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 (2)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 92
외전 :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2)
하지만 소풍날보다 먼저 두 사람을 찾아온 것은 축제였다. 축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블란이 차도를 보인 지도 어느새 두 달이 지나 세 달째에 접어들었고 그록이 ‘후회’를 주제로 특강을 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크흠.”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고, 그록은 또 다른 누군가가 제 옆구리를 툭 치는 것을 느꼈다. 옆을 보니 잭이 자신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앞.’
앞? 그 단어에 그록은 고개를 돌려 앞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앞에서 연신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이는 재크 교수였다. 그레이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로 한 이후 재크 교수는 그록을 볼 때마다 아쉬움과 함께 괘씸함을 얼굴에 드러내며 그록을 흘겨보기 일쑤였다.
‘글쎄.’
잭은 그록에게는 전혀 닿지 않는 재크 교수 혼자만의 불만에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얄밉겠지. 얼마나 얄밉겠어.’
서 우드 아카데미에서는 그록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크흠, 어디를 가고 있는 거지? 앞을 똑바로 보도록.”
앞을 똑바로 보고 인사를 제때 제대로 하란 재크 교수의 말에 그록은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행정지원과에 갑니다.”
“행정지원과?”
재크 교수의 눈썹이 휙 산을 그리더니 그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그록의 말에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궁금증이 아니라 짜증이 한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록은 그 말을 물음으로 알아들었다.
“네. 기획서와 실험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해서 말입니다.”
재크 교수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그록의 옆에 있던 잭은 그 모습에 입꼬리가 쓰윽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딴 생각을 하며 참았다. 하지만 재크 교수와 그 뒤에 서 있는 체프의 얼굴을 보자, 자연히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서 우드 아카데미에서는 그록을 위한 여러 투자 방안을 세웠다. 그록이 교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람의 상황이라는 것은 모르는 법. 약초학 역사에 길이 남을지도 모를 천재를 조금이라도 더 아카데미에 묶어두기 위해 서 우드 약초학과는 물론 우드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실험 보조금을 어떻게든 더 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덕에 그레이 교수가 많은 연구 지원금을 받았고 덩달아 잭도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레이 교수 밑에서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게 그리도 아까울까.’
그리고 그 투자금과 지원금을 가장 아까워하는 이가 눈앞의 재크 교수였다. 보나마나 재크 교수는 대상단과 왕실에 잘 보일 수 있을 만한 주제만 골라서 연구하며, 있는 대로 생색을 다 내어 지원금을 뜯어먹을 요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은 이제 불가했다.
“학과에서 또 지원을 해준다고? 중복은 허용되지 않을 텐데.”
재크 교수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그록은 어깨를 으쓱이며 평온하게 답했다.
“연구비로 사용하라고 기부금을 주려는 곳이 있다고 해서요.”
잭의 입꼬리가 다시 한 번 위로 씰룩 올라갔고 체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아마도 그록에 대한 질투심과 함께 재크 교수의 히스테리를 견뎌야 할 오늘 하루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교수님.”
그록은 평온한 얼굴로 인사를 했고 잭은 그록을 따라 목례를 하곤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록은 주먹을 꽉 쥔 채로 서 있는 재크 교수를 지나쳐 그 뒤의 체프에게 짧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얼굴색이 안 좋군. 건강 조심하면서 연구해.”
너 때문이잖아.
잭은 눈치 없는 그록의 말에 피식 웃으며 체프에게 인사를 하곤 그록의 뒤를 따랐다. 잭이 슬쩍 뒤돌아보자 거친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잭 교수 뒤를 따라가는 체프의 짜증 난 표정이 언뜻 보였다. 그 순간 잭의 귓가로 그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매번 건드는지 모르겠어.”
‘음?’
잭은 멈칫하며 그록을 바라봤다. 잭의 시선에 그록이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재크 교수와 체프를 건들던 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설마, 다 알고?’
잭의 입이 열렸다.
“너, 일부러?”
하지만 그록은 잭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걸음을 옮겼다. 잭은 어버버 하다가 이내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시원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는 그록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야, 너 생각보다 괜찮다?”
“무슨.”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그록의 모습이 사람다워 보였다. 알면 알수록 무뚝뚝한 겉모습과는 다른 놈이었다. 잭은 웃음을 삼키며 툭 내뱉었다.
“야, 그런데 매튜는 요새 왜 안 보이는 줄 아냐?”
그록은 무심하게 잭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잭은 무엇이 웃긴지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더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답했다.
“재크 교수가 체프에게 준 심부름을 대신 하느라 바쁘거든. 저쪽은 상하관계가, 먹이사슬이 아주 제대로야.”
재크 교수는 체프에게, 체프는 매튜에게. 그렇게 이어져 내려오는 서열 관계에 잭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떠오르는 궁금증을 그록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동기들 다 놔두고 왜 하필 매튜 그 자식을 괴롭히는 걸까? 나도 그 자식이 입이 싸고 이리저리 들러붙어서 싫다만.”
“모르지.”
모르긴. 그록은 알고 있었다. 졸업식 때 매튜가 자신을 끌고서 재크 교수와 그와 친한 이들에게 인사를 시켰던 일. 그 일로 매튜는 체프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지금까지 고생 중이었다. 그리고 재크 교수는 그런 매튜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에 붙을까, 누구 덕을 볼까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생긴 결과였다. 그록의 귓가로 잭의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쯧쯧. 여하튼, 걔는 왜 그렇게 사나 몰라. 남한테 이리저리 들러붙을 생각 말고 지 연구나 좀 하지.”
그러게. 그록은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행정지원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 삶에서 매튜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록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졸업과 동시에 블란과 함께 저택에서 시간을 보냈으니까. 학계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학계에 아는 지인이 있다는 것은 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군.’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록은 옆에 선 잭을 잠시 바라봤다. 지난 삶과 지금의 삶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것은 모두 자신이 변해서 일어난 일들뿐이었다. 타인이 변해서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변해서 일어난 일들 중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단 하나였다. 블란과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그록은 지금의 삶이 기적이라고 쉬이 말할 수 있었다.
***
세번째로 블란과 함께 맞이하는 축제의 아침은 공기부터 조금 달랐다. 5월의 끝자락을 알리는 아침 공기는 서늘했지만 한편으로 풋풋하고 따뜻했다.
“아침부터 고맙다.”
블란을 만나러 가기 전, 그록은 잭이 건네준 약도를 보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밤새 무엇을 했는지 머리가 산발이 된 잭은 하품을 하며 연신 가라는 듯이 손을 훠이훠이 휘저었다.
“인사는 됐고, 얼른 가봐. 내가 진짜, 그 돌아이 자식 설득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잭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그록은 그런 모습조차 고마웠다. 그 마음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그록의 모습에 잭은 머리를 긁적이며 웅얼웅얼 말을 이었다.
“진짜 그림에 미친 놈이 맞는지 너도, 블란 양도 모르더라. 우드 시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람들인데 말이야. 여하튼 인상착의 말해놨으니까 보면 바로 알 거야. 그리고 걔 인상착의는 그냥 시꺼매.”
“음?”
“위아래로 새까만 옷을 입고 있어.”
잭에게서 블란과 그록의 초상화를 그려줄 이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잭에게 듣기로는 서 우드 아카데미 예술 대학에서 부동의 수석이자 미술학부 전체를 통틀어 모든 교수들이 천재라고 추켜세우는 인물이라고 했다.
“뭐라더라? 자신이 흰 옷을 입는 것은 죄악이라던가? 검은색이야말로 자신의 상징성을 나타낼 수 있어서 좋다던가? 아무튼 이상한 애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
잭은 서 우드를 상징하는 하얀색 코트를 혼자서 시꺼멓게 물들이고 다니는 그 괴짜를 떠올리며 어깨를 한 번 더 부르르 떨어댔다. 하지만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군.”
그리고 그 답에 잭은 생각했다. 그래, 저 둘이라면 의외로 잘 지낼 수도 있어. 잭은 자신의 생각에 한 번 더 동의하며 그록에게 짧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축제 재밌게 보내.”
“어, 고맙다.”
그록은 잭의 배웅을 받으며 블란이 있을 남 우드 아카데미로 향했다. 남 우드 아카데미에 도착한 그록은 늘 그렇듯 블란을 기다리던 벤치에 앉아 교정을 둘러보았다.
축제 날 아침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활기찼고 어쩐지 학생들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조금 더 화려해 보였다. 그 광경을 그록은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그록을 보는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어쩜, 머리도 좋은 사람이 잘생길 수가 있지?”
“그러니까. 거기다가 여자친구한테 엄청 잘하잖아,“
“내 말이. 사람일까?”
“사람이긴 하겠지. 우리와 연관될 일이 없는 사람.”
마음의 한이었던 연구를 끝내고 치료제를 개발해내었기 때문이었을까.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그록은 여전히 무뚝뚝한 인상이었지만 조금은 부드러운 빛이 얼굴에 맴돌았고 식사도 규칙적으로 해 그 인물이 더 돋보여 보였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 잘생겨져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축제날 오전인데도 수업을 하는군요.”
블란은 뛰어와서 숨이 찬지 숨을 고르며 그의 옆에 섰다. 그록은 뛸 수 있는 블란의 모습과 분홍빛이 도는 그녀의 뺨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이제 뛰어도 괜찮았다.
“수업 때문이 아니라 제가 어제 자료를 잘못 드리는 바람에 다시 왔어요.”
“그렇습니까.”
블란은 남 우드에서 준비하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기로 결정한 뒤 수시로 아카데미를 찾았다. 문학 교수의 수업과 그의 연구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짜로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문학 교수는 남 우드에서 교양 수준으로 배웠던 문학이 아닌, 조금 더 깊이 있는 문학과 문학사를 블란에게 가르쳐주었다.
“시라는 것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요. 그래서 그런지 시집을 만드는 일도 조금 더뎌질 것 같구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내민 블란의 모습이 그록의 눈에 담겼다. 그 모습마저 예뻤다.
아직도 블란은 일주일의 반은 집에서 요양을 하며 보내야 했다. 치료 역시 계속 진행 중이었지만 전과 같은 독한 치료약에서 세 단계 약해진 치료제를 쓰고 있고, 앞으로 6개월 안에는 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보고서로 매일 확인할 때마다 그록은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그록은 슬며시 블란의 손을 잡았다. 예전보다는 부기가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통통한 손이었다.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기가 많이 빠지고 살도 어느 정도 내렸지만 여전히 날씬하다기보다는 통통한 편이었다. 하지만 외양이 뭐가 중요한가.
블란은 블란이었다.
“그런데 오늘 뭐 해요?”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 축제 때 보자고 하길래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온 블란이었지만 중요한 일이란 단어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블란이 궁금증을 담아 그록을 바라봤지만 그록은 모르는 척하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뭐예요?”
결국 블란이 물었고 그록은 답했다.
“우리 두 사람이 담긴 그림을 남겼으면 합니다.”
“그림이요? 초상화?”
“네.”
그림으로 남겨진다는 말에 블란은 살짝 멈칫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많이 통통했다. 하지만 그 손을 그록이 다정히 감싸고 있었다. 블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녀의 귓가로 그록의 목소리가 닿았다.
“우리의 지금 모습을 남겨보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에 블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할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좋아요.”
블란의 답에 그록은 약도를 꺼내들며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아주 촉망받는 화가분께 부탁을 드려놓았습니다. 그분께 가면 됩니다.”
“오, 정말요?”
블란의 눈이 커지며 그녀의 얼굴에도 기대감이 어렸다. 블란은 그록을 따라, 그록은 잭이 표시해준 서 우드 지도를 따라 서 우드 미술학부가 밀집되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회화과 건물 앞에서 당도해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을 본 순간,
“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록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화가라는 것을. 하얀 대리석 조각상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새하얀 서 우드의 흰 코트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부터 신발까지 모든 것이 새까맸다.
“저분인가요?”
블란의 작은 목소리에 그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까만 남자는 두 사람을 보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블란을 척 가리키더니,
“미인에.”
그록을 가리켰다.
“순정파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블란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록을 바라봤다.
“그, 그록 씨?”
그록은 블란의 시선을 마주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안목을 지닌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