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외전 2 : 한겨울의 결혼(3)
3.
그리고 그 소문에 누구보다도 눈을 반짝였던 이들은,
“반갑습니다.”
그록의 첫 강의를 듣기 위해 신청한 우드 아카데미 1학년들이었다. 그록의 담담한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보통 강사의 수업은 서툰 부분이 많아서 그렇게 인기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강의실은 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우아- 멋져.”
서 우드 약초학과 1학년 포카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동기가 과하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기는.’
포카는 그 동기의 마음이 무엇인지 뻔히 보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구자가 꿈인 이들에게 그록 바서, 그 천재 연구자의 존재는 이상 그 자체일 것이다.
“이번에 첫 강의를 시작하게 된 그록 바서라고 합니다.”
오오오오오!
16살. 변성기를 막 지난 혹은 변성기 중인 남학생들의 들뜬 목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포카는 이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박사님이랑 친해지고 싶다.”
또 다시 들려오는 동기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포카는 옆에 앉은 동기를 바라봤다. 순수한 동경이 눈에 담겼다. 하지만 그는 알까? 천재와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연줄도, 유명한 가문도, 뭣도 없는 포카는 그 뭣도 없는 이들 중에서 천재였기에 성공할 수 있는 그록을 예외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인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예외.
“앞으로의 수업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담담하게,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강의 소개를 하는 그록을 포카는 가만히 바라봤다.
그록은 시계로 시선을 두었다.
‘그록! 절대로 첫날부터 수업하지 마라! 그러면 너 인기 없어져! 알았냐?’
맹렬하게 첫날은 수업하지 말라던 아스트의 의견을 그는 수렴하기로 했었다. 어차피 교재도 아직 준비되지 않아서 수업이 어렵기도 했고.
그는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맨 앞줄부터 1학년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2학년들도 몇 보였다. 수업을 향한 열정이 큰지 자신을 향한 반짝이는 눈빛들에 그록은 마음이 조금 흐뭇해졌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저 눈빛이 동경과 팬심이라는 것을.
‘보통 질문을 더 하겠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안 할 거야. 그러면 그때 수업을 마쳐.’
그록은 아스트의 조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다면 지금 편하게 질문하십시오. 질문이 없다면 수업을,”
“교수님!”
“저 질문 있습니다!”
“교수님, 질문할 것 있습니다!”
그록은 하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저도 질문 있습니다!”
“교수님!”
여기저기서 아주 맹렬한 눈빛을 뿜어내며 손을 들어댔다.
으음. 그록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이거, 공부에 대한 열의가 강한 친구들이군. 수업 강도를 높여도 되겠어.
그록은 수업 강도를 더 높이기로 마음먹었다. 학생들은 이때 고생길이 열렸음을 알지 못했다.
“이쪽 학생부터 질문을 받도록 하죠.”
포카는 처음으로 질문을 하게 된 동기를 바라봤다.
아. 쟤 유명한대.
“교, 교수님! 패, 팬입니다!”
그록 바라기로.
포카는 팬심으로 가득 차 볼이 발그레한 동기의 얼굴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 그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하다니! 그, 질문 하겠습니다, 교수님.”
그록은 첫 질문을 기다렸다.
“펴, 평소에 어디서 나오신 잉크를 쓰십니까? 실험용 장갑은요? 그리고 그, 궁금합니다.”
이런. 포카는 질문 내용에 눈을 감았다.
누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겠어.
“그렇군요. 학생에게 잉크와 실험용 장갑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제가 쓰는 잉크는 아카데미에서 내주는 비품이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실험용 장갑의 경우, 실험에 따라서 그 용도가 다 다릅니다. 연구자에게 안전은 생명이나 다름없고…….”
하지만 그록은 답했다.
매우 세세하게. 무려 5분 동안.
“무엇보다도 연구자에게 장갑을 갖추는 것은 ‘준비된’ 실험을 한다는 뜻입니다. 연구자의 자세는 본디-”
포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느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연구자의 자세와 그 가치관으로까지 나아갔다. 뭐지?
하지만 의문과 달리 그록의 대답은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지루하지도 않았고 요점이 굉장히 잘 전달되었다. 어느새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그 속에서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기에 장갑을 향한 의문, 멋진 질문이군요. 연구자로서의 열정을 높이 삽니다.”
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포카는 질문자를 바라봤다. 그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너도 그렇지? 너 그냥 팬이어서 같은 물건 따라 사려고 했던 거잖아?
포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록을 바라봤다.
뭔가 어떤 촉이 피어올랐다. 이 사람, 괴짜다!
“다음 질문하실 학생 있으십니까?”
담담하게 다음 질문을 기다리는 그록의 모습은 실로 평온했다. 포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무언가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포카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교탁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록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포카는 움찔했다.
그 모습에 그록은 자신 나름 편안한 미소를, 하지만 포카에게는 딱딱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질문 있습니까?”
아. 어-
포카는 그 미소와 담담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천재는 어떻게 연구를 합니까?”
포카는 순간 커지는 그록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툭. 옆에 앉아 있던 동기가 포카의 팔을 살짝 쳤다.
“야.”
하지만 동기는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미 포카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쳤다. 이거 너무 건방져 보이는 질문이잖아?
세상에. 포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천재라고 물어보다니!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물었다.
“저는.”
그 순간, 그록의 입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1학년. 이제 막 서 우드에 한 발을 담근 그들은 롤모델이나 다름없는, 하지만 천재이기에 닿긴 힘들다고 여기는 그록을 바라봤다.
“멍청한 편입니다만.”
어? 포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어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거 겸손이야? 워보트 병 치료제를 개발했으면서! 천재가 아니라니!
모두의 얼굴 위에 포카와 비슷한 감정이 담겼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변했다.
“천 번은 넘게 실험했습니다.”
그록은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천 번? 설마? 학생들의 얼굴 위로 서서히 경악이 드리워졌다.
“워보트 병 치료제인 그란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서요.”
포카와 그록의 시선이 마주했다. 그 순간 포카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힘들지 않습니까?”
천 번이라니. 거짓말.
하지만 거짓말이라기엔 그록의 눈은 진실해 보였다.
세상에. 아무리 중요한 연구라도, 어떻게 한 가지 실험을 그 정도로 할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해? 안 힘들어?
포카는 한 번 더 물었다.
“그렇게 연구를, 실험을 계속하면 힘들지 않습니까?”
그 순간 포카는, 강의실의 학생들은 처음으로 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는 그록의 얼굴을. 천천히 그록의 입이 열렸다.
“당연히 힘듭니다.”
천재라 불리는 이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왔다.
“힘들고. 내가 왜 이런 것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포카는 그록을 바라봤다. 차가운 인상의 얼굴과 달리 마주한 눈빛은 꽤 따뜻했다.
“하지만.”
그리고 단단했다.
“저는 연구자입니다.”
나는 연구자. 포카는 그 말을 저도 모르게 입안에서 되새겼다. 그록은 강의실을 모두를 향해 말했다.
“연구자는 연구를 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묘한 분위기가 강의실에 흘렀다. 이전과 조금 달라진 시선들이 그록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을 그록은 마주했다.
“연구자가 되려는 여러분들처럼 말입니다.”
포카는 되새겼다.
연구자는 연구를 하는 것. 그것뿐.
아주 간단했지만 아주 무거운 말이었다.
눈이 마주친 그록이 나직하게 물었다.
“질문에 답이 되었습니까?”
포카는 저도 모르게 순간 무언가가 마음속에 꽉 차올랐다.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록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아직 교수가 아니라 강사입니다.”
강사라고 말하는 무뚝뚝한 얼굴을 보며 포카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와, 씨. 나도 팬 된 것 같은데.’
천 번의 실험.
연구자는 연구를 하는 사람.
포카는 이날부터 진심으로 그록을 동경하게 되었고, 다짐했다.
나도 저리 노력해보자고.
그록의 짧은 첫 강의가 진행되는 강의실에는 포카와 비슷한 열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의 첫 강의는 꽤 성공적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그 시각, 그록은 또 다른 시작을 다른 두 곳에 각기 알렸다.
***
“어머나, 세상에.”
루린은 아들 그록에게서 온 편지를 보며 밝게 미소를 그렸다. 막 수선집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피곤하던 것도 다 잊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루린은 자신의 작업대를 바라봤다. 이미 집의 거실은 루린의 작업실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검은색의 천과 흰색의 천을 가만히 바라봤다. 묘한 열기가 그녀의 눈동자를 스쳐지나갔다.
톡. 톡.
그록이 보낸 편지를 살짝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그녀는 곧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선 걸음을 옮겼다. 늘 닫혀 있지만 예전처럼 외로워 보이지 않는 문.
똑똑똑.
“여보.”
루린은 문을 열었다.
그록의 아버지 레간의 실험실로 들어섰다. 단 향과 함께 프시아 뿌리의 독한 향이 한데 어우러져 실험실에 가득했다. 그녀는 실험을 하느라 바쁜 레간의 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여보. 그록이 블란 양이랑 함께 편지를 보냈어요. 한번 봐요.”
레간은 무뚝뚝하게 루린이 건네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을 크게 뜨는 이가 있었다.
***
쾅!
“헉!”
비서 펠은 갑자기 난 큰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레온의 의자가 보였다.
“이, 이!”
그리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떠는 레온도 보였다.
뭐지? 펠은 레온의 시선이 닿아 있는, 레온 손 위의 편지를 바라봤다.
저건, 그록 씨가 보낸 것인데. 또 무슨 일이 터진 것인가?
펠은 연신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편지를 쥔 채 이를 눈빛으로 뚫어버릴 듯 바라보는 레온을 보며 침을 삼켰다.
“이, 이! 무슨!”
레온은 크게 외쳤다.
“벌써 결혼이라니! 벌써!”
[장인어른. 이제 자리가 어느 정도 잡힌 것 같습니다. 블란 양과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블란을, 우리 사랑스러운 블란을!”
아.
펠은 결혼이라는 단어에 무슨 편지인지 바로 짐작이 갔다. 그는 씩씩대는 레온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혼을 하고 싶다는 편지입니까?”
“그래!”
천둥처럼 큰 목소리로 레온은 답했다. 그 목소리에 펠은 어깨를 살짝 움츠러트렸다. 그는 레온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 허락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음?”
언제 열을 냈냐는 듯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레온이 펠을 바라봤다.
“네?”
그 시선에 펠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는 어색하게 레온의 시선에 답했다.
“그, 화가 나신 것 같아 보이셔서요.”
“아. 뭐. 아버지 입장으로선 아직 블란을 보내기가 싫지만 둘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결혼하라고 해야지.”
그럼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셨습니까?
펠은 묻고 싶지만 속으로 삼켰다. 작게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다시 레온을 바라봤다.
흠칫. 그는 레온의 표정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살짝 떨렸다.
“후후.”
눈빛을 번뜩이며 레온은 웃고 있었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최고로 만들어주지.”
너희의 결혼을.
레온에게서 어떤 열정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펠은 알 수 없는 오한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
그 결혼식을 선사하리라, 블란의 아버지 레온 샤를은 굳세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록과 블란의 계획을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