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가지를 다 하지 못한 남자의 초조함 (1)
박사 과정 1년 차인 그록의 심장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쪽지가 두 개 있었다. 둘 모두 블란의 가지런한 글씨체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해보고 싶었던 일.’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앞으로 함께 할 것들.’
비슷한 이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둘 모두 그록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에 두 쪽지를 모두 꺼내들어 책상 위에 펼쳐놓은 그록의 표정은 사뭇 심각했다.
“큰일이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잭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그록의 책상을 바라봤다. 그레이 교수 밑에서 같이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잭은 오늘 내내 처음 보는 그록의 표정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저렇게 심각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록이 그레이 교수의 밑으로 가고 희귀약초학이 대두되기 시작한다는 소식에 그레이 교수 밑으로 들어가길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최소 1년 동안은 고민하고 공부하며 정한 학문의 길을 급하게 바꿀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레이 교수 밑에 박사 과정 1년차는 오직 그록과 잭뿐이었다.
“어려워서 말이야.”
그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잭은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그록 바서한테 어려운 일이 있다고? 저 무뚝뚝한 얼굴로 다 척척 해결하는 인간이?’
잭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록의 뒤로 다가갔다.
“무슨 어려운 일인데? 내가 도와줄까? 내가 도움이 될지…….”
그의 등 뒤에 서며 말을 이어가던 잭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말문을 잃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첫 번째. 같이 손잡고 걷기.]
[두 번째. 맛집 다 둘러보기.]
‘뭐야, 이게.’
잭은 그제야 언젠가 전 학생회장이자 선배였던 아스트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왕립 약초 연구소에 일하는 아스트는 그록과 절친한 사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듯 그록을 보기 위해 연구실을 찾아왔고 그는 그록의 유일한 동기인 잭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잭. 그록이 딱 하나 제대로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그렇습니까?’
‘그래. 이 냉철한 녀석이 딱 그 순간에만 멍청한 생각을 할 때가 많아.’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제인지 아스트는 잭에게 말해주었고 그 말을 잭은 지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는 바로, 블란. 블란 양이 함께할 때야. 그때는 판단을 황당하게 해서 이상하게 행동할 때가 많아. 그러니 놀라지 말라고.’
툭툭. 그때 아스트가 두드렸던 어깨의 토닥임이 지금 잭의 어깨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잭은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록에게 물었다.
“블란 양 일이야?”
그리고 그 물음에 그록은 신중함과 고뇌를 담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
어. 저 한마디에서 저렇게 깊은 고뇌가 느껴질 줄이야. 잭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내심 궁금했다. 그록과 블란은 우드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연인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이 가진 재능이 정말로 놀라웠으니까.
‘그리고 닭살 돋지.’
저 냉철한 그록의 얼굴 위로 가끔씩 바보 같은 미소가 피어오를 때는 블란이 옆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렇기에 잭은 지금의 상황이 궁금했다.
“뭐가 문젠데? 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그록의 시선이 두 개의 쪽지에서 잭에게로 향했다. 그록의 검갈색 눈동자를 보며 잭은 어색하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흠.”
그록은 잭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잭은 다른 의미로 우드 아카데미에서 유명했다. 만인의 연인. 그것이 잭이 가진 별명이었다. 연구를 하느라 찌들어 있는 이미지의 서 우드에서 잭만큼은 늘 깔끔하고 멋이 넘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야, 연애 상담은 잭이랑 해. 잭이 유명하잖아? 연애 한 번 못해본 서우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그놈들이 다 잭에게 조언을 얻고 고백을 성공했다니까.’
아스트 선배의 말이 그록의 귓가에 맴돌았다. 물론 그록은 그 뒤에 아스트가 한 말은 기억하지 못했다. 아스트는 그렇게 말하곤 뒤에 덧붙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론 잭이 아무리 좋은 조언을 해줘도 넌 네 식대로 할 게 뻔하지만.’
그 말이 그록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록은 잭에게 물었다.
“내가 이것들을 다 해야 하는데 말이야.”
“이 쪽지 말이야?”
잭은 그록의 손에 들린 쪽지를 들여다봤다. 그 안의 내용들이 그의 눈에 담겼다. 쪽지를 보는 그를 향해 그록은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함께 할 것들. 이 쪽지는 블란 양과 함께 토론을 해서 정해야 할 일인데 말이야.”
토론까지야. 잭의 표정이 떨떠름해졌지만 그록은 말을 이었다. 그는 심각했다.
“여기 이거.”
해보고 싶었던 일. 그 쪽지를 보는 그록은 미간이 찌푸려져 깊은 골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들은 내가 준비해서 해야 하거든.”
지금의 블란을 사랑하는 만큼, 블란이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그록은 이 지난 삶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다 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벌써 만난 지 3년째인데 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음.”
잭은 진지한 그록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쪽지를 들여다봤다.
[열두 번째. 비 오는 날 같이 우산 쓰고 걷기.]
[열세 번째. 같이 첫눈 맞기.]
“어렵긴 하겠네. 첫눈 같이 맞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타이밍 잡기가 힘들지. 비 오는 날도 그렇고. 이건 그 순간에 둘 중 한 사람에게만 우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했다.”
“응?”
의아한 표정의 잭에게 그록은 담담하게 말했다.
“했다. 그건 쉬웠다.”
쉬웠다고? 잭의 눈가가 살짝 떨려왔다. 그는 이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떤 게 어려웠어?”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록이 세 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 번째.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
[스물한 번째. 서로가 담긴 초상화 남기기.]
[스물여덟 번째. 도시락 싸고 소풍가기.]
잭의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나타났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록에게 말했다.
“다 쉬운데?”
이건 쉬운 편 아닌가? 자신만 해도 저것들은 다 한 번씩 해봤었다. 하지만 그록은 잭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도서관을 블란 양이 불편해 해.”
블란은 병이 다 나았는데도 도서관은 유독 불편해 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이유를 그록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과거의 시선이 발목을 붙잡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록은 블란과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둘 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지금, 학생인 지금에야 느낄 수 있는 추억이니까. 그리고 그런 시선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꼭 하고 싶었다. 달라진 시선들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이 하고 싶다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건?”
“초상화 그려주는 사람은 주로 축제 때 나오는데, 지난 축제 때는 시간이 없었다.”
“그럼 이건 이번 축제 때 하면 되겠네.”
“그렇지.”
스물한 번째는 어렵지만 일단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록의 얼굴을 보던 잭이 툭 내뱉었다.
“내 친구라고 해야 하나? 아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는데 소개해줄까?”
홱. 그록의 고개가 아주 빠르게 잭에게 향했고 잭은 마주한 그록의 표정에 당황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런 잭의 팔을 그록이 잡았다.
“사실주의인가?”
“어? 어.”
“그럼 부탁하지.”
“어? 아, 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잭에게 그록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분이 좋은 듯 밝은 그 미소에 잭은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록의 말에 잭의 표정은 떨떠름해졌다.
“블란 양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이번은 기대되는군. 고맙다, 잭.”
잭은 아름답다고 하기는 평범한 외양을 가진 블란을 떠올리다가 웃고 있는 그록의 모습에 생각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멋있지.’
블란은 꽤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작 왜 블란 같은 사람을 알지 못했나 싶을 때가 있었다. 블란의 시 ‘새벽’이 담긴 탄신일 기념 문예 공모전 수상작 모음은 잭의 책장에 있었다.
“그럼 소풍은? 이건 진짜 쉬운데. 그냥 가면 되잖아?”
순식간에 그록의 표정이 변했다. 침울해졌다.
‘침울? 그록 바서가 침울한 표정이라고?’
잭이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 것처럼 입을 벌리는데 그록이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요리에 재능이 없다.”
“뭐?”
“요리를 못한다. 블란 양에게 도시락을 싸줘야 하는데.”
잭은 그록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구실 천장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눈을 뜨고선 그록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록.”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에게 잭은 말했다.
“내가 도와주마.”
잭. 그는 연애보다 잘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모든 이들이 호감이라고 말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크게 그려 보이며 말했다.
“내가 요리를 잘하거든.”
그리고 덧붙였다.
“특히 소풍용 도시락은 내 전문이지.”
그록의 얼굴에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록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잭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하하하. 잭은 그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 누가 약초 천재 그록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들어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이유가 도시락을 쌀 수 있어서라니. 잭은 아스트가 스쳐지나가듯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저 자식이 조금 특이하거든.’
그렇네요, 선배님.
잭은 실험을 할 때보다 더 열렬하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무슨 도시락을 쌀지 고민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그록에게 물었다.
“어떤 도시락을 싸지?”
“귀여운 도시락.”
“응?”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블란 양이 귀여운 걸 좋아한다.”
아. 잭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냥 더 이상 생각을 말자.
이날 그레이 교수는 늘 실험만 하며 서로 친해지지 못하는 것 같아 신경 쓰이던 잭과 그록이 붙어 앉아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단둘밖에 없는 동기 사이에 드디어 믿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아 그레이 교수는 뿌듯했다.
‘역시, 함께 실험을 하는 그 과정 속에서 연구자들은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를 만들지.’
그레이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구실을 벗어났다. 한편 두 사람은 그레이가 연구실에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토끼 모양으로 하고 싶다고?”
“그렇다. 가능하겠는가?”
가능하냐고 묻는 그록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리고 걱정도 조금 내비쳤다. 잭은 그런 그록에게 여유롭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까짓 것쯤이야.”
그 대답에 그록은 작게 감탄을 흘렸다. 잭은 그 감탄에 어깨를 으쓱이며 어느새 열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내가 철저히 가르쳐줄게!”
그록과 잭, 두 동기 사이에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끈끈한 유대가 생기고 있었다. 동기 중 친한 이가 없던 그록에게 드디어 친구라고 할 만한 존재가 생긴 순간이었다.
***
“블란 양, 다음 주 일요일에 시간 되십니까?”
블란은 그록의 물음에 의아한 표정을 그렸다. 매주 일요일이면 만나는 그록이었기에 새삼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록은 블란의 의문 가득한 표정에 슬그머니 품에서 종이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블란은 그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작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첫 번째 소풍 계획서]
“저번에 축제더니, 이번에는 소풍이네요?”
블란의 목소리가 들뜬 것을 느낀 그록의 입꼬리가 블란처럼 덩달아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시락 싸서 소풍을 가고 싶습니다.”
이제 블란은 병이 나아서 음식을 크게 가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도시락이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늘 음식을 가려 먹어야 했고 많은 음식을 먹지 못했기에 그녀는 요리와 가까이 할 시간이 없었다. 도시락을 어떻게 싸야 하나 걱정하는 블란에게 그록이 말했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록 씨가요?”
“네. 기대하십시오.”
기대하라며 눈을 빛내는 그록의 모습에 블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기대할게요.”
블란의 답에 그록은 환하게 웃었고 블란도 따라 웃었다. 그녀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록의 가방에서 살짝 삐져나온 곰돌이 돗자리를.
블란은 생전 처음 갈 소풍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록과 헤어졌고 블란을 먼저 보낸 그록은 담담하게 찻집으로 돌아가 찻집 사장 릴리에게 부탁했다.
“사장님.”
“웬일로 사장님이라고 부른대?”
뭐냐는 릴리의 눈빛에 그록은 담담하게 툭 내뱉었다.
“주방 좀 쓰겠습니다.”
첫 소풍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