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외전 3 : 쌍둥이의 대모험(5)
5.
그 순간 블란이 작은 보물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너희들.”
흠칫! 카이와 무나는 몸을 떨었다. 그 떨림에 응하듯 블란의 작은 목소리가 천둥처럼 둘의 귓가에 내리박혔다.
“혼나야겠지?”
무나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카이는 급속도로 두 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둘은 연신 침을 꿀꺽 삼켜댔다. 둘은 자연스럽게 그록을 쳐다봤다.
“혼나야지.”
아. 둘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서로를 바라봤다. 용감한 두 쌍둥이의 모험은 결국 성공했지만 그 뒤에는 꾸지람이 예고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두 사람은 혼나지 않았다. 아니, 혼나지 못했다.
“카이. 엄마, 아빠는 잠시 나갔다가 올게?”
애써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그 모습에 블란은 아들의 볼을 쓰다듬고는 그록과 함께 카이의 방을 나왔다. 방을 나서자마자 블란은 복도 벽에 기대어 섰다. 그록은 얼른 다가가 블란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카이는 감기인가요?”
블란의 물음에 그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 감기였다.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걸릴 법한, 가볍다고 할 만한 병이었지만 카이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아무래도 장인어른 댁이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했고 지금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다보니 그리 된 것 같습니다.”
블란은 그록의 말에 눈을 감았다.
옷도 따뜻하게 입혀 보냈고 우드 시 자체가 평지이다 보니 몇 년간 별일이 없어 이번에도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었다. 블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동시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
“약도 먹었고 열이 그다지 심하지 않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록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속도 타들어갔다. 하지만 카이가 아플 때면 블란은 어느 순간보다 마음속으로 괴로워했다.
블란은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고 그록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적만이 가득한 복도에서 그록은 블란의 손을 잡았다. 평소와 달리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 순간 블란의 작은 목소리가 복도에 내려앉았다.
“……나 때문일까요?”
“블란.”
블란의 이름을 부르는 그록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단호했다.
“분명 당신 탓이 아닌 것을 알지 않습니까.”
안다.
분명히 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카이는 워보트 병 환자다.
“그렇지 않고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블란은 이 얄궂은 운명이 괴로웠다.
워보트 병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어머니도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고 자신은 워보트 병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까지!
신이 있다면 왜 자신의 피에 이런 가혹한 운명을 주었냐고 묻고 싶은 그녀였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블란.”
그록은 블란을 다독였다.
카이가 아플 때면 평소의 그 다부진 모습도 사라지고 무너지고야 마는 블란이었다. 물론 아이들 앞에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록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알아요. 당신이 개발한 치료제로 내가 나았듯이 카이도 나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란 치료제.
워보트 병 치료제는 꾸준히 보완이 되어서 지금은 완전한 형태를 이루어내었다. 하지만,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블란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아파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요.”
약이 너무 독했다.
그 독함을 견디기에는 아직 카이가 어렸다. 적어도 15살은 되어야 치료가 가능하다.
그 사실이 블란은 괴로웠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카이의 곁에 든든한 가족과 좋은 이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몸의 아픔은 힘겨운 것이었다. 블란 자신이 여전히 그 아픔을 기억하고 있듯이.
“블란.”
그리고 그런 블란의 아픔을 곁에서 지켜본 그록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블란을 안아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 카이가 워보트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록은 나을 방도가 있다는 것을 앎에도 무너지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식이 조금이라도 아프다는 사실 자체로 괴로웠다.
“블란. 괜찮습니다. 카이는 강한 아이입니다.”
강하긴. 강하다고 해봤자 아이였다. 그 사실을 앎에도 그록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때문이라고 괴로워하는 아내의 심정은 그록보다 더할 것이기에.
“블란, 무나에게 가겠습니까? 카이 곁에는 제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블란을 안아줄 수는 없었다. 카이의 곁에는 자신이 있어야 했다.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아마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사람은 잠들지 않고 아이의 곁에 머물 것이다. 면역력이 약한 카이가 더 심해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것이다.
내일 당장 강의 준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인데, 밤을 샐 그록을 생각하니 그것 역시 미안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약초 연구자인 남편이 훨씬 나았다.
“네. 알겠어요. 무나는 걱정 마요.”
그리고 무나도 걱정이었다. 다행히 감기는 걸리지 않았지만 카이를 누구보다도, 어쩌면 자신들보다 더 걱정하는 이가 무나였다.
“어머니, 아버지.”
이런. 블란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뒤로 몸을 돌렸다.
“무나.”
하지만 블란은 다시 마음이 아려왔다. 제 아버지를 닮은 것인지 늘 무뚝뚝한 얼굴 가득 불안과 걱정, 그리고 죄책감이 가득했다. 책을 품에 안은 채 연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록은 자신과 블란을 부르고서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딸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딸과 시선이 마주했다.
“잘 준비 안 하고, 여기는 왜 왔어? 잠이 안 와?”
그록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며 무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무나는 그록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록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딸의 등을 토닥였다.
“……죄송해요.”
그록은 어깨가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블란은 황급히 무나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무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럼에도 소리 없이 젖어드는 어깨에 그록은 무나를 품에 꽉 안았다. 카이가 아플 때면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던 딸이었다.
“아버지-”
슬그머니 무나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고 코가 새빨갰다.
“이거.”
무나는 품에 안고 있던 책을 그록에게 내밀었다. 그록은 그제야 무나가 들고 온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용감한 다람쥐의 대모험 2]
하. 그록은 다시 한 번 무나를 품에 안았다.
“카이한테 읽어주세요.”
울음으로 인해 목이 잠겼지만 그록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누구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꼭 읽어줄게.”
그록은 무나를 품에서 놓았고 블란이 무나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블란은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가는 조금 빨갰다. 그록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무나 너도 잘 자. 당신도 푹 자요.”
“네. 무리하지 말아요.”
그록은 무나와 블란을 보내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달칵. 문이 열렸고 그록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무나도 왔다 갔어요?”
카이가 그대로 푹 자고 있는지 확인하려던 그록은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침대를 바라봤다. 이불을 덮은 채 얼굴만 내민 카이가 그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싶어 그록은 얼른 카이에게로 다가갔다.
“언제 일어났어. 잠시 나갔었는데.”
“조금 전에요.”
그록은 책을 침대 옆 협탁에 놓고선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 묵묵히 온도를 재는 그를 보며 카이가 입을 열었다.
“무나가 가지고 온 거예요?”
“……그래. 무나가 꼭 읽어주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구나.”
카이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이내 다부진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무나가 또 자기 탓 하죠?”
그록은 아들을 바라봤다. 무나도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지만 카이가 좀 더 어른스러웠다. 왜 어른스러워졌는지 그 이유를 알았기에 그록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
“아니라고 꼭 말해주세요. 무나 탓은 하나도 없어요. 제가 가자고 했어요.”
“그래.”
그록의 답에 카이는 안심했다는 듯이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히 열은 올라가지 않았다. 하지만 안정을 취해야 했다.
“잠이 잘 안 와도, 다시 자자.”
“네, 아버지.”
카이는 침대에 똑바로 누우며 그록을 바라봤다.
“동화책 읽어줄까?”
그록이 무나가 건네준 동화책을 집어 들었고 카이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록은 ‘용감한 다람쥐의 대모험 2’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용감한 다람쥐는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그에게,”
“죄송해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그록은 동화책을 내려놓고 카이를 바라봤다.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카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록은 아들의 그 미소가 기뻐서 짓는 미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너희의 어머니도 같은 병이었다. 알고 있지?”
“네.”
“그럼 어머니도 잘못을 한 것이냐?”
카이는 답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 블란도 같은 병을 앓았던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버지임을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그리 되지 못했다. 그냥, 다 자기 잘못 같았다.
“카이.”
그록은 답이 없는 아들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카이는 답을 하라는 신호인 것 같아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록이 먼저 말했다.
“아픈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함께 이겨나가야 할 일이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에 카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록은 그런 아들을 살짝 안아주었다. 그러고는 조금은 장난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잘못했구나.”
음? 순간 카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잘못?
“허락받지 않고 몰래 둘이서 돌아다닌 것.”
“아.”
“감기가 낫는 대로 혼날 거니까 얼른 낫거라.”
보기 드문 장난기 어린 아버지의 미소가 보였다. 그제야 카이는 그록이 농담을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무나처럼 무뚝뚝하지만 늘 다정했다. 카이는 씩씩하게 답했다.
“네. 얼른 나을게요! 하지만 벌은 한 번만 봐주세요.”
그록은 답 대신에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동화책을 읽어 내려갔다.
“용감한 다람쥐는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빨리 다닐 수 있는 마차도, 멋진 옷도 아니었다.”
카이의 눈이 조금씩 감겨들어갔다. 용감한 다람쥐의 이야기가 귓속에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 무나와 함께 했던 모험이 꿈처럼 흐릿한 잔상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록은 카이를 토닥여주며 묵묵히 동화책을 읽었다.
“함께해줄 친구가 가장 필요했다. 그리고 용감한 다람쥐에게는 함께해줄, 도와줄 친구들이 많았다…….”
그록 가족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