며 그 모습을 비웃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청조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이 곁에 다가온 주모가 재환의 허우대를 훑었다.

“아유, 거 참 잘하셨수. 내 안 그래도 저 화상 꼴 보기 싫어 딱 죽을 참이었는데, 이리 해결해 주니 고마워서 어쩐댜?”

“안사람 일에 나선 것뿐이니, 괘념치 마시오.”

“아아, 암만. 그렇지.”

저를 안사람이라 칭하는 재환의 말에 청조의 어깨가 움찔거렸으나, 다른 말은 달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녀가 함께 다니면 남들의 눈에 어찌 보일지 뻔한 일이었다. 괜한 분란을 일으키기보다 부부로 행세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이득인지라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이 있소? 사람이 꽤 많이 들었네.”

“아아, 멀리 배를 타고 행상 다녀오는 상단이 잠시 주막에 들러 그렇지 뭐요. 오늘 하루 예서 묵고 내일 이른 아침에 떠난다고 하니, 오늘 저녁 일이 많을 것이오. 새댁이 할 일이 좀 많겠지만, 대신 내 품삯을 넉넉히 쳐주지. 저 지긋지긋한 화상을 쫓아 준 셈도 칠 겸.”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감사하다 허리를 접어 인사하는 청조의 옆에 선 재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단이라.

“혹여, 상단의 우두머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소?”

“그건 왜 물으슈? 왜, 상단에 관심이라도 있수?”

“내 그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마침 이곳에 상단이 있다니. 혹, 재수가 좋으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나 행수에게 물어보려 하오.”

“저기, 안쪽에 있는 세 번째 방이오. 그리 가 보슈. 꼭 자리 하나 얻어 보시오. 보아하니 새댁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은데.”

“고맙소.”

곧장 목표로 한 방 앞으로 걸어간 재환은 안으로 들겠다 고하고 바로 방 안으로 들었다. 방 안에서 국밥을 뜨고 있던 행수는 갑자기 들이닥친 낯선 사내의 모습에 놀라 숟가락을 놓았다.

“혹여, 밖에 있는 상단의 행수이십니까?”

“맞소만, 누구신지?”

“부탁이 있어, 염치불구하고 이리 들었습니다.”

“부탁?”

“말을 돌려 하지 않겠습니다. 내 도성으로 들어가야 하나, 사정이 있어 호패를 잃어버렸소. 하여, 나를 상단에 넣어 주실 수 있을지 물으러 왔습니다. 내 힘을 쓰는 일도 수월하고, 검술 또한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라 자신하니 필시 상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답례는 도성에 도착하거든 내 꼭 하겠소.”

‘참, 나. 허허.’ 기가 찬 듯 혀 차는 소리가 행수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도대체 뭐가 이리 당당한지 모를 일이었다. 호패를 잃어 도성에 들어갈 수 없으니 상단에 넣어 달라 말하는 젊은 사내는 말로는 부탁이라 하지만, 풍기는 기백은 실상 명령에 가까웠다. 어떤 사정이 있는 자인지 알 수도 없고, 이런 사내를 괜히 받아들였다 어떤 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데…… 장사꾼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사내를 도와주는 대가는 필시 달콤할 것이다. 아버지 대에 낡은 포목점부터 시작하여, 거상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상단을 꾸릴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감 하나를 믿고서였다.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관상에서 너구리 같은 행수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좋소. 내 그대를 돕도록 하지. 그대의 사정은 내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리다. 다만, 약조를 해 주시오.”

“무슨 약조를 말하십니까?”

이리 수월하게 협상을 해 오는 행수의 말이 사뭇 의심스러워 재환은 행수를 더욱 면밀히 살펴보았다. 혹여 자신의 얼굴을 아는 자는 아닌지, 저를 의금부에 넘기려는 자는 아닌지 세세히 살폈다.

“대가는 내가 원하는 것으로 치러야 하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내 지금의 사정으로 어디까지 들어드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힘이 닿는 대로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대가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대가 그것을 가지는 날,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겠네. 그때에 꼭 셈을 치러야 할 것이네. 그것을 약조할 수 있다면, 내 자네를 도와주지.”

“약조하겠습니다.”

늙은 너구리 같은 영감이 무엇을 내놓으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재환은 그가 내어놓는 문서에 수결까지 해 버렸다. 설령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라 해도 갖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 반드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보게, 잠깐 나 좀 보세.”

“예, 나리. 말씀하시지요.”

청조를 데리고 주막의 뒤편으로 향한 재환은 저를 바라보는 여인의 청초한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여인을 혼자 보내려니 맘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것이, 내 에둘러 말하지 않겠네. 내일 아침 동이 트거든, 내 저 상단을 따라갈 걸세. 내 사정이 여의치 않은 건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동안 말을 할 수 없는 고민이 있었네. 사실 내 호패가 없어 도성을 통과하기가 여의치가 않아, 그것이 줄곧 걱정이었다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였습니다. 소인은 괘념치 마시고 상단을 따라가십시오. 오늘도 그렇고, 그간 성치 않으신 몸으로 저를 보호해 주시느라 노고가 너무 크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여인의 모습에 재환은 울컥 간절한 마음이 올라왔다. 노고가 크다니. 이제껏 살뜰히 저를 돌보고, 보호해 준 건 여인이었다. 여인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미 차가운 물 속에서 얼어 죽거나, 길 위에서 피를 흘리다 죽거나, 저와 가문이 당한 억울함에 가슴을 치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 저의 몸과 마음을 구해 준 여인이었다. 정갈하단 말이 모자랄 정도로 몸가짐이 반듯한 여인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고운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곱고 맑은 여인이었다.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로 내면의 아름다움이 눈부신 여인이었다.

“상단이 바로 도성으로 가지 않는다고…… 잠시 돌마면에 들러 거래를 한 후, 도성으로 향한다 하니 자네 먼저 도성으로 가 있게. 그곳에 상단의 행수가 운영하는 기방이 있네.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품을 팔아도 좋다 내 허락을 받았으니, 그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게. 내 꼭 자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그러네.”

“아닙니다, 나리. 소인, 나리께서 상단에 몸을 의탁하시어 안전해진 것도 보았고, 이제 제 앞길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 해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내 사정이 이리되기 전까지 종사관의 신분이었지 않은가? 자네의 지아비를 찾는 데 필시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저의…… 서방님을요? 정말이십니까? 정말 서방님을 찾는 데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허나…… 나리의 사정도 여의치 않으신데, 제 일로 부담까지 드리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네. 그리 생각 말고 가서 나를 꼭 기다리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또다시 허리를 숙여가며 연신 감사를 표하는 여인을 바라보기가 심히 괴란했다. 거짓말. 자신의 속내에서 들려오는 말이 제 귓가를 후려쳤다. 지아비를 찾아주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그저 여인과 이리 헤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면서. 신분이 다른 여인이기 이전에, 지아비가 있는 여인이었다. 허나…… 지아비는 이미 사라졌고, 제 신분은 이제 비천한 노비나 다름없었다.

욕심이 자꾸만 꾸역꾸역 올라오자 재환은 고개를 힘껏 도리질했다. 지금 여인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제 누이를 구해야 했다. 그저 잠시만, 여인에게 입은 은혜에 보답할 때까지 잠시만 곁에 두는 것이다.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다. 결코, 여인을 욕심내려는 것이 아니라며 재환은 다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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