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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96화 (95/95)

#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 (6)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 96

외전 :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6)

나도 해보고 싶었던 일? 그 일이 무엇일지 그록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문이 담긴 그록의 시선이 블란에게로 향했고 블란은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에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수줍거나 쑥스러울 때 늘 하던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 그녀였다.

“원래는 졸업 전에 하기로 했는데 제가 자꾸 피해서 못 했던 건데요.”

블란은 괜히 말꼬리를 늘이며 뜸을 들이다가 이내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다부진 표정으로 그록에게 말했다.

“도서관 가요!”

그록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다른 감정이 하나 더 담겼다. 블란은 그 감정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도서관을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록의 눈빛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블란은 그 눈빛에 답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았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늘 그록 씨만 준비하는 것 같아서, 저도 하려구요. 아니 해보고 싶어요.”

단호한 목소리에 그록의 고개를 절로 끄덕여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 어디서?”

쉿. 아무 말도 말라는 듯 그록의 입술 위로 블란의 검지가 올라갔다. 그록은 자신의 입술 위에 맞닿은 손길에 헙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블란은 그록이 조용해지자,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번 주 안에요. 서 우드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고 책 읽어요.”

그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블란의 손가락은 그록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록의 머릿속에선 의문이 가득했다.

‘서 우드 오려면 허가증이 있어야 할 텐데?’

물론 허가증을 받는 그 과정이 쉽지만 기간이 조금 걸리는 편이었다. 거기다가 이제 블란은 엄연한 졸업생이 아닌가. 아직 남 우드에 박사 과정이 생기지도 않은 상황에서 블란이 서 우드 도서관에 출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록의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블란은 걱정 말라는 듯 그의 입술에 닿아있던 손가락을 떼어 톡톡 그록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래 봬도 제가 서 우드 문예 공모전 수상자예요.”

아. 그록의 입에서 깨달음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서 우드 문예 공모전. 장려상을 주었지만 시상식에 초대하지도, 상패도 주지 않았던 그 공모전에서 수상자들에게 주는 혜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서 우드를 비롯한 우드 아카데미 도서관을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었다.

심지어 서 우드 문예 공모전은 블란에게 잘 보이고 싶었든지 혹은 과거의 잘못을 덮어버리고 싶었든지 교수급으로 사용이 가능한 출입증과 대여 카드를 주었다. 블란은 마음만 먹으면 우드 아카데미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서적들도 열람이 가능했다.

“그러니 출입 걱정은 하지 마시구요.”

툭툭. 자신의 가슴께를 두드리며 블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가 이번엔 그록 씨 학교로 찾아갈게요!”

그록의 눈이 커졌다. 블란이 그록의 발표회도 아니고 홀로 그를 만나러 찾아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씩씩한 표정의 블란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블란의 어깨를 감싸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록은 자신을 보러 올 블란이 기대되었다.

***

블란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일어난 이후로 거울만 몇 번을 봤던지. 블란은 괜히 쑥스러운 느낌과 설렘으로 부드럽게 말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가방 안을 한 번 더 살폈다.

평소와 달리 화사하게 꾸민 블란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녀의 가방은 각종 논문과 책들로 빵빵하게 가득 차 있었다. 모두 요즘 그녀가 공부하는 분야였다. 그녀는 가방을 확인한 후 한 번 더 거울을 살펴봤다.

요즘 들어 거울을 자주 보게 되었다. 과거에는 그록을 만날 때 가끔씩 거울을 보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뚱뚱한 자신의 모습에서 ‘워보트 병‘의 그림자를 느꼈기에 거울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뚱뚱하고 못생긴 자신의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그 모습을 보면 떠오르는 죽음과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옭아매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이 조금은 즐거워졌다.

“뭐, 거의 그대로지만.”

부기가 빠지고 살도 빠졌지만 얼굴 이목구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살을 빼면 많이 예뻐진다는데 자신에게는 아직 적용되지 않는 말 같았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거울 속 생기가 느껴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블란은 미래가 보였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느껴졌다.

“후우.”

블란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선 가방을 챙겨 멨다. 조금 무거웠지만 오후 내내 지루하지 않게 공부하려고 이것저것 챙긴 그녀였다. 사실 다 읽지도 못할 것들인데,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는 생각에 들떠 여러 가지를 챙기게 되었다.

“가십니까?”

저택 문을 나서던 블란은 카만 의원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카만은 평소보다 훨씬 더 화사하게 꾸민 블란을 보며 히죽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이트 가십니까? 그록 군이 온다고 합니까?”

카만은 쑥스러워할 블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블란은 카만을 따라 히죽 웃어 보이더니 장난스럽게 답하며 문을 열었다.

“아뇨! 오늘은 제가 그록 씨 보러 가요!”

음? 카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블란은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인사를 하고선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서 우드 아카데미로 걸음을 옮겼다.

“블란 양!”

블란과의 약속 장소가 눈앞에 보인 순간, 그록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블란에게 다가갔다.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이르게 왔건만 벌써 블란이 먼저 와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록 씨 왔어요?”

하지만 놀라서 다가온 그록은 힘차게 블란을 부른 것과 달리 입을 꾹 다문 채 블란을 바라보기만 했다. 블란은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는 그록이 의아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그록이 멈칫하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지?’

블란의 얼굴에 의아함이 나타났다.

“……그록 씨?”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록을 불렀다. 그때 꾹 다물고 있던 그록의 입이 열리더니 그는 멍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블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괜히 블란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옷자락을 매만졌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화사한 색감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청순해 보이는 활동용 원피스를 입은 상태였다. 그록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빛이 납니다.”

헐. 그리고 지나가며 그런 그록과 블란을 보던 서 우드 학생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블란이 평소보다 많이 꾸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빛이 날 정도로 예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다더니.”

한 학생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록을 바라봤다. 여전히 그록은 감탄한 표정이었다. 학생은 이내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연인이 죽음을 이겨냈는데.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예쁘지 않겠는가. 자신 같아도 아주 예뻐 죽을 것 같았다.

“어휴.”

“후우.”

곳곳에서 연구에 지친 서 우드 학생들이 한숨을 내쉬며 그 지치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록과 블란에게는 그 소리들이 전혀 닿지 않았다. 그록은 먼저 기다렸을 블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빨리 나올 걸 그랬습니다.”

블란은 그록의 말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툭 내뱉었다.

“그록 씨는 매일 먼저 나와서 저 기다리잖아요. 심심했어요?”

물음을 던진 블란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닐 때 매일 홀로 수업을 듣고 모든 시간을 견뎌내고 나오면 그록이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 그가 있었고 자신이 가면 그곳에 그가 이미 와 있었다.

그 사실이 얼마나 든든했고 기뻤는지, 하루에서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 그 시간이었다. 그래서 고마웠고 그래서 오늘 블란은 그록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고 설레고, 또한 행복함을 블란은 느꼈다. 그록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블란의 눈동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뇨. 심심하지 않고 오히려 좋았습니다.”

블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괜히 오늘 블란은 평소보다 더 들떴다. 그녀는 그록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록의 시선이 부딪쳤을 때 블란은 씩씩하게 말했다.

“가요! 공부하러!”

그록은 그 답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목소리를 들은 서 우드 학생들의 어깨가 흠칫 떨렸고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데이트도 공부라니!’

두 사람은 자신들을 이제는 해탈한 표정으로 그리고 존경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을 인지하지 못한 채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각사각. 듣기 좋은 펜촉 소리에 그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각사각.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그록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살짝 눈을 떠 옆을 바라봤다. 블란이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도서관 학습실이었다. 서 우드 학생들로 가득 찬 이곳에서 블란은 자신의 공부에 몰두해 있었다. 그록은 그 순간에 새삼 묘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책을, 문학을 사랑하는 블란에게 도서관은 정말 좋아하는 장소였어야 했고 즐겨 가야 했을 장소였어야 했다. 하지만 블란은 늘 고개를 숙인 채 도서관으로 향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책을 빌려 도서관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가의 벤치에 앉아 홀로 책을 읽었다.

그 시간이 어떠했을지. 그렇게 눈과 머리, 심장에 담았을 책 구절들이 어떠했을지 그록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이겨내고 도서관에 자리해 자신의 꿈을 위해 공부하는 블란이 그록은 자랑스러웠고 그래서 뿌듯했다.

사각사각.

하지만 그런 그록과 블란을 지켜보는 시선들에는 뿌듯함이 아닌 놀람이 담겨 있었다. 쪽지들에 글자들이 새겨졌다.

[야. 그록 선배 얼굴 봐. 난 저 선배가 저런 얼굴 할 줄 몰랐다.]

[ㄴ 나도 몰랐다. 완전히 넋이 나갔네, 나갔어.]

[ㄴ 솔로는 서러워서 살겠나.]

중간고사가 끝나고 그 후에 축제까지 끝낸 도서관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이 과제를 미루다, 미루다 못해 어쩔 수 없이 도서관으로 달려와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 속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축제로 붕 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든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비친 그록과 블란, 특히 블란을 바라보는 그록의 눈빛은 놀라움을 넘어 이제는 신기했다.

사각사각. 학생들의 필담은 계속해서 채워져 갔다.

[누가 저 얼굴 보고 냉정하다고 하겠어?]

[ㄴ 저번에 그레이 교수님 과제 중간 검사 그록 선배한테 받았거든? 나 그때 완전히 탈탈 털렸는데. 그때 제일 무서웠던 게 뭔 줄 알아?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다는 거야. 그런데 지금 저 표정이라니!]

달달함이 뚝뚝 떨어지는 그록의 눈빛이 블란에게로 향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블란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넘길 때 넋을 놓고 보고, 블란과 잠시 눈을 마주치면 아주 바보처럼 헤벌쭉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서 우드에서 그록을 잠시라도 마주했던 학생들에게는 그저 놀랍기 그지없었다.

사각사각. 필담은 채워져 갔다.

[역시 사랑은 위대한 듯.]

사랑의 위대함이 만든 달달함에 속이 쓰릴 것 같아 학생들은 애써 그록과 블란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을 바라봤다. 차라리 과제가 나았다. 그리고 저 둘도 공부를 하지 않는가. 물론 그록이야 블란을 보기 바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블란의 모습에 자극을 받은 서 우드 학생들은 전보다는 조금 더 열성적으로 과제를 대했다. 그들도 남 우드에서 만들려 하는 박사과정의 첫 주자가 블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열심히 하는 블란에게서 어떤 자극을 받았다.

톡톡톡.

블란은 아주 작게 펜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옆을 바라봤다. 그록이 블란의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블란은 눈빛으로 물었고 그록은 그 눈빛에 짧은 쪽지로 답했다.

‘눈이 보고 싶습니다. 책만 너무 보지 마십시오.’

블란은 순간 도서관임을 잊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향해 혐오의 칼을 들이밀지 않았다. 이런 순간을 학창 시절 내내 기다렸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지금 그 순간을 맞이했다. 자신의 눈동자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와 함께. 블란은 그록이 보낸 쪽지의 뒷면에 글을 적고는 그록에게 건넸다. 그록은 쪽지를 봤다. 그보다 더 짧았다.

‘자, 봐요.’

그록은 쪽지에서 시선을 떼어 블란을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둘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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