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외전 3 : 쌍둥이의 대모험(7)
7.
“갑갑해.”
카이는 침대 위에서 뒹구르르르 몸을 굴리며 입을 불퉁 내밀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감기가 나았지만 혹시 모른다며 오늘까지는 방 안에 콕 들어박혀 지내야 하는 카이였다.
그는 다시 반대편으로 뒹구르르르 굴렀다. 그러자,
툭. 무나와 닿았고 카이는 무나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무뚝뚝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었다.
“무나.”
“응.”
“약초 캐기 연습 안 해도 돼?”
며칠째 무나는 카이의 옆에 계속 함께 있어주었다. 무나는 늘 말했었다.
‘성실해야 하고 늘 노력해야 멋진 연구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무나는 연구자가 되기 위해 약초 캐기 연습은 물론 약초 백과사전 읽기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무나 할 거 못 하면 안 되잖아.”
자신과 닮은 하늘색 눈동자가 카이를 바라봤다.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도 맑은 하늘빛 눈동자였다.
“나는 약초보다 카이가 더 좋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카이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갑자기 심심하지 않아졌다. 역시 모험도 그렇고 무엇이든 무나랑 함께 할 때가 가장 재밌다. 그 순간,
“아!”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카이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공책과 연필을 쥐고 무나의 옆에 이를 놓았다.
“무나!”
무나는 카이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면서 뭔가 있구나 싶었다. 왠지 재밌는 일일 것 같았다. 덩달아 마음이 콩콩 뛰었다.
“우리 대모험 이야기 짓자!”
음? 무나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툭 내뱉었다.
“용감한 다람쥐처럼?”
“그래!”
“오.”
무뚝뚝한 감탄을 내뱉으며 무나는 일어나 앉았다. 그 옆에 카이도 앉았고 둘은 자신들이 모험을 이야기로 짓기 시작했다.
“제목은 뭘로 하지?”
곧 방 안은 두 쌍둥이가 속닥이는 소리들로 채워졌다. 그 소리들은 꽤 많은 설렘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블란이 서 있는 곳에서도 속닥이는 소리들이 꽤 많았다.
“후우.”
“신경 쓰지 마.”
블란은 메리의 어깨를 살짝 두들겨주었다. 하지만 메리는 푸르른 초원을 맹렬하게 달리는 한 마리의 야생 소처럼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우. 성질 같아서는 정말이지.”
메리의 시선이 매섭게 한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서 우드 문학 관련 학과 관계자들이 보였다.
마프렌 국문학과, 하리안 제국문학과, 고대문학과, 문예창작학과 등등 많은 과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주 1회 정기 회의를 열고 있었다. 형식적인 자리이기에 대부분 그 과의 젊은 교수들이 과의 의견을 가져와 친목 겸 경쟁을 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남 우드 문학과가 참가하게 되었다.
본래라면 남 우드 소속이기에 참가하지 않아도 될 회의였지만 ‘커리큘럼을 맞추기 위해 모이자.’라는 말에 참가해야 했고. 그 결과 현재 그 자리에 참여한 블란과 보조인 메리는, 찬밥 신세였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을 거면 왜 부르고 난리야. 우리끼리 잘 할 수 있는데.”
씩씩거리면서 구시렁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 메리였다. 그녀는 불러놓고 말 한마디 할 기회를 주지 않는 저 못된 놈들 모양새에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툭툭. 하지만 참으라는 듯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에 입을 꾹 다물었다. 메리는 옆을 바라봤다. 블란은 무슨 생각인지 부드럽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언니는 화도 나지 않는 걸까?’
자신이야 보조이니 상관없지만 교수로서 온 자리인데. 이건 너무했다. 누가 봐도 기죽이기 였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죽이기가 시작되었다.
“이번 특강은 어디에 요청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음? 문예창작학과에서 여는 특강이면 다들 흔쾌히 오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요. 명색이 마프렌 최고의 문예창작 관련 학과니까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입꼬리 한쪽이 위로 쓰윽 올라갔다. 그는 힐끗 테이블의 가장 끝을 바라봤다.
유일한 여자 교수.
블란이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보는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표정은 비릿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회의 방향은 한 학기에 한 번은 있는 특강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크흠. 이번에 우리 국문학과에서는 글래트 작가님이 오신다고 하시더군요.”
“오. 정말이십니까? 그분은 작년에 스칸 문학상을 수상하신 분 아니십니까?”
“네. 한 번쯤 모교 자기 과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하하.”
서로 저마다 특강을 할 외부 인사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유치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쉽게 학과의 역량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유명한 외부 인사를 초빙함으로써 자신의 학과가 문학계에서 이만큼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 그렇군요. 저희 과는 카수스 문학상을 타신-”
“혹시 노케 작가님?”
“오, 아시는군요! 그분이 오겠다고 하시더군요. 유명한 분이시지요.”
얼씨구. 서로 얼굴에 금칠하느라 바쁘구만.
메리의 입술이 다시 삐죽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을 얼굴에 내비쳤다.
특강. 남 우드에서도 한 달간 특강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세부적인 사항은-
‘블란 언니가, 아니 교수님이 맡으시기로 했지.’
두 달 뒤, 11월에 진행될 특강. 그 모든 진행을 맡기로 한 이는 블란이었다. 그래서인지 괜히 메리는 지금 저 대화의 주제가 불안했다. 특히 저 문창과 교수가 꺼낸 말이었으니까.
“와, 다들 대단하신 분들이 오시는군요.”
문창과 교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그러고는 슬쩍 테이블의 끝 쪽 블란을 바라봤다. 그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 또한 블란의 자리로 향했다.
“블란 작가님, 아, 아니지요. 죄송합니다. 교수님이 된 지 얼마 안 되셔서 잠깐 헷갈렸습니다. 블란 교수님.”
여우같은 눈매를 휘며 문창과 라이 교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했기에 메리는 다시 씩씩거렸다. 여차하면 다 엎고 한 대 쥐어박을 기세였다.
“네. 라이 교수님.”
“남 우드 문학과에서도 올해부터는 특강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어찌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마치 너희는 사람을 구하기는 했니? 하고 깔보는 듯한 뉘앙스였다. 다른 과의 젊은 교수들은 슬그머니 삐뚜름한 미소를 입가에 걸거나 혹은 호기심을 비췄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남 우드는 배출한 작가 층이라고 해봤자 몇 분 안 되실 테고. 초청에, 으음, 다른 분들이 응해주실지…….”
“그런 학과 사정은 블란 교수님이나 다른 분들께서 잘 아시겠지요. 저희가 걱정할 사항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몇몇 이들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걱정 어린 기색을 보였다. 남 우드 문학과를 향한 이 ‘기죽이기’가 옳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었다.
“오, 걱정해야지요. 어찌 되었든 같은 ‘우드’ 이름을 달고 있는데, 특강 외부 인사가 좋지 못하다면 그건 조금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깔보고 있었다. 메리는 화가 나면서도 점점 걱정이 커졌다. 사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남 우드 특강에 올 외부 인사가 마땅히 없었다.
“블란 교수님, 혹 힘드시다면 저희 과에 말씀하시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문창과의 부탁이면 그래도 들어주시겠지요.”
라이 교수는 블란에게 친절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 깃든 우월감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어쩌지? 메리는 인상을 찡그리며 블란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그 인상이 펴졌다.
블란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음?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 교수는 삐뚜름한 미소를 더 짙게 그리며 말했다.
“혹시 부탁하기 어려우신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같은 우드 아닙니까. 다 같이 도와야지요. 편히 말씀하세요.”
“다 구했습니다.”
블란이 라이 교수의 말을 잘랐다. 블란은 테이블 위의 교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동안 그녀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많이 겪었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학생들을 위해서, 청을 드렸고 다들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잘 해결되었습니다.”
정말로 블란은 학생들을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다.
“크흠, 자신 있어 하시니 어떤 분들인지 궁금하군요.”
또 다른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물었다. 다른 교수 역시 궁금해 하면서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급이 있으신 분들이어야 할 텐데. 아무나 다-”
“우선 고켄 작가님.”
음! 다른 교수의 말을 자르며 블란이 내뱉은 이름에 몇몇 교수들은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블란과 고켄 작가 사이의 친분은 유명했기에 이해했다.
“고켄 작가님이시면 아주 최고지요. 하지만 한 분으로는 한 달을,”
“그리고 바이렛 작가님.”
이십 년 전 탄신일 기념 문예 공모전에서 소설 부분 대상을 탄 바이렛 작가. 그는 지금까지도 마프렌 왕국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는 이였다.
“그, 그분은 현재 고향에 계신 걸로 아는데.”
누군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블란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
“푸란카 작가님, 나이메어 작가님, 키로틴 작가님-”
허!
테이블 위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하리안 제국에서 알아주는 수필 작가, 푸란카.
작년 마프렌 왕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나이메어.
탄신일 기념 문예 공모전 희극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한 키로틴.
하나같이 엄청난 이들이었다.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의 입에서는 네 명의 이름이 더 흘러나왔다.
“총 여덟 분의 작가님들께서 귀한 시간을 나누어주신다고 하셔서 무사히 특강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블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하나같이 같은 분야의 사람이 없었고 원로부터 신진 작가까지, 그야말로 최고의 조합이었다.
“그, 그 블란 작, 아니 교수님.”
“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알게 되신 사이입니까?”
한 교수의 물음에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블란에게로 향했다. 블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먼저 연락을 주셔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오, 대박.
메리는 입꼬리가 걷잡을 수 없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져 얼른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녀는 테이블 위를 바라봤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유독 전통을 우선시하는 서 우드였다. 그리고 블란과 연이 닿은 이들은 이 관습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문학적인 성취로도 유명했다. 메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블란을 바라봤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블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메리는 테이블 아래도 주먹을 꽉 쥐었다.
아싸! 한 방 먹였어!
“크흠, 그러면 다들 괜찮으신 것 같으니 다른 안건으로 넘어가지요.”
회의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여전히 기죽이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회의가 끝이 났을 때.
“아, 언니. 아니, 교수님! 저 너무 오늘 시원해요! 얼음물을 통째로 들이켠 것 같은 통쾌함!”
메리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블란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그냥 우리는 학생들 위해서 준비한 게 다인데, 뭐.”
“그래도 그게 완벽했으니까! 통쾌한 거죠!”
뭐, 그런가? 블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회의 전 인사도 대충 받아주던 이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거나 혹은 외면하는 것을 보며 이제 막 전쟁을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시각, 그록은 오늘 해야 할 일 중 마지막을 끝내고선 찰리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묘한 기대감이 그의 얼굴에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우드 시 중앙광장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이를 만났다.
“야, 이놈의 자식아! 그 동안 연락 한 번을 안 해?”
아스트는 그록에게 달려들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이가 들수록 어째 더 유쾌해지고 장난기가 많아지는 아스트였다. 그는 현재 왕립 연구소에서 한 팀의 팀장을 맡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바빴습니다.”
여전히 무뚝뚝한 후배의 답에 아스트는 오히려 반가웠다. 그래, 이 녀석이 이래야 그록이지. 그는 포옹을 풀며 그록을 마주봤다. 하지만 둘 사이의 반가운 기색은 이내 사라지고 어딘가 씁쓸한 기색이 맴돌았다. 아스트는 그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가자.”
“네.”
두 사람은 우드 시 성 밖에 위치한 작은 저택으로 향했다.
그곳은 두 사람의 배움의 스승이자 인생의 스승인 그레이 교수의 자택이었다.
그레이 교수는 저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교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퇴임식 이후 처음으로 두 제자는 스승을 만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