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귀한 여인
하늘이 높고 맑게 열렸다. 산이 색을 갈아입기 시작하니 이제 정말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쌀쌀하였다. 깊은 산속이라 그런지 기온은 더욱 차고 시렸다. 조석으로 추워진 날씨에 청조는 도운의 의복을 모다 꺼내어 하나씩 손보고 있었다. 봄과 여름내 좀먹은 옷을 바지런히 세답하고, 햇빛에 바짝 말린 후 짜깁기하여 구멍을 메웠다.
목화를 좀 구할 수 있으면 미리 잘 누벼 놓았다가 겨울에 서방님 입으실 따듯한 의대 한 벌 만들면 좋을 것을,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답을 끝낸 옷들을 탁탁 털어 널고 나니 해가 꽤 높이 떠 있었다. 높이 뜬 해의 빛이 좋은 것을 본 청조는 평상 위 돗자리에 깔아 놓은 탈곡한 콩과 팥을 다시 골고루 섞으며 뒤집어주었다.
텃밭이 작아 수확이 적으나 서방님과 저 둘이 먹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먹고 남은 팥은 두고 두었다가 동지 때가 오거들랑 팥죽을 쑤어 서방님 점심상에 올려야겠다. 서방님께서 단 것은 아니 좋아하시지만, 팥 앙금의 단맛은 꽤 좋아하셨다.
그리고 메주를 쑤고 남을 요 노란 백태는 두고 두었다가 곱게 갈아 꿀에 섞어 다식 만들고, 쫄깃한 찰떡에 입혀 서방님 출출하실 적에 잡수실 주전부리를 만들어야겠다. 광에 방치됐던 종자들이 이렇듯 탐스러운 낱알로 변한 모습이 어여뻐 청조는 작은 구슬 같은 그것들을 손끝으로 하나씩 어루만졌다.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고 그것들을 바라보던 청조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 출타하시렵니까? 사냥이라도 하러 가십니까?”
도운은 대답도 없이 어깨에 멘 나무 활통을 내려 안의 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냥 나가려는 모양새인 듯하자, 청조는 얼른 반빗간에 들어가 깨끗한 면포에 육포 몇 조각을 싸서 나왔다.
“점심때가 다 되었습니다. 지금 나가시면 제때에 점심 드시기 힘드실 터인데, 이걸로 요기라도 하시지요. 육포 조금 쌌습니다.”
육포라는 소리를 듣자 미간에 주름을 만든 도운은 흰 면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의 못마땅한 눈빛에서 이전에 익태가 육포를 두고 한 말이 떠올라 청조의 고개가 숙여졌다. 토끼로 만든 하품을 내밀어 기분이 상하셨나 보다.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고 하는데 도운의 커다란 손이 먼저 면포를 확 채어 싸리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휙! 휙!
“젠장, 젠장! 젠장 맞을!”
도운은 성이 난 듯 활로 휙휙 나뭇가지를 쳐내며 산길을 걷다 저도 모르게 거친 욕설이 내뱉었다. 결국, 사냥을 나오고야 말았다. 지난 달포 간 애써 누르던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와 버렸다.
“그까짓 고기, 다시는 그 소리가 아니 나오게 해 주마!”
무엇이 화가 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깟 고기 때문에 머리를 숙이던 여인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 달포가 지난 일인데도 지워지지 않았다. 흥,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숙이더니, 반빗간에 들어앉아 무나 썰어대며 청승을 떨어대다니. 산의 짐승을 모다 잡을 요량으로 나왔는데, 집중이 되질 않으니 목표를 향한 화살은 번번이 비껴갈 뿐이었다.
“젠장!”
이번에도 목표물을 놓친 도운은 활을 땅에 패대기쳐 버리고는 바닥에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못난 놈, 점점 더 저잣거리의 시정잡배가 되어가고 있구나. 허긴, 시정잡배 놈의 팔자가 지금 제 처지보다야 낫기야 낫겠지. 제 팔자만큼 고약하고 사나운 팔자가 어디에 또 있을까! 자조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누워 하늘만 바라보니 점점 속이 공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도운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면포를 꺼내 들고 잠시 바라보다 이내 매듭을 풀었다. 색이 진하고 크기가 적당한 육포에서 진한 향이 풍겨 식욕을 자극했다. 도운은 잠시 망설이다, 육포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하품 따위라고 하였었지. 하나뿐인 친우의 말이 생각나자 또 알 수 없는 화가 올라왔다. 도운은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입에 문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양념이 고루 잘 배어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것이, 너무 단단하지도 않고 적당히 부드러워 씹는 맛이 좋았다. 하지만 입안 가득 퍼지는 맛있는 육포의 향에도 도운은 잡념과 화를 쉬이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정성스러운 음식인지도 모르고, 감히 하품 따위라 하였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도운은 무의식적으로 육포를 씹어대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육포가 사라져 없어진 후에도 도운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제 친우가 남긴 말만 곱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하품이라 칭하였지. 갑자기 반빗간 여인의 청초한 얼굴이 떠올랐다.
* * *
“이 사람 안에 있느냐?”
“오셨습니까, 나리. 지금 출타 중이십니다.”
“어디를 갔느냐?”
“사냥 나가시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언제쯤 나가셨느냐?”
“조반 드시고 일식경 후에 나가셨습니다. 아마 신시(申時:오후 3시~5시) 전에는 돌아오실 것입니다.”
평상에 앉아 썩은 팥과 콩을 골라내던 청조는 갑작스런 방문에 놀랐다. 애써 놀란 마음을 감추고 익태의 물음에 조용히 읍하였지만, 속으론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게꾼을 따라 산에 오신 지 달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또 들리신 건지. 그리고 뒤를 따라 들어오는 저 고운 여인은 누구인지. 궁금하였지만 물을 입장이 아니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 알겠다. 볼일 보거라.”
“안에 들어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다. 주인 없는 방에 들어앉아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예화는 고단할 터이니 방에 들지 그러느냐?”
여인은 집을 휘 둘러보더니 보일 듯 말 듯, 미간에 작은 주름을 만들었다.
“아닙니다, 오라버니. 저도 오라버니와 함께 이곳에 있으렵니다.”
이어 꾀꼬리 지저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여인을 흐뭇하게 바라본 익태가 청조에게 다소 엄하게 일렀다.
“뭐하고 서 있느냐! 아가씨 힘드실 터인데 어서 자리 마련하지 않고!”
“예? 예, 송구합니다.”
아침나절 부지런히 펴서 말리던 콩이며 팥을 거둬들이는 청조의 손길이 다급했다. 곡식 별로 소쿠리에 긁어 담고, 돗자리를 걷어낸 청조는 서둘러 깨끗한 마른걸레로 평상을 닦았다.
“앉으시지요.”
청조의 권유에 예화가 평상을 흘끔 바라보자 곁에서 시중들던 몸종이 나서 다소 앙칼진 소리를 냈다.
“이보시오! 우리 귀한 아가씨가 어찌 이런 자리에 그냥 앉는단 말이오. 가서 방석이라도 하나 가져와야 할 게 아니오!”
“아, 송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청조는 서둘러 도운의 방으로 들어가 집안에 하나 있는 방석을 가지고 나왔다. 익태가 한 번씩 사용하던 방석을 가지고 나와 탁탁 털고는 평상에 올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언년이의 눈꼬리가 바짝 올라가 있었다. 모시는 아가씨의 곁에 딱 붙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언년이의 눈초리에 청조는 평상에 올린 방석을 다시 한번 깨끗하게 털었다.
“송구하오나, 집안에 방석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되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어서 앉거라, 화야.”
“네, 오라버니.”
장옷을 벗어 언년에게 건네준 예화가 방석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치마를 매만졌다. 고운 살굿빛 비단 치마를 이리저리 매만지자 치마가 어여쁘게 부풀어 오르며 자리를 잡았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치마의 색이며 그 모양이 마치 수면 위에 떠 있는 연꽃 같았다. 연꽃의 꽃봉오리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진정 부용화 그 자체로 보였다.
부용화로 보일 만큼 아리땁고 고운 저 여인은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나리의 여동생인 듯싶으나 예까지 어인 일인 것인지. 혹여 서방님을 보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예화를 마주 보고 자리를 잡은 익태는 다소 멍하게 서 있는 청조에게 타박하는 듯 명했다.
“어허! 뭐하고 서 있는 것이냐? 아가씨 출출하실 것이니 얼른 요기될 만한 것 좀 내오고, 같이 따라온 이들에게도 알아서 내어 주거라.”
“아, 예, 예. 곧 준비하여 올리겠습니다.”
곧바로 반빗간으로 사라진 청조는 바삐 찻물을 끓였다. 찬바람에 올라온 연한 꽃봉오리가 개화하자마자 따다 말려 둔 국화를 꺼내 들었다. 뜨거운 물에 담긴 여린 꽃잎에서 그윽한 향이 올라왔다. 찻주전자와 함께 얼마 전 서방님 주전부리를 위해 만들어 놓은 약과를 접시에 올렸다. 청조가 준비한 다과를 받은 오누이가 다정하게 잡담을 나누는 사이 도운은 사냥한 날짐승 한 마리를 들고 초가를 향해 털레털레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 요행으로 꿩 한 마리를 잡았다. 오늘처럼 집중하지 못한 날 저의 손에 잡혔으니, 눈멀고 귀까지 멀어 버린 날짐승이 분명할 것이다. 작은 멧돼지라도 잡았으면 좋았을 것을. 겨우 꿩 한 마리인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나마 빈손이 아닌 것에 기분이 좋았다. 축 늘어진 꿩의 발목을 쥐어 잡고 초가로 돌아온 도운은 예상치 못한 객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오라버니!”
평상에 앉아 있던 예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꽃신에 발을 끼우고는 도운의 앞으로 사뿐히 걸어갔다.
“예화? 설마…… 네가 예화냐? 네가 예까지 어찌 왔느냐?”
“이곳 산세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가을 단풍을 즐기러 며칠 유람 왔지요.”
“그러냐?”
“예. 허나 사실 그는 핑계이고,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소녀가 아버님을 꽤나 졸랐습니다.”
“이곳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힘들지 않았느냐?”
“예에, 아니 그래도 소녀, 예까지 오르느라 발이 다 퉁퉁 부었습니다.”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도 이곳 산세가 험한데, 너같이 고이 자란 규수에게는 힘겨운 산행이었을 것이다. 한데도 예까지 어찌 올라왔단 말이냐.”
“사실 소녀, 오라버니를 뵙고 싶은 마음에 하나도 힘들지 아니하였습니다. 요 두 다리가 도술이라도 부린 듯 가볍게 걸어왔습니다.”
“그리하였느냐? 잘 왔다. 정말 많이 자랐구나.”
서방님께서 저리 다정할 수도 있는 분이시구나. 청조는 서방님과 격 없이 대화를 나누는 여인을 훔쳐보았다. 곱다. 곱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여인이었다. 달덩이 마냥 희고 뽀얀 얼굴에 진달래 마냥 화사하게 피어나는 홍조가 눈이 부셨다. 동백기름을 부어 살살 빗어 내린 머릿결은 그야말로 반짝거리며 윤이 흘렀고, 머루 같은 검은 눈동자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빛이 났다.
특히 웃을 때마다 부끄러운 듯 입내를 가리는 손끝이 참으로 부드럽고 고와 보였다. 여인의 매끈한 손끝을 감탄하듯 훔쳐보던 청조는 문득 제 거친 손이 부끄러워 뒤로 감추었다. 괜한 민망함에 뒤로 감춘 손을 슬쩍 비벼댔다. 살짝 비비기만 했는데도 깔끄러운 손끝에서는 거친 메마름이 느껴졌다.
“사냥을 다녀왔다고?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응, 답답한 듯하여 좀…… 나갔다 왔지.”
도운이 손에 든 꿩을 멋쩍게 바라보며 대답하자 예화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 오라버니. 예화가 올지 어찌 알고 꿩을 사냥해 오셨어요?”
“응?”
“하하.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 화가 꿩으로 만든 모리탕을 제일 좋아하지 않는가. 어찌 알고 잡아 왔는지, 신기하네그려.”
“아아……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신기한 일일세.”
예화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꿩으로 만든 모리탕이었는지 기억조차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도운은 굳어진 입가를 움직여 마지못해 대답하였으나, 그의 굳어진 입매를 보지 못한 익태는 청조를 닦달하였다.
“네가 꿩으로 모리탕(고기를 다져 만든 완자를 빚어 넣어 끓인 맑은 탕)을 할 줄 아느냐? 그것은 궁중에서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다. 너 같은 것은 평생 본 적도 없을 만큼 귀한 음식인데, 그것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모리탕이 무엇인지는 아느냐?”
“예, 꿩으로 만든 것은 본 적이 없으나, 소고기를 넣고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허면 한번 해 보거라. 내 누이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니 특별히 정성을 더 들여야 할 것이다.”
“예, 성심을 다 해 보겠습니다.”
청조는 뒤로 감추었던 손을 뻗어 도운이 잡아 온 꿩을 건네받고는, 반빗간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도운은 제 팔을 잡아끄는 예화의 성화에 못 이겨 평상에 함께 둘러앉았다.
“언년아, 어서 가서 도련님 마실 차와 주전부리 내오라 하여라.”
“예, 아가씨.”
쪽마루에서 함께 온 지게꾼과 감자와 수정과로 요기하고 있던 언년이 벌떡 일어나 반빗간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빗간 여인이 시탁을 들고 나왔다. 도운은 제 몫의 다과를 놓아주는 여인의 얼굴을 왠지 쳐다볼 수 없었다. 저와 제 친우들이 차지하고 앉은 이 자리엔 분명 아침나절 여인이 곡물들을 널어놓았었다.
그 곡물 낱알들을 보듬으며 미소 짓던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자, 앉은 자리에 가시라도 돋아난 듯하였다. 하지만 봄철에 피어나는 어여쁜 꽃같이 연신 방긋거리는 예화를 보자 곧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횟수로 꼭 십 년 하고도 일 년 만에 보는 아이여서 반가운 마음이 컸다. 별당에서 곱게만 자라던 아이가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응당 자리를 내주어야지. 예화가 앉을 자리에 곡물을 널어 말리고 있었다면, 당연히 곡물을 치워줘야지. 이런 것쯤 저 천한 것에게는 늘 하던 잡일이 아닌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왠지 입안이 썼다. 담소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쌀쌀하다는 예화의 투정에 셋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기고 시간이 꽤 흘렀는지, 어느 순간 청조가 무거운 반상을 들고 방으로 들었다.
“저도 겸상하면 아니 됩니까? 소녀가 반상의 법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만 그리하게 해 주십시오.”
“화야, 내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아니 될 말이다. 남녀가 유별하기도 하지만, 이이의 입장이 있질 않느냐.”
“소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그러합니다.”
“아니 될 것은 없지. 내 입장이 뭐가 중요한가? 예화의 말대로 가끔 이리 셋이서 한 상에서 밥을 먹곤 하였지. 유년시절 기분 한번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과거를 이야기하는 도운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 도운의 허락에 예화는 무거운 반상을 내려놓는 청조를 향해 거리낌 없이 지시하였다.
“너, 어서 가서 이곳으로 내 식사를 가져오너라. 내 이곳에서 오라버님들과 함께 식사할 것이다.”
“예, 아가씨.”
청조가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시탁에 한 사람분의 밥과 국그릇 그리고 수저 한 벌을 올려 가지고 돌아왔다. 시탁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이미 자리가 꽉 찬 반상 위에 놓인 찬들을 조금씩 움직여 예화가 먹을 밥과 국그릇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내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아침에 떠나려 하네.”
“그래? 예화와 함께 지내다 가지 않고?”
“아닐세. 닷새 후에 아이를 데리러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만 잘 돌보아 주게.”
“싫습니다.”
갑자기 싫다 말하는 예화를 바라보자, 처량한 얼굴을 한 예화가 도운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오라버니께서 데려다주십시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예화야.”
“그리 해 주셔요. 예?”
“그건 아니 된다. 이 사람이 이 산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허나!”
“어허. 아니 된다 하지 않았느냐!”
오라버니의 단호한 호통에 고개를 숙인 예화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기가 죽은 어여쁜 누이의 모습이 안쓰러워진 익태는 금세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대신 돌아가는 길에 장에 데려가 주마.”
“네?”
“장 구경 마치고, 금박 박은 어여쁜 댕기도 하나 사주마.”
“치, 댕기는 싫습니다.”
“그럼 네가 뭐가 가지고 싶으냐?”
“뱃시(머리 위에 얹는 장식품) 하나 사주시어요. 칠보로 장식한 것에 커다란 진주 알 박힌 걸로 하나 사주시어요.”
“하나뿐이겠느냐? 그것도 사고, 댕기도 사주마. 가서 원하는 것으로 맘껏 골라 보거라.”
도운은 그제야 방긋 웃는 예화의 윤기 나는 머리를 쳐다보았다. 머리 한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뱃시가 아주 화려했다. 마름모꼴 옥판에, 칠보와 진주를 촘촘히 박아 만든 장신구가 윤기 흐르는 예화의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에 반해…… 도운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모리탕을 국그릇에 소담히 담아 밥그릇 옆자리에 하나씩 올리는 청조를 곁눈질했다.
동백기름으로 곱게 빗어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예화와는 달리,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여인의 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조금씩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어 있는 것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나마 흑단마냥 검고 풍성한 것이 봐줄 만한 머리였다. 하지만 그 풍성한 머리는 색이 바래 버린 무명 쪽댕기에 묶여 아무런 장식도 없는 거친 목비녀로 단단히 틀어 쪽을 지고 있었다.
심지어 옻칠조차 되어 있지 않고, 듬성듬성 깎인 모양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목비녀는 하품이라 칭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상태가 허름하고 잡스러운 모양새였다. 어디서 저런 허섭스레기를 얻어서는 저리 끼고 궁상을 떠는지. 복면 아래 도운의 눈썹이 한순간 일그러졌다가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곧 숭늉 올리겠습니다.”
“그래, 네 솜씨가 나쁘지 않구나. 나가거든 데려온 이들 저녁도 잘 챙겨 주거라.”
“예, 아가씨.”
도운은 조용히 읍하고 나가는 여인의 꼴이 보기 싫은 것이 식욕이 떨어졌다. 괜히 말간 모리탕만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아까 먹은 다과가 얹힌 것 같았다.
“그래도 저것의 솜씨가 그만하네. 모리탕을 다 만들 줄 알고.”
“……그러게.”
아까부터 자꾸 입안이 썼다. 차라리 아무것도 잡아 오지 말 것을, 아니 차라리 사냥을 나가지 말 것을.
“한데, 고기는 가져왔나?”
“응?”
저도 모르게 통박하는 듯 따져 묻는 말투가 튀어나오자, 순간 당황한 도운은 얼른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것이…… 저번에 저 여인이 자네에게 청을 넣는 것을 들어서.”
“아, 그거. 미안하네, 내 깜박 잊었지 뭔가.”
“미안하긴, 내가 종종 사냥을 나가니 여인의 청은 그냥 무시하게.”
“응, 그리해도 되겠나? 내 그것의 청을 받고 되바라진 그 태도를 질책하긴 했으나, 생각해 보니 내 자네에게 너무 무심했단 생각이 들지 뭐야.”
“아니, 무심하다 생각할 필요 없네.”
그것의 청이라, 그것, 그것…… 친우를 향해 억지로 쓴 미소를 짓고 도운은 다시 맑은 모리탕만 휘휘 저었다. 이리 열심히 만들어 놓고도 저 여인은 아마 맛도 보지 못할 것이다. 또 혼자 궁색 맞게 아궁이 앞에 앉아 있을 여인의 모습이 휘휘 젓는 모리탕 안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이튿날 아침 조반상 물린지 일식경도 되지 않아 익태는 일찌감치 산을 떠났다. 익태가 떠나자마자 단풍을 보러 가겠다며 예화가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예화의 채근에 언년은 청조를 찾아 반빗간에 들었다. 조반상에서 나온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있던 청조에게 빠르게 다가간 언년이가 대뜸 청조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요? 우리 아가씨 단풍 구경 가신다는 말씀 못 들었소? 가서 드실 점심이며, 주전부리 챙겨야 할 것 아니오. 어서 준비하쇼!”
눈을 흘기며 제 할 말만 하고 재빠르게 튀어 나간 언년은 쪼르르 방으로 들어가 예화의 치장을 도우며 비위를 맞추었다.
“아가씨, 요것 어떠십니까? 도화색 치마 입으실 적에 하시려고 장만하신 요 댕기 하시고, 붉은 산호로 장식된 요 뱃시 같이 하시면 선녀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요.”
“흐음, 그래? 것도 좋구나. 좋긴 한데…… 아니다, 그것 말고 그 옆에 비취로 하는 것이 좋겠다.”
“예, 아가씨.”
한참 수선을 피운 끝에 방을 나서던 예화는 건넛방에서 나오는 도운과 마주쳤다. 그와 마주친 예화의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오라버니.”
“그래, 채비 다 하였느냐?”
“예, 오라버니.”
조신하게 머리를 돌리며 살포시 미소 짓는 예화의 몸짓 하나하나가 꽃을 찾아 살랑거리는 우아한 나비의 몸짓 같았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곱게 치장을 마친 예화의 뽀얀 얼굴에 연지를 바른 입술이 붉게 반질거렸다. 음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도운의 마음이 뿌듯하였다.
이것이 바로 고귀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간 숱하게 이 산을 올라왔던 그 천한 여인들에게는 없는 혈통이라는 것을 갖춘 여인의 모습이었다. 고귀하고 기품이 넘쳐흐르는 모습이었다. 언젠가 이 족쇄에서 풀려나게 되는 날, 저의 옆에 설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만 했다.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도운은 굳은 입술을 움직여 억지로 호를 그렸다.
“그럼 이만 나가자.”
“예.”
섬돌을 내려서는 예화의 발에 재빠르게 운혜를 신겨 준 언년은 바삐 반빗간으로 향했다. 짜증스럽게 널판문 앞에 선 언년은 안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 멀었소?”
“다 되었네.”
반빗간에서 나온 청조가 보자기로 감싼 주합(술과 안주를 담아서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찬합)을 언년에게 건네주었다. 낚아채듯 보자기를 건네받은 언년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청조에게 지청구를 쏟아냈다.
“어찌 이리 엉덩이가 무겁소? 다음부터는 내 닦달하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 좀 해 놓으시오. 지체 높은 우리 아가씨께서 게를 기다리는 게 말이 되오?”
“송구합니다, 아가씨.”
“되었다. 허나 다음부터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예, 아가씨.”
조용히 읍하는 청조를 새침하게 바라보던 예화는 금세 환한 미소로 도운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께서 어디를 데려가 주실 요량이십니까? 소녀가 기대되어 밤새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랬더냐? 내가 생각해 둔 경치 좋은 곳이 있다. 따르거라.”
“예에, 오라버니.”
즐거운 듯 초가를 나서는 세 사람의 뒤로 허리를 공손히 구부린 청조가 조용한 목소리로 읍하였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꺼질 것만 같은 청조의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한 듯,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초가를 떠났다. 돌아보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청조는 돌처럼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산세가 수려하니 아름다웠다. 여기저기 울긋불긋 피어오른 단풍잎은 마치 고운 능라금의를 입은 듯 그 천연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경치 좋은 곳이라며 도운이 데려온 산봉우리 어디쯤에서, 산세를 굽어보던 예화가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오라버니.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러하냐? 조금 더 가면 쉴 만한 곳이 나오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잠시 쉬자. 절경을 감상하기에 그곳이 더 좋을 것이다.”
“예, 소녀가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자 산세가 조금 험난한 곳이 나왔다. 앞에 약 한 자(약 30.3cm) 정도 되는 단이 나오자 도운은 예화가 쉬이 올라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부끄러운 듯 살포시 미소 짓던 예화는 고운 손을 들어 사내의 커다란 손을 잡고 단 위로 올라섰다. 그렇게 일다경(一茶頃: 15분)을 걸으니 앞이 확 트인 기암절벽이 나왔다.
“이곳에 돗자리를 깔거라.”
“예, 도련님.”
언년이가 대충 자리를 정하고 돗자리를 깔자 예화가 그 위에 올라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바라보는 눈앞의 전경이 실로 훌륭하였다.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 아래로 울긋불긋한 단풍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고, 하늘은 맞닿을 듯 가까웠다.
“흰 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추풍에 물든 단풍 봄꽃도곤 더 좋아라. 천공이 나를 위하여 뫼 빛을 꾸며 내도다.”
낭랑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시조를 읊으며 풍경에 대한 감탄을 표현하는 예화의 모습이 어여뻤다. 그 어여쁜 모습에 도운은 지금 부는 바람이 추풍이 아니라 춘풍이 아닌가 싶었다. 그간 이 산을 올랐던 창기들 중 어느 여인이 이리 풍류를 알고 품격이 있었는가. 도운은 이제야 그것들을 경멸하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김천택이로구나.”
“예, 오라버님. 추풍에 물든 단풍이 실로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 소녀가 이리 아름다운 가을 풍경은 처음 봅니다. 평생 잊지 못할 풍경입니다.”
“그리 좋으냐?”
“예, 말로만 듣던 풍악산(가을의 금강산) 상상봉이 이보다 더 아름답겠습니까? 소녀의 마음에는 오라버니가 보여 주신 이 풍경이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천하제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 네가 그리 기뻐하니 내 마음도 무척이나 기껍구나.”
조신하게 눈을 깔고 미소 짓는 예화의 홍조 어린 모습이 바람에 떨어진 복사꽃 한 잎을 품은 작약마냥 아름답고 기품이 흘렀다. 그 모습을 보는 도운의 마음은 진실로 뿌듯했다. 예화에게 나오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보고 있으려니, 금수마냥 욕정에 가득 차올랐던 저의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움을 경외하는 마음이 천한 몸뚱이에 발정하는 본능을 해소시키자 마음이 다소 안심되었다.
“도련님, 아가씨. 요기하셔야지요?”
“그래.”
언년이가 돗자리 위에 가져온 주합을 올리고 보자기를 풀었다. 맨 위 칸에는 술병 대신 찻주전자와 찻잔이 들어 있었고, 두 번째 칸에는 나뭇잎에 일일이 쌓여 있는 주먹밥이 들어 있었다. 보통 주먹밥은 그저 소금으로 간을 하여 그 크기가 사내 주먹만 했으나, 청조가 만든 주먹밥은 조금 달랐다.
우선 한입에 쏙 들어갈 듯 그 크기가 일반 주먹밥보다 현저히 작았다. 게다가 밥에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어떤 것은 잘게 썬 고사리가 섞여 있었고, 어떤 것은 시래기, 또 어떤 것은 취나물이 섞여 있었다. 모다 청조가 봄에 뜯어다 삶고 말려 광에 주렁주렁 달아 놓았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칸에는 식후 입가심하라고 산에서 캐온 도라지와 우엉으로 만든 정과가 들어 있었다. 첫째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빠짐없이 지켜본 언년이가 큰소리로 청조의 험담을 시작했다.
“아니, 이 부실한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감히 이런 것을 어찌 우리 아가씨 드시라고 싸 주었단 말입니까? 이것이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 심보가 어찌 이리 고약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언년이의 타박에 도운의 입매가 굳어지자 예화가 서둘러 언년이의 말을 막았다.
“괘념치 않으니 그만하거라. 어디 일부러 그랬겠느냐?”
“일부러 그런 것입니다, 아가씨! 보십시오. 정과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가씨께 우엉에 도라지가 뭡니까요? 응당 인삼이나 능금으로 만든 것을 올려야지요. 또한, 요 괴상망측한 주먹밥이 뭐랍니까? 전이나 부침, 구이 하나 없이 덜렁, 겨우 이런 것들을 싸느라 그리 늦장을 부렸답니까요? 도련님, 그것이 저희 아가씨를 이리 욕보여도 된단 말입니까? 쇤네는 너무 억울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돌섬네를 데려왔지 말입니다.”
언년이의 구구절절 늘어놓는 소리에 예화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아니 하지만 도시락이 적잖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래, 알았으니 가서 너도 요기하거라. 내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도련님…… 예에…….”
뭐라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말꼬리를 잡던 언년은 도운의 엄한 목소리에 물러섰다. 아직도 억울한 듯 입을 삐죽이던 언년은 자리에서 먼 곳으로 물러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퉁이를 뒤져 제 몫의 주먹밥을 꺼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소녀는 괜찮으니 저 아이 말에 너무 괘념치 마세요.”
“아니다. 내가 미안하구나. 평생을 좋은 것, 귀한 것만 입고 먹었을 너인데, 너에게 한참 모자란 것을 내가 안다. 내 더욱 신경 쓰라 이르겠다.”
“소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오라버니가 가엾어 목이 막힙니다.”
“가여워? 내가?”
“예, 소녀야 이 산을 내려가면 그만이지만, 이런 부실한 찬으로 계속 끼니를 이어가야 하는 오라버니가 가엾어 소녀가 근심이 큽니다. 어제저녁 모리탕을 그만하게 올렸기에 소녀 말은 아니 하였지만, 모리탕 외에 무엇 하나 쉬이 저분질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속이 상한 듯 말하는 예화의 모습에 도운은 어제저녁에 무슨 찬이 올라왔었는지 빠르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저녁 내내 잡념이 많아서였는지, 무슨 찬이 올라왔었는지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이제껏 먹었던 찬에서 무언가 두어 가지 더 올라왔던 기억이 날 뿐이었다.
“언년이가 집안의 여비인지라 배우지 못하여 말이 다소 거칠긴 하지만, 그 애의 말이 모다 틀리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이 오라버니를 욕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부실한 찬을 드시게 하겠습니까?”
부실한 찬이라는 말에 도운이 찬합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다시 한번 훑었다. 그리고 그간 부실한 찬을 먹고 지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열 살이 되던 해에 이 산에 함께 들어와 두 해 전, 피를 토하고 죽어 버린 늙은이 생각이 났다. 사실 그이가 있을 때조차 이 정도의 음식을 먹고 산 적은 없었다.
달에 한 번, 얼마간의 곡식과 식재료를 이고 오는 지게꾼이 무엇을, 얼마나 가져오는지 늙은이가 죽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저 노쇠하고 몸이 불편한 늙은이가 해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이가 살아 있을 적, 손바닥만 한 작은 텃밭을 일군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텃밭에서 나고 자란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제 소반에 올라왔는지는 잘 몰랐다.
허나 한 번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고 아침에 조반상을 받아 본 기억이 없으니, 지금보다 절대 풍성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식후 입가심할 정과나 국화차 따위는 확실히 없었다. 하루 한 번씩 올라오는 주전부리는 고사하고, 함께 올라오는 식혜 같은 맛깔난 음료도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제 수발을 들던 노쇠한 늙은이가 겨우내 기침을 해대다 결국 피를 토했다. 늙은 유모가 죽고 처음 지게꾼에게 식재료를 받았을 때서야 처음으로 지게로 싣고 온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지게꾼이 가져온 짐 안에 들었던 거라 해 봤자 보리 섞은 쌀 여섯 되에, 소금 한 줌과 참기름 등이 다였다. 그나마 봄과 여름철에는 제철 채소나 과일이 있었지만, 가을이 되면 말린 나물과 장아찌 몇 종류가 다였다. 반빗간 여인이 광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보다도 볼품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겨울에 눈으로 산길이 막혀 얼마간 식재료가 오지 못할 경우, 하루에 한 끼로 버틴 적도 허다했다.
유모가 죽은 이듬해, 겨우내 내린 눈이 아직 녹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형님께서 보낸 여인들이 산에 올랐다. 그 여인들이 오기 전까지 밥조차 할 줄 몰라 생쌀을 씹고, 구황작물이나 사냥해 온 짐승을 통째로 아궁이에 구워 먹으며 지냈다. 허나, 찬 하나도 제대로 만들 줄 모르던 게으른 여인들은 보름이 지나기 전에 산에서 도망가기 바빴었다.
문득 죽어가던 늙은이가 마지막으로 애절하게 저를 보았던 눈빛이 떠올랐다.
‘마마…… 불쌍한 우리 대군마마……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버티셔야 합니다. 궁으로 돌아가시거든…….’
“그러니 차라리 언년이의 말대로 돌섬네를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오라버니!”
“뭐?”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셨기에 소녀가 묻는 말에 대답이 없으십니까?”
“미안하구나. 무엇을 물었지?”
“돌섬네를 이곳으로 부르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습니다.”
“돌섬네를?”
“예에. 그이가 제법 손맛이 좋지 않습니까? 오라버님께서도 사가에 계실 적 그이 음식을 종종 찾지 않으셨습니까?”
후후, 아무것도 모르는 예화의 순진함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돌섬네를 이곳으로 부를 수도 없지만, 만약 돌섬네가 이곳으로 올 수 있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 진수성찬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이가 식재료를 만들어 내는 도깨비방망이라도 들고 있지 않은 한은.
“그 말은 아니 들은 것으로 하겠다.”
“하지만…….”
“그래도 허기가 질 것인데, 맛이라도 보거라.”
“예에…….”
예화에게 음식을 권하고 도운은 주먹밥을 하나 집어 먹었다. 생전 처음 본 주먹밥의 맛이 실로 놀라웠다. 크기가 작으니 한입에 털어 넣기 쉬웠으며, 나물 향이 배어 있어 맛도 좋았다. 소금과 참기름으로 적절히 간이 되어 있던 나물의 향이 밥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그 풍미가 더욱 진하였다. 멀리 보니 요상 망측한 주먹밥이라고 펄쩍 뛰었던 언년이가 허겁지겁 주먹밥을 베어 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들어 보거라. 부실하기는 하나 그 맛이 과히 나쁘지는 않다.”
“네…… 오라버니.”
먼저 주먹밥을 먹는 도운을 보자 예화가 마지못해 따라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 후로도 한참을 머물며 절경을 구경하다 세 사람은 곧 일어섰다. 입추가 지나고 날이 많이 짧아졌으니 서둘러 초가로 돌아가야 했다.
초가로 돌아가는 길, 도운은 문득 반빗간에 들어 있을 여인이 궁금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태 이름도 모르고 지내던 여인의 하루가 궁금했다. 이 길이 원래 이렇게 멀었었나. 초가로 돌아가는 길이 어인 일인지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다녀오셨습니까?”
초가로 돌아오자 반빗간에서 잰걸음으로 나온 청조가 읍하였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언제나 그러하듯이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애써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찰나, 뒤에서 앙칼진 언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 나 좀 보시오.”
그 목소리에 도운은 잠시 발걸음이 멈칫하였으나 곧 방으로 들어섰다. 언년이 어떤 심통을 부릴지 뻔히 알고 있었으나, 아랫것들 하는 일에 사내인 자신이 나서는 것도 괜히 체면 깎이는 일이었다. 의복을 갈아입은 도운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양, 보료에 벌렁 누워 버렸다.
한참을 누워 허공만 바라보는데 명치끝이 답답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해서인지 낮에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쳐보았지만, 체기가 도통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간 그렇게 앉아 있자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운은 호롱에 불을 붙이고는 잠시 서책을 펼쳤다. 한참 서책을 읽고 있을 때, 청조가 저녁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도운은 애써 보지 않는 척 청조를 곁눈질했다. 곁눈질한 여인은 늘 보았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동그란 이마 가장자리를 중심으로 송골송골 맺힌 땀, 그 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 반상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 동그란 눈동자, 그리고…….
“가을이라 도토리가 지천입니다. 해서 도토리묵을 조금 쑤어 봤습니다. 매일을 마른 풀만 드시느라 입맛이 없으셨을 텐데, 장에 찍어 드셔보셔요.”
꼭 한마디씩 건네는 저 붉고 도톰한 입술도 그대로였다. 제 앞으로 도토리묵을 밀어주고는 밥과 국그릇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어 놓은 뒤, 여인은 방을 나섰다. 계속해서 속이 좋지 아니했지만 젓가락을 들어 탱글거리는 도토리묵 한 점을 들어 올렸다.
저녁을 물리고 일각이 다 되어 가는데도 체기가 가라앉지 않아 도운은 산보라도 할 요량으로 잠시 밖으로 나섰다. 마당을 가로질러 싸리문에 다다르는데, 반빗간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도운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놋쇠 대야와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건넛방으로 향하는 청조를 흘끔 바라본 후 초가를 나섰다.
“정말 어찌 이리 굼뜨오? 저녁 먹은 지가 벌써 일다경(一茶頃: 15분)이 지났는데 뭐하다 이제야 오는 거요? 내 우리 아가씨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몇 번을 일러줘야 일을 제대로 한단 말이오?”
“송구합니다, 아가씨.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청조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사죄하였지만, 예화는 영 마뜩잖은 듯 새초롬한 표정으로 청조의 위아래를 훑었다. 청조는 서둘러 뜨거운 김이 훨훨 올라오는 대야를 내려놓고 함께 가져온 무명으로 만든 주머니를 적셨다. 뜨겁게 적신 무명주머니를 꼭 짜서 그 안에 말린 쑥을 넣고, 예화의 발과 종아리에 대 주고는 그 위에 다시 두툼한 포대기를 덮어 열이 새는 것을 막았다.
“무엇이냐?”
“말린 쑥입니다. 쑥은 그 향이 심신의 안정에도 좋고, 또 어혈이나 근육통을 풀어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이렇게 훈증하듯 일식경 정도 찜질을 해 준 후, 발바닥과 종아리의 혈 자리를 조금 주무르면 훨씬 좋아지실 것입니다.”
“그래? 네가 유곽의 창기였다 하더니 약방기생 출신이었나 보구나.”
다소 경멸 어린 말투로 자신을 약방기생이라고 칭하는 말에 청조의 손이 멈췄다.
“저는 창기도 아니고, 약방기생 출신도 아닙니다.”
“아니야? 그래, 내가 실언을 하였구나. 허나 설령 약방기생이라 해도 뭐가 대수겠느냐. 하늘에서 정해 주신 천명이 그러한 것인데. 그저 자신의 천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분수와 도리에 어긋남 없이 열심히 살면 될 것을.”
언중유골이라, 고운 목소리로 유감인 듯 말을 했지만, 말에 저를 향한 뼈와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지금 네 주제를 알고 행동에 각별히 유념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감히 자신의 사내를 탐하고 싶은 너의 분수를 알아라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예, 유념하겠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쑥이 효험이 있는 듯하다. 심신의 고단함이 많이 사라지는 것 같구나. 오늘 언년이 너도 꽤나 고단하였을 것인데, 이이에게 찜질 한번 받아 보거라.”
예화의 살가운 말에 언년이가 반색을 하며 눈을 빛냈다.
“예? 저 말씀이십니까요? 허지만 어찌 제가 감히 아가씨 앞에서 다른 이의 시중을 받는답니까?”
말은 거절하는 듯 빼면서도 은근 기대가 되는지 입꼬리를 비죽 올린 언년이 청조를 흘끔거렸다. 제 몸종의 기대하는 모습이 눈에 뻔히 보이는지라 예화는 방긋거리며 언년을 비웃었다.
“무어가 어때서, 사가도 아니고. 오랫동안 내 곁에서 수고하는 너인데, 내 그런 거 하나 눈감아주지 않으면 뒤에서 나를 흉볼 것이 아니냐.”
“아이참, 아가씨께서는…… 제가 언제 흉을 본다고 그러십니까?”
“안다, 알아. 농이다.”
“예에. 저도 압니다요.”
입속의 혀처럼 죽이 척척 맞는 언년이의 행실이 마음에 드는지, 예화는 아까보다도 더 환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꽃처럼 화사한 얼굴로 청조에게 언년이의 다리를 찜질하라 명령하였다.
하늘에서 정해 주신 천명을 논하더니, 중인인 저에게 한낱 노비의 다리를 주무르라 그 고운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허나, 양반이었다. 양반이고 서방님의 소중한 객이었다.
청조는 치마 밖으로 쑥 내민 언년이의 때가 꼬질꼬질한 버선을 벗기고 뜨겁게 젖은 무명주머니에 쑥을 넣었다. 일렬의 과정을 일관된 표정으로 행하는 청조를 보는 예화와 언년이의 눈빛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둘은 서로 마주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