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외전 2 : 한겨울의 결혼(5)
5.
[프쉴에서, 작은 규모로 소박하게 하고 싶어요.]
“후후.”
레온이 나직한 웃음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비서 펠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딘가 모르게 뒤통수가 조금씩 서늘해졌다.
“펠.”
“네.”
휙. 편지에서 시선을 돌린 레온은 펠을 똑바로 바라봤다.
“블란이 나에게 큰 과제를 안겨주었어.”
“네. 네? 아가씨가 말입니까?”
“그래.”
레온은 편지를 펠에게 슬쩍 내밀었고 ‘프쉴’과 ‘소박하게’라는 단어를 본 펠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모두가 부러워할 성대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준비할 걸세!’
펠은 레온이 블란의 결혼식에 대해서 연신 강렬하게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밑에도 봐봐.”
“아, 네!”
펠은 밑에도 보라는 레온의 말에 다음 편지의 밑부분을 보았다.
“아.”
[저희 두 사람이 결혼식을 준비해보고자 합니다. 모자라고 서투르더라도 저희의 시작을 저희가 준비해보고 싶어요.]
이렇게 되면. 펠은 레온을 바라봤다. 레온이 끼어들 수가 없었다. 설레며 준비할 생각에 들떴던 모습이 떠올라 펠은 저도 모르게 살짝 안쓰러운 눈빛을 그렸다.
“해외라니. 역시 내 딸은 배포가 커.”
하지만 이는 이어진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케일부터가 다르구만. 달라. 역시 그록, 이 마음에 안 드는 사위도 배포는 커!”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면서 사위라는 말은 왜 자꾸 뒤에 붙이십니까. 펠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고는 다시 편지를 보았다.
‘하긴.’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가족에 몇몇 지인들까지 더해서 해외에서 결혼식을 올리려면 실질적인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 하지만 이를 해낼 만큼의 힘은 두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각각 그록은 치료제 개발로, 블란은 시집으로 벌어둔 돈이 있으니까.
“흐음. 펠.”
“네.”
펠은 레온을 바라봤다. 불러놓고 다음 말을 잇지 않은 채 레온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드레스와 정장은 사돈이 만드신다고 적혀 있지?”
“네. 편지에 그리 적혀 있습니다.”
드레스는 어머님이 해주신다며 자랑스럽게 쓴 글에서 블란의 들뜬 기분이 느껴졌다. 레온은 가만히 천장을 보다가 툭 내뱉었다.
“일반적인 드레스는 아니겠구만.”
“예? 아!”
멍하니 되묻던 그는 곧 레온의 말에 탄성을 터트렸다. 레온은 창밖을 바라봤다. 10월임에도 바람은 꽤 쌀쌀했다.
“분명 두꺼운 숄을 두르거나, 혹은 안에는 드레스이고 겉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겠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프쉴은 우드시보다 조금 더 추운 곳이었다. 그곳의 날씨는 어떨지 뻔했다.
“펠.”
“네.”
레온은 펠을 바라보며 말했다.
“편지지를 두 장 준비하도록.”
편지지? 드레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왜?
의아했지만 펠은 답하며 샤를 가문용 편지지를 꺼냈다.
“네.”
레온은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여기 있습니다.”
펠은 레온의 앞에 편지지를 두 장 놓고 물러서서 그 뒤에 섰다. 레온은 펜을 손에 쥐며 천천히 편지지 위에 글을 새겼다.
아! 이를 지켜보던 펠의 눈동자는 커졌다.
[마프렌 왕국 마법 협회]
한 편지지는 수도 네디린에 있을 마법 협회로 향했다.
[루린 디자이너님께.]
[안녕하십니까? 사돈. 저 레온 샤를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지지는 그록의 어머니 루린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 펠은 편지지에서 시선을 떼어 레온을 바라봤다.
흠칫.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주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레온의 눈빛이 보였다. 펠은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다 썼네. 잘 부치도록.”
“네.”
레온은 두 통의 편지를 내밀었고 펠은 이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 순간 레온의 나직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좋은 선물이 될 거야. 분명.”
활활 타오르는 열기로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펠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자신의 생각에도 분명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도착하게 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펠은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혼자 남은 레온은 창밖을 바라봤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왠지 붉은 초원이 그의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
“이제 다음 주면 논문 심사 결과가 나오겠군요.”
교양 문학 교수이자 현재 블란의 박사과정 지도 교수이기도 한 크펜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블란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조금 긴장돼요. 열심히 해서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통과했으면 해서.”
“통과될 겁니다.”
단호한 크펜의 목소리에 블란은 그를 바라봤다. 크펜은 남 우드 아카데미에서 최초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게 될 사람은 블란이라고 확신했다.
“그 논문을 통과시키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멍청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다시는 서 우드 작자들도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교수님.”
격해지는 크펜의 목소리에 블란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서 우드 문예 공모전. 블란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던 그들에게 크펜은 조금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심사위원 중 몇몇이 이번 논문 심사의 담당이기도 했다.
“크흠. 그래도 뭐, 이제는 정신을 차린 것 같지만요.”
첫 번째 시집 발간 후, 블란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갔다. 그녀의 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시는 마치 하나의 신드롬처럼 주목을 받았다. 서 우드에서도 이제는 블란을 귀하게 여겼다. 웃기지도 않을 노릇이지만.
“블란 양.”
교양 문학담당 교수인 크펜은 블란을 나직이 불렀다.
“네. 교수님.”
자신을 바라보는 순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눈동자를 향해 크펜은 툭 내뱉었다.
“수업 해보시겠습니까?”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고 곧 블란이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네? 수, 수업이요?”
크펜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네. 블란 양이 교단에 뜻이 있다면 말입니다.”
블란의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수업이라니!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일이 제안이 되어 돌아오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블란을 향해 크펜은 입을 열었다.
“수업을 한다고 해서, 강사가 된다고 해서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답은 못 합니다.”
진지한 목소리에 블란은 놀람을 가라앉히고 크펜을 마주봤다.
“아시다시피 벽이 있으니까요. 박사 자리보다 더 힘겨울지 모릅니다. 그리고 남 우드에서 해야 하기에 교양 문학 수업이 될 것입니다.”
교양 교수 크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블란은 자신들과 함께 힘겹게 박사 과정까지 왔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한 가지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은, 블란의 뛰어난 실력이었다.
“지금은 교양이겠지만 언젠가는 전공이 될 수 있습니다.”
블란은 크펜을 바라봤다. 교양 문학을 담당하지만 실제로 박사 과정에서 지도 받게 된 크펜의 지식은 실로 엄청났었다.
“남 우드 문학 전공 학생들과 블란 작가가 함께하는 강의실이 보고 싶습니다.”
교양 문학이 아닌, 문학 전공. 블란은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혔다. 왠지 심장이 쿵쿵 크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블란은 곧바로 크펜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크펜은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언제든지 이 제안은 유효하니까. 생각해보고 말해주세요.”
블란은 크펜을 바라봤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눈빛이 보였다. 블란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블란은 인사를 한 후 크펜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예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제안을 받고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그녀는 그록과 만나기로 한 위스 찻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며칠 전에 왔던 고켄의 편지를 떠올렸다.
시에 있어서 그녀에게 스승과 다름없는, 그리고 소중한 친구이기도 한 고켄 작가. 그는 요즘 자신의 집필 활동에 대해서 간간이 소식을 전했고 그의 자유로운 삶을 전해들은 블란은 이를 읽으며 자신도 그리 되고 싶어 심장이 뛰었었다.
딸랑. 위스 찻집에 들어선 블란은,
“블란 양.”
그록과 마주 보고 앉으며 자신의 이 고민을 말했다.
“그록 씨.”
“네. 블란 양.”
그록은 고민 어린 표정을 한 블란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결혼식 준비는 순조로웠기에 다른 고민이리라 금세 짐작이 되었다.
“저는 고켄 작가님처럼 자유롭게 살면서 글을 쓰고 싶어요.”
그록은 담담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크펜 교수의 제안과 고켄 작가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블란의 바람. 그 사이에서 그녀가 느끼는 고민을 그록은 경청했다.
“그록 씨라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블란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록에게 물었다. 여전히 고민이 생기거나 부끄럽거나 떨릴 때면 그녀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록은 그런 그녀를 눈에 담으며 담담하게 답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십시오.”
허무하리만큼 담담한 답이었다.
블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그리 말하며 블란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그록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뻗었다. 예전만큼 통통하지는 않지만, 펜을 많이 쥐어서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지만 여전히 따뜻한 블란의 손을 그록은 잡았다.
“블란 양.”
자신의 손을 감싸는 따뜻한 손과 담담한 목소리에 블란은 고개를 들었다.
“고켄 작가님의 자유로움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에게 나직하게 묻는 그록의 눈동자가 보였다. 블란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고켄 작가의 자유로움. 생각에 빠진 그녀에게 그록은 하나 더 물었다.
“자유로움은 무엇입니까?”
블란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유로움. 그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질문에 답했다.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고 이를 할 수 있는 것.”
그록의 눈에 반짝이는 블란의 눈동자가 담겼다.
“그게 자유예요.”
그록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그는 블란의 답에 답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블란은 고켄 작가를 떠올렸다. 자신은 그의 무엇에 부러움과 설렘을 느꼈나. 그것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갔기 때문이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시를 썼다는 그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렇다면 자신도 자신만의 자유로움을 찾으면 된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십시오.’
그록의 말이 무엇인지 블란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고 이를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고켄과 다른 자신만의 자유로움이었고 이를 누리며 시를 쓰면 그것은 자유로운 것이었다.
점점 머릿속이 선명해지는 블란에게로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그 옆에 있겠습니다.”
그록이었다. 블란은 새삼 마음이 꽉 차올랐다. 그녀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 그록을 바라봤다. 그 감정에 그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블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도요.”
고개를 끄덕이는 블란의 눈빛은 한층 더 단단하면서도 따뜻해져 있었다.
다음 날, 블란은 크펜 교수를 찾아갔고 그에게 말했다.
“강사 일도 된다면 해보고 싶습니다.”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크펜 교수를 향해 블란은 눈을 빛내며 다짐하듯이 말했다.
“되든 안 되든 해보고 싶어요.”
블란은 다시 새로운 길로 뛰어들었다.
***
그 시각, 그록은 우드 시의 한 가게를 찾아갔다. 블란에게 부탁해 혼자 하기로 한 일이었다.
딸랑.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번째로 방문한 가게였기에 주인은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네.”
“어떻게 하실지 정하셨습니까?”
그록은 가게 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마주보며 섰다.
“그럼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이름 철자로 하실 겁니까? 아니면, 기념일?”
가게 주인. 보석 세공사의 말에 그록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품 안의 것을 내밀었다.
“이걸 새겨주십시오.”
음? 가게 주인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 정말로 이걸로?”
“네.”
그록은 담담한 얼굴로 보석 세공사에게 말했다.
“결혼반지에는 이걸 새겨주십시오.”
세공사의 손 위에는 작은 붉은 잎이 그 선명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지가 완성되었을 때쯤. 12월, 겨울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