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둠에 삼켜진 구름
“데려오지 못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데려올 수가 없었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묻지 않는가!”
익태를 향해 호통을 내지른 도운은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책봉식이 거행된 지가 벌써 보름 전이었다. 허나, 도운은 이제껏 작은 전각에 갇혀 누구의 왕래도 허락되지 않았다가 동궁전으로 처소를 옮긴 후에야 겨우 익태를 볼 수 있었다. 이래저래 궁에 들어온 지가 벌써 달포가 넘었거늘, 익태는 아직도 청조를 찾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사옵니다. 초가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사람을 시켜 오랫동안 초가를 살폈습니다만, 그 흔적을 도통 찾을 수가 없사옵니다.”
“그럼 그이가 어디를 갔다는 말인가?”
“혹여, 산을 내려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산을?”
도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이 없어진 것에 놀라 저를 찾겠다고 산을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심지가 강한 여인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여인이었다.
“찾아오게. 나를 찾아 산을 내려갔을 것이네. 분명 날 찾고 있을 것이야.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 그이가 살던 집을 수소문해 보게. 그곳에 병든 어머니와 아우들이 있으니, 화성으로 갔을 수도, 아니…… 그러지 말고, 한가, 한가! 당장 한 내관을 찾아보게. 형님께서 승하하셨으니 응당 출궁을 했을 것이네. 그의 소재를 찾아내어 청조의 집을 알아보게. 분명 한 내관이 집을 알고 있을 것이야! 혹여,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으니 어서 찾아보게!”
흥분하여 빠르게 말하는 도운의 명을 반듯한 자세로 경청하던 익태가 굽혔던 고개를 들었다.
“소신이 찾아 데려온다면, 그때는 어찌하시렵니까? 후궁이라도 삼으려 하시옵니까?”
“뭐?”
“예, 산에서 살 적에야 첩으로 데리고 살던, 그저 잠자리 시중드는 이로 데리고 살던 흠 될 것이 없었사옵니다. 어차피 그런 용도로 보내진 여인이었으니 말이옵니다. 허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지 않사옵니까? 이젠 세자 저하이십니다. 이 나라의 세자 저하이십니다. 더 이상 산골짜기에 숨어 살던 얼굴 없는 사내가 아니시옵니다. 그러신 분께서 그런 미천한 여인을 궁에 들여 무엇을 얻고자 하시옵니까? 지금 저하의 흠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들이 지척에서 숨을 죽이고 있사옵니다.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의 장인인 영의정이 그 세를 지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는 말이옵니다. 대체 어찌하시려 그러시옵니까?”
“무수리로 두던, 후궁으로 두던 그건 자네가 알 바 아니니 무조건 찾아서 내 앞으로 데려오게!”
도운의 호통에 긴 한숨을 삼킨 익태가 눈을 깔고 조용히 읍하였다.
“정녕 예화의 마음을 이리 우롱하시렵니까? 이제껏 세자 저하만 바라보고 살아온 아이이옵니다. 분명 약조하셨습니다. 산에서 벗어나는 날, 예화와의 혼인을 분명 약조하셨사옵니다. 이제껏 저하를 보필하며 희생해 온 저희 가문을 위해서라도 저하께서는 반드시 약조를 지키셔야 하옵니다. 그 약조를 지켜 주셔야, 저희도 저하를 지켜 드릴 수 있사옵니다!”
“그건!”
도운이 호통을 내지르려는 순간, 입실을 고하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세자 저하, 중전마마께서 뵙자고 청하시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예, 저하.”
“알겠다.”
모후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온 도운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사조룡보가 어깨와 가슴에 달린 흑색 곤룡포를 입은 도운의 풍채가 어느 때보다 엄장하고 도도했다. 어깨를 당당히 편 도운은 제 앞에 허리를 숙이고 공손히 서 있는 익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무조건 찾아와. 이건 부탁이 아니고 명이다. 더 이상의 건방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위엄이 서린 차가운 명에 익태의 허리가 굽었다. 마른침을 삼킨 익태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예, 저하. 소신 명 받잡겠사옵니다.”
차갑게 돌아서는 도운의 흑룡포가 멀리서 불어오는 따뜻한 밤바람에 나부꼈다. 청량하게 나부끼는 흑룡포와는 달리, 모후의 처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도운의 마음은 매 순간 이지러졌다. 그 여인을 데려와 어찌하려는지 저도 모르겠다. 자신도 알고 싶었다. 익태의 말이 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이대로 모르는 척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왕위에 올라선들 온전한 지어미 자리를 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제 온전한 마음을 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이 구중궁궐에 들어오거든 많은 이의 눈칫밥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궁이 얼마나 냉정한지, 얼마나 무서운지는 자신이 더 잘 알았다.
어린 시절, 전각에 갇히다시피 생활하던 저를 원망하고 멸시하던 궁인들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그 눈빛을 받고 살게 하느니 이대로 보내 주는 편이 여인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소박을 맞은 여인의 말로가 죽음뿐이라며 읍소하던 청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초승달 마냥 호를 그리며 길게 휘어진 까만 눈썹 아래, 단정한 듯 둥글게 시작해 요염하게 그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영롱하던 눈동자. 굴곡 없이 반듯한 이마를 따라 곧게 뻗어 있던 콧날, 부드러운 호를 그리는 코끝을 지나 손가락으로 꾹 눌러 놓은 듯 앙증맞게 패인 인중. 그 인중 바로 아래로 도톰하게 튀어나온 입술은 마치 잘 익은 앵두를 물고 있는 듯했지.
하나가 떠오르면 뒤이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렇게 떠오른 기억이 어느덧 청조의 얼굴을 완성시켰다. 이리도 선명히 기억나는 여인의 얼굴. 도운은 또렷이 떠오르는 청조의 얼굴을 머리에서 도통 떨칠 수가 없었다. 청조의 부재가 가져오는 상실감은 너무나 깊고 무거웠다.
“중전마마, 세자 저하 드셨사옵니다.”
“어서, 어서 모시어라.”
다소 흥분 섞인 목소리가 안에서 들리자 장지문 앞에 공손히 서 있던 두 나인이 문을 활짝 열었다. 책봉식 이후 아침마다 짧게 문안 인사를 드리던 모후가 기꺼운 얼굴을 하고 도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운은 아들인 자신을 향해 뻗는 손을 슬쩍 바라보다, 예를 다한 후 그냥 자리에 앉아 버렸다.
아들을 반기던 어미의 고운 손이 길을 잃고 잠시 방황하다 무릎 위에 살포시 놓여졌다. 도운은 애써 섭섭함을 감추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았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앞에서 다과상을 받고 있는 여인에게 눈길도 보내지 않고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리 늦은 시각에, 혜빈마마께서도 계셨습니까?”
무뚝뚝하게 내뱉는 안부 인사에 세자빈이었던 혜빈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예, 저녁 수라 후 어마마마와 가볍게 담소를 나누던 차였습니다.”
“그러셨습니까?”
“혜빈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갑자기 세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 뵙자 청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흥, 내가 아니라 형님이 보고 싶은 것이겠지. 무뚝뚝하게 되묻는 도운의 표정에는 모후에 대한 감정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세자, 이 어미가 많이 원망스럽습니까?”
“무엇에 대한 원망을 말씀하시옵니까?”
“어린 세자를 그리 보낸 것에 대해 이 어미가 늘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이었어요.”
“…….”
“유모가 세 해 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옆에서 모시는 이 없이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우리 의경 세자가 승하하기 전까지 세자의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예, 그래서 소자의 수발을 들으라 그렇게나 많은 이를 보내셨나 봅니다. 소자의 마음에 차지 않아 그냥 돌려보낸 것이 송구할 따름이지요.”
“그러셨습니까? 수발 들으라 그리 많은 이를 보내셨다니, 의경 세자가 여러모로 신경을 쓰셨나 봅니다. 얼마나 어질고 바른 사람이었는지…….”
물론 그랬겠지요. 저를 기만하고자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어찌나 애를 쓰셨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옆에서 시중드는 이가 있다 한들, 산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 어미가 세자 생각을 하면 항시 죄스런 마음이었어요.”
“그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산에서의 생활이 고되지만은 않았사옵니다.”
물론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지요. 청조를 만난 짧은 시간을 빼면 말입니다. 느닷없이 청조가 그리웠다.
“그러셨습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산에서 생활하셔서 그런지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에서 강건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참으로 헌헌장부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혜빈?”
“예, 참으로 그러하십니다.”
“먼저 간 우리 의경 세자의 몸도 병증만 아니었더라면 딱 이리 장성하였을 것인데요. 의경 세자가 측은하고 측은하여, 내 맘이 좀처럼 편안해지질 않아요.”
“어마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서로를 위로하며 촘촘하게 저를 살피는 두 여인의 눈이 진정 누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천치가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제는 훌훌 벗어 버린 복면이었다.
세자 책봉식이 있던 전날, 열두 해 만에 지긋지긋한 족쇄에서 해방되었다. 저도 기억 안 나는 저의 얼굴에 귀신이라도 본 듯 자지러지는 내시 놈들의 모습이 참으로 고깝고 우스웠었다.
싸늘한 눈으로 두 여인을 바라보던 도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세자.”
“예, 어마마마.”
“여기 있는 혜빈과 혜빈의 장녀인 군주를 잘 지켜 주세요. 세자의 형님이었고, 이 어미의 장자였던 의경세자의 안해이고 딸입니다. 꼭 그리 해 주세요.”
“예, 어마마마.”
“약조할 수 있습니까?”
“예, 어마마마.”
“고맙습니다, 세자.”
저에게서 형님을 바라보는 모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그 지긋지긋한 복면을 벗었어도 저는 여전히 얼굴 없는 놈이었다. 세자가 되었어도, 여전히 이 궁에서 저를 바라봐 주는 인간은 없었다.
저를 보며 죄스러웠다 눈물을 보이는 어머님도, 저를 보며 제 서방을 그리워하는 여인도, 저를 보며 한숨을 내쉬는 아버님도 모다 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백관(百官: 모든 벼슬아치)들도, 제 얼굴을 보고 자지러질 듯 놀라던 궁인들마저도 모다 저에게서 형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복면을 쓰든 벗든, 서방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청조의 말이 머리를 스치자 쓴웃음이 올라왔다. 어리석은 청조야, 너는 틀렸다. 복면을 썼을 때나 벗었을 때나, 내 존재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와 복면을 벗고 얼굴을 되찾은 줄 알았는데 이 얼굴 역시 저의 얼굴이 아니었다. 씁쓸한 마음에 찻물을 들이켰다. 향이 좋은 최고급 차였지만 어딘지 입에 맞지 않아 미간이 일그러졌다. 청조가 말려주던 국화 향이 몹시 그리웠다.
“왜,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아닙니다. 이리 향이 좋은 차를 음미하였더니, 그 맛에 취하여 그러합니다.”
“향이 좋으시다니, 아랫사람을 시켜 저하의 처소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혜빈마마께서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도운의 딱딱한 대답에 혜빈이 더 이상 권하지 못하고 조신하게 고개만 숙였다. 아들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중전은 뜸을 들이다 오늘 그를 불러들인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곧 금혼령을 내리려 합니다. 세자께서 이리 장성하셨는데,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어요.”
“세자빈 간택을 말씀하시옵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실 주상 전하의 예후가 매우 좋지 않아요. 병증이 더 심해지기 전에 간택을 끝내려 합니다.”
모후의 말씀에 도운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언가 느낌이 참으로 이상했다. 지난해 가을, 불현듯 산에 올라 다짐을 받아가던 예화와 익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도운은 문득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자빈 간택이야 내명부의 소관이니, 소자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겠지요. 허나…….”
“말씀하세요.”
“소자가 내정자를 특정해도 되겠사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세자, 설마 심중에 담아 둔 처자라도 있는 것입니까?”
심중에 담아 둔 처자라는 말에 도운은 선뜩 답을 할 수 없었다. 심중에 담아 둔 처자라…… 청조의 작은 얼굴이 떠올랐다. 떠오르는 여인의 얼굴을 억지로 지우고 예화와의 언약을 곱씹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혼례였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이들 보다 차라리 예화와의 혼례가 나을 것이다.
어린 시절 궁에서 내쳐진 자신을 지켜준 유일한 가문이었다. 아무 세력도 없이 위태롭기만 한 자신의 자리를 지켜줄 유일한 가문의 여인이었다. 어여쁘고, 고매한 여인이다. 세자빈의 자리에 모자람이 없는 여인이다. 언약을 준 여인이었다. 도운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곱씹고 또 곱씹었다.
“도승지의 여식인, 주가 예화 처자입니다. 소자가 어릴 적 그 도승지의 사가에 잠시 몸을 의탁했었지요. 그때 소자를 많이 따르던 여인이옵니다. 소자가 산을 벗어나게 되는 날 안해로 삼겠다 약조를 하였사옵니다. 세자빈 간택이 내명부의 소관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소자의 마음과 언행에 경솔함이 없었고 그 뜻에 금과 같은 무거움을 담은 언약이니 꼭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승지의 장녀요?”
“예.”
하아, 중전의 입에서 긴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승지의 장녀라. 옆에 앉아 있는 며느리를 슬쩍 보았다. 저에게는 먼 조카뻘 되는 아이였고, 마음에 아린 아이였다.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젊디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이 궁에서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 할 아이였다. 마땅히 중전의 자리에 올랐어야 했으나, 이제 와 평생을 빈의 자리에 앉아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할 아이였다.
지아비를 잃은 며느리를 지켜 주기 위해서라도, 세자빈은 집안의 사람으로 뽑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허나,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의 청을 물리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이제껏 산속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아들을 보살핀 공이 있는 가문이었다.
“내 세자의 뜻을 알았으니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만 여기서 접는 것이 좋겠소.”
“소자, 어마마마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소자를 언약을 가벼이 여기는 소인배로 만들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그럼 소자,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 마마께서 남은 담소를 즐기시지요.”
아들이 떠난 후 찻잔을 집어 든 중전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같은 용모를 지녔으나 그 성정이 너무도 다른 아들이었다. 성정이 따뜻하고, 어질고, 효심이 넘쳤던 장자였다. 허나 장자와는 다르게 그 속을 알 수 없고, 냉기 가득한 지금의 세자는 낯설고 어려웠다. 저 아이의 강한 육체를 그 아이가 지녔다면, 저 아이의 건장한 체격을 그 아이가 지녔었다면 이리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것인데.
“세자가 너무 낯설어 무섭습니다. 어린 시절엔 저렇게 차갑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가끔 궁이 무섭다 이 몸에게 칭얼거릴 정도로 마음이 여린 아이였습니다.”
“산 생활이 고되었을 테니 그럴 수밖에요. 자그마치 십여 년을 그곳에서 홀로 보내신 분이십니다. 의경 세자께서 자신 때문에 그 산에 갇혀 지내시는 아우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 근심하곤 하셨습니다.”
“네, 그랬을 것입니다. 참으로 심성이 고운 아이였는데. 차라리 지금의 세자가 의경 세자였다면…… 아니, 아닙니다. 내 실언을 했어요. 듣지 않은 것으로 해 주세요, 혜빈.”
“예, 마마.”
듣지 않은 것으로 하라고 하셨지만 혜빈의 생각도 결코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운명으로 태어나 제 지아비의 생명을 갉아먹고 저리 튼튼히 자란 세자의 모습을 보자 서러움이 복받쳤다. 제 서방의 양분이 되었어야 할 이가 버젓이 살아서는, 저의 서방을 양분으로 삼았다. 살아생전 왜소하던 의경 세자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분하였다.
차라리, 차라리 저분께서 의경 세자였더라면 모두가 평안했을 것인데. 그 옛날 주상전하께서 용단을 내리시기만 했어도 지금쯤 저 몸을 가지고 강건하게 살아 계셨을 터인데. 서방을 잃은 젊은 여인의 마음에 서글픔이 차올랐다.
* * *
모후의 처소를 나오자 등을 든 내관 하나가 바삐 다가와 도운의 앞길을 비추었다. 어둠이 무겁게 깔린 넓은 궁궐은 낮의 화려함이 거짓말인 듯, 고요하고 적막했다. 적막 속, 내관의 손에 들린 등 주위로 모여든 작은 미물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향해, 내관이 비추는 등이 어둠을 가르고 길을 텄다. 그 얇게 갈라진 길을 따라가면 지나온 길은 다시 어둠 속에 먹혀 버렸다. 어둠에 삼켜져 미미한 등불에 의지하여 걷는 작금의 이 모양새가 바로 자신의 모습 그 자체였다. 위태롭고 가련한 저의 모습이었다.
숨은 구름이라는 도운(逃雲)을 자(字)로 받은 사내인지라, 이제 정말 그 모습이 누구에게도 보이질 않는구나.
청조야, 청조야, 어디 있는 것이냐? 달마저 사라진 검은 하늘에 청조(淸朝)가 오질 않으니, 이토록 깊고 어두운 밤 도운(逃雲)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 청조야, 나를 이리 홀로 두고 도대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 * *
“이보시오, 혹여 근방에 익태라는 함자를 지닌 나리의 집을 아십니까? 예화라는 성함을 지닌 누이가 계신 분이십니다.”
“글쎄, 잘 모르겠네. 이름만 갖고 어찌 안단 말이오? 우리 같은 것들이 양반네들 성함을 일일이 어찌 아오. 어디 어디 댁이라 해야지. 참판 나리 댁이라거나, 뭐 그런 직책은 없나?”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그럼 잘 알 수가 없지. 차라리 저기 기생집 같은 그런데 가보슈. 혹시 아오? 양반댁 자제분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 이름 정도는 아는 사람이 있을지?”
“아, 예. 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청조는 보퉁이를 가슴에 꼭 안고 너덜너덜한 짚신을 끌며 바삐 기생집을 찾아 걸어갔다. 산을 내려온 지 벌써 달포가 지났다. 평소 지게꾼이 산에 도착하던 시각을 보았을 때, 산에서 약 세 시진(6시간) 정도 걸리는 반경에 익태 도련님이 살고 계실 거라 생각했다.
청조는 산에서 내려와 동서남북을 향해 세 시진 걸리는 마을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익태의 집을 찾아 헤매었다.
수중에 가진 것이 없으니,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잣거리에 나가 품을 팔고, 저녁이면 아무 집에나 들러 잠자리를 청했다. 헛간에서라도 잠을 잘 수 있도록 사정하여 밤이슬을 피하고 다음 날 일찍 길을 떠났다. 쉴 새 없이 떠돌며 혹여 익태의 집을 아는 이가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헤매고 헤매다 어느새 도성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도성 안 넘쳐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물 흐르듯 밀려다니던 청조는 묻고 물어 옥류관이란 현판이 걸린 으리으리한 기방 앞에 도달하였다. 선뜻 들어가지는 못하고 커다란 대문 밖을 서성이며 안의 기척을 살피는 사이 활짝 열린 문으로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 실례하오.”
“뭐요?”
거지꼴을 한 여인이 저희를 부르자 곱게 단장한 여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새로 장만한 명주 치마에 혹여 검댕이라도 묻을까 치마를 꼭 부여잡아 허리에 휘감았다.
“미안하지만 내 한 가지 여쭐 게 있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혹 이곳에 드나드시는 분들 중, 익태라는 함자를 지닌 나리가 계십니까? 성은 알 길이 없고 그분의 누이께서 예화라는 함자를 가지고 계십니다. 혹여, 아는 분이 계시거든 꼭 좀 알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익태?”
“예, 스물 초반쯤 되어 보이시고, 키가 육 척(六尺)이 조금 모자라십니다. 혹여 아는 분 없으십니까?”
“글쎄, 익태라는 나리? 잘 모르겠는데…….”
“혹시 도승지 영감 댁의 익태 도련님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화려한 여인들 중, 구름 같은 가체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 도승지 영감이라고 했습니까?”
“그 댁 장자께서 그 함자를 쓰는 걸로 알고 있네만, 그분에 관해선 왜 묻소?”
드디어 익태의 소재에 관해 조그만 단초를 얻게 된 청조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것은 내 말 못 할 사정이 있습니다. 거듭 물어 미안하나, 혹여 도승지 영감 댁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내 그것까진 잘 모르겠네. 미안하게 됐소.”
“아닙니다, 아닙니다. 도승지 영감 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청조는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허리를 굽히고는 바삐 걸어갔다.
“도승지 영감 댁 도련님을 매화 성님이 어찌 아오? 그분께서 언제 기방에 오신 적이 있었소?”
“오래전에 한 번 친우들과 들렸던 걸 기억한다. 그때 술에 취해 제 누이가 곧 이 나라의 국모가 될 거라 떠들던 것이 기억나서. 그때만 해도 아직 나이 어리시어 관직은 고사하고 미취한 몸이셨지. 그런 애송이가 감히 이 매화에게 수청을 들라 하니 내 단칼에 거절을 했었다. 그랬더니 술에 취해 기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더라. 그래서 내 기억하고말고. 그분 성함이야 기연가미연가 하지만, 그때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그 누이의 이름은 내 똑똑히 기억을 하지. 분명 예화라는 이름이었어.”
“어머, 그 양반 꿈도 크셨네, 깔깔. 세상에, 어찌 그런 큰 꿈을 잡수셨대? 지금 세자빈마마는 영의정 댁에서 나오지 않았수?”
“흥, 낸들 아니? 어찌 되었든 곧 새로운 세자빈마마 간택이 시작된다고 하니, 그 헛된 꿈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지켜봐야 알겠지.”
농염한 몸짓으로 틀어 올린 머리를 우아하게 만지작거리던 여인이 요염하게 웃으며 농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깔깔대는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퍼졌다.
청조는 저잣거리를 향해 바삐 걸어갔다. 물어물어 가면 집쯤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긴 여정에 터지고 갈라진 고단한 발을 채근해가며 저잣거리로 향하는 청조의 얼굴이 기대감에 환히 빛났다.
“이보시오. 안에 계십니까?”
쾅쾅! 어렵사리 도승지의 자택에 도착한 청조는 생각할 틈도 없이 대문을 두드렸다.
“이보시오! 도승지 영감 댁을 찾아왔습니다. 이보시오!”
“누군데 함부로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냐!”
“나으리!”
익태는 더러운 몰골을 한 여인네가 제집 대문에 달라붙어 있는 꼴에 크게 역정이 났다. 아무리 도성 안에 거지들이 넘친다지만, 감히 뉘의 집이라고 이런 비렁뱅이 계집이 함부로 기웃거리는 것인가. 역정을 내던 익태는 자신을 돌아본 여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굳어 버렸다. 저를 보고 깊게 허리를 굽히는 여인의 쪽머리에 비녀를 대신하여 꽂힌 나뭇가지가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입가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년이 정녕 살아 있었구나.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나으리, 나으리. 제발 도와주십시오. 서방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뭐라?”
“필시 무슨 사단이 일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서방님께서 사라지시던 날, 낯선 이들이 산에 올랐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위협하고, 서방님을 데려갔습니다.”
“낯선 이들이 산에 올랐다?”
“예, 사내 두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일행이 더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초가 마당에 어지러이 찍혀 있던 수많은 발자국을 소인이 보았습니다.”
다급한 듯, 익태의 소맷부리라도 붙잡을 기세로 청조가 앞으로 다가섰다. 저를 향해 내미는 여인의 거칠고 더러운 손에 익태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그를 찾지 말거라.”
“예? 그것이 어인 말씀이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서방님께서 어떤 곤욕을 치르고 계실지 모릅니다. 분명 도움을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나리,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실 분이 나리밖에 아니 계십니다.”
청조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발끝에 엎드려 울며 읍소하는 여인을 더러운 물건 보듯 코끝으로 내려다보던 익태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떠났느니라.”
“예?”
“그는 스스로 떠났다 하였다. 사정이 있어 떠난 것이니 찾지 말고, 너는 이제 네 갈 길을 가거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절대 그릴 리가 없습니다! 저에게 아무 언질도 주시지 않고 혼자 떠나실 리 없습니다. 분명 산에 오른 그 낯선 이들이 데려간 것입니다!”
“그 낯선 이들은 내가 부리는 수족이다. 내 그와 함께 산을 내려오기 전, 혼자 남을 너를 가엾이 여겨 너에게 그가 떠났음을 일러 주라 했다. 아마 네가 그들을 오해한 것이겠지.”
익태의 말에 네 서방은 이미 산을 떠났다 말하며 히죽거리던 사내들이 떠올랐다. 허면 진정 서방님께서 저를 버리셨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고개를 흔들어 의심을 떨친 청조는 익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대체 서방님께 무슨 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어디로 가신 것입니까? 알려 주십시오.”
“그의 사정을 네까짓 것이 알 필요 없다. 그리고 그가 어디로 떠났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니 그만 네 살길이나 찾아가거라.”
“나리께서 어찌 모르신다 하십니까? 제발 알려 주십시오. 제발, 이렇게 빌겠습니다.”
“어허! 모른다 하지 않느냐! 또한, 알고 있더라도 너 같은 것에게 알려 줄 수 없는 일이다. 뫼시던 주인 나리가 떠났으면 떠난 것이지, 네가 도대체 무어라고 그의 행방을 캐고 다니느냐. 경을 치기 전에 어서 물러가거라.”
이제껏 엎드려 사정하던 청조가 벌떡 일어섰다. 불신으로 가득한 눈으로 익태를 똑바로 노려봤다.
“정녕이십니까? 정녕 모르시는 것입니까!”
“네 이년!”
날카로운 눈매를 부릅뜬 익태가 호통을 쳤으나 청조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내 분명 네 주제를 알라 일렀거늘, 그 후로도 너는 조금도 나아지지가 않았구나. 감히 네까짓 것이 뉘 앞이라고 건방지게 그따위로 대거리하느냐! 또한, 너 같은 천한 것이 언감생심 누구를 서방이라 입에 올리는 것이냐! 산에 있을 적, 그가 외로움을 달래려 몇 번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하여 네가 진정 그의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이런 천하의 건방지고 악랄한 것을 보았나. 네 본분이 진정 무엇인지 모르느냐! 너는 그냥 육욕을 해결할 암캐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뭐, 뭐라?”
이것이 무엇을 잘못 집어 먹었나. 감히 저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대거리를 하는 청조의 모습에 익태는 할 말을 잃었다.
“소인이 저의 서방님을 서방님이라 부르는 것은, 이미 제 서방님께서 허락을 하신 일입니다. 나리께서 가하다 아니다 개재하실 일이 아니십니다! 허고 저의 본분은 나리가 말씀하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첩이긴 하나 이미 저의 존재를 인정하셨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서방님께서 똑똑히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허니 저를 두고 그리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그것은 서방님을 욕되게 하는 말씀이십니다!”
“이, 이년이 정녕 실성하였구나. 내 집 앞에서 당장 꺼지거라! 내 너를 다시 보거들랑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 낯짝을 보이지 말거라!”
“나리, 가르쳐 주십시오! 서방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네 서방이라 큰소리치더니, 네 서방을 왜 나한테 와서 찾느냐? 그는 이미 떠났으니, 네가 알아서 찾아보거라.”
“나리! 나리!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밖의 소란을 들은 청지기가 대문을 열자마자 도포 뒷자락을 휘날린 익태가 뒷짐을 지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리! 제발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알려 주십시오. 나리, 나리! 제발 간청드립니다! 나리!”
“뭣들 하느냐! 저런 비렁뱅이 계집이 집 앞을 기웃거리도록 여태 무얼 한 것이냐! 어서 쫓아내거라!”
젊은 사내들의 손에 우악스럽게 잡힌 청조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익태를 불러댔다. 대문 건너편에서 청조의 부르짖음을 듣던 익태의 입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도지 어디 있느냐?”
“예, 나으리, 부르셨습니까?”
“저것이 버젓이 살아 있질 않느냐! 가거라. 가서 이번엔 실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나리.”
건방진 년. 운이 좋아 그 천한 목숨을 부지했으면 죽은 듯 엎드려 살 일이지, 굳이 이리 나타나 명을 재촉하는구나. 조금 전 모습을 보니 더욱 살려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저리 활개를 치고 다니다 세자 저하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아니 될 일이지, 아니 될 일이야.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린 익태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 * *
세자빈 간택은 유례없는 공방을 낳았다. 내정자를 두고 조정에서 양보 없는 공방이 일어났다. 그동안 세자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피던 도승지의 공을 높이 사, 그의 여식을 새로운 세자빈으로 간택하는 것은 응당 당연한 이치이다. 조정은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파와 그렇지 않은 파로 나뉘어 연일 시끄러웠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도승지를 중심으로 신진세력으로 떠오르려는 야심에 들뜬 자들이었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은, 외척인 영의정 대감을 중심으로 이미 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세력을 빼앗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로를 물고 뜯으며 처절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병약한 임금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외척이었다. 새로운 세자빈 역시 외척에서 나온다면, 앞으로 세자가 짊어지고 갈 정치에 큰 걸림돌이었다. 지금껏 산에 홀로 떨어져 지내던 세자에겐 아무도 없었다. 이제 저마저 가고 나면 들끓는 외척의 시달림을 어찌 감당하며 국정을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노마저 없는 밑 빠진 배를 태워 저 강을 건너라 하는 형국이었다.
그렇다고 도승지의 여식을 간택하자니, 세자의 뒷배가 되기엔 도승지의 힘은 아직 미미하였다. 또한, 조정 신료들의 반발이 거세었다. 그간 잘게 나뉘던 세력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물고 뜯다, 이제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외척의 등장은 겨우 지탱되던 힘의 분배에 돌을 던지는 꼴이었다.
허나 객성의 빛을 띠고 태어나 나라의 흉조가 될지도 모르는 세자에게 힘 있는 세력을 붙여 주는 것 또한 옳지 못했다. 그 힘을 이용하여 신료들과 백성들을 핍박하고 폭군이 될까 진정 두려웠다. 그런 면에선, 아직 그 세력이 미미한 도승지가 적임자일 수도 있었다.
또한, 아직은 젊다고 할 중전과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며느리,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손녀의 앞날도 걱정이었다. 외척을 견제하면서도 그들의 세력을 어느 정도 유지시켜 주기 위해, 현재 세력이 미미한 도승지의 여식을 세자빈의 자리에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민을 하던 임금은 힘에 겨운지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때, 중전의 입실을 고하는 내관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하, 용안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어의를 부르라 할까요?”
“괜찮습니다.”
“심려가 너무 크시옵니까? 세자빈 간택의 일로 조정이 시끄럽다 들었습니다.”
“모두 지들 이익을 틀어쥐고자 야단이지…… 중전.”
“예, 전하.”
“중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어찌 되었든, 세자빈 간택은 내명부의 소관. 내 중전의 생각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중전은 힘이 빠져 버린 지아비의 용안이 참으로 불쌍하고 측은하였다. 궁에 처음 들어왔던 때가 제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때 지아비는 이미 오십이 훨씬 넘은 나이였다. 나이에 비해 건장하고 강건하신 분이었는데…… 이제는 늙고 기운 빠진 늙은이가 되어 버린 임금은 너무 고단해 보였다.
“전하, 신첩의 말을 곡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소첩의 마음에는 도승지의 여식을 이미 세자빈으로 낙점하였사옵니다.”
어째서라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왕은 중전을 바라보았다.
“저와 남겨진 혜빈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허나 신첩, 정치에 관한 일은 모두 잊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라.”
“예, 그간 세자를 그 험한 산중에 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의경 세자를 위함이었고, 이 나라 종묘사직을 위하는 길이었다 하나 어미로서는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와 어미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세자의 청을 물릴 수가 없사옵니다. 어찌 되었든 버림받고 산 세자를 지켜 주던 가문이었고, 그 가문의 여식입니다. 세자가 말하길, 어린 날 잠시 그 집에 몸을 의탁하던 시절 세자를 잘 따르고 위로를 해 주던 처자라 하옵니다.”
“그리 말을 하였소?”
“예, 몸은 이 궁에 들어와 있으나 주변에 마음 주는 이가 없으니 세자는 지금 고립무원이나 다름없을 것이옵니다. 내자라도 세자의 마음을 채워 줄 이를 만나게 해 주고 싶사옵니다.”
어미의 마음이라…… 그럼 아비의 마음은 무엇인가. 어린 그 아이에게 억지로 복면을 씌우고 산으로 내쫓았다. 자식을 죽일 수 없으니 수를 내놓으라 윽박질러 얻은 계책이었으나, 실제로 죽으라고 보낸 것과 진배없었다. 그리하였는데도 결국 오늘날에 이르렀다. 장자는 죽어 버렸고, 차남은 속을 알 수 없는 냉혈한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비에게 일말의 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위를 찾을 수 있다면…….
“중전의 뜻대로 하시오.”
“감읍하옵니다, 전하.”
왕과 중전의 독대 이후, 초간택과 재간택이 빠르게 지나고 마지막 관문인 삼간택 날이 되었다. 이미 내정자로 정해져 있는 예화의 옷차림은 벌써부터 화려하고 그 콧대가 매우 높았다. 시기와 부러움을 애써 감추며 자신을 흘끔거리는 두 여인들 중엔, 아버지의 직책보다도 훨씬 높은 우상의 여식도 들어 있었다. 그런 여인들을 깔보는 마음이 벌써부터 부풀어 올랐다. 세자빈이 된다, 그리고는 곧 중전이 되는 것이다.
여인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이었다. 오라버니를 만났던 그 옛날부터 이미 자신의 운명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아, 오라버니가 참으로 보고 싶었다.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지. 또 얼마나 저를 그리워하고 계실지. 도운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져 예화의 마음이 한없이 우쭐해졌다.
마침내 최종간택이 끝나고 삼간택에서 탈락한 여인들에게서 절을 받는 예화의 콧대가 더욱 높아졌다. 한껏 치켜 올린 눈으로 여인들을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흥, 우상의 여식이면 뭐하누, 결국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자신인걸. 저에게 고개를 푹 숙이는 여인들의 정수리를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기껍고도 기꺼웠다.
그 시각 도운은 자신을 찾아온 익태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에 달아오른 도운의 몸이 땀에 푹 젖어갔다. 이제 초여름으로 들어선 더운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손에 든 목비녀를 노려보는 도운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어졌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고!”
“허나 사실이옵니다, 세자 저하.”
도운은 평온한 표정으로 사실이라 고하는 익태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목비녀로 쪽을 지던 모습이 미안하여 다른 비녀가 없느냐 물었던 자신에게, 제 아우의 선물이라 대답하던 청조가 생각났다. 혼인을 위해 아우가 직접 만든 소중한 비녀라 미소 짓던 청조의 뺨에 깊게 패이던 볼우물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그 소중한 물건이 왜 저의 손에 놓여 있는가. 분노로 부들거리는 입매에서 거친 숨소리가 쌕쌕 뿜어져 나왔다.
“모다 사실이옵니다. 돌아오지 않겠다, 그리 버티는 여인을 달래보았지만 소용없었사옵니다. 정녕 이별의 뜻이라, 그 목비녀를 소신에게 직접 전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이 말하길, 한 내관이 지시하였던 저의 본분이 모다 끝났으니 미련 없이 산을 떠났다 하였사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직접 찾아갈 것이니, 앞장서거라. 어디 있느냐?”
“세자 저하.”
“앞장서라 하였다!”
도운의 고함에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익태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용없사옵니다.”
“소용이 없다니?”
“이미 떠났사옵니다.”
“뭐…… 뭐?”
“그 여인 곁에 이미 다른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 사내와 함께 멀리 떠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한 내관에게 대가로 받은 재물로 새 삶을 시작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서안을 부숴 버릴 듯 내려치며 도운은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런 주군의 모습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던 여인의 모습이 겹쳤다. 그 계집도 저리 확신을 하며 아니라 부르짖었지. 흥, 기가 막혀 코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으시겠지만 예, 사실이옵니다. 저하, 신 주익태이옵니다. 그 긴 시각 저하의 곁을 지킨 저하의 친우이옵니다. 소신, 친우로서 그리고 충신으로서 목숨을 걸고 간언 드리옵니다. 제발 이제 정신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지금 조정에는 저하를 깎아내리려는 존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저하의 흠을 찾고자 하고 있사옵니다. 정녕 그들에게 저하의 흠을 보여 주고자 하시옵니까? 강건해지셔야 하옵니다. 굳건해지셔야 하옵니다. 그래야 이 궁에서 살아남으실 수 있습니다. 또다시 산으로 쫓겨나는 그런 수모를 겪으실 참이시옵니까?”
도운은 분노로 빨갛게 변한 눈으로 익태를 노려보며 부들거렸다. 밑도 끝도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저를 배신하였다는 청조를 믿을 수 없었다. 청조가 정녕 나를, 나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여인이 아니다. 손에 쥔 목비녀를 바라보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청조가 목비녀를 주었을 리가 없다. 그이에게 내가 따로 내어 준 물건이 있네. 진정 그 여인이 나를 떠나려 작정을 하였다면, 그것을 내어 주었을 것이야. 이따위 조악한 목비녀가 아니고!”
도운의 외침에 익태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내어 준 물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유추해 보았다. 여인에게 사내가 물건을 내어 주었다. 그렇다면 필시 장신구일 것이다. 허나, 어디서 장신구를 얻었단 말인가? 그 산에 틀어박혀 저의 도움 없이 여인의 장신구를 구할 방법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은장도. 그해 겨울 피를 토하다 죽은 유모상궁을 묻고 나서, 유모를 기억하려 남겨 둔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저승 가서도 예쁘게 치장하라, 저승길 노잣돈으로 다른 장신구들과 의복들은 모다 태워 버리거나 함께 묻어 버렸었다.
도운이 유일하게 곁을 내주었던 유모를 추억하려 남겼던 단 하나의 물건이 바로 은장도였다. 그해 겨울 차갑게 언 땅에 유모상궁을 묻으며 품에 갈무리했다고 하였었다. 은장도의 모양까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후에 도운이 자신에게 슬쩍 보여 주었던 단 하나의 유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낭패이지만, 만약 그것이 맞는다면 그의 마음에서 확실히 그 여인을 떼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익태는 모험을 선택했다.
“혹여 은장도를 말씀하십니까?”
도운의 눈이 놀라움에 커져갔다. 커진 눈을 발견한 순간, 익태의 눈썹이 간사하게 올라갔다.
“저하의 심기 불편하실까, 제 속에만 품고 말씀드리지 않으려 하였사옵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내어 주신 은장도가 하나 있으나, 이미 금전으로 바꾸었다 하였사옵니다. 새 삶을 시작하는 데 필요 없는 물건이라 세간에 보탬이나 하고자 처분하였다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은장도 대신 저에게 이 목비녀를 주는 것이라 말하였사옵니다. 목비녀와 은장도 이야기를 하면 틀림없이 저하께서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실 거라 그리 말하였사옵니다. 이제 만족하시옵니까?”
“…….”
“세자 저하, 정신을 똑바로 차리셔야 하옵니다. 지금 별궁에서는 삼간택이 이루어지고 있사옵니다. 삼간택이 끝나면 곧 정식으로 세자빈마마를 맞이하게 되십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미천한 여인은 이제 잊으시옵소서. 어차피 그 용도가 다 한 여인입니다. 저하에게 흠을 내고 괴롭히고자 의경 세자 저하께서 하명하시고, 한 내관이 고르고 골라 보낸 여인이옵니다. 알고 계시지 않으시옵니까? 정녕 이대로 그들의 수에 놀아나고 싶으신 것이옵니까?”
익태의 말이 귓가에서 어지러이 맴돌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리는 것이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나가라…….”
“세자 저하.”
“알았으니 그만 나가라!”
익태의 귓가를 스치며 날아간 벼루가 벽에 부딪히고는 조각조각 흩어졌다. 흥분하여 씩씩대는 도운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익태가 조용히 일어나 읍하고는 뒷걸음질했다. 제 주군의 격정적인 모습에 자신의 거짓말이 얼마나 큰일을 해내었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
암, 저가 매우 큰 일을 하였다. 제 주군을 위해, 곧 세자빈마마가 되실 제 누이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가문을 위해.
익태가 자리를 뜬 후, 목비녀를 강하게 움켜쥐고 부르르 떨던 도운은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서안 위로 풀썩 엎어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청조가, 청조가 자신을 배신하였다. 저만을 바라보던 여인이, 제 품 안에서 열락에 들뜨던 여인이 저를 홀로 두고 다른 사내의 품으로 떠나 버렸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 눈물로 읍소하던 여인이, 대풍창이 옮더라도 저를 고쳐주겠다던 청조가, 나를!
왜! 왜 나를 배신한 것이냐! 벌떡 일어난 도운은 손에 쥔 목비녀를 단숨에 부러뜨려 버렸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분노에 뒤집힌 까만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결국, 너도 그런 것이었느냐? 그 천한 창기년들 중 하나였느냐? 다른 사내까지 숨겨 두고, 재물에 눈이 멀어 그간 나를 속이고 기만한 것이야?
감히, 뉘가 너에게 네 본분이 끝났다 하더냐? 웃기지 말거라, 청조야. 네 본분은 네가 죽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내 아래에 깔려 노리개로서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이다.
마음에 치는 폭풍이 잠잠해질 수가 없었다. 매일 가슴에서 몰아치는 폭풍우에 귓전이 늘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귓전이 시끄러우니 도무지 잠을 이룰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친영례의 날이 밝았다. 도운은 벌건 눈을 하고 세자빈을 맞이하러 예화가 기거하고 있는 별궁에 도착했다.
오랜 절차가 끝나고 날이 어두워지자 이윽고 동뢰의 순간이 다가왔다.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궁녀들이 다가와 예법에 따라 술잔을 따르고 안주를 올렸다. 조금씩 몇 번에 걸쳐 술을 마시자 곤한 몸에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귓전에 왕왕 울리던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눈은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이윽고 동방으로 입실하여 조복을 벗고 예화와 마주 보고 앉았다. 도운은 어지러움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눈을 감았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많이 곤하십니까?”
도운은 갑작스레 제 몸을 만지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한 청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렴, 청조가 나를 떠날 리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죽거리더니 이내 미소가 지어졌다. 머릿속을 어지럽게 울리던 이명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평화에 눈가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왜, 왜 이제야 왔느냐? 내가 얼마나…….”
도운의 속삭임에 예화의 마음이 크게 동당거렸다. 아, 이 옥골선풍의 미남자가 저의 사내였다. 이 나라 최고 권력을 지닌 사내를 사로잡은 여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눈 속 가득 감출 수 없는 애모를 담고, 저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내의 모습에 예화의 마음은 녹아내릴 듯 설레었다.
“아앗!”
예화의 몸이 갑자기 번쩍 들리더니 곧바로 금침 위에 눕혀졌다. 조금의 여유조차 없이 옷고름을 잡아 뜯는 도운의 격정적인 모습에, 흥분으로 떨리는 예화의 작은 비명이 울렸다. 아아, 저를 탐하는 사내의 춘정이 아름다웠다. 그간 저를 보며 참아야만 했던 사내의 들끓는 욕정이 터져 버리는 이 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모른다.
미처 벗기지도 못한 저고리 사이로 겨우 어깨가 드러나자 도운은 예화의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다급히 제 목을 물어뜯는 사내의 머리통을 품에 안고 예화는 열락에 들뜬 신음을 흘렸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황홀함은 도운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는 순간 산산이 부수어졌다.
“저하?”
“우욱, 우욱!”
도운이 벌떡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며 걸어가 벽을 짚었다. 역한 냄새에 토기가 밀려왔다. 청아한 흙 내음은 어디를 가고, 여인의 지독한 분내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올라오는 토기에 그제야 제 아래에 깔렸던 여인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겨우 생각났다. 거짓말처럼 오늘 하루의 기억도, 지난 며칠간의 기억도 머릿속에 없었다. 우욱, 몰려오는 허탈함과 좌절에 토기가 더욱 올라왔다.
“저하, 저하, 왜 이러십니까?”
“그 손 치우거라!”
도운은 저를 보듬는 손길을 거칠게 밀어 버렸다. 사내의 강한 힘에 밀려 뒤로 벌렁 넘어간 예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도운을 바라봤다. 안에서 들리는 소란에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궁녀들이 두 분 마마의 망극한 모습에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세자 저하께서 벽을 짚고 토악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뒤로 나자빠진 세자빈은 정신이 나간 듯, 입만 뻐끔거리며 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하, 저하 괜찮으시옵니까? 어의를 불러라, 어서!”
“시끄럽다. 모다 물러가라!”
“저하, 곧 어의가 올 것입니다. 뭐하느냐? 어서 저하를 금침으로 눕히지 않고!”
“시끄럽다 하였다! 모다 물러가라 하지 않느냐! 저기, 저것도 당장 데리고 나가라! 어서!”
금침을 집어 던지며 호통을 치는 세자의 망극한 분부에 내관 이하 궁녀들이 모다 고개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어서 금침에 누우소서.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하는 목소리에 도운은 눈앞이 뱅글뱅글 돌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시끄러웠다. 도운은 붉은 눈으로 내관들을 노려봤다.
시끄럽게 빽빽거리는 저 내시 놈들을 모다 잡아서 장지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말리라.
노여움 가득한 눈으로 내관들을 향해 걷던 도운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저하, 저하, 시끄러운 내관들의 비명소리와 가슴에서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한데 섞여 윙윙거렸다. 이내 바람 소리가 점점 사그라지더니 눈앞이 까맣게 어두워져 버렸다.
* * *
그동안 성후가 좋지 않던 왕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왕의 침소 안이 타오르는 뜸 향의 냄새로 가득했다. 어둡게 침전된 왕의 마른 입술에선 가느다란 숨소리만 겨우 새어 나오고 있었다. 중전께서 연신 눈물을 흘리며 얼른 성후 회복되시라 간절히 읍소하는 모습을 도운은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세……자.”
“전하,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신첩이 보이십니까? 전하, 이리 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제발, 기운을 차려보소서. 저를 두고 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전하.”
“중전…….”
“예, 전하.”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전을 부르는 왕의 모습엔 이미 죽음이 서려 있었다. 그 죽음을 본 중전은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하아아아…… 중전. 부디 오랫동안, 즐거이 누릴 것 다 누리고 오세요. 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전하,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신첩을 두고 어디를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세자…….”
“예, 전하.”
“이리, 가까이.”
차가운 기운을 한 도운이 임금의 곁으로 다가갔다.
“세자만 남고, 다들 물러가 있으라.”
울부짖는 중전을 모시고 아랫것들이 나가자, 임금은 오래전 금기시됐던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혈아.”
“…….”
“너는 죄를 짓고 태어났다. 불길한 흉성을 지니고 태어나 네 형의 발목을 잡고…… 네 형의 운명과 생명을 갉아먹었느니라. 그것을 한시도…… 잊어선 아니 될 것이다.”
“…….”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좋은 왕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디 참회하는 마음으로…… 늘 네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하고, 또 수행하며 자신을 늦추지 말거라. 헉헉…… 그래야만 형의 자리를 뺏은 네 죄를 씻고…… 비로소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로서 마지막 부탁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닌 왕을 바라보는 도운의 눈은 싸늘했다. 죽어 가는 눈으로 저를 애타게 바라보는 왕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도운의 입이 열렸다.
“나의 죄? 소자의 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씀이시옵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전하. 소자의 죄가 아니옵니다.”
“뭐라?”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은 저였습니다. 그 난리를 치고도 죽어 버린 것이 형님이라면, 하늘에서 천자로 고른 것은 처음부터 이 몸이란 말씀이옵니다. 그러니 전하의 소중한 장자를 죽인 건 소자가 아니라 바로 전하이십니다. 되도 않는 자가 저의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으니, 하늘이 저에게 자리를 돌려주고자 의경 세자를 데려가신 것이옵니다. 참회라니요? 저승에 가시거든 염라대왕을 붙잡고 물어보시옵소서. 정녕 누구의 운명이 왕의 운명이었는지,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거든 소자를 핍박한 전하의 죄를 참회하시옵소서.”
왕은 가늘게 뜬 눈으로 힘겹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가득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아들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 분노조차 없었다.
“내 너의 어둠이 너무 커…… 그것이 참으로 두렵구나.”
“소자의 어둠을 이토록 키우신 것은 바로 전하이시옵니다.”
왕의 검게 변해 버린 입술을 비집고 헉헉거리는 거친 숨이 쉬지 않고 들락거렸다. 비틀린 어둠으로 가득 찬 아들을 보는 임금의 바랜 눈이 깊은 회한으로 물들었다.
정녕 왕의 운명은 처음부터 저 아이였던 것인지 이제 와 참으로 궁금했다. 처음부터 강건한 이 아이에게 왕세자의 자리를 내어 주었다면, 그랬다면 달라졌을지. 운명을 알아채지 못한 어리석은 저의 결정으로 인해, 저의 장자가 죽어 버린 것은 아닐지. 만약 선택을 달리하였다면, 저렇게 공허한 눈을 한 아들이 아닌 빛나는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지 참으로 궁금했다.
허나 모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저의 소중한 장자는 이미 죽어 버렸고, 자신의 목숨 또한 경각에 달렸다. 하지만 단 하나, 저리 망가진 아들의 모습에 이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어찌 되었든 보듬었어야 했는데, 저리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면 아니 됐었는데. 장자를 살리겠다고, 다른 아들까지 잃었다.
“그래, 네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 허억, 허억, 지켜…… 보겠다. 누가 옳은지…… 내…… 다…… 지켜…… 보겠다. 그러니…… 부디 노력…… 노력을, 어둠을…… 이겨야…….”
“…….”
“약속…… 약속을…… 어둠을…… 꼭 이기고…… 좋은 왕이…… 꼭 노력을, 너 역시 내…… 아들…… 내 아들인 것을…… 미안…… 하구나…….”
“…….”
마른 생선 껍질 같던 눈이 결국 감겼다. 이제 정녕 이 나라의 왕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깊은 산골에 틀어박혀 초목구부(草木俱腐)될까 노심초사하던 사내가, 이제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머리를 조아릴 왕이 되었다. 허나, 왕의 자리에 올랐어도 가슴에 뚫린 구멍은 메워지질 않았다. 청조의 배신 이후 생긴 구멍에서부터 쉴 새 없이 부는 바람에 늘 귓가가 시끄러웠다.
“으윽.”
윙윙, 점점 커지는 소리에 도운은 귀를 막고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도운의 입에서 간헐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버님께서 승하하셨는데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사방이 시끄러울 뿐이었다. 곧이어 들어온 내관이 ‘전하, 전하’하고 부르짖자 밖에서 대기하던 왕의 여인들이 달려 들어왔다.
중전, 나이 많은 후궁들, 한때 세자빈이었던 혜빈, 그리고 새로운 세자빈인 예화까지 모다 엎드려 전하를 부르짖으며 울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이 시끄러웠다.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귓가에 윙윙 울리는 이명이 날카로운 장침이 되어 귓속을 찌르는 듯했다. 비틀거리며 침전을 빠져나온 도운은 연못가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물비린내를 풍기는 연못으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전히 얼굴 없는 검은 사내가 물속에 비쳐 있었다. 이상하였다. 어찌나 지긋지긋했는지 제 손으로 직접 불에 태워 버린 검은 복면이었다. 그 복면이 다시 제 머리에 씌워질 일은 없는데 물속에 비친 사내는 여전히 검었다.
벗어날 수가 없다. 도운은 영원히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넘치도록 거하게 받는 수라상에서는 아무 맛도, 향도 느낄 수가 없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예화에게선 아무 욕정도 느낄 수 없었다. 저를 보며 형님을 그리워하는 모후에게는 동정을 느낄 수 없었다. 늘어져 버린 가죽 같은 모습으로 그 생을 마감한 부왕의 모습에선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깊은 어둠을 빼고 나면 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도운은 몸을 한껏 구부리고 킬킬거렸다. 너는 무엇이냐? 도대체 너란 인간은 무엇이냐?
‘저의 서방님이십니다.’
청조의 대답이 바람결에 속삭이다 다시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렇다면 왜 떠났느냐, 청조야. 나를 두고 왜 떠났느냐. 사무치게 그리웠다. 청조가 차려주던 소박한 반상, 정성으로 지어 올렸던 털배자, 함께 세답을 하고 돌아오던 눈길, 이슬을 머금은 산속 깊은 곳의 흙내, 저를 바라보던 순수했던 맑은 눈빛이 모다 그리웠다.
뼈가 저릿할 정도로 그리워하다 제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낯선 마음을 깨달았다. 이런 마음을 은애라고 하는 것인가? 은애하는 것이었나. 그리움이 사무쳐 스스로 망가질 정도로 그 여인을 은애하는 것이었어. 이미 남김없이 모다 내어 준 마음을, 모다 줄 수 없다 걱정하던 저 스스로를 비웃고 또 비웃었다.
저도 모르던 제 안 깊은 곳에 숨겨진 마음을 깨닫자, 그 감정은 순식간에 몸집을 키워 도운을 한번에 집어삼켰다. 날카롭고도 생생한 날것으로 다가오는 감정에 절망감과 배신감은 더욱 짙어졌다.
킬킬, 자조 섞인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이것이었소, 형님? 당신이 바란 것이 바로 이것이었소? 죽어 가는 몸뚱이로 나를 향해 쏘아댄 저주가 이것이었소? 당신의 생명을 갉아먹고 사는 아우를 그리 용서할 수 없었소? 이렇게 어둠에 잡아먹힌 채 폭군이나 되라 청조를 나에게 보내었소?
다시금 시끄러워지는 귓가를 부여잡은 도운은 스스로 이 어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절대 나 혼자만 이 속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벗어날 수 없다면, 모두 함께 끌고 들어가겠다. 모다 어둠 속에서 실컷 괴로워해 보거라!
도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더니,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었다. 귓가가 시원한 것이 사방이 고요했다. 도운은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바라보는 내관들을 서늘하게 쳐다보았다.
“가자.”
이제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너희를 어둠으로 끌고 들어갈 어둠의 왕이니라.
* * *
마당을 서성이는 중년 여인의 모습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반빗간에 들었다가 막 밖으로 나온 여인은 바가지에 든 물을 마당에 힘껏 뿌리고는 다시 반빗간으로 사라졌다. 삼 년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에 비해 건강이 무척 좋아지신 듯 보여 청조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어머니, 항상 건강하셔요.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다음엔 꼭, 꼭 인사 여쭐 것입니다.”
멀리서 집안을 훔쳐보기만 하던 청조는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아우들의 모습도 한 번씩 더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모두 어딘가 출타를 한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청조는 고향인 화성으로 돌아와 몇 번쯤 집 근처를 서성이며 어머니와 아우들의 모습을 한 번씩 훔쳐보았다.
집을 떠나고 늘 식솔의 건강과 살림이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이대로 떠나더라도 걱정이 없을 듯하였다. 마음속 근심과 죄책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청조는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렸다.
매서운 북풍한설을 온몸으로 맞서며,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태워 버릴 듯 작열하는 뙤약볕을 견디며 온 나라를 돌아다녔다. 엄동설한의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가며 북쪽으로 올라가 그 끝인 함경도까지 다녀왔다. 그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며 경상남도를 지나 전라남도 우수영까지 다녀왔다. 쉬지 않고 걸어 나라에서 안 가본 곳이 없었다. 풍문에 들리는 소문에 의지하며 떠돌다 전라남도에서 충청남도를 거쳐 다시 이곳 화성까지 올라왔다.
서방님을 찾아 그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이들의 말을 듣고 발걸음을 쉬지 않고 옮겼다. 몇 번이나 발톱이 빠지고, 발바닥이 다 터져 핏물이 흘러도 절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나라 구석구석을 돌며 화성까지 오는 두 해 동안 나라에 변고가 많았다고 들었다.
주상전하께서 승하하시고, 세자저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벌써 한 해하고도 반년이 흘렀다. 허나 새로운 전하께서 정사는 돌보지 않으시고 주색에 빠져 지내신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하여 지난 두 해 동안 연이어 대풍이 들었지만,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곤궁해지고 있다고 모두 한탄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왕위를 찬탈하려는 역당의 무리들이 발각되어 작금 조정에는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고 있다고 했다. 그간 나라를 돌며 기방이나 주막에서 품을 팔다 주워들은 이야기였다. 풍문에 떠다니는 정보를 얻기에는 기방과 주막이 가장 쉽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청조는 가끔 이런 곳을 찾아 품을 팔며 정보를 얻어들었다.
얼마 전 화성 인근에 위치한 고을에서 복면을 한 무리들이 화성으로 향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의지해 고향으로 돌아온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 혹시라도 복면을 한 이들 중 서방님께서 계실까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았지만, 복면을 했다는 무리들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대풍창에 걸린 이들이 마을에 들렀다 사람들에게 쫓겨 도성 쪽으로 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대풍창. 서방님께서 언젠가 자신을 가리켜 대풍창에 걸린 병자라면 어찌할 것이냐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혹시 만약, 그래,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여 병세가 심해지시어 저를 떠나신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지금쯤 큰 고통에 시달리고 계실 터였다. 병자들이 사람들에게 쫓겨났다는 말에 청조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청조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바로 짐을 꾸렸다. 그간 품을 팔며 이리저리 정보를 얻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곤 지체 없이 떠났다. 마을을 벗어나는 오솔길을 바삐 걷던 청조의 귓가에 어디선가 물 흐르는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니, 근처에 제법 크고 깊어 보이는 내가 나왔다.
“서방님…….”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이제 춘삼월로 들어섰으나, 뒤늦은 꽃샘추위에 아직도 냇가의 가장자리 쪽에는 살얼음이 맺혀 있었다. 차갑게 흐르는 물을 보니 서방님 생각이 간절했다. 겨우내 두껍게 얼어붙었던 계곡물을 깨고, 그 안에 들어가 저를 대신하여 세답을 해 주곤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 그리움이 가득 차올랐다.
“서방님…… 서방님!”
청조는 몰려드는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차갑게 흐르는 물을 향해 서방님을 부르짖었다. 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고 품속에 챙겨 들은 보퉁이를 더욱 소중히 품었다. 청조는 도운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면 털배자를 꺼내어 코를 박고, 그 안에 배여 있는 도운의 향을 들이마시곤 했다. 시간이 흘러, 배자에 스며든 도운의 향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하지만 이 순간, 두툼한 보퉁이를 뚫고 털배자에서 서방님의 향이 풍겨 오는 듯했다. 아마도 기억이 가져다주는 착각이리라. 하지만 착각이어도 좋고, 기억이어도 좋았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서방님의 향취가 그리움에 말라 버린 마음을 위로했다.
“서방님, 어디 계십니까? 대체, 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저를 이리 홀로 두고, 대체 어디를 가신 것입니까? 보퉁이에 얼굴을 묻고, 그리운 향에 취해 있던 청조의 눈에 결국 눈물이 아롱거렸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아롱대는 눈물을 닦아내었다. 이리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다 저 멀리 수면에서 검은 무언가를 발견한 청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서……방님? 서방님! 서방님!”
멀리서 둥둥 떠내려오는 검은 물체는 분명 사람이었다. 검은 도복에, 검은 복면을 한 사내의 체격은 도운만큼이나 크고 엄장했다.
“서방님! 서방님!”
다급히 뛰어든 얼음장 같은 물에 얼어붙은 살이 칼에 베인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청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사내를 향해 무거운 물길을 헤치며 걸어갔다. 오직 저 멀리 보이는 사내를 향하여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다. 물에 젖은 치마가 다리를 휘감으며 걸음을 방해했다. 생각보다 훨씬 깊은 냇물에 곧 목까지 잠겨 걸을 때마다 입안으로 물이 밀고 들어왔다.
“서, 서방님! 아, 서방님!”
입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물을 뱉어내며 둥둥 떠내려가는 사내를 향해 손을 힘껏 뻗었지만,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마음이 다급했다. 청조는 겨우 한발을 내디디며 손끝을 더욱 앞으로 내밀었다. 물결을 따라 떠가던 사내의 옷깃이 쫙 뻗은 손가락 끝에 겨우 잡혔다.
아! 잡았다, 잡았어!
사정없이 밀려드는 물을 퉤퉤 뱉어내며 청조는 손가락 끝에 힘을 바짝 주었다. 뭍으로 올라온 청조는 밭은 숨을 헉헉 내쉬며 사내를 살폈다. 코 밑에 손을 대 숨을 쉬는지 확인한 후, 팔목의 맥을 짚었다. 희미하게 팔딱거리는 맥을 확인하자 곧 울음이 터졌다.
“서방님, 서방님! 정신 차리십시오! 서방님!”
다급한 마음에 청조는 보퉁이에서 털배자를 꺼내어 사내의 몸을 덮고는 근처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와 불을 붙였다. 얼음장 같은 물에 얼마나 그러고 계셨을지 걱정이 앞섰다. 팔다리를 열심히 주무르는데, 손에 핏물이 배어났다. 크게 놀란 청조는 사내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자상을 입은 사내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서방님?”
상처를 살피는 청조의 얼굴에 점점 실망감이 비쳤다. 사내는 도운이 아니었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아니었다. 잠시 실망감에 주저앉았던 청조는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우물거리다 자상을 입은 사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청조는 서둘러 마른 영견을 꺼내어 사내의 자상을 꽉 묶어주고는 불을 더욱 크게 피웠다.
* * *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이튿날 저녁, 신음소리와 함께 사내의 눈이 떠졌다. 멍한 듯 풀려 있던 사내의 눈이 일순 커지더니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 일어나시면 아니 되십니다. 피를 많이 흘리셨으니 어지러우실 것입니다. 좀 더 누워 계십시오.”
“누구요? 누군데 나를 돕는 것이오?”
“소인이 기억 안 나십니까, 나리?”
저를 보며 소담하게 웃는 여인의 모습에 재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듯 곧 미간을 찡그렸다. 청조는 작게 미소 짓고는 뜨거운 미음을 한술 떠 입가에 대어 주었다.
“드십시오. 변변치 않은 것이지만, 드시고 힘을 내셔야 합니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지만, 피를 많이 흘리셨으니, 기를 보하셔야 합니다.”
나긋한 청조의 목소리에 재환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미음을 받아먹었다. 허나, 미음을 받아먹으면서도 낯선 여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풀 수가 없었다.
지난 며칠 저를 죽이려 달려든 이들 중에는 평소 저와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얼굴도 들어 있었다. 그러니 얼굴도 모르는 여인의 친절을 믿을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화성입니다. 나리께서 화성에 오신 것은 기억하십니까?”
“그래, 내 기억하네. 분명…… 아.”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내 자상을 입고 물에 빠진 것까지는 기억하네.”
“예, 물에 떠밀려 가시는 것을 소인이 발견하여 건져 올렸습니다.”
“자네가?”
“예.”
그러고 보니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에 섞여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아녀자의 몸으로 저 얼음장 같은 물에 뛰어들어 저를 구하고, 지금까지 보살폈다는 소리에 재환의 의심이 커져갔다. 무엇을 위하여? 왜? 의심스러웠지만, 머리가 어지러워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를 아는가?”
“예, 나리. 나리를 구하고 물에 젖은 복면을 벗기어 면부를 뵈었습니다. 사정이 있으시어 쓰고 계신 줄은 알지만 아직은 차가운 날인지라, 그러다 고뿔이라도 걸리실까 제가 벗기었습니다. 송구합니다.”
“목숨을 빚졌는데, 그깟 복면 벗긴 것이 대수겠는가?”
쌕쌕거리며 작게 소곤거리는 재환의 말에 청조가 배시시 웃었다.
“목숨을 빚진 것은 소인이지요. 나리께서는 기억을 못 하시는 듯싶지만, 전에 소인을 구해 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내가?”
“예, 재작년 단오쯤이었습니다. 혹여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낯선 사내들에게 위협받고 있던 저를 구해 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두 해 전, 청조는 익태의 집 앞에서 몇 날 며칠을 서성이며 익태를 기다리다 결국 매몰차게 쫓겨났다. 아무리 읍소하고 간청하여도 익태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에게서는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도운을 찾아 도성을 떠나던 날, 인적이 뜸한 고갯길에서 저를 해하려 하는 낯선 사내들을 만났다.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가오는 순간 정체 모를 사내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산에서 보았던 그들이었다.
저를 노려보는 한 사내의 오른쪽 눈동자가 근소하게 자신을 비껴가고 있었다. 산에서의 그날, 그들 중 사시안을 가지고 있던 사내가 딱 저런 눈동자로 저를 보며 킬킬거리던 것을 청조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왜 해하려 하는 것인지, 익태의 의중을 정확히 알 길은 없었다. 저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사내를 피해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다 재환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때, 종사관 나리가 아니셨다면, 쇤네가 이렇게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 내 이제 기억이 나네. 그때 친정어머니의 병문안을 다녀오다 변을 당하였다 하였지. 그때 그 여인이 자네인가?”
“예, 그렇습니다. 나리.”
쌕쌕거리며 가는 숨을 쉬던 재환은 가늘게 뜬 눈으로 청조의 얼굴을 더 면밀히 살피고자 하였지만, 결국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1권 끝. 다음권에 계속>
구름을 비추는 새벽 1권
ⓒ 2017, 5月 돼지
이 책은 (주)북팔이 작가와의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본사의 서면 허가 없이는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발행일 2017년 12월 22일
지은이 5月 돼지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년 3월 25일
홈페이지 novel.bookpal.co.kr
블로그 blog.naver.com/bookpalbooks
작가 소개
필명 5月 돼지
봄부터 여름, 특히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빠져나가는 순간이 제일 좋은 작가. 그런 계절 아래, 아이스 커피 한 잔이면 하루가 행복합니다.
책 소개
구름을 비추는 새벽
나의 어둠을 밝히는 너,
“청조야, 나를 이리 홀로 두고 도대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연이은 흉년, 하루 끼니조차 해결하기 쉽지 않은 청조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년의 사내가 찾아와 첩의 자리를 주선한다. 어머니의 약값과 아우들의 생계를 위해 결심을 한 청조는 낯선 사내를 따라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앞으로 함께 할 서방님을 만나지만... 온통 비밀투성이에 검은 복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내, 도운은 청조를 욕정받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능욕한다.
목차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