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외전 2 : 한겨울의 결혼(8)
8.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이는 그록이었다. 그는 내리자마자 펼쳐진 붉은 초원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시들지 않는 붉은 잎들 사이로 전해져오는 인사들 때문이었다.
“이야! 그록 아이가? 결혼하려고 왔다매?”
“무신 결혼도 요서 한다고 그라노! 여튼 잘 왔다!”
약초꾼들이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전보다 조금 더 하얗게 샌 머리로 헤리아가 그에게 다가왔다.
쫘악!
“하이고, 잘 왔다!”
여전히 자신의 등을 때리는 매운 손맛과 함께 헤리아는 그에게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록은 반가움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블란이 마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헤리아는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아이고! 이게 누꼬! 우리 예삐 왔나!”
그는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블란에게로 사라져버리는 헤리아의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피식. 그 모습조차도 익숙해서 그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야. 진짜 프시아가 강한 약초기는 하네.”
“그러게. 나 이렇게 많은 프시아는 처음 봐. 북부인데도 눈이 잘 안 온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더 눈에 띄네.”
아스트와 릴리를 시작으로 여러 대의 마차 안에서 일행들이 하나둘 내려섰다. 그록은 천천히 한쪽 마차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버지 레간과 어머니 루린이 내려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처럼 감탄을 흘리면서도 그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록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겨울 만큼 싫었지만 그럼에도 함께해야 했던 존재가 아마 프시아이리라.
“아버지.”
그록은 아버지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은 채 하염없이 붉은 초원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분명 아버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라 그록은 생각했다.
“여기가 프쉴입니다. 대륙 최대 프시아 군락지입니다.”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옆에 서는 이는 그록이 아니었다. 어머니 루린이었다. 루린은 레간의 옆에 선 채 겨울임에도 생기로 가득 찬 프시아 잎들을 바라봤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잘 살아 있네.”
그록은 레간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프시아 잎들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이쁘다.”
그록은 천천히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프시아 초원이 보였다. 그 초원의 초입에서 헤리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블란이 보였다.
“그록 씨!”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록은 걸음을 옮겼다.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이전보다 가까이 붙어 서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이제 결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
결혼식 날 아침. 그록은 아스트의 괴상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떠야 했다.
“야, 야! 야!”
“……왜 그러십니까?”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의 그록을 아스트는 잡아 흔들며 말했다.
“눈 왔어! 밤사이에 눈이 엄청 왔다고!”
음? 그록은 잠기운이 싹 날아갔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당장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의 뒤에서 아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칵, 창문이 열렸다.
“진짜 멋지더라니까! 끝내주더라!”
아. 그록는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밤사이에 내린 하얀 눈이 아침의 맑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얀 눈에도 시들지 않는 붉은 잎들이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너 좋겠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스트가 건네는 말에 그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그록은 자신의 가슴께로 손을 올렸다. 쿵. 쿵.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붉은 잎들로 가득 찬 초원의 시작. 그 입구에 작은 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저 자리였다.
자신과 블란이 함께 올라설 자리.
그록은 그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곧 찾아왔다.
“후우.”
그록은 정장을 매만지며 연신 앞을 바라봤다. 단상 바로 아래에 선 그는 간밤에 눈이 와서 추운 날씨임에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레온이 마법 협회에 의뢰해 온도 조절 마법을 새긴 정장은 따뜻했다.
“후우.”
그러면서도 그록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런 그를 그와 마주본 채 서 있던 하객들은 눈에 담으며 미소를 그렸다.
“릴리. 그록 저 녀석 긴장한 것 같지? 이야, 내가 저런 모습을 볼 줄이야.”
“조용히 해. 넌 사회자 해야 하잖아. 얼른 자리로 가.”
“알았어. 알았어.”
아스트는 릴리의 등살에 못 이긴다는 듯 사회를 볼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록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록에게 이 결혼식이 떨리는 이유를.
‘정말 달라졌군.’
새삼 그록은 느끼고 있었다.
과거 오직 자신과 블란, 레온만이 자리한 채 이루어졌던 결혼식. 그 자리에서 완전하게 기뻐하는 이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때, 블란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록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객들과 자신을 바라보는 부모님,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그 속에서 기다렸다. 자신의 아내를.
그 순간, 천천히 저 멀리서 레온의 손을 잡은 채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록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하얀 눈길을 걸어오는 블란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온통 겨울인 세상 속에서 그녀만이 따뜻한 봄날 같았다. 수수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드레스가 걸음마다 조금씩 흔들렸고 프시아의 잎으로 만든 꽃을 든 블란은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레온의 손을 잡은 블란이 하객들의 뒤편에 선 순간,
“그럼 지금부터 그록 바서와 블란 샤를, 두 사람의 결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스트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신부 입장!”
블란은 천천히 단상 아래에 서 있는 그록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벌써부터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아까 전부터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잘 살아야 한다. 아니, 잘 살 거다. 그리고 꼭 행복할 거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블란 역시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블란은 자신을 향한 그록의 눈빛을 보았다. 그의 뒤로 눈과 함께 빛나는 프시아 잎들이 보였다.
지금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크흠.”
레온은 그록의 앞에 섰다. 그는 옆에 선 딸을 바라봤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을 할 수 있게 될 줄이야. 레온은 그록을 바라봤다. 그는 천천히 자신이 잡고 있던 블란의 손을 그록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그록의 눈을 보며 말했다.
“믿네.”
자네라면 내 딸과 행복하게 살 것이라 믿네.
그 말에 그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도 믿습니다.”
뭘 믿는다는 거냐?
레온은 늘 그렇듯 얄미울 만큼 담담한 목소리에 속으로 되물었지만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그래, 나도 믿는다. 레온은 맞잡은 그록과 블란의 손을 한 번 꾹 잡고선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블란과 그록은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마주봤다.
원래라면 주례를 비롯해 많은 절차들이 있어야 했지만 겨울의 야외였기에 이를 생략했다. 대신에 식이 끝나고 난 뒤 모두 함께 작은 만찬자리를 가질 예정이었다.
“이야. 여러분, 보이십니까?”
결혼식은 경건하기보다는 유쾌했다. 사회자 아스트는 분위기가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벼워지지도 않게 잘 이끌었다.
“그록 바서 군이 저토록 긴장하는 모습은 제가 살면서 처음 봅니다!”
곳곳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스트의 말대로 저런 그록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자, 결혼식에서 이 질문이 빠지면 섭섭하겠지요.”
아스트는 그록을 향해 물었다.
“블란 샤를 양을 얼마만큼 사랑하십니까?”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늘 담담하기만 하던 그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들이 오고가는 것이 보였다. 그록은 블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으며 답했다.
“지난 시간보다 더 사랑합니다.”
지나간 시간들보다 지금 더 사랑한다.
“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답이었다.
지나왔던 수많은 시간.
블란을 처음 만나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
그리고 그녀와 첫 번째 결혼을 했을 때.
그녀를 먼저 떠나보냈을 때.
그리고 다시 돌아와 그녀를 만났을 때.
다시 그녀에게 접근했을 때.
그녀가 나았을 때.
함께하기로 약속했을 때.
그 모든 시간들보다 지금 더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그록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록은 눈앞의 생기 넘치는 눈동자를 마주봤다.
앞으로 함께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 그렇기에 그록은 더 사랑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으음.”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아스트가 은근슬쩍 물었다.
“다시 태어나도 말입니까?”
순간 블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긴장 어린 기색이 가득하던 그록의 얼굴 위로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는 너무나도 편안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당연한 겁니다.”
그록의 미소와 답에 블란은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순간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블란의 말에 그록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소를 그렸다.
“오! 신부님께서는 묻지도 않았는데, 답을 하시는군요.”
아스트의 농담에 블란은 볼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모든 이들이 따뜻하게 바라봤다. 결혼식은 계속 이어졌다. 아스트는 슬쩍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서로 반지를 교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단상 위에 서 있던 두 사람은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앉아 있던 하객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시겠습니까?”
그록이 나직하게 건네는 말에 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프시아 초원의 입구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약초꾼들이 다니는 작은 길로 들어섰다. 그록은 블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초원의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객들은 자리에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그록의 눈에 하얀 눈과 붉은 프시아 잎들이 담겼다.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프시아의 그 강인함이 아름다웠다.
그록은 이 프시아처럼 어떠한 어려움도 블란과 함께 이겨나가고 싶었다. 그록은 블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 순간,
“엇!”
강한 바람이 초원에 휘몰아쳤다. 순간 하객들은 눈을 크게 뜨며 두터운 옷깃을 여몄다. 사회를 맡은 아스트는 매서운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마지막 중요한 자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람이 점점 가라앉자마자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
그 순간 그는 감탄을 흘렸다.
“……눈이다.”
맑은 햇살 아래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프시아 잎 위에 놓여 있던 눈들이 강한 바람에 위로 치솟았다가 천천히 다시 붉은 잎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눈들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눈에 갇혀 있던 붉은 잎들이 그 생기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뽐내고 있었다.
“아름답다.”
누군가의 감탄과 같은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 붉은 초원 위 반짝이며 내리는 눈 아래에서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 장면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블란은 잠시 흩날리는 눈을 바라봤다. 마치 강한 바람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내면 그 뒤에는 아름다운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블란 양.”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그록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 놓인 반지가 보였다. 블란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프시아 잎이었다.
프시아 잎이 새겨진 반지를 그록은 천천히 블란의 손에 끼워주었다. 블란도 반지를 건네받아 그록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사랑합니다.”
담담하지만 수많은 감정이 담긴 그 목소리에 블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그록은 천천히 다가가 블란의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붉은 초원 위 하얀 눈송이와 함께 두 사람의 결혼식은 끝이 났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