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외전 2 : 한겨울의 결혼(2)
2.
블란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이를 옆에서 보고 있던 메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록 박사님 이제 계속 우드 시에 계시겠네요?”
“응?”
“그래서 언니 지금 신난 거 맞죠?”
블란은 부끄럽다는 듯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록이 아버지 레온이 후원하는 연구소에 가 있느라 일 년간 많이 볼 수가 없었다. 블란의 고향에 세워진 연구소인데도 그녀는 자주 가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 근데 언니도 올해만 지나면 이제 박사님이겠네요?”
남 우드 최초로 생긴 박사 과정. 그 과정을 블란이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논문이 통과해야 되는걸?”
“에이.”
메리는 블란의 말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메리와 블란. 우드 여학생들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고 둘도 마주 인사를 했다.
“지금 문학계에서 언니 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을 바보가 어디 있어요? 아무리 네디린 쪽이나 강경파에서 막는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훌륭한 논문은 통과시킬 수밖에 없을 거예요.”
메리는 점점 열을 올리며 말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여학생들은 그런 메리에게 어떤 부러움과 존경의 눈빛을, 그리고 그 옆의 블란에게는 더 큰 마음을 담아 바라봤다.
어쩌면 블란은 남 우드 출신 최초의 박사가 될지도 몰랐으니까.
남 우드 여학생들에게 블란은 누구도 깨지 못한 어떤 견고한 틀을 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진짜 멍청한 놈들이에요. 우리가 학회에 가면 매번 딴죽이나 걸고. 솔직히 언니 실력이면 훨씬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텐데. 하려는 일들마다 그 놈의 시비를 거는 인간들 때문에.”
“메리.”
블란은 감정이 격해지려는 메리를 나지막이 불렀다. 메리는 그런 블란의 얼굴을 마주봤다.
정말이지, 이 언니는 화도 안 날까?
남 우드에서 최초로 생긴 박사 과정은 마프렌 문학과 마프렌 역사. 딱 두 가지였다. 하지만 이 과정을 만들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했고 블란은 남 우드 교수들과 함께 앞장서서 이 과제를 해냈다.
“언니는 화도 안 나요?”
“화는 무슨.”
첫 기수인 블란은 다음 두 번째 기수로 들어온 메리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함이 가득했다.
“결국 이뤘잖아.”
하.
정말, 이 언니는.
메리는 결국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언뜻 소심하고 마음이 여려 보였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생각과 꿈에 있어선 확고한 사람이었다. 알면 알수록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메리는 블란을 존경했다.
“맞아요. 결국 다 이뤘고 이제 마지막만 남았죠.”
그래서 메리는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그것도 이뤄낼 거예요. 분명.”
“고마워.”
블란은 자신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이는 메리에게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그 순간 메리는 그 눈빛을 받으며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이제 박사님 만나러 가시는 거죠?”
“아, 그게 잠시 교수님 뵈러 갔다가, 어…….”
끄덕끄덕. 블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메리는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정말, 언니랑 박사님은 계속 보면 안 질려요? 매번 처음 보는 것마냥. 으, 닭살이야. 그래서 박사님은 강의 준비 잘 되신대요?”
블란은 메리의 물음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우드 시의 서쪽. 서 우드 아카데미를 바라보며 그녀는 답했다.
“응. 잘 하고 있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도 많이 바뀌었고 주위 환경도, 인간관계도 달라졌지만 그록도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늘 바뀌지 않고 같았다.
[저도 얼른 보고 싶습니다. 늘 있던 곳에 가 있겠습니다.]
그 사실이 블란이 힘겨울 때마다 버틸 수 있는, 그리고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럼 언니, 저는 연구실에 가 있을게요.”
“그래.”
블란은 메리와 헤어지고 교수님 연구실로 향했다. 여전히 교양 문학 교수님이었지만 이제는 박사과정을 지도하는 교수님이시기도 했다.
똑똑똑.
“교수님. 블란입니다.”
닫힌 문 너머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들어와요!”
블란은 밝은 목소리에 작게 미소를 그렸다. 교수님은 늘 열정적이고 활기찬 분이었다.
달칵. 블란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잠시 사라졌다.
“오! 맞네! 둘이 동기였죠? 서로 아는 사이려나?”
5년 만인가. 블란은 교수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 역시 블란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교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니양. 블란 작가 알죠?”
제니. 졸업을 한 후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녀를 블란은 5년 만에 봤다. 제니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사근사근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네……. 알아요.”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어딘가 낮았다. 제니는 눈앞의 블란을 바라봤다. 하. 저도 모르게 속으로 어떤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교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블란 작가.
꼴에. 제니의 입꼬리가 순간 뒤틀렸다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를 알지 못한 채 교수는 블란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이구, 아는 사이라니. 서로 오랜만에 인사를 하겠군요. 블란 박사, 아, 아니지. 이런.”
블란 박사. 순간 제니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여전히 담담하게 서 있는 블란을 바라봤다.
“……박사요?”
“아, 제니 양. 블란 작가는 아직 박사는 아니고 지금 마지막 논문 통과만 남겨두고 있어요.”
교수는 연신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블란을 보며 말했다.
“아마 남 우드 출신, 마프렌 왕국 출신 최초의 여박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
제니는 자신의 손에 들린 청첩장의 끝을 세게 잡았다. 말도 안 돼.
담담한 눈빛의 블란을 보며 그 속에 당당함이 담겨 있음을 눈치챈 제니의 눈빛이 더 표독스럽게 변해갔다.
그녀도 물론 알고 있었다. 블란. 저 돈혐지가 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박사 공부를 시작했음을. 분명 곳곳에서 반발을 많이 겪고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어느새 벌써 박사를 코앞에 뒀다니!
저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쥔 제니에게로 블란이 천천히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제니.”
제니는 교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기에 눈앞의 돈혐지를 향해 미소를 그렸다.
“그래. 오랜만이야.”
돈혐지. 뒷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그녀는 최대한 당당한 눈빛으로 블란을 바라봤다. 그러나 블란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교수님. 여기 자료 정리했습니다.”
“오, 벌써요? 고마워요. 바쁠 텐데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내년부터 강의할 거 미리 팁 주시려고 일부러 시키신 것 아닙니까.”
강의? 누가?
제니의 눈동자가 커졌다.
“후후. 알아챘나요? 알아주니 더 고맙군요. 블란 작가가 내년에는 강단에 설지도 모르는데 미리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부탁했지요.”
블란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가 제니의 눈에 담겼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요.”
교수는 블란을 보다가 제니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제니 양도 이제 가봐야 한다고 했죠?”
“네. 교수님.”
블란이 문을 두드리기 전 일어서려고 했던 제니였다. 교수는 테이블 위의 청첩장을 손에 들며 제니에게 말했다.
“청첩장 고마워요. 시간이 되면 꼭 가도록 할게요.”
청첩장. 화려하게 금박을 입힌 청첩장이 블란의 눈에 담겼다. 이를 힐끗 본 제니는 함박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제가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가장 존경했던, 그리고 지금도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와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단아하면서도 기쁨이 가득해 보이는 미소에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기쁘군요. 다시 한 번 축하해요.”
“네. 교수님.”
제니가 교수에게 인사를 했고 블란도 뒤이어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교수 연구실 문으로 향했고, 벌컥. 함께 밖으로 나왔다.
달칵. 제니는 조용히 문을 닫는 블란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블란은 그 시선에 제니를 바라봤다.
“나 결혼해.”
블란은 그 말에 제니를 가만히 바라봤다. 지독히도 자신을 괴롭히던 이였다.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마주하기 싫은 이였다. 하지만 블란은 축하의 인사는 전했다. 결혼. 미움을 떠나 축하받을 일이었다.
“축하해.”
짧은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는 블란에게 제니가 말을 걸었다.
“아주 유명한 집안이야. 혹시 알아? 베이 가문이라고, 행정부 조달청에서 아주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가문이지.”
블란은 걸음을 멈추고 제니를 바라봤다. 제니는 한껏 입꼬리를 올리며 블란을 내려다봤다.
“그 가문의 차남과 결혼하게 됐어. 앞날이 창창한 남자고, 돈도 능력도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지. 다들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부러워하더라.”
어때. 넌 이런 조건의 남자 만날 수 있니?
제니는 아무 말 없는 블란의 모습에 비로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넌 이런 결혼은 할 수 없어. 네 꼴로는 가당치도 않지. 거기다가 조신하지 못하게 여러 일이나 벌이고 말이야. 좋은 집안에서 너 같은 애를 원할 리 있겠니?
그녀는 블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절로 조소가 나왔지만 이를 꾹 참은 채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죽을병이 다 나았다고 하더니, 그 덕에 살이 꽤 빠지긴 했구나.”
언뜻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런데.”
블란을 한 번 더 훑어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니? 살을 빼도 뭐, 이쁜 얼굴은 아니구. 원래 뚱뚱한 사람들은 살 빠지면 더 이뻐진다던데 넌,”
예전보다는 살이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조금 통통한 체형이었고 작은 실눈에, 예쁘지 않은 이목구비가 보였다.
“그대로구나. 어떡하니? 기대 많이 했을 텐데.”
평범보다 못한 얼굴이었다. 화려하게 꾸민 자신과 비교하면 더욱더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제니의 입가에 절로 비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그녀가 하나 못 본 것이 있었다.
“제니.”
자신을 부르는 담담한 목소리에 제니는 그제야 블란을 똑바로 쳐다봤고 자신을 향한 올곧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뭐야. 그 눈빛에 제니는 순간 움찔했고, 그 사실이 분해서 더욱더 매서운 눈빛으로 블란을 쳐다봤다. 그런 제니를 향해 블란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가 좋아.”
제니의 올라가 있던 한쪽 입꼬리가 뒤틀렸다. 블란은 그런 제니를 바라봤다.
자신의 외양을 보며 비꼬는 제니가 블란은 이제 조금 불쌍했다. 블란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가시를 세우는 제니에게 짧은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축하해. 잘 살아.”
진심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기를 바랐다.
담담하게 말을 전한 채 블란은 제니에게서 멀어졌다.
“하. 뭐야.”
뭐야, 지 주제에. 남겨진 제니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왠지 모를, 어떤 패배감이 짙게 느껴졌다.
“오! 블란 작가님! 안녕하세요?”
“작가님! 내년에 박사 따시면 바로 강의하실 거죠?”
제니는 복도를 거니는 블란에게로 다가가는 남 우드 여학생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니 앞을 스쳐지나가는 여학생 두 명이 블란을 보며 대화했다.
“나도 박사 과정 밟고 싶은데. 거기는 교양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전공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래봤자 아직 마프렌 문학이랑 역사뿐인걸?”
“그래도 차차 늘겠지. 아직 우리 졸업하려면 이 년 남았잖아.”
“그렇긴 하지.”
제니는 그 두 여학생을 바라봤다.
“나도 작가님처럼 되고 싶다.”
“야, 선배한테 들었는데 진짜 힘들다더라. 온갖 곳에서 견제한대.”
“그래도-”
한 여학생은 눈을 반짝이며 블란을 바라봤다. 그 여학생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제니의 눈에 담겼다.
“그래도, 멋지잖아.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게.”
제니는 여학생의 눈동자를 보던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블란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가 날 만큼 꽉 쥔 주먹과 달리 제니의 눈동자는 어딘가 힘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걸음을 옮기는 블란의 눈동자엔 점점 설렘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춘 채 남 우드 도서관 앞 벤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늘 그래왔듯이.
“오셨습니까?”
그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록은 조금씩 걸음이 빨라지는 블란의 곁으로 다가갔다. 조금 빨리 뛰듯이 걸어왔기 때문인지 그녀의 이마 위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록은 손을 들어 이를 닦아주었다. 블란은 그 손길에 작게 미소를 그렸다. 무뚝뚝하지만 여전히 다정했다.
“블란 양.”
그 순간 블란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록이 갑자기 블란의 두 손을 잡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많은 이들이 도서관 앞을 지나가며 그 모습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이미 두 사람은 우드 시 안에서 엄청나게 유명했다.
“블란 양.”
다시 한 번 그록이 블란을 불렀다. 그녀는 작은 실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록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록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결혼합시다.”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지나가던 이들이 얼굴에 놀람을 담은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블란은 갑작스러운 말에 멍하니 서 있다가 되물었다.
“……네?”
그녀의 눈동자에 진지한 그록의 모습이 담겼다.
이날, 동서남 우드 아카데미 세 곳에서는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이 드디어 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날개 돋친 듯 순식간에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