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94화 (93/95)

#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 (4)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 94

외전 :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4)

“전시요?”

그록의 물음에 루시앙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상관이 없는데, 동료 녀석이랑 교수님께서 제안을 해주셔서 말이야.”

제안? 그록은 루시앙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블란을 힐끗 바라봤지만 블란은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못 듣고 있는지 그저 뚫어져라 그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록, 너도 알다시피 내 스타일이 조금 많이 파괴적이지. 나는 파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둠 또한 하나의 생명이라고 여기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느낌이 덜 다가오는 것 같아. 그리고 몇몇 평론가들에게 안 좋은 평을 듣고 있기도 하고.”

저번 작업실을 방문한 이후 루시앙에 대해서 알아보았던 그록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앙의 그 파괴적이고 창조적인 면을 좋게 보는 평도 있었지만 기존의 화풍 양식을 파괴하는 그를 향한 질타와 비판 또한 존재했다.

“그래서 동료 화가 녀석이 이 그림을 보더니, 3학년 전시회 때 이 그림을 내거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더라고.”

서 우드 문예 공모전이 가을에 있듯이 미술과 음악 등의 다른 학부에서도 계절마다 공모전 혹은 전시회, 공연 등을 열었다. 그리고 미술학부 중 회화과의 전시는 여름이 완연한 뜨거움을 발하기 전, 초여름에 시작되었다.

그록은 루시앙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작품은 훌륭했다. 예술에, 특히 미술에 거의 문외한인 자신이 보더라도 이 작품은 이전의 루시앙의 작품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루시앙에게 이 작품을 전시회에 내걸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납득이 되기는 하군요.”

그록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들려온 루시앙의 답은 묘했다.

“네 눈에도 달라 보이나?”

“네?”

그 묘한 답 혹은 물음에 그록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나타났다.

달랐다. 많이 달랐다. 어둠이 담긴 루시앙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그림은 빛의 향연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루시앙의 물음에 답을 한 이는 다른 이였다.

“같아요.”

블란이었다. 루시앙의 눈빛에 이채가 돌더니 그는 블란을 바라보며 넌지시 그 이유를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블란은 여전히 그림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루시앙 씨가 방금 말씀하셨듯이 어둠 또한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셨죠?”

“그랬지.”

루시앙의 수긍에 그록은 블란을 따라 그림을 바라봤다. 블란은 빛의 향연이나 다름없는 이 작품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록의 시선이 그림에서 블란으로 향했다. 그때 블란의 입이 열렸다.

“이 빛 속에서도 생명이 느껴지네요.”

호오. 루시앙의 입에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블란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시앙 씨의 다른 작품에서 어둠이 강조되었지만 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금 이 작품에도 빛이 존재하지만 빛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잘 보이죠.”

그록은 그 말에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그 말대로였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들이 블란의 금발과 맞닿아 화려한 빛의 향연을 만들었을 때, 그록은 어두운 쪽에 앉아 그녀의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과 빛.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서 루시앙 씨의 작품은 늘 생명과 활기로 가득 차 있죠.”

짝짝짝. 루시앙이 박수를 쳤다. 그의 입꼬리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그는 블란에게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떠오르는 시인이라더니,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군.”

블란은 그 감탄에 작게 미소를 그려 보이더니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그림을 바라보는 블란의 눈빛은 깊어져 있었다. 블란은 이 그림을 보며 느꼈던 두 가지 중 하나를 솔직하게 말했다.

“그 빛과 어둠을, 그리고 생명을 저는 겪어봤으니까요.”

그록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블란이 말하는 빛, 어둠, 생명 세 가지의 의미를 모를 그가 아니었다. 블란은 이 그림 속에서 과거부터 쭉 살아온 자신의 삶을 본 것이다. 새삼 그록은 이 그림이 달리 보였다. 그는 블란이 루시앙의 이전 작품들과 지금 이 그림에서 같은 점을 찾아낸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 역시 빛 아래의 블란을 보며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 사실에 감사했으니까.

“그렇군. 사람의 눈은 보이는 것만 담는 게 아니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까지 함께 담아서 보는 게 사람의 눈이지.”

루시앙은 블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이 그림은 이 그림이고, 다음에 초상화를 다시 그려줄게. 아무래도 블란 작가가 눈을 감고 있는 게 초상화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단 말이야.”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내 예술혼을 빛으로 승화시킨 이들을 위해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대답을 하는 루시앙을 그록은 어색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역시도 다시 그려준다면 고맙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지금 그림은 다 좋았지만 블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맑은 하늘을 닮은 푸르른 블란의 눈빛. 그 눈빛이 그록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나. 하늘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그 부분이 못내 아쉬웠다.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블란은 그록과 다른 답을 내놓았다.

“저는 이 그림이 좋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그림 속 그록의 눈동자로 향했다. 초상화를 그린다면 자신도, 그록도 정면을 보며 앉아야 할 터. 이 그림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의 눈동자가 담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든 두 이유 중 남은 한 가지를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록은 돌연 그림에서 시선을 떼어 자신을 바라보는 블란의 입가에 지어진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환한 얼굴로 블란은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그록 씨가 저를 이렇게 보고 있었군요.”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무엇보다도 큰 이유. 그것은 블란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의 따스한 눈빛이었다. 자신과 달리 빛이 아닌 어둠에 잠긴 모습이었지만 그 어둠이 눈에 뚜렷하게 담기지 않은 것은 온전히 블란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의 시선 속에 담긴 따뜻함과 애정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 잠긴 그록의 애정은 블란을 더욱더 따스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보며 짓는 미소는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고 사랑스러웠다. 블란은 그림 속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그록이 사랑스러웠다.

“저는 이 그림이 정말 좋아요. 두고두고 계속 보고 싶어요.”

그록은 잠시 멍하니 블란의 미소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앙에게 말했다.

“블란 양이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안 그려주셔도 됩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분명, 다시 그려준다고 하니까 좋아했던 것 같은데? 루시앙은 순식간에 달라진 그록의 반응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래.”

“네. 감사합니다.”

루시앙은 묘한 눈빛으로 그록과 블란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시회 할 때쯤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지. 전시회 바깥에서 작은 다과회도 여니까, 작은 축제라 생각하고 오면 될 거야. 나름 예술대의 자랑거리지.”

그림을 보여주고 난 후, 루시앙은 일전에 두 사람을 처음 만났던 대리석 조각상 앞까지 그들을 배웅하였다. 그록과 블란은 멋진 작품을 그려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번 더 전했고 다음번에 식사를 한번 하자는 약속을 잡은 뒤 돌아섰다. 한 다섯 걸음 걸었을까. 그록은 자신을 부르는 루시앙의 목소리에 다시 뒤돌아봐야 했다.

“그록.”

루시앙은 그록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고 그록은 블란에게 잠시 갔다 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선 루시앙에게로 다가갔다. 루시앙은 자신의 앞에 선 그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말한다는 듯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그록은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 가까이 귀를 가져다댔다. 그러자 루시앙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여자친구 말이야.”

그는 속닥이며 말했다.

“순둥이지만 똑순이야.”

그록은 얼떨떨한 얼굴로 루시앙을 바라봤다. 진지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냐 했더니, 이게 무슨?

하지만 루시앙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강하면서도 상처가 많지. 또한 그 상처를 이겨낼 방법도 알고 있고.”

그록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아주 멋진 사람이야.”

진지한 얼굴로 루시앙이 귓속말로 내려놓은 결론에 그록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그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블란을 바라봤다. 잠시 몸을 숙였다가 일어서는 블란이 보였다. 그녀는 곧바로 그록을 보며 둘이 뭐 하냐는 듯 바라봤지만 그록은 그저 웃음을 삼키며 여전히 진지한 표정의 루시앙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여유로웠고 일말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당연한 소릴. 블란은 멋진 사람이었다.

그록은 자신이 아는 바를 다른 이도 알았다는 사실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앙을 바라봤다. 진실을 말하는 그 명백하고 또렷한 눈빛과 흐뭇하고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에 루시앙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얜 아주 그냥 해바라기구만.’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록에게 닿지 못했고 그록은 루시앙에게 인사를 하고는 블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록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블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고 그 행동에 블란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전시회 보러 갈 거죠?”

“네. 저는 그러고 싶군요. 블란 양은?”

“저도요.”

그록과 블란은 루시앙이 참여할 전시회에 구경 가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예술대학을 벗어나 걸음을 옮겼다.

훗날 루시앙의 ‘봄의 빛’은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그의 화풍이 파괴가 아닌 생명의 역동성, 빛과 어둠의 조화임을 제대로 알려준 작품이라 칭해졌다.

***

그리고 며칠 후, 소풍날이 왔다. 그록은 블란과 함께 동 우드 뒤편의 작은 산으로 향한다.

“동 우드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블란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높고 산이라기에는 가파르지 않은 작은 산을 둘러보았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옷차림은 활동적인 옷이었지만 외투는 평소와 같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블란의 볼은 발갛게 예쁜 빛을 띠고 있었다.

“잭이 추천해줬습니다.”

그록은 잭이 말한 ‘봄에 데이트하기 좋은 곳’, 특히 ‘소풍하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난 동 우드 언덕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높이 솟아오른 나무보다는 키가 낮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언덕은 나무들이 빽빽하지 않았고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록은 작은 시냇가 근처, 잭이 소개해준 곳으로 블란을 안내했다.

“와. 너무 좋아요.”

연신 감탄하는 블란과 달리 그록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표정이 묘하게 흐렸다. 그는 손에 도시락이 담긴 바구니를 꼭 쥔 채 블란을 목적지까지 안내했다. 혹시 블란이 힘들까 봐 그녀에게 맞춰 걷느라 그록의 걸음은 느렸다.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

“너무 예쁘다.”

시냇가 근처 작은 꽃밭이 그들을 반겼다. 야생 들꽃들로 이루어진 꽃밭은 작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색들로 가득 차 아름다웠다. 자연의 풋풋함과 봄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블란 양, 잠시만요.”

그록은 손에 들린 바구니에서 돗자리를 꺼내와 꽃밭 한쪽 옆 나무 그늘 아래에 펼쳤다. 그록과 블란은 돗자리 아래에 앉으며 가만히 숲의 봄을 눈에 담았다.

“너무 좋아요, 그록 씨.”

소풍도 처음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언덕을 올라와 시냇가를 보는 것도 블란은 처음이었다. 풍경을 눈에 담는 블란은 자신을 감싸고 지나가는 바람에 모자를 손으로 눌렀다.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깊어져갔다. 그 순간이었다.

“크흠, 큼.”

그록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 것은. 블란이 풍경이 아닌 그록을 바라봤을 때, 그록은 슬그머니 바구니를 자신의 앞에 두며 입을 열었다.

“점심때이니, 일단 밥을 먹으며 풍경을 눈에 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좋아요. 저 배고파요.”

블란의 밝은 목소리에 그록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더니 그는 이내 뿌듯한 표정으로 바구니에서 도시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도시락을 본 블란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보자기에 감싸인 앙증맞은 도시락이 바구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락이 열렸을 때, 블란은 눈을 반짝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곰돌이 스테이크, 병아리 모양의 계란, 토끼 모양 장식을 붙인 샌드위치. 그리고 동글동글하고 귀엽게 깎은 과일들까지. 블란은 도시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귀여워서 못 먹을 것 같아요. 어떡해, 그록 씨 대단해요!”

너무 귀엽다는 듯이 도시락에서 눈을 못 떼는 블란의 한껏 들뜬 모습에 그록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표정이 흐렸다.

‘어디서 잃어버렸지?’

그록은 쪽지를 잃어버렸다.

‘해보고 싶었던 일.’ 그 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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