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외전 2 : 한겨울의 결혼(1)
1.
약초학과 행정실을 방문했던 그록은 문을 열자 보이는 이의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너도 강의 개설 때문에 온 건가?”
체프였다. 올해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보다 한 해 더 먼저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어. 너도?”
그 담담한 시선에 체프는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권력을 가진 재크 교수를 버리고 힘도 없는 그레이 교수 밑으로 간 그록. 그리고 재크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보낸 자신.
“그렇지.”
체프는 숨길 수 없는 질투를 눈동자에 담은 채 말했다.
“천재라고 그렇게 떠받들더니, 어째 위치는 나랑 같네. 너도 천상 강사 자리부터 시작해야 하나 봐?”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교수가 되려는 이들은 강사 기간을 거쳐야 했다. 강사 기간 동안 아카데미 측에서는 1학년 수업을 한 학기에 하나씩 그들에게 배정했고 이를 훌륭히 수료한 자들에 한해서 교수가 될 자격이 주었다.
체프는 그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이상하네. 천재한테 왜 교수 자리를 바로 안 주는 걸까? 응?”
그록은 체프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레이 교수 밑으로 간 후, 워보트 병 치료제를 개발해낸 자신에게 많은 이들이 질투와 시기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체프만큼 질긴 이도 없었고 재크 교수만큼 음습한 이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록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내가 그러고 싶다고 했다.”
“……뭐?”
되묻는 체프를 향해 그록은 다시 걸음을 내딛으며 입을 열었다.
“하나씩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싶어서 내가 아카데미 측 제의를 거절했다.”
체프의 주먹이 터질것처럼 꽉 쥐어졌다. 그록은 그런 주먹을 힐끗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남기곤 행정실을 나왔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잘 부탁한다.”
체프와 멀어지는 그의 귓가로 작은 욕설이 들려왔다.
“후우.”
그록은 귀찮음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행정실을 나와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일 년 만이구만. 정말 보고 싶었네!’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연신 미소를 짓던 그레이 교수가 떠올랐다.
1년 만에 방문한 서 우드 아카데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록은 1년 동안 희귀병 전문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레온이 후원하는 곳이었다.
“흐음.”
그는 행정실이 있는 건물 홀에 모인 약초학과 학생들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금 홀에는 올 2학기에 개설할 강의들이 적힌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록은 천천히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올 2학기에 새로이 개설될 강의 제목들을 훑어보던 서 우드 약초학과 1학년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오! 대박! 진짜 대박!”
옆에 있던 또 다른 1학년은 그 남학생의 반응을 힐끗 보고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봤다.
“헐. 대박.”
그러고는 똑같은 감탄을 흘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2학기에 새로이 개설될 강의 중 하나에 닿아 있었다.
[기초희귀약초해설학]
과목의 이름은 약초학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어야 하는 그 과목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강사’ 표시가 있었기에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해야 정상이었다.
강사. 서 우드 아카데미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이들은 교수가 되기 위해 일종의 시험을 치르듯 몇 개의 강의를 진행해야 했다. 처음 강의를 맡는 강사들은 교수들에 비하면 턱없이 실력이 부족하고 서툰 점이 많아서 학생들이 기피했다. 하지만 지금 벽보 앞 학생들이 반응은 달랐다.
“와……. 꼭 들어야겠다. 무조건.”
“나도. 내 우상이!”
[기초희귀약초해설학] 강의 제목을 보는 1학년들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강사의 이름에 닿아 있었다.
[그록 바서]
서 우드 약초학과 최고의, 아니 마프렌 왕국 약초학계 최고의 천재가 드디어 강의를 시작했다.
이는 교수가 되기 위해 그가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 그록 박사님처럼 되는 게 꿈이었다고. 그래서 내가 네디린도 안 가고 우드에 왔다고!”
“나도! 이야, 세상에! 작년에 박사 수료하시고 바로 강의 시작하시는 줄 알았더니 안 보이기에 아예 떠나셨나 싶어서 얼마나 슬펐는데! 드디어!”
어떤 기묘한 열기가 1학년들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그들은 눈빛을 번뜩이며 그록 바서, 그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으음.”
그록은 그 기묘할 정도로 열광적인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다가가려다가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면 이번에 얼굴도 볼 수 있겠네! 잘생기셨다는데!”
“정말?”
“어! 차가운 분위기의 미남이시라는데?”
이런.
그록은 한 걸음 더 뒷걸음질을 했다. 그 순간, 그록은 한 3학년과 눈이 마주쳤다.
“아.”
그록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의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3학년은 그레이 교수님 밑에서 배우는 제자로 그록과 안면이 있는 이였다.
“어?”
3학년 학생은 얼굴에 반가움을 담은 채 홀의 한가운데에서 그록을 향해 외쳤다.
“그록 박사님!”
순간 홀에는 작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홱! 벽보 앞에 올망졸망 붙어 있던 1학년들의 고개가 급속도로 돌아갔다.
아.
그록은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차가운 분위기의 미남……!”
그록은,
홱!
몸을 뒤로 돌렸고 빠르게 홀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록을 처음 본 1학년들 중 몇몇이 눈을 빛내며 크게 외쳤다.
“박사님! 사인 한 장만 해주세요!”
“박사니이임!”
16살. 변성기를 막 지난 남학생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그록은 담담한 얼굴로 흘려 넘기며 빠르게, 아주 빠르게 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록이 다시 아카데미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역시 여전히 차가운 분이지만, 멋있으셨어!’
작은 평과 함께 서 우드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워보트 병 1차 치료제를 개발한 지 5년. 쉴단과 프시아의 진정한 효용을 발견해내어 학계를 발칵 뒤집었던 그는 워보트 병 치료제, 일명 그란 치료제를 상용화하는 것에 성공했다.
“역시 멋있어.”
홀에 남은 1학년은 그록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하나의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것만도 일생의 업적이었다. 하지만 그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현재 수많은 희귀병 치료를 위한 약재 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진짜 대단하시다! 그렇지 않아?”
“그러니까! 박사도 최단기에 수료하시고! 진짜 저런 분이 우리 곁에 있,”
“야. 조용히 해.”
신이 나서 말하던 1학년은 곧 옆구리를 치는 남자 때문에 입을 닫아야 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뭐냐고 따지려다가 그 남자가 맨 넥타이가 3학년 색임을 알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뭣들 하길래, 다들 이렇게 시끄러워?”
재크 교수의 커다란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그는 씩씩거리며 학생들에게 눈총을 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개설 강의가 적힌 벽보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들 봤으면 빨리 빨리 강의 신청이나 할 것이지!”
빠르게 홀을 벗어나며 그가 외치는 목소리에 1학년들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러트렸다. 아까 신나게 그록에 대해서 말하던 1학년도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재크 교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자신의 옆구리를 툭 찔렀던 3학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그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참 꼬시다.”
그 모습에 1학년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재크 교수님께서 저렇게 화를 내는 건 꼬신 일이긴 한데. 그런데 왜 그러세요?”
“너 모르냐?”
“예?”
크흠. 3학년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의 학생들이 힐끗힐끗 자신을 바라보며 얼른 설명을 요구했다. 특히 사정을 잘 모르는 1학년들이 유독 심했다. 그는 어깨를 은근슬쩍 쫙 펴며 입을 열었다.
“원래 그록 박사님이 재크 교수님 제자였거든.”
“뭐라구요오?”
“뭐어? 왜요?”
1학년들이 저도 모르게 놀람을 표했다.
세상에. 저 쪼잔한 밴댕이 소갈딱지 재크 교수 밑에 우리 그록 박사님이 계셨다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
은근슬쩍 3학년이 1학년에게 물었고 1학년은 저도 모르게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재크 교수님이 그록 박사님을 못 알아봤었어.”
“……예?”
“그 천재성을 못 알아본 거지.”
세상에. 바보 아냐?
1학년은 황당한 표정을 얼굴 위에 그렸다.
그록 바서. 그가 누군가?
마프렌 왕국과 하리안 제국에서 5년 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희귀병 치료의 선구주자였으며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천재이자 최고로 여겨지는 이였다.
1학년 남학생에게는 동시대에 살 수 있음이 감동스러운 이가 바로 그록 바서였다. 그런데 그런 이를 못 알아봤다고? 바보 아냐?
“큽!”
1학년의 얼굴 위에 나타난 의미를 파악한 3학년은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여하튼 그록 박사님은 그레이 교수님 덕분에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그레이 교수님 밑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하셨지.”
3학년의 말에 1학년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렇군요.”
그 중에 한 명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주위가 아주 조용해져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다행이네요. 그레이 교수님 밑으로 가셨다니, 정말로.”
“뭐가?”
음? 그는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저도 모르게 굳었다. 그러고는 마치 녹슨 나사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헉! 1학년은 숨을 집어삼켰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그레이 교수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1학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1학년은 울상이 된 채 그레이 교수를 바라봤다.
툭. 툭.
“홀에서 이렇게 떠들면 안 되지. 얼른 들어가 보게. 강의 신청해야 할 테니.”
하지만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는 손길과 다정한 목소리에 1학년은 눈을 빛내며 답했다.
“네! 교수님!”
“그래.”
그레이 교수는 빠르게 각자의 강의실로 향하는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는 힐끗 벽보를 바라봤다.
[그록 바서]
자랑스러운 제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레이 교수의 입꼬리가 위로 쓰윽 올라갔다.
“크흐! 중년의 멋짐! 멋있어.”
“재크 교수랑은 달라. 역시 그레이 교수님. 부드러운 카리스마!”
1학년들은 홀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레이 교수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봤다.
5년 전을 시작으로 급격하게 떠오른 학문이 희귀약초 관련 분야였다. 이 분야에 있어서 천재라 불리는 그록 바서는 늘 말했었다.
‘최고는 그레이 교수님이십니다.’
교수는 연구자가 아니며 최고가 될 수 없다. 이를 부수는 말을 한 그록은 교수를 향한 행보를 보였고 덩달아 그레이 교수에 대한 인기는 높아져 갔다. 그리고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그레이 교수의 논문들이 주목받기 시작하자, 그가 정말로 희귀약초 분야의 권위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그레이 교수 강의는 언제나 경쟁률이 셌고 인기 만점이었다.
똑똑똑.
그레이 교수는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십시오.”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미소를 그리며 문을 벌컥 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아주 자네 이야기로 약초학과가 떠들썩하더구만?”
그록은 멋쩍게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레이는 성공한 연구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런 관심을 어려워하는 자신의 제자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강의 준비는 다 되어가는가?”
“네. 첫 수업은 우선 다 했습니다.”
“오, 그래? 그러면 이제 조금 널널하겠구만.”
“으음.”
음?
그레이 교수는 묘하게 인상을 찡그리는 그록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일이 있는 겐가?”
“……네. 있습니다.”
그록은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록이 이렇게 고민할 일이라면.
어려워하는 일이라면-
아.
바로 답이 나왔다.
“블란 양과 관련된 일인가 보구만.”
움찔. 그레이는 움찔하는 그록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어째 만난 지 벌써 8년이 다 되어감에도 여전히 풋풋하고 서툰 둘이었다. 그게 보기 좋았지만.
“쯧쯧. 원래 연애는 어려운 법이지.”
툭툭.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레이 교수는 그록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내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답하는 그록은 진지했다. 그레이 교수는 웃음을 꾹 참으며 그록의 연구실을 벗어났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지? 고민할 게 있나?”
그는 힐끗 뒤돌아 닫힌 그록의 연구실을 바라봤다. 그 순간 연구실에 홀로 남은 그록은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책상 위를 바라봤다.
[그록 씨. 얼른 보고 싶어요.]
블란의 편지였다.
곧 블란을 만나러 갈 그록이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편지를 바라보다가 달력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때가 됐어.”
이제 때가 됐다.
결혼을 할 때가.
그록의 눈빛이 어떤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