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해가 저무니 어둠이 내리네
“하아, 하아.”
청조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산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사내들을 피해, 나뭇가지에 뺨을 긁히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 앞을 향해 무조건 달렸다. 산을 방문한 낯선 사내들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청조의 눈에 마침내 목표로 하던 곳이 보였다.
절벽 끝 아슬아슬하게 자라 있는 소나무 한 그루, 저 소나무를 조심스럽게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면 몸을 뉘일 만큼의 공간이 나온다. 절벽 아래에 있기 때문에 겉에서 봤을 때는 절대 알아볼 수 없는 비밀스런 공간이었다. 청조는 송이버섯을 캐다 우연히 발견한 그곳으로 서둘러 내려가 몸을 뉘었다.
“이것이 어디로 사라진 것이야?”
절벽 아래를 바라보던 사내가 요란하게 침을 뱉어내며 짜증을 냈다. 절벽 아래, 푸릇푸릇 연한 잎새로 가득 덮인 나무숲을 목을 빼가며 살펴보다 미간을 구겼다.
“아래로 떨어졌나?”
“글쎄, 분명 이곳으로 사라졌는데, 더 이상 갈 곳도 없는데. 고년이 사람 성가시게 하는구먼.”
“그러게, 꽤 곱상한 것이 재미 한번 보려고 했는데 말이야.”
“예끼, 이 사람이. 머릿속이 그 짓으로 꽉 차 있기는.”
“흥, 아닌 것처럼 굴어도 자네도 은근 원하지 않았는가? 반듯한 척 말게.”
“됐네. 농은 그만하고, 저쪽으로 좀 더 둘러보게.”
사내들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 낄낄거리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발치 아래로 움푹 패여 있는 공간 안쪽에 납작 엎드린 채, 청조는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갈까 너무 두려웠다.
“이제 어쩌지?”
“어쩌긴, 이것이라도 있으니 되지 않았나? 도망치다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면 뭐 어쩌겠는가?”
“하긴, 그렇긴 하지.”
“이미 많이 늦었으니 그만 가세.”
사내들이 떠나고도 청조는 자리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서방님 걱정에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저들이 무어라 하였지? 벌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몇 시진 전만 해도 쑥을 캐고 있었다. 부쩍 따사로워진 날씨에 산 전체가 풀 냄새로 진동했다.
서방님께서 이른 봄에 올라오는 연한 냉이와 두릅 넣은 된장 조치를 좋아하시니 마음이 급하여 망태기를 들고 급히 나왔다. 이른 봄이라 겨우내 굶었던 난폭한 산짐승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며 한사코 말리던 서방님 몰래 나온 참이었다. 지게꾼 사건이 있고 나서, 도운은 청조를 혼자 두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이 험한 산중에 누가 있다고 세답을 하러 나갈 때에도, 텃밭에 이랑을 만드느라 괭이질을 하러 나갈 때에도 도운은 청조를 따라나서 세답이며 괭이질을 늘 함께했다. 점심을 물리고 도운이 잠시 서책을 읽는 사이, 청조는 혼자 망태기를 들고 몰래 길을 나섰다. 아니라면 서방님은 분명 또 저를 따라 나오셨을 것이다.
오리 새끼마냥 제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서방님과 함께하는 것은 즐거웠으나,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이 더뎠다. 얼마 전에도 함께 나물을 뜯으러 나왔지만, 망태기 안에는 도운이 뭉텅이로 뽑아 넣은 잡초가 한가득이었다. 잡초와 작은 돌멩이를 골라내는 일은 나물을 캐는 일보다 시각이 더 지체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도운 몰래 빠져나온 청조는 냉이와 두릅만 조금 캐서 서둘러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쑥이며 고비, 씀바귀에 더덕까지 지천에 널린 봄나물을 보니 욕심이 생겼다. 얼마나 시각이 흘렀는지, 한참 연하게 올라온 그것들을 캐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저의 뒤에 나타난 사내들이 뭐라 하였던가. 이제 다시는 서방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네 서방은 너를 버리고 진즉에 산 아래로 내려갔다.”
“서방님께서 그럴 리가 없소! 당신들은 누구요? 대체 내 서방님을 어찌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청조의 외침에 두 사내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킬킬거렸다. 저를 보는 그들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중 한쪽 눈동자가 살짝 비껴 있는 눈을 무섭게 번들거리며 저를 잡으려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오금이 저려 왔다.
“어찌 알긴. 우리가 어찌하기도 전에 널 버리고 진즉에 도망갔다 하지 않았느냐?”
음흉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다가오는 사내들의 모습에 청조가 들고 있던 호미를 휘둘렀다. 엉성하게 휘두른 호미질이 운 좋게도 사내의 손등에 상처를 남겼다.
“이것이!”
사시안을 가진 사내가 손을 잡고 주춤하는 사이 청조는 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 도망가는 여인을 향해 뻗은 사내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며 청조의 머리에서 비녀를 뽑아갔었다.
차가운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청조는 쪽 댕기에 묶여 덜렁거리는 머리 타래를 쓸어 보았다. 아우가 선물해 준 목비녀가 없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을 반추하던 청조는 그제야 정신이 확 돌아왔다.
서방님!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서방님께서는 절대 저를 두고 가시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저의 존재가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도구라 하여도 저를 두고 가실 분이 아니다. 마음 한 자락일지라도, 분명 서방님께서는 저를 허락하셨다.
청조는 서둘러 절벽 옆에 뿌리를 박고 있는 나무를 타고 위로 기어 올라갔다. 한참 전 자리를 뜬 사내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을 숨겨 가며 초가로 향하였다.
“도대체 왜 아직 아니 돌아오는 것이야? 벌써 몇 시진이 지났는데.”
도운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벌써 나간 지 두 시진(4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청조는 아직도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내 그리 혼자 나가지 말라고 일렀거늘. 혹 산짐승이라도 만난 것은 아닐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마음이 급해진 도운은 익태를 향해 소리쳤다.
“보낸 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떠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게. 청조가 아직 오지 않았어.”
“대군마마, 이는 어명이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각이 없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지금 주상전하께옵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기다리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 도운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익태의 재촉에 마음속 불안이 점점 커졌다. 도대체 왜 안 오는 것이야, 왜!
“대군마마. 소신 이렇게 간청드리옵니다. 주변을 보소서. 대군마마께서 이 이상 지체하시면,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로 치도곤을 당하는 것은 저들입니다. 해시(亥時:오후 9시~11시)가 지나기 전, 궁에 당도하셔야 합니다.”
도운을 부르는 익태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도운은 저를 재촉하는 제 오랜 친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약 두 시진 전,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고 온 친우는 이제 저를 대군마마라 부르고 있었다.
형님께서 승하하셨다. 그간 무수한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던 형님께서 병환으로 승하하셨다. 지난 가을 세자 저하의 예후가 좋지 않다던 예화의 말대로 정말 죽어 버렸다. 허나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홀로 나간 청조가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망태기가 없는 것을 보아선 저 몰래 봄나물을 뜯으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데려가야 한다. 데려가야만 했다. 이후의 일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대로 궁에 끌려가거든 아바마마께서 자신을 어찌하실지 자신도 몰랐다. 저의 탓으로 형님이 죽었으니 아마 저를 죽이려 하실지도 몰랐다. 이후로 저의 신변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청조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산에 홀로 남아 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죽든지 살든지 무조건 함께 있어야 했다.
“대군마마, 벌써 반시진이나 더 기다리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가셔야 하옵니다. 여인이 돌아오거든 소인이 말을 전하겠사옵니다.”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도운을 향해 익태가 간청했다.
“대군마마, 제발.”
“갈 것이네! 그러니 데려오게.”
“예?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까? 설마 궁으로 데려오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역정, 불안, 그리고 확고함으로 가득 찬 도운의 눈이 익태를 향했다.
“데려와.”
“…….”
“궁으로. 내 곁으로.”
“알겠습니다, 마마. 소신, 명을 따를 것이니 이제 더 이상 지체 말고 떠나셔야 합니다. 한시가 급하옵니다.”
꽉 말아 쥔 도운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결심한 듯 채교에 올라탔다. 도운이 올라타자 교군 넷이 벌떡 일어나 첫 걸음을 바삐 내디뎠다.
“잠깐.”
건장한 장정 넷이 걸음을 멈추자 번뜩거리는 안광이 익태를 향하였다.
“꼭 데려와.”
“신, 대군마마의 명을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공작 깃털이 멋들어지게 장식된 검은 전립을 쓴 무관이 칠흑 같은 비단 전복을 휘날리며 장정들을 통솔했다. 그의 통솔 아래, 채교를 어깨에 멘 교군과 그 주위를 에워싼 무관들이 줄을 이어 떠났다. 그 뒤에 서서 허리를 굽혀 읍하던 익태가 비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데려오라니, 그런 더러운 것을 데려오라니요. 그건 절대 아니 될 말씀이시지요.”
번뜩이는 눈으로 멀어져 가는 일행을 바라보고 있자, 근처에 숨어 상황을 주시하던 집안의 무사들이 돌아왔다.
“어찌 되었느냐?”
서늘한 눈으로 흘겨보는 익태에게 두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게,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확실한 것이냐? 시체를 확인하였느냐?”
“그것이 시체를 확인한 건 아닙니다만…… 절벽 아래로 어찌나 숲이 무성한지, 소인들의 두 눈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허나…….”
무사 중 하나가 품에 갈무리해 두었던 목비녀를 꺼내 익태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그 계집이 하고 있던 비녀입니다, 주인나리.”
“흐음, 그래.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살아남기는 힘들겠지.”
“예, 분명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높이였습니다.”
흐음, 손때가 묻어 있는 목비녀였다. 도운이라면 필히 그 계집의 물건임을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익태는 번뜩이는 눈으로 목비녀를 바라보다 소맷부리 안으로 물건을 잘 갈무리하였다.
“오늘 일이 절대 새어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순간부터 이 비녀의 모습도, 그 계집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에서 지우거라. 그것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지껄이는 순간, 네놈들 묏자리를 알아봐야 할 것이야. 내 말 알아듣느냐?”
“예, 주인나리.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내 너희들을 믿는다. 허나 혹시 모르니 이곳에 남아 기다리거라. 혹시라도 살아 있다면 필시 초가로 돌아올 계집이다.”
“예, 알겠습니다.”
* * *
몸을 숨겨 가며 겨우 초가로 돌아온 청조는 평상에 누워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근처에 몸을 숨기고 집안을 훔쳐보니 저를 따라다니던 사내 둘이 마당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서방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청조는 어둠이 내리면 산을 돌며 봄나물이나 더덕 등을 캐어 먹고는 낮에는 절벽 아래 공간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절벽에서 올라오는 습한 냉기에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파왔지만, 사내들에게 들킬까 꼭 숨어 있었다. 그러다 이른 새벽에 초가에 몰래 들어가 어둠을 헤치며 도운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도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섬돌 위에 놓인 낯선 흑혜 두 켤레를 확인하고는 다시 숲으로 숨기를 반복하였다. 사흘쯤 지난 어느 날부터 사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겨우 초가로 돌아왔다. 그제야 마당 가득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들을 발견했다.
“서방님, 서방님!”
초가의 방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광과 반빗간, 뒷간까지 모다 샅샅이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도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방님께서 무슨 봉변을 당하시어 어떤 급박한 일에 연루되신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해야 하나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마당 한복판을 서성이던 청조는 정신이 나간 듯 자리에 풀썩 쓰러져 앉고 말았다.
어찌해야 하나. 어디에 도움을 구해야 하나. 관에는 갈 수 없었다. 성함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사연 있는 분이었다. 왜 이 산에 흘러들어와 복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분에 관해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또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숨어 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관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익태 나리! 그래, 그분에게 알려야 한다. 그분 외에는 방법이 없다. 손가락을 세며 가늠해 보니 지게꾼이 다녀간 지 얼추 한 달이 되었다. 이삼일 내로 그가 산에 오를 것이다. 그래, 지게꾼이 오면 그를 따라가 익태 나리를 만나자. 그분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이 보이자 청조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벌써부터 싸리문에 매달려 지게꾼을 기다렸다.
하지만 올 거라 믿었던 지게꾼은 닷새가 지나가도록 오지 않았다.
그가 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청조는 오늘도 싸리문을 부여잡고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이 시각에도 서방님께서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어떤 역경에 빠지시어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닌지 너무 걱정되어 입술이 바짝 말랐다. 목을 길게 빼고 올라오는 길을 바라봤지만, 오늘도 인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청조는 좌절감에 자리에 그대로 무너졌다.
‘으윽’, 속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입을 막고 울음을 참던 청조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밥이 익어가는 사이 광을 뒤졌다. 사내들이 집을 이용하는 동안 먹어 치운 것인지 서방님께서 좋아하시던 육포며 곶감 같은 주전부리들은 모다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양식이 될 만한 것들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청조는 먹을 수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다 끄집어 내왔다. 김이 펄펄 올라오는 밥을 둥글게 말아 소금으로 간하여 대충 주먹밥을 만들곤, 곧 짐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먹을 것 외에 별로 넣을 것은 없었으나 빠진 것이 없는지 다시 한번 점검했다.
얼추 정리가 되자 청조는 마지막으로 도운이 기거하던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를 위해 만들었던 털배자를 가지고 나왔다. 배자에서는 아직 서방님 향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배자에 얼굴을 묻고 올라오는 울음을 삼킨 청조는 옷을 곱게 개어 짐에 넣었다. 모든 짐을 다 꾸리자마자 지체 없이 일어섰다.
아무도 없는 빈 초가이지만, 누구도 오지 않을 초가이지만 싸리문을 단단히 고정하고 초가를 돌아보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의 기억이 물밀 듯이 떠올랐다. 처음 초가에 올라 뵈었던 서방님의 모습, 고통스럽기만 했던 첫날밤. 예화 아가씨의 다리를 주무르며 느꼈던 자괴감과 저를 위로해 주던 따뜻한 아궁이.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서방님과 함께 행복했던 기억들이 가장 선명하게 떠올랐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마침내 청조를 가득 채웠다.
청조는 싸리문 너머로, 함께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곶감을 빼 먹던 마루를 한참 바라보았다. 어디 계십니까, 서방님. 청조는 아프도록 눈을 꼭 감고 싸리문을 잡은 손에 머리를 기댔다. 꼭 돌아올 것이다. 서방님을 찾아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함께 돌아와 이 문을 열 것이다. 싸리문에 대고 굳게 다짐을 한 청조는 미련 없이 돌아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아직 소식이 없는가?”
“주 교리 나리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아직이옵니다.”
“사람을 보내라.”
“송구합니다, 대군마마. 왕명이 지엄하신지라, 대군마마의 뜻을 받잡기가 어렵사옵니다.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
도운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말라비틀어진 내시 놈을 노려보았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며 저를 쥐 잡듯 몰아 이 전각에 가두어 놓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이었다. 그간 초조함에 불안함까지, 다스리기가 힘들 정도로 도운의 마음은 몹시 어지러웠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셨다는 주상전하의 얼굴은 아직 뵙지도 못했다.
저를 이곳에 가두어 놓는 아바마마의 의중을 헤아리기도 쉽지 않거니와, 이제껏 소식 한 자락 없는 익태의 부재에 목이 타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청조의 부재에 목이 탔다. 지금 어찌하고 있을지, 얼마나 놀랐을지, 청조에 대한 염려가 끊이질 않아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입실을 고하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대군마마, 근정전으로 납시라는 전하의 명이옵니다. 어서, 어서 채비하시지요.”
“흥, 다 늦은 이 시각에 뭔 일로 부르신다더냐?”
“대군마마, 그 무슨 불경한 언사이시옵니까? 누가 들을까 소인이 몹시 두렵나이다. 부디 말씀을 가려 하시옵소서.”
“되었다. 앞장이나 서거라.”
전각을 나서자 내관이 달려와 등을 비추어 앞길을 밝혔다. 저벅저벅, 고요함이 감도는 궁궐 내 퍼지는 발걸음 소리 사이로 어디선가 비릿한 물 냄새가 풍겼다. 습습한 봄밤에 퍼지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작은 개천을 따라 곱게 잔다듬한 돌들로 만든 금천교를 건넜다. 그 앞에 웅장한 모습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근정문이 아가리를 벌리고 저를 삼킬 듯 서 있었다.
근정문을 지나자 멀리 이중 월대 위에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에 은은하게 밝혀져 있는 불빛이 보였다. 이 시각, 자신의 아버지는 저를 개인 공간인 강녕전이 아닌 왕의 집무공간인 근정전으로 불러들였다. 도운은 근정전을 향하여 한 발짝 내밀었다. 박석을 깔아 만든 월대를 지나, 육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돌계단을 차례로 올랐다.
이윽고 근정전의 육중한 문이 열리자, 붉은 용포에 감싼 임금이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화려한 황룡 두 마리가 춤을 추고 있는 천장 아래, 크고 웅장한 어좌에 앉아 있는 임금의 모습은 어둡고, 마르고, 창백하였다. 어좌에 기대어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있던 임금은 도운의 등장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결국, 네가 왔구나. 네 형제를 잡아먹고 결국 네가 여기까지 왔어.”
고통스럽게 짓이기는 목소리가 텅 빈 근정전에 울렸다. 드디어 고개를 든 임금의 붉게 충혈된 어안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넓게 퍼져 있었다. 홀쭉하니 패인 두 뺨 위로 검게 퍼진 검버섯, 갈라진 마른 입술 사이로 힘에 부친 듯 쌕쌕거리는 밭은 호흡이 느껴졌다. 도운은 어릴 적 기억 속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병들고 쇠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참으로 불경한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아들의 눈빛에 임금의 용안이 더욱 수심으로 가득했다. 저 아이를 이대로 용상에 올려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근심이 깊어진 임금은 어수로 다시 이마를 짚고 어좌에 기대었다. 그날, 차라리 저 아이를 죽였다면 어떠했을까. 차라리 그리하였다면, 어질고 바른 나의 장자가 그리 고통받다 허망하게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마 끊어내지 못한 저의 부정이 작금의 일을 초래한 것이다. 스물두 해 전, 제 형의 발목을 잡고 태어난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임금은 마른 생선 껍질 같은 눈을 감았다.
* * *
일식이 있던 날이었다. 아랫것인 달이 왕의 상징인 해를 가리고, 음이 양을 삼키고, 사특한 것이 귀한 것을 더럽히는 날. 흉조가 최고조에 이르는 가장 불길한 날이었다. 교만한 신하로부터 왕을 구하고, 음양의 조화를 바로잡고, 천하고 사특한 것을 물리치기 위해 구식례가 열렸다. 임금을 비롯한 백관들이 소복을 입고 해를 향해 기도를 드렸다.
근정전 좌우로 온갖 악기를 벌려 놓았으나 풍악은 울리지 않고 북소리만 둥둥 메아리쳤다. 이내 왕이 해를 향해 절을 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배를 잡고 쓰러진 중전은 산실청으로 급히 옮겨졌다.
“아아아아악!”
“마마, 마마! 힘을 더 주십시오. 다 되었습니다. 머리가 보입니다! 마마!”
고통스런 비명이 퍼붓는 빗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시진이나 계속되는 산고에 기진맥진할 즈음, 드디어 머리가 보인다는 내의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아악!”
“나오십니다. 나오십니다! 왕자 아기씨이십니다! 왕자 아기씨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마지막 힘을 모두 쥐어짠 중전의 신음이 절규하듯 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왕자 아기씨가 탄생하셨다. 하필 일식이 일어난 날 태어나신 것에 대한 불안이 있었지만, 불안은 곧 기쁨에 치여 멀리 날아갔다.
“왕자 아기씨께서 금일 해를 구하신 것이 아니십니까? 해를 구하고자, 예정보다 일찍 오신 것이십니다.”
“맞습니다! 그런 것이 틀림없습니다. 분명 성군이 되실 것입니다! 성군께서 태어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두들 기뻐 떠들었다. 오랜 세월 왕자를 기다리던 늙은 왕께서도 밖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기쁨의 눈물까지 보이셨다.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왕실의 반석이 단단하게 이룩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왕자 아기씨의 탯줄을 끊던 의녀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어갔다. 의녀는 공포에 번쩍 뜨인 눈으로 왕자 아기씨의 발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왕자 아기씨의 발목에 돌돌 감긴 채 안에서 딸려 나온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보기에는 분명 탯줄 같은 이것이 정녕 탯줄이 맞는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안에서 나온 탯줄은 두 개였다. 하나는 분명히 왕자 아기씨 배꼽에 붙어 안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왕자 아기씨의 다리에 말려 나와 그 끝이 다시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콰과광!
하늘을 두 쪽으로 나눌 것 같은 엄청난 천둥소리에 내의녀들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왕자 아기씨의 발목에 감긴 탯줄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지경인데, 갑자기 내리치는 천둥번개에 말 못 할 공포심이 번졌다. 지붕이 무너질 듯 쉬지 않고 울리는 천둥 사이로 중전의 비명이 시작됐다.
“아아아악!”
다시 울리는 중전마마의 비명에 내의녀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다시 산도가 열리고 검은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은 머리만 보이고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이미 첫 번째 분만에 힘을 모다 써 버린 중전은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내보낼 힘이 부족했다. 몇 번이나 정신을 놓친 끝에, 듣기에도 괴로운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와…… 왕자, 왕자 아기씨이십니다.”
왕자 아기씨의 탄생을 알리는 의녀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순간, 거짓말처럼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두 얼굴이 완벽하게 똑같은 쌍생아였다. 쌍생아란 불길하고 사악한 존재로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한데, 대군의 탄생은 그저 불길한 정도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부정한 쌍생아의 탄생이었다. 일식이 일어난 날, 폭풍우를 몰고 온 불길한 탄생이었다. 거기에 제 탯줄로 형님의 발목까지 붙들어 맨 또 다른 아기씨의 존재는 그야말로 사악하고, 흉하고, 부정한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제야 일식의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감히 신하여야 할 차남이, 왕이어야 할 장남의 권능을 약탈하고 욕보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음이 양을 더럽히고 달이 해를 가리는 꼴이었다. 그 교만하고 발칙한 존재에 하늘도 노하시어 대지를 흔들 정도로 강한 천둥번개를 내리신 것이었다. 두 번째 왕자마마를 보는 모두의 눈이 싸늘했다.
먼저 태어날 제 형님의 탄생을 막아 보고자 탯줄로 발목까지 잡았음에도 결국 뒤를 이어 태어난 것이 억울하기라도 하듯 갓 태어난 왕자 아기씨의 울음소리는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세자 저하가 되실 원자마마의 울음소리는 가늘어진 빗소리보다도 작고 연약했다. 그것에 대해 모두들 달과 싸우다 지친 해가 기력을 잃은 것이라 생각했다.
불길한 탄생의 순간이 전해지자 조정 신료를 비롯한 민가의 백성들조차 삼삼오오 만나면 흉조에 관해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나라에 큰 재난이 일 거라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대군의 존재에 관해 왕의 근심이 깊어지던 때, 소격서 제조를 필두로 대신 몇 명이 사정전에 들었다.
“천문의 흐름이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관상감에서 장계가 올라왔사옵니다. 왕위를 위협하는 객성이 어느 때보다도 밝게 빛을 내고 있다 고하였습니다. 객성이 붉게 타오르며 자미마저 삼키려 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필시 흉조 중의 흉조를 지니고 태어난 왕자 아기씨이옵니다. 왕위를 위협하고, 나라에 변고를 가져오실 분이시옵니다. 성수청의 국무 역시 불운을 점쳤다 하옵니다.”
“전하, 대군마마를 이대로 두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쾅! 서안을 거세게 내리친 왕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씩씩거렸다.
“지금 무슨 말들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그게 정녕 무슨 뜻인가? 지금 나에게 내 아들을 죽이라 명하기라도 하라는 것인가!”
“전하, 국본을 바로 세우고 원손마마를 지키는 길이옵니다. 원손께서 누구시옵니까? 곧 세자 저하가 되실 분이십니다. 태어나실 적 이미 성군이 되실 거라 하늘에서 그 징조까지 보여 주신 분이시옵니다. 다시없을 성군의 자질을 짙게 타고 난 분이시옵니다. 성군이 되실 원자마마를 지키셔야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이것들이 점점 점입가경이로구나. 시끄럽다! 다들 물러가라!”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통촉’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이제는 조정 신료들마저 통촉하여 달라며 저를 졸라댔다. 괘씸한 것들이, 감히 뉘의 아들을 죽이라고 저 지랄들인가! 왕의 체통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욕설이 가득 차올랐다. 왕의 나이 지명(知命:50세)을 넘긴 지가 벌써 다섯 해, 늦은 나이에 겨우 본 아들들이었다.
지난해 생을 마감한 중전과 많은 후궁을 두었지만, 그 누구도 이 나라 종묘사직의 뒤를 이을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걱정이 쌓이던 때, 새로 맞이한 젊은 중전의 회임 소식은 한 가닥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그렇게 얻은 귀하고 귀한 아들들이었다. 고된 산고를 치르고, 아직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어린 중전은 왕을 보며 아들을 지켜 달라 눈물로 읍소하였다.
부정도 이리 찢어지는데 모정은 얼마나 견디기 힘이 들 것인지, 왕은 그 마음을 헤아리기도 쉽지 않았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 입들 다물라! 다시 한 번만 통촉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 보거라. 감히 아비에게 아들을 죽이라 청하는 것들의 주리를 내 이 몸이 직접 틀어주마. 너덜너덜해진 그 몸을 거열하여,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린 다음 육조 거리에 골고루 뿌려 개밥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육조 거리에 널려 개밥이 되고 싶거든, 언제든 통촉하여 달라 말하라!”
붉게 빛나는 형형한 안광으로 신료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왕이 어좌 밖으로 몸을 쭉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어좌를 탁탁 쳐대며 과연 누가 말을 할까 고개를 쓱 내밀고 신료들을 바라보니, 그 두려움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젊은 시절부터 성정이 매우 괄괄하고 자비가 없는 왕이었다. 왕의 젊은 날을 기억하고 있는 조정 신료들은 두려움에 억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억지로 신료들의 입을 봉해 버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심은 기울었다.
원자에게는 옥돌과 같이 귀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성군이 되라 영(瓔: 옥돌 영)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 주었다. 모두가 불길하다고 말하는 대군에게는 불길이 아닌 기쁨의 존재가 되라 혈(娎: 기쁠 혈)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허나 같은 이(李)씨를 받아, 같은 얼굴을 한 아이들이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아들들의 얼굴은 놀랍도록 같으면서도, 또 놀랍도록 달랐다. 똑같은 눈, 똑같은 입, 똑같은 코를 달고서도 하나의 얼굴은 백지마냥 창백하고 앙상한 것이 보기에도 안쓰러웠고, 다른 하나는 혈색이 밝고 강골인 것이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지니었다.
매일 아침 조강에 들어가기 전, 창백한 얼굴로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던 세자는 간혹 비틀거리기도 하였고 곧잘 넘어지기를 잘하여 근심을 쌓게 했다. 세자의 다리가 꺾여 넘어질 때면, 왕은 세자의 발목을 뚫어지게 쳐다보곤 했다. 탄생의 순간 영의 발목에 감겨 있었다는 혈의 탯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왕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소격서 제조가 끊임없이 혈의 불길함을 지적했다.
“두 분께서는 함께 있으시면 아니 되십니다. 객성인 대군마마께서 자성인 세자 저하를 삼키고 있으니, 세자 저하께서 나날이 양기와 운을 빼앗기고 계십니다. 하루바삐 두 분을 떼어 놓으셔야 합니다.”
일곱 해가 지나고, 왕은 결국 고작 여덟 살인 혈을 출궁시켜 버렸다. 대군을 이제까지 돌봐오던 늙은 유모상궁만 딸려 당시 소격서 부제조로 있던 주청점(僉正:종4품직)의 집으로 보내 버렸다. 혼인도 하지 않은 어린 대군을 어찌 출궁시킬 수 있느냐 울며 읍소하는 중전의 청에도, 저를 보내지 말아 달라 울며 매달리는 대군이 청에도 어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단지 나날이 창백해져 가는 세자의 안위가 걱정될 뿐이었다.
대군의 출궁 후, 점점 밝아지는 세자의 얼굴빛을 보자 한시름 놓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흐르자 세자의 얼굴빛은 종이보다 희고 창백해져 갔다. 그리고 평소 자주 넘어지던 세자의 쇠약한 다리에 어느 날 마비가 찾아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분명 네가 세자와 대군을 떼어 놓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이야! 세자의 다리를 보아라! 네 이놈이 감히 나에게 거짓을 고하고 능멸을 해!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전하, 전하. 소신의 말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지금 사저로 나가 계신 대군마마의 기가 너무 강하옵니다. 원래 하나로 태어나셨어야 할 분이 두 분으로 나누어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 세자 저하와 대군마마는 하나의 운명을 반씩 나누어 가지고 계신 것이나 다름이 없나이다. 그 증거로 두 분 마마의 관상이 같지 않사옵니까?”
“관상이 같다?”
“예, 전하. 얼굴 생김새가 같으시니 그 관상 또한 같을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 말은 곧 두 분 마마께서 하나의 용상(龍像)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반쪽인 용이 하나가 되어야 하니, 자미보다 강한 객성이신 대군마마께서 세자 저하의 운명을 모다 흡수하고 계시옵니다.”
“뭐라?”
원체 하나의 운명이었으니,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더 강한 놈이 약한 놈을 흡수한다. 어심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하기에 대군마마께서 탄신하셨을 적, 소신 대군마마의 존재를 사라지게 해 달라 주청을 드리지 않았사옵니까?”
“대군의 존재를…… 사라지게 해야만 한다.”
왕의 몸이 비틀하였다. 결국, 하나가 죽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절대적으로 대군이어야 한다. 장손만이 적자이다. 이것은 바로 하늘의 이치이자 순리. 허나, 혈도 내 아들이다. 어심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것은 아니 된다. 대군 또한 과인의 아들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라.”
지엄한 어명에 어찌할 줄 모르고 사라졌던 소격서 제조는, 그간 사가에서 대군을 돌봐오던 소격서 주제조인 주청점과 성수청 국무를 끌고 어느 날 다시 나타났다.
“소신들이 머리를 맞대어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사옵니다.”
“무엇이냐.”
“자네가 말씀 올리시게.”
“예, 영감.”
제조의 명에 짧게 읍하고 앞으로 나선 국무가 연지를 짙게 바른 붉은 입술로 빠르게 속살거렸다.
“전하께서 이미 아시는 대로, 한 운명을 두 분 마마께서 나누어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그 말은 곧, 두 분의 상이 같다는 말씀이옵니다. 두 분 마마의 생김새가 마치 경(鏡)에 비춘 듯 저리 같으니 당연히 두 분 마마의 관상에는 모두 용상(龍像)이 들어 있사옵니다.”
“그래서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반대쪽 경을 깨시옵소서. 경을 깨뜨리셔야 하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말씀 올린 그대로입니다. 대군마마의 관상을 사라지게 하여, 세자저하의 용상이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셔야 하옵니다.”
“답답하구나. 얼굴이 없어지지 않는 한 관상을 어찌 사라지게 한단 말이냐!”
“얼굴을 없앨 수는 없으나, 가릴 수는 있사옵니다. 대군마마의 얼굴을 가리시어, 하늘을 속이시면 되옵니다. 반드시 그리해야만 세자 저하께서 사실 수 있으십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 성수청 무녀들은 소인들의 혼을 갈아 하늘의 눈을 가릴 부적을 만들 것이옵니다.”
“부적?”
“예, 하늘의 눈을 피해 그 얼굴을 가려 줄 부적이옵니다. 용상을 가릴 수 있도록, 복면 안쪽에 부적을 가득 새겨 넣을 것이옵니다. 그 복면을 쓰신 대군마마를 삼각산으로 보내시옵소서. 삼각산 깊은 곳, 그곳에 귀도(鬼道)가 열리는 곳이 있사옵니다. 귀신들의 통로에 대군마마를 밀어 넣어 세속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지우시옵소서. 그리하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죽지 않았으나 죽어 있는, 이른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귀도에 갇히게 되는 꼴이옵니다.”
삼각산 깊은 곳에 대군을 보내라는 무녀의 말에 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린 대군이 험한 산중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 있으랴. 왕은 그 깊은 곳에 혈을 보내라 말하는 무녀가 괘씸했다.
“얼굴을 가리면 되었지, 그런 곳까지 보낼 순 없다! 네가 분명 하늘을 속일 수 있다 하지 않았느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얼굴을 가리고 그 관상은 가릴 수 있으나, 그것이 대군마마의 기까지 가릴 수는 없사옵니다. 특히 대군마마처럼 강한 기를 타고난 분은 더욱 그렇사옵니다. 허니 귀도로 보내셔야 하옵니다. 대군마마의 운명과 그 존재까지 완전히 지우셔야 하옵니다. 그래야만 하늘을 속일 수 있사옵니다. 그렇게 대군마마의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시면, 운명은 오롯이 세자 저하의 것이 될 것이옵니다.”
무녀의 말을 들을수록 왕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살아 있되 죽은 자로 살아야 하는 어린 아들의 기구한 팔자가 불쌍하여 눈앞이 비틀거렸다. 허나,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세자의 안위가 더 걱정이었다. 세자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대군을 죽일 수도 없었다. 왕은 결국 힘들고 잔인한 결정을 내렸다. 잔인하지만 최선의 방법이었다.
“만들어라. 내가 직접 씌울 것이다.”
청점의 집에 홀로 맡겨져, 두 해 만에 보는 혈은 훌쩍 장성하여 있었다. 기골이 단단하고 얼굴에서 윤이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것이, 과연 이 아이가 영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못난 아비를 만나 즐거워하는 대군의 얼굴을 보자 왕의 마음이 심히 괴란 하고, 어심이 흔들렸다.
하지만 종묘사직의 앞날이 걸린 일이었다. 자신은 아버지임과 동시에 왕이어야만 했다. 모질어지기 위해, 마음을 강하게 다잡기 위해 직접 복면을 손에 들었다. 성수청 무녀들이 두껍고 질긴 흑목(黑木)에 한가득 수를 놓아가며 새긴 부적이 세 겹이었다. 그 세 겹의 부적 바깥쪽에 두툼한 흑목을 한 장 덧대어 견고한 복면을 만들었다.
보기에도 괴상한 복면을 본 어린 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붉은 문자가 소름 끼쳤다. 그 붉은 문자가 한가득 새겨진 새카만 천이 저의 머리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두렵고도 두려워 아바마마를 부르짖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무섭습니다. 소자가 너무 두렵습니다! 싫습니다, 벗기어 주십시오! 흐어엉, 아바마마!”
발버둥 치는 대군의 사지를 단단히 잡으라 명하고, 왕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이의 작은 두상에 복면을 씌웠다. 제 얼굴에 단단히 고정된 복면을 벗으려 발버둥 치는 아이에게 직접 매까지 가하였다.
“이제부터 너는 얼굴 없는 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복면이 너의 얼굴 대신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검은 복면처럼, 네 얼굴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 알겠느냐? 그러니 절대 그 복면을 벗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식사를 할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목간을 할 때에도, 서책을 읽을 때에도! 너의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절대 그 복면을 벗으면 아니 될 것이야! 이것은 지엄한 왕명이니라! 알겠느냐?”
대군이 흘리는 눈물로 복면이 축축이 젖어갔다. 울먹이며 겨우 대답하는 대군에게 왕은 더욱 지엄하게 명하였다.
“이제 과인이 너에게 자(字)를 내릴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이혈(李娎)이 아니라 도운(逃雲)이니라. 이제부터는 너는 오직 도운일 뿐이다. 너는 왕족의 성을 잊어야 할 것이며, 절대 네 휘(諱)를 써서는 아니 될 것이다. 명심하거라. 그 누구에게도 네 휘(諱)를 발설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또한, 너는 이제부터 네가 대군임을 잊어야 할 것이다. 이 길로 삼각산으로 가거라. 그곳에 초가를 마련해 두었다. 너는 지금부터 그곳에 위리안치될 것이니, 유모와 함께 그곳으로 들어가 절대 산을 내려오지 말거라. 너의 자(字)가 뜻하는 대로 평생을 그곳에 붙박이가 되어 죽은 듯 숨어 지내거라. 만약 어명을 어기고 초가를 벗어나거나 그 복면을 벗어 버릴 시, 내 직접 단칼에 네 목을 칠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꺼억, 꺼억’, 울음을 목으로 삼키며 대답하는 대군을 당장 데려가라 명하였다. 장정의 등에 업혀 아직도 숨이 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사라지는 대군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모습으로 장성한 대군의 모습은 바로 세자가 지녔어야 할 그 모습이었다.
워낙 단단하던 아이는 기골이 매우 장대하고 튼튼해 보였다. 눈빛은 매서웠지만, 한편 매우 영걸스러워 보였다. 여리고, 어질고, 온화하였던 세자와 풍기는 기운부터가 달랐다. 열두 해 전, 자신이 씌워 버린 저 낡은 복면 아래 세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나의 세자가 죽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네가, 네가…… 네 형을 잡아먹고, 결국 나의 장자를 죽였다.”
바싹 마른 어수에 이마를 기댄 임금은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아들의 불경한 눈빛을 모른 척하였다.
“열흘 후, 세자 책봉식이 있을 것이다. 처소로 돌아가 기다리거라.”
“물러가겠사옵니다.”
고요히 읍하고 사라지는 낯선 사내에게서 어둠의 기운이 진하게 뿜어져 나왔다.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강한 어둠이었다. ‘쿨럭쿨럭’, 왕이 심하게 기침을 해대자 주변에 있던 내관들이 모여들었다.
“되었다. 침전으로 갈 것이다.”
잠시 어좌에 앉아 있기도 버거울 만큼 늙은 왕의 몸은 너무나 노쇠하고 병들어 있었다. 저 어두운 낯선 사내가 곧 저의 뒤를 이어받을 것이다. 운명이 왜 이다지도 가혹하단 말인가. 그리 애를 썼는데, 왜 나의 적장자가 죽었는가. 폭군의 기운이 현군을 잡아먹고, 장차 이 나라를 암흑에 빠뜨릴 것이 두려웠다. 내관들의 부축을 받은 늙은 왕의 수심은 더욱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