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름을 비추는 새벽-3화 (3/25)

3. 지체 높은 사내

“오셨습니까?”

청조의 예의 바른 인사에 비단 도포를 차려입은 젊은 사내는 차가운 눈매를 한번 던질 뿐 이렇다 대답하지 않고 지나쳤다. 청조가 처음 이 산에 들어오고, 따듯한 봄에 한 번 뵈었던 서방님의 친우분이셨다. 도포 뒷자락을 휘날리며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청조를 지나친 사내는 섬돌을 밟고 마루로 올랐다.

“나 익태일세. 안으로 들겠네.”

그가 방으로 들며 섬돌 위에 벗어 둔 신을 가지런히 정리한 청조는 익태와 함께 온 일꾼과 함께 반빗간으로 향했다. 지게를 내린 일꾼에게서 얼마간의 곡식을 받아 독에 채우고, 예까지 힘겹게 올라온 그를 위해 시원한 식혜 한 사발을 내주었다. 이후 소반에 약간의 다식과 식혜를 올리고 바삐 반빗간을 나섰다.

“잠시 들겠습니다.”

문을 열고 조신하게 방으로 든 청조는 들고 온 소반을 내렸다. 소반 위에 젓가락을 다시 가지런히 매만진 후, 고운 목소리로 읍하였다.

“더운 날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심하였을 테니 해갈하시라 식혜로 들였습니다.”

나긋한 목소리로 고하고 방을 나서는 청조의 뒤태를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익태는 소반에 놓인 식혜와 다식으로 눈을 돌렸다. 오랜 세월 이 산을 오가며 처음 대접받아 보는 주전부리였다. 식재료가 마땅치 않은 산 생활에서도 청조가 부지런히 산을 누비며 채집한 송홧가루와 꿀을 한데 넣어 반죽한 치자색 다식이었다.

다식판도 없이 손으로 빚어낸 다식은 그 크기가 일정할 뿐만 아니라 모양도 나무랄 데 없이 동글납작한 것이 보기에도 좋았다. 뽀얀 백자 접시에 줄을 맞추어 가지런히 놓인 것이 담긴 모양새 역시 나무랄 곳이 없었다. 왠지 어그러뜨리고 싶은 그 모습에 익태는 접시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다식의 생김새, 담긴 모양새에서 만든 이의 야무진 성품이 나오는 듯하여 마음이 불편했다.

“목이 탈 터인데 들게.”

“아, 그러지.”

도운의 권유에 살짝 들이켠 식혜의 맛은 적당히 달고 시원하였으며, 뒤끝에 살짝 감도는 생강 향이 알싸하고 개운하였다. 향과 맛의 조화를 잘 이룬 것이 일품인 식혜였지만,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식혜가 든 사발을 내려놓으며 익태는 도운의 얼굴을 살폈다.

“이번 찬모는 꽤 오래가네 그려.”

찬모로 보내진 여인이 아닌 것을 서로가 뻔히 알고 있었다. 일부러 찬모라 칭하며 떠보는 익태의 한마디에 문득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오래가는군. 어찌나 질긴지, 그 질기기가 백 년 묵은 칡 줄기보다 더하네. 아무리 윽박지르고, 내치려 해도 도통 그 고집을 꺾지 않아.”

“어찌하겠나. 어차피 저것을 내쳐도 또 다른 이가 올 것이 아닌가. 저것의 성품이 모자라지 않다면 대충 참고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이제 곧 이 일도 질리실 때가 되지 않았는가. 조금만 기다리게.”

“차라리 내 목숨을 취하려 자객을 보낼 때가 더 나았네. 이번 방법은 치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자객을 보낼 때가 더 나았다니. 어찌 그러한가? 적어도 지금은 목숨을 위협받을 일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치욕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낫지.”

차라리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낫다고? 익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 전만 해도 이 비열하고도 졸렬한 방법에 코웃음을 치던 친우가 변하였다. 색기를 흘리던 숱한 여인을 보고도 돌부처마냥 꿈쩍 안 하던 그였다. 그런 그의 감정에 일말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부정이든 긍정이든, 변화는 옳지 않았다.

변화의 원인이 반빗간에 들어 있는 저 자그마한 여인이라는 사실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익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만을 억지로 누르며 제 친우를 은근히 살폈다. 복면에 가려진 표정까지야 알 수가 없으나, 고집스럽게 꽉 맞물려 있는 입술에서 그의 번잡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화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 그 아이는 잘 있는가?”

“잘 있지. 요즘 혼담이 들어오고 있네.”

“혼담?”

“그래, 이제 그 아이도 열아홉이 아닌가. 혼기가 꽉 찬 것이 이미 많이 늦었지. 어서 좋은 짝을 만나야 하는데…….”

말끝을 흐리며 친우의 얼굴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나 별다른 변화 없이 굳게 닫힌 도운의 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형식적인 말들이 오가고, 도운이 부탁했던 서책을 전해 준 익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시각의 산은 위험하니,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벌써 가십니까?”

“그래. 식혜 잘 마셨다.”

“저어, 나으리…….”

서늘하게 돌아서는 익태를 급하게 부른 청조가 말끝을 흐렸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예에, 저 외람되오나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저, 혹여 다음번 지게꾼을 통하여 고기 한 덩이만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왜, 고기가 먹고 싶으냐?”

헛, 건방진 찬모의 부탁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익태가 빈정거렸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소인이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요즘 서방님께서 기력이 쇠하신 듯하여. 여기…… 대신 적지만 육포를 준비해 뒀습니다. 토끼 고기를 잘 말려 정성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으로 대신 셈을 치르면 아니 되겠습니까? 제가 산을 내려가기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나리.”

공손히 고하는 찬모의 모습이 참으로 맘에 들지 않았다. 순박하고 음전한 척 제 친우를 홀리려 노력하는 모습이 더욱 그랬다. 게다가 뭐, 서방님? 감히 제까짓 천한 년이 누구에게 서방님이라 하는 것인가? 익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토끼 육포라? 하품 중의 하품이 아니더냐? 그까짓 육포 따위 필요 없으니 너나 주전부리 삼도록 하여라. 하품 중의 하품인 것이 너 같은 천한 것들이 먹기에 딱이구나. 그리고 식재료는 내 알아서 챙겨 줄 터이니 다시는 이런 건방을 떨지 말거라.”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 저 천것에게 된맛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어 차갑게 일갈하고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익태의 뒤에서 고개를 깊게 숙인 청조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용히 읍하였다.

“송구합니다, 나으리. 살펴 가십시오.”

저것이 정말 배알도 없구나. 방문을 열고 나오려다 밖에서 들리는 대화를 모다 들은 도운은 가볍게 혀를 찼다. 저것의 저런 점이 제 속을 확 뒤집어 놓았다. 모든 걸 다 인내한다는 듯, 아무리 외면하고 박대하여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저런 모습은 그간 이곳을 들렸던 다른 여인네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곳에 첫 여인이 들어온 것은 작년 새해가 시작할 때쯤이었다. 저를 보필하던 늙은이가 죽고, 자신의 존재를 가시같이 여기는 형님께서 수시로 보내던 자객들의 행적이 뜸해질 무렵이었다. 처음에야 목숨을 지키려 자객들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며 발버둥 쳤다. 그들의 검에 저의 살이 베이고, 또 제 검에 그들의 살이 베이기도 했다.

바람 스치는 소리에도 자다 깰 만큼 신경이 끊어질 듯 가늘어져 있었다. 벌게진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검을 꽉 쥐고 살았었다. 허나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음에도 슬쩍 그 칼을 비껴가는 자객들을 보고, 형님께서 진정 저의 목숨을 취하시려고 자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저 토끼 사냥하듯 저를 궁지로 몰고 버러지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해서 별달리 상대하지 않았다. 그저 죽일 테면 죽여라, 목을 쭉 내밀면 이제껏 죽일 듯 달려들던 놈들이 허겁지겁 그 검을 거두고 물러갔다. 그러자 어느 날 그가 방법을 바꾸었다. 목숨을 위협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하니 괴롭히는 방법을 바꾸신 거겠지.

전에는 제 목숨을 담보로 저를 괴롭히더니, 이제는 정신을 가지고 저를 괴롭혔다. 비록 이 깊은 산속에 처박힌 신세라지만, 고귀한 핏줄인 저였다. 그런 지체 높은 저에게 찬모를 가장한 상스러운 여인들을 들여보내 제 혈통에 흠집을 내고, 저를 기만하였다. 아니, 육욕에 빠져 이 산에서 진정 금수처럼 지내기를 바라신 것이겠지.

수발들던 이가 겨우내 죽었으니, 찬모를 보내 주마 하고 처음에 보낸 것은 분내 진동하는 요염한 창기였다. 그때도 그 징그러운 늙은이가 천박함을 줄줄 흘리던 창기를 끌고 예까지 직접 올라왔었지. 그때를 생각하자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겨우 그런 치졸한 방법이라니, 흥.

콧소리를 역하게 섞어가며 감히 이 몸을 서방님이라고 불렀다. 자신에게 몸을 던지던 창기의 팔목을 부러뜨려 버릴 듯 잡아 싸리문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야차 같은 자신의 모습에 겁을 먹고 발악하며 산을 내려가던 계집의 모습이 참으로 가소로웠었다. 그 후, 두 번째 계집이 어둠을 틈타 여기저기 구르던 더러운 몸을 분 냄새로 감추고 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었다.

역한 콧소리를 내며 이불 속을 파고드는 고것의 머리채를 잡고 마당에 패대기쳐 버렸다. 이어 도끼를 집어 드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 계집은 비명을 질러대며 그대로 어둠 속으로 도망갔다. 허나 시간을 두고 다른 여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중, 분 냄새는 심하지 않았으나 미약을 쓸 줄 알던 요망한 계집에게 당했던 것이 생각나 도운은 머리로 피가 몰렸다.

그날 아침 터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제 옆구리에 찰싹 붙어 누워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미약에 취해 여인을 취한 사실을 알았을 때, 밀려드는 자괴감과 치욕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었다. 그 순간 올라오는 살의를 억누르느라 손바닥이 패일 정도로 주먹을 꽉 쥐어야만 했다.

당당히 제 옆에서 발가벗은 채 자빠져 있는 그것을 잡아다 알몸 그대로 초가 밖으로 내쳤다. 산에 들어오는 여인들은 그렇게 모다 하나같이 똑같았다. 조금의 나음과 그렇지 않음이 다를 뿐 다 거기서 거기였다.

저를 끊임없이 유혹하다, 몇 달에 한 번 산에 올랐던 익태에게까지 추파를 던졌다. 게다가 익태를 모시고 온 하인에게까지 교태를 부릴 정도로 남자에 몸이 달은 창기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굳이 쫓지 않아도 고되고 외로운 산 생활을 참지 못하고 제 발로 산을 떠났다.

앞다투어 산을 떠나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자 코웃음이 났다. 겨우 저런 여인들을 보내어 저를 흔들어 보려는 형님의 유치하고 졸렬한 방식이 우습고 가여울 정도였다. 하지만, 하지만 저 여인은 달랐다. 고약한 분내가 진동하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흙내가 풍기는 여인이었다. 아침이슬을 맞고 올라오는 깊은 산속의 청아한 흙내 같은 것이 여인에게서 강하게 풍겼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저를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여인에게 더없이 화가 났다.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하고 감히 저의 고귀한 혈통에 똥물을 튀기려고 하는 비천하고도 악랄한 여인. 그런 주제에 저를 서방이라 부르며 간교함을 떨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머리를 올려 주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실상 그것은 첫날밤을 가장하여 여인을 범한 것임을.

어차피 그렇고 그런 여인, 겁이 나면 그만 도망가겠지 생각하였다. 허나 가느다랗게 떨면서도 끝내 도망가지 않는 여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는 새에 양물이 벌떡 일어섰다. 여인을 보고 그리 흥분한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비천한 여인을 상대로 사내로서 흥분했다는 사실이 더없이 수치스러웠다. 수치를 느꼈을 때,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허나 본능은 수치심을 간단히 이겨 버렸다. 한번 흥분하기 시작하자 제어할 이성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본능만으로 무장된 교접은 더없이 거칠고 사나웠다. 폭행과 다름없었던 첫날밤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이부자리조차 깔지 않은 딱딱한 방바닥에 여인이 치마로 대충 닦다 만 영롱한 핏자국을 보고서야 여인이 진정 처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날 입술이 하얗게 일어난 여인이 땀을 흘리며 조반상을 차려오자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알 수 없는 분노가 죄책감을 흐려 놓았다. 그때 조반상을 들고 들어온 여인에게 무어라 일갈했던가?

‘되었으니 너나 먹어라!’

그래, 그리 말했지. 그리 냉랭하게 일갈하고 방을 나서던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빛. 그 눈빛에 마음이 번다했다. 작게나마 전날의 잘못에 대한 사과를 전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제 행동에 옳지 못함은 없었다.

노비라도 상전이 저를 취하는 데 있어서 거부할 자격이 없을진대, 하물며 거액의 화대를 받고 몸을 팔러 왔으니 어찌 되었든 창기나 다름없었다. 저 여인은 화대에 대한 값을 치른 것뿐이다. 여인에 대해 슬그머니 이는 미안함과 동정심에 대하여 스스로 변명을 하고 억지로 끊어내었다.

그 후로 한동안 산속을 휘저으며 다녔다. 그렇게 산속을 휘저으며 잡아다 던져놓은 사냥감을 여인은 알뜰히 다루었다. 벗겨낸 털가죽은 잘 무두질하여 광에 쌓아두고, 살코기는 쨍한 햇볕 아래 바람이 잘 드는 그늘에서 정성껏 말려 육포로 만들었다. 고기를 발라내고 남은 뼈를 고아 육수를 우리고, 육포로 만들고 남은 고기와 뼈에 붙은 살점을 긁어모아 만두를 빚어내었다. 산에 오른 후 처음 보는 만둣국에, 불현듯 어린 시절 즐겨 먹었던 만둣국이 떠올라 잠시 마음이 괴란했었다.

“오늘 만두를 좀 빚어 만둣국을 끓여 보았습니다. 국이 뜨거우니 적당히 훌훌 식혀 드셔요.”

“…….”

“그럼 맛나게 드셔요. 소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인 자신은 늘 찬밥이나 눌은밥으로 끼니를 때웠어도, 저에겐 늘 정성으로 밥을 지어 올렸다. 예쁘게 빚어낸 만두를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그릇에 소담히 담아와 제 앞에 가져다 두고는 대답도 없는 저에게 꼬박꼬박 말을 건네곤 일어섰다.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냉이와 두릅이 지천으로 널리면 한 소쿠리를 캐와 식사에 올리고, 꽃이 피면 화전을 올렸다.

‘냉이와 두릅을 넣고 된장 조치를 끓였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니 벌써부터 냉이와 두릅이 지천에 피었습니다. 여린 잎이라 향이 은은하니 입맛이 도실 것입니다. 잡수어 보소서.’

‘진달래가 한창인지라 화전을 좀 지져보았습니다. 감주와 함께 내왔으니 출출할 때 요기하십시오.’

저의 대답이 없어도 여인은 한마디씩 보태곤 했다. 그렇게 말을 남기고 조용히 일어서는 작은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인은 끊임없이 말을 남겼다. 그리고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어 몸을 부산히 움직였다. 지천에 널린 고사리나 각종 산나물 등을 가득 따와 삶고 햇빛에 말린 다음 잘 묶어 광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또 집 주변에 텃밭을 일구고 채소를 심고 돌보았다. 그 작은 손에 괭이를 들고 텃밭을 가는 일이 힘들 텐데도 일이 끝날 때까지 허리 한번 펴지 않고 손을 놀렸다. 말린 나물들이 광에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며, 일군 텃밭에 뿌린 종자에서 올라오는 여린 잎들을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여인은 작게 미소 짓곤 했었다.

미소 짓는 그 여인을 마주치지 않도록, 번다한 마음을 갈무리할 수 있도록 더욱 산속을 누비며 사냥을 하고 무예를 닦았다. 번다한 마음이란 것이 그저 처녀에게 고통스런 첫날밤을 안겨 주었다는 불편한 진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커가는 사내로서의 욕망을 점점 다스리기가 힘이 들었다.

오며 가며 보게 되는 여인의 바지런한 모습,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 여인은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여인은 여전히 천한 것이어야만 했다. 형님께서 저를 여인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우매한 한량으로, 일개 금수로 만드시려고 보낸 사특하고도 고얀 년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성과는 다르게 제 본능은 사특한 여인의 몸을 탐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여인의 가는 목선을 타고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땀방울에도 음심이 가득 차오르고 음욕이 넘쳤다. 비록 이런 험한 산중에 갇혀 있는 처지이긴 했지만 저는 지체 높은 사내였다. 그런 자신이 저런 비천한 여인에게 몸이 달아오른다는 사실에 상실감과 치욕을 느꼈다.

그리고 그날이 오고 말았다.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과 고매한 기개가 무너지는 날이었다. 저를 흔드는 여인을 피해 산속을 헤매던 무더운 어느 날, 석양을 등지며 내려오던 그때 계곡에서 첨벙거리는 물장구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야 했다. 그도 아니면 물장구 소리를 들었을 때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물가를 헤치며 걸어 나오는 여인을 보지 말아야 했다.

머리에서부터 물을 뒤집어쓰고 휘적휘적 걸어 나오는 굴곡진 몸 위로, 구르듯 떨어지는 물방울이 노을에 반사되어 다홍빛으로 투명하게 빛났다. 여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작은 물방울조차 그런 음란한 색을 띠고 저를 유혹했다. 도운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뒤를 돌아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흔들리는 것은 모르고, 저를 흔드는 여인이 괘씸해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뛰어가던 발이 멈췄다. 뛰어온 길을 돌아보는 도운의 눈길에 감출 수 없는 정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시원하다.”

휘적휘적 물을 가로질러 나온 청조는 삼단 같은 머리를 틀어쥐며 물기를 꽉 짜낸 후, 이리저리 흔들어 대충 물기를 털어냈다.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세답을 하던 도중 젖어 버린 옷가지를 널어놓았던 판판한 바위까지 걸어갔다. 연이어 내리쬐는 폭염에도 이리 열을 식힐 수 있는 계곡이 있으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멱을 감는 동안 뜨겁게 달구어졌던 바위 위에 널어 논 옷가지와 영견이 바짝 말라 보드라웠다. 햇빛 냄새를 가득 먹은 영견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닦아내고, 몸에 흐르는 물방울을 대충 털어 낸 후 먼저 속곳부터 갖춰 입었다. 그 위에 바로 치마를 두르고 팔에 저고리를 걸치려는 순간, 보삭보삭, 어디선가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뉘시오?”

인기척에 놀란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얼른 몸을 숙이고 옷고름과 함께 저고리 앞섬을 꽉 부여잡았다. 날이 저물어 가는 이 시각, 이 깊고 험한 산중에 누구일까? 누군가를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곳까지 누구일까? 혹여 이 깊은 곳까지 들어온 사냥꾼이나 심마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다.

“거기 뉘시오? 냉큼 물러가시오. 아니면 소리를 지를 것이오. 그…… 근처에 내 서방님이 있소.”

“네가 말하는 서방이 나를 말함이냐?”

“서, 서방님?”

저벅저벅 다가오는 도운의 눈동자가 검고 깊었다. 청조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여러 달, 저를 멀리하던 서방님이셨는데 어째서. 다시금 그날의 고통이 떠올라 벌써부터 몸이 떨렸다.

“예까지 어, 어쩐 일이십니까?”

“글쎄. 너야말로 이런 곳에서 그런 차림으로 무얼 하느냐? 깊은 산중이라 하나 어디서 누가 나타날 줄 알고. 아니면 뉘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느냐? 그래, 그 천한 근성이 어디 가지 않는구나.”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점점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뒷걸음질 치던 청조는 저고리를 더욱 세게 움켜쥐고 몸을 숙였다. 하지만 어느새 바짝 다가온 도운이 청조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앞섬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 미처 매듭짓지 못한 저고리에 힘이 풀리며 앞섬이 슬쩍 벌어졌다. 벌어진 앞섬 사이로 꽉 여민 치마말기에 눌려 터질 듯 솟아오른 가슴이 깊은 골을 만들고 있었다.

깊게 패여 있는 그 골짜기가 사내의 눈엔 너무나도 색정적이었다. 청조가 뿜어내는 요염함에 취한 도운은 후각과 시각이 한꺼번에 마비되는 듯 아찔함을 느꼈다. ‘꿀떡’, 참을 수 없는 갈증에 침을 한번 삼킨 도운의 커다란 손이 금세 치마말기 끈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손에 잡힌 끈을 잡아 뜯듯 풀러 버리자, 색이 바래 버린 무명 치마가 힘없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거추장스럽던 치마가 사라지자 짧은 저고리 아래로 미쳐 가려지지 않은 크고 탄탄한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저녁노을 때문인지, 더욱 다홍빛으로 물들은 젖꼭지가 저고리 끝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져 있었다. 심하게 긴장한 여인이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숨을 들이켤 때마다 저고리 밑으로 앙증맞은 젖꼭지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수줍게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아니라고? 흥, 내 너 같은 것들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사내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역한 것들.”

여름내 텃밭에서 일하며 뙤약볕에 달궈진 까무잡잡한 얼굴과는 다르게, 속살은 진주 알처럼 결이 곱고 투명하리만치 희었다. 저 곱고 풍만한 가슴을 손으로 쥐고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었다. 몰려드는 적나라하고 음탕한 상상에 도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요물이다. 저것은 요물이다. 진정 저를 육욕에 미친 금수로 만들 요물이었다.

어쩌자고 저 요물의 술수에 이리 힘없이 넘어가는 것인가. 저와 같은 고귀한 혈통이, 어째서! 아니다, 아니야. 자신이 넘어간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그저 사내로서의 성욕을 푸는 일이고, 저것은 그런 쓰임에 맞게 보내진 여인이다. 그러니 그런 용도에 맞게 쓰면 되는 일. 도운은 밀려드는 수치심으로부터 스스로를 변명해야만 했고, 그 변명을 정당화시켜야 했다.

그렇기에 도운은 저를 육욕만 남은 금수로 만드는 요물의 육감적인 몸을 외면하였다. 보란 듯이 저를 향하여 탱탱하게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여인의 젖가슴을 외면하려, 도운은 청조의 몸을 사납게 잡아 뒤로 돌려 버렸다. 한 손으로는 여인의 가느다란 팔목을 비틀어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뒷목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청조의 팔목을 돌려 잡은 채로 목 뒤를 거칠게 누르자, 힘없는 여인의 몸이 바위 위로 철퍼덕 넘어갔다. 오후 내내 햇빛에 달궈진 바위에 몸이 맞닿자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동그랗게 뜬 눈을 불안하게 굴리며 청조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도운은 덜덜 떨리는 여인의 가느다란 어깨를 보자 잠시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엉망으로 망가뜨리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도운은 지체 없이 엎드린 여인의 속곳을 붙잡아 한 번에 끌어내렸다. 흠칫거리며 드러난 여인의 둔부가 잘 익은 복숭아를 닮아 있었다. 쏙 들어간 허리부터 시작하여 우아한 곡선으로 둔덕을 이루며 그 한가운데 줄을 긋듯 골이 파진 모양새가 닮았고, 순결한 바탕에 연한 복사꽃 색을 띄우는 그것의 색과 말랑한 감촉이 닮아 있었다. 도운은 그 어여쁜 두 살덩이를 일부러 우악스럽게 잡고 한껏 벌렸다.

벌어진 골 사이로 보이는 옥문의 주름을 하나하나 엄지로 훑다 손가락을 더 아래로 내렸다. 아래로 내린 두 엄지손가락으로 숱이 적은 거웃을 헤치고 둔부와 함께 비문을 활짝 벌렸다. 아직 완전히 어둠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더구나 사방이 확 트인 이런 곳에서 수치스럽고 망측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청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작게 울먹거렸다.

“서방님, 서방님, 밖이옵니다. 제발,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소첩이 너무 두렵나이다.”

“그렇게 두려운데 어찌 이리 홀딱 벗고 있었느냐? 음탕한 것, 지나가는 사내가 있길 은근 바란 것을 내 모르는 줄 아느냐?”

“아……닙니다. 그런 것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대답하는 여인의 모습에 도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치사하고 졸렬했다. 벌써부터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발딱 일어난 제 분신은 이미 선단 끝에 방울까지 맺고 있었다. 이런 흉물스런 꼴을 하고도 이렇게까지 치졸하게 굴고 있는 제 모습이 더없이 가소롭고 한심했다.

그렇기에 저를 이렇듯 치졸한 사내로 만드는 여인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어찌하여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 여인이 무엇이기에! 도운은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래, 그저 성욕만 풀면 된다. 그러라고 보내진 여인이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격분을 이기지 못한 도운은 아무 말 없이 바짝 독이 오른 남근을 여인의 좁디좁은 구멍으로 한 번에 밀어 넣었다.

“아앗!”

단말마를 지르던 청조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며 눈을 꼭 감았다. 전에도 겪은 바 있으니 이번엔 좀 수월할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거려 보았으나 다 소용없었다. 생살을 찢는 것만 같은 격통은 그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뒤에서 밀어붙이는 격렬한 힘에 밀려 거친 바위에 연한 가슴이며 뱃살까지 쓸려 더욱 고통스러웠다.

여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도운의 흥분은 더해가기만 했다. 판판한 바위에 눌려 옆으로 삐져나온 풍만한 가슴이, 허리를 쳐댈 때마다 그 풍만한 젖가슴이 위아래로 밀리며 한껏 찌그러지는 모습에 점점 흥분했다.

제 사타구니에 부딪힐 때마다 탄력적으로 출렁대는 뽀얀 둔부의 움직임. 잘 익은 복숭아의 즙이 터지듯, 그 동그랗고 탱탱한 두 쪽의 살덩이가 번들거리는 땀방울을 튕겨대며 출렁대는 모습에 흥분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제 커다란 양물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여인의 작은 비문을 찢어질 듯 벌려대는 모습에 흥분했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 어디선가 가학적인 흥분이 쉴 새 없이 치솟아, 도운은 마르고 좁은 청조의 안을 더욱 격렬하게 퍽퍽 쳐대며 마음껏 쑤셔댔다.

“아읏, 아……앗.”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청조의 입이 심한 고통에 다물어지질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의 무섭도록 강한 몸짓에 밀려 몸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자, 바들거리는 발끝으로 겨우 땅을 딛고 서 있던 다리가 결국 공중으로 들렸다. 갈 곳을 잃은 발길이 잠시 허공에서 버둥거렸으나, 이내 뒤를 쳐대는 억센 힘에 맞추어 힘없이 털렁거렸다.

“아으으, 흐윽…….”

겨우 입을 틀어막으며 신음을 참던 청조의 몸에서 갑자기 양물이 쑥 빠져나갔다. 제 욕심을 다 채운 도운이 마침내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허나 천한 것의 몸에 제 씨앗을 심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고 공중에 대고 뿌리기에는 뭔가 허전했다.

결국, 도운은 진한 액을 흘리는 귀두 끝을 복숭아를 닮은 여인의 둔부 골 사이에 박고 비벼댔다. 본문에 와 닿는 망측한 느낌에 깜짝 놀란 청조가 허리를 비틀며 이리저리 피해 보았다. 하지만 커다란 손에 꽉 잡힌 엉덩이가 힘으로 눌리자 작은 발버둥은 곧 멈추었다.

더 이상 반항하지도, 어찌하지도 못하는 여인은 충격과 비참함에 그저 입술을 깨물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공중에서 털렁대던 발끝이 뒤쪽에서 번지는 뜨거운 액체를 느끼자 바들거리며 안으로 힘껏 구부러들었다. 사정을 마친 도운이 힘껏 잡고 있던 청조의 엉덩이를 놓고 멀어지자, 골 사이를 타고 흐르는 진액이 여인의 비문을 적시며 아래로 흘렀다.

바위에 엎드린 채,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인의 등이 가쁜 숨을 내쉬며 크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잔뜩 더럽혀진 채 번들거리는 허벅지 안쪽 살과는 정반대로 여인의 하얀 나신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또다시 사내로서의 욕망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도운은 그런 자신에게 토악질이 올라왔다. 미쳤구나, 미친 것이다. 청조를 그대로 남겨둔 채, 도운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 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토악질이 나와도, 아무리 여인을 탓하고 경멸해도, 여인을 향한 욕망을 누를 수가 없었다. 서책에 집중을 하여도, 무예를 수련하여도, 산속을 헤집으며 짐승들을 사냥해도, 몸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열은 식을 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은 어느새 여인의 아랫도리에 달라붙어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발정 난 금수, 아니 개새끼가 되어 버린 처참한 느낌에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형님의 수작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더욱 여인을 몰아붙였다. 방사를 치를 때조차 결코 몸을 더듬지 아니하였다. 그저 저의 욕정만 해결하고 또 해결하려 들었다. 그래, 어차피 욕정받이로 온 여인 그저 그 쓰임에 맞게 쓰면 되는 것이다 생각하였다. 허나 그리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은 허해지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더욱 깊어만 갔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긴 밤 내내 열에 들끓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결국 새벽이슬을 밟고 마당을 가로질러 여인네의 방문을 열어 버렸다. 두 번, 세 번을 격하게 취하고 또 취했지만 제 속의 욕정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채 더욱 목이 말랐다.

* * *

“고기가 먹고 싶었느냐?”

“아닙니다. 저는 그저 요즘 서방님께서 잘 잡수시질 못하시기에, 기름진 찬이 없어 그런가 하여 부탁을 올린 것이옵니다. 정말입니다.”

“네가 감히 무엇이관데 내 걱정을 한단 말이냐! 정녕 이 산에서 너의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느냐? 사내의 욕정이나 받아낼 도구로 이 산에 온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저 화대를 받은 만큼, 내가 원할 때 다리만 벌리면 되거늘. 생각 따윈 하려 하지 마라. 네가 나를 네 지아비로 여긴다는 네 맘 따위야 상관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네가 진짜 내 지어미라도 되는 듯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어찌 되었든 반상의 도리가 있는데, 네까짓 천한 것이 감히 누구에게 청을 한다는 것이냐! 다시는 그런 건방을 떨지 말거라. 당장에 산을 내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주제를 똑똑히 알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차갑게 일갈하는 도운의 목소리에 청조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내리깐 눈동자가 슬픔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지만 도운은 부러 더욱 질책하였다.

“왜 대답이 없느냐? 억울하다 생각하느냐?”

“아니옵니다. 소첩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답답한 것. 또다시 깊게 고개를 숙이는 청조를 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화가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되었다!”

쾅! 소리가 울릴 정도로 거세게 닫아 버린 문에서 바람이 일었다. 마치 제 마음에 이는 찬바람 같아 청조의 고개가 더욱 내려갔다. 흙바닥을 바라보던 텅 빈 눈을 몇 번 깜박거리던 청조는 이내 고개를 들고 반빗간에 들었다. 오전에 텃밭에서 뽑아낸 무에서 따로 모아둔 무청을 삶을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처마 끝에 매달아 잘 마른 무청이 구수한 시래기가 되거든, 겨울에 국도 끓이고 무침하기도 참 좋을 것이다. 청조는 아궁이 속으로 장작을 잘 밀어 넣어 불을 지피고 가마솥 가득 물을 길어 넣었다. 아궁이의 불이 다소 약한 듯싶어 불을 키우려 집어 든 장작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무거운 솥뚜껑을 가마솥에 잘 맞추어 닫았다.

물이 끓는 동안 아궁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청조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무를 잡고 서걱서걱 썰기 시작했다. 다시금 눈물이 한 방울 흘러 손등으로 떨어졌다. 얼른 코를 훅 들이켰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맑은 눈물이 흘렀지만 마치 아무것도 흐르지 않은 듯, 청조는 계속해서 무만 썰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맑고 찬 공기가 불기 시작했으니, 바람이 무를 실하게 말려줄 것이다. 다 마르거든 가을에 매콤하게 무쳐 서방님 저녁식사에 올려야겠다. 눈물이 흐를수록, 한 움큼씩 썰어 낸 무가 소쿠리를 가득 채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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