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외전 3 : 쌍둥이의 대모험(6)
6.
4일째 카이의 감기가 낫지 않고 있었다. 그록은 약을 먹이고 카이를 재운 후 옆에 있는 무나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방을 나왔다. 무나는 카이의 옆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록은 창가에 섰다.
오늘은 9월 1일. 우드 아카데미의 2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자, 블란이 첫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그록은 오늘 수업이 없었다. 블란은 곧 남 우드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시작하리라. 그록은 창밖으로 보이는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그 시각, 블란은 거울 속 자신의 하늘빛 눈동자를 보며 주문을 걸었다.
‘열심히! 열심히 하자!’
수업을 앞두고 그녀가 늘 되새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달랐다.
‘어머니, 잘 다녀오세요. 전 괜찮아요.’
‘어머니, 잘 다녀오세요.’
아직 방에서 지내며 감기가 다 낫지 못한 아들 카이와 그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무나가 떠올랐다. 카이에 대한 걱정으로 블란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열심히 하자.”
그리고 단단해지자.
블란은 한 번 더 거울을 본 후 연구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러자 꽤 많은 교수들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 블란이구나, 아니지! 이제 블란 교수님이군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말씀 편안하게 해주세요.”
그간 알아왔던 교수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블란은 교수 연구동 입구로 향했다. 대부분이 밝게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크흠!”
대답을 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크펜 교수를 비롯한 몇몇 교수들의 파격적인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었다. 모두가 변화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그럼에도 블란은 그들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고 씁쓸한 미소가 순간 블란의 입가에 어렸지만 이내 밝게 표정을 고치고는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어휴. 남 우드가 왜 이렇게 미쳐가고 있는 건지.”
등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순간 블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인사를 받지 않았던 이들은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초대 총장이셨던 대 현자 우드 님의 유지를 파괴하는 행동이야. 왜 남 우드가 존재하는지 그 존재 목적부터 망가뜨리는 거지.”
“그러게나 말일세. 유력한 가문들의 영애들이 이제 다른 아카데미에 갈 거란 소리도 있더구만.”
블란은 걸음을 멈췄다. 남 우드의 존재 이유. 그것은 레이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금 정도의 교육 수준이 딱이거늘. 더 가르쳐줘봤자 뭐하려고. 쯧.”
“그러게 말이야. 오히려 레이디 교육에 더 열을 올려야 할 건데 말이야. 보게나, ‘레이디’가 아닌 이들이 얼마나 남 우드를 망치는가?”
레이디가 아닌 이들. 그 말은 분명 블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블란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간 많이 겪어왔던 일이었다. 40을 바라보는 30대 후반의 나이. 그 시간 동안 블란은 어려운 일들이 많았고 그 덕에 당당해야 할 때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당당해야 할 때였다.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이들이 많아서 걱정일세.’
크펜 교수의 한숨 가득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혹은 못 들은 척을 해서는 안 되었다. 크펜 교수 측과 반대 측이 아직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은 확고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피해를 받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제자가 될 학생들일 테니까.
블란은 등을 돌려 다시 그 교수들과 마주했다. 여전히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눈에 담겼다.
“왜 그러는가? 블란 박사.”
교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 박사라고 해주니 그나마 다행인가. 블란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우드 아카데미 학칙 제1조 1항.”
음? 블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학칙 제1조 1항이 왜?
“우드 아카데미는 학생들에게 머무는 곳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이다.”
대현자이자 초대 총장인 우드가 가장 먼저 만든 조항이었다. 요즘 들어 유명해진 조항이었다.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블란은 말했다.
“이걸 잊으면 안 되겠죠?”
대현자 우드가 만들었으며 조금씩 첨가는 되었지만 1조부터 10조까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이어져 왔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유지이자, 그의 뜻이라 할 수 있었다.
“허!”
“이, 이!”
그리고 남 우드 아카데미 전공 과정 신설의 첫 번째 근거가 되었던 조항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단어의 해석을 근거로 들어 크펜 교수는 이번 일을 추진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블란은 자신을 향한 적의 어린 시선들에 환하게 미소를 그리고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주 교수가 되더니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만!”
“예전에 말도 제대로 못하던 것이, 감히!”
들려오는 말들을 블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예전보다 자신은 많이 강해졌다. 이는 지켜야 할 사람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으며 블란은 강의실로 향했다. 교수가 되고 난 후 생애 첫 제자들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드르르륵.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블란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생각보다 인원이 많았다. 블란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가문에서, 집에서 허락해주지 않아 전공 신청을 하지 못한 학생들이 자네 수업만이라도 청강을 해도 되냐고 묻더군. 다른 전공 수업은 힘들더라도 자네 수업만큼은 듣고 싶다고 말일세. 괜찮겠나?’
당연히 블란은 괜찮다고 했다. 문학 학부 과정에는 블란 외에도 다른 교수들의 수업도 있었다. 하지만 블란의 수업을 듣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반갑습니다!”
니아타는 인사를 하면서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블란의 눈에 확 들어왔다. 새까만 피부의 소녀.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블란을 향한 호의로 가득했다.
‘이 아이구나.’
마프렌 왕국에서 상당히 먼, 오피처트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사막 왕국. 그곳에서 온 학생이 니아타였으며 우드 아카데미 최초의 사막 왕국 출신 학생이자 남 우드 최초의 외국인 여학생이었다.
‘말도 마. 니아타 그 아이 덕에 머리 아파하는 교수들이 많아.’
크펜 교수는 머리 아파한다는 말과 달리 묘하게 흐뭇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유를 몰라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크펜 교수는 말했었다.
‘자기 나라에서는 여자도 말을 타고 사냥을 할 수 있는데, 왜 여기서는 여학생들에게 무술 수업을 못 듣게 하냐고 그러더라고. 자신도 전사의 자격이 있고 호신술로는 부족하다고 말일세.’
블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니아타에게 작게 미소를 그려주었다. 순간 니아타의 눈이 커졌고 그녀의 마음속은 지금 쿵쾅쿵쾅 뛰었다.
‘오! 세상에! 블란 작가님이 나한테 웃어주셨어! 오, 세상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우연히 아버지가 구해다주신 시집. 그 시집을 읽고 난 후, 니아타는 사냥을 하러 다니던 것을 멈추고 펜을 잡았다.
“첫 수업인데 다들 눈빛이 뜨겁네요.”
블란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지금 뜨거운 저 눈빛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이 전공 과정에는 문학을 더 알고 싶어서 온 이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전공. 그 이름이 필요해서, 하고 싶어서, 간절해서 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저는 첫날부터 수업을 할 생각은 없답니다.”
블란은 미소를 그리며 학생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뜨겁지 않은 이들도 많았다. 단순한 호기심도 있었고 혹은 어떤 염탐의 기색도 있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하나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아시는 분은 답해주시면 지각을 한 번 해도 봐드릴게요.”
“오!”
순간 여학생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각을 한 번이라도 하면 점수가 깎였다.
학생들은 무슨 질문일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문학에 대한 질문일까? 아니면 본인의 작품? 여러 추측들이 난무한 가운데 블란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여러분들에게 우드 아카데미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음? 우리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우드 아카데미에서 바라는 것?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문에 학생들은 답을 하지 못했다.
“뭐지? 너 혹시 알아?”
“몰라. 학비 내는 건가?”
“야. 그런 거겠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조금씩 강의실을 채웠다. 그때.
“교수님!”
니아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블란은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지만 니아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오히려 떨떠름한 과일을 먹은 것마냥 얼굴이 찡그려져 있었다.
“1학년 니아타 프링쉬입니다.”
“네. 니아타 양. 답하시겠어요?”
니아타는 블란이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다. 그녀는 잠시 입을 우물쭈물했지만 이내 답했다.
“‘배려’입니다.”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 우드의 덕목인 ‘배려.’ 그것이라면 우드 아카데미에서 바라는 것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니아타의 답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레이디가 되는 것입니다.”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니아타처럼 구겨졌다. 공공연하게 남 우드는 최고의 레이디를 배출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땡!”
하지만 답이 아니었다.
“음?”
니아타는 땡이라는 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블란을 바라봤다.
“아쉽지만 니아타 양, 틀렸어요.”
그럼 뭐지? 니아타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학생들의 얼굴에 더 의아함이 커져갔다.
“자.”
블란은 여유로이 칠판으로 다가가 분필을 잡았다.
사각사각.
그리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고 학생들은 이를 지켜봤다.
사각사각, 탁!
칠판에 점을 찍으며 블란은 분필을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았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을 향해 블란은 입을 열었다.
“우드 아카데미 학칙 제1조.”
[우드 아카데미 학칙 제1조]
다른 어떤 곳에서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마프렌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에서 개교 때부터 전해져온 10가지의 규칙. 그 중 첫 번째 규칙.
“1항을 아는 학생분 있나요?”
학생들은 멍하니 블란을 바라봤다. 우드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지만 그 학칙은 잘 몰랐다. 접할 일이 없었다.
“그러면 제가 답하도록 하죠.”
블란은 미소를 지었다.
“우드 아카데미는 학생들에게 머무는 곳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곳이다.”
잔잔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다음은 제1조 2항.”
블란은 멈추지 않았다.
“우드 아카데미는 학생들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그들을 돕는다.”
블란은 잠시 입을 닫은 채 학생들을 바라봤다. 묘한 표정을 짓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우드 아카데미 학칙 제1조를 어떻게 부르는지 아시나요?”
니아타는 블란을 바라봤다. 방금 블란이 말한 조항들에 괜히 심장이 뛰었다.
“초대 총장인 대현자 우드는 말했습니다. ‘우드의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존재해야 할 정의다.’라구요.”
그 말은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정의라는 것을 의미했다.
블란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학생들을 바라봤다. 자신은 타인이기에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말할 수 있었다.
“동, 서, 남. 모두를 합쳐서 우드 아카데미라고 합니다. 이 우드 아카데미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의 학업을 돕는 이유이자 바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우리. 그 안에는 블란도 들어갔다.
자신이 이 학생들을 위해 돕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기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블란은 긴 삶을 살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삶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 그것은 본인의 결정이며 그 결정은 타인이 옳다, 그르다,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만 블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저는 한 학기 동안, 아니 이 아카데미에 제가 있는 동안 여러분들께 그 길을 걷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성심성의껏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는 것. 눈앞의 이 학생들을 위해, 서툴고 실수하는 것이 있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와.”
니아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입안으로 말했다.
나만의 길. 묘한 기분이 들었고 점점 심장이 다시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블란을 바라봤다.
묘하게 상기된 눈빛들이 블란에게로 향했다. 처음으로 남 우드에서 생긴 학부 과정에 도전한 이들. 그들의 마음에 블란이 해준 말이 새겨졌다. 그런 그들과 눈빛을 마주하며 블란은 입을 열었다.
“그럼, 답을 맞힌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다들 1분이라도 지각하면 벌점입니다?”
그 목소리는 꽤 장난기가 넘쳤지만.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도움을 청하면 도와줄 스승이 생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러면 오늘은 첫날이니 빨리 마치도록 하죠. 다음 시간부터는 아마 힘드실 거예요.”
저 조곤조곤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어마무시한 과제와 힘겨운 수업을 진행할 사람이 바로 블란이라는 것을.
웃는 호랑이. 그 별명이 남 우드에 퍼지는 것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끝! 다들 반가웠어요.”
블란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수업의 끝을 알렸고 학생들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힘차게 건넸다.
드르르륵. 블란은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다행이야.’
수십 번 연습한 만큼은 해낸 것 같아 블란은 속으로 안도했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은 그녀였기에 늘 이런 자리에 서기 위해선 연습을 해야 했다.
교수로서의 첫 수업은 꽤 괜찮은 것 같았다.
블란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어렸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하고 블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얼른 그 일들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