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7)
7.
블란은 달력을 바라봤다. 아직 50일이 넘게 남았다.
“괜찮습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블란은 시선을 돌렸다. 카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아직 잘 보였고 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도 잘 보였다.
정말이지, 너무 못나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카만의 눈동자는 많이 늙어 있었다. 나 때문일까.
“그록, 부를까요?”
“아니요.”
나직이 묻는 말에 블란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힘에 겨워서 제대로 고개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나 연구를 열심히 하는지 요즘 연구실에 불이 꺼질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블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걱정되었다. 그렇게까지 하다가 몸이 축나면 안 될 텐데.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자신이 그록에게 바라는 것인데. 하지만 이를 길게 말할 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 사람, 끼니 좀 제대로 부탁해요.”
“네, 알겠습니다.”
카만이 애써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만 의원이라면 믿고 맡겨도 될 것이다. 블란은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만은 이를 보며 속이 썩어 들어갔다. 어찌, 부부라는 사람들이 이다지도 닮은 것일까. 카만은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카만이 나갔고 간호를 하는 여인이 들어왔다. 고용인이 손을 주물러주었다. 블란은 이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까.
기다리는 것을 잘하던 자신인데, 점점 힘들어졌다.
기다리기가 버거워졌다.
째깍째깍째깍.
시간이,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느껴졌다. 블란은 하루하루가 흐를수록 마치 습관처럼 카만에게 물었다.
“얼마 남았나요?”
“이제 40일 남았습니다.”
그리고 블란은 점점 말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오늘이-”
“20일 남았습니다.”
답하는 카만의 얼굴이 형편없어져갔다.
20일. 15일. 점점 기다림의 끝이 다가왔다. 블란은 조금 더 힘을 내었다. 그녀는 이제 말하지 않은 채 힘을 주어 카만을 바라봤다.
“……9일 남았습니다.”
카만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란은 천장을 바라봤다. 숨이 조금씩 버거워졌다. 그록을 불러야 할까. 블란은 조금씩 예감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얼마가 어느 정도의 시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앞으로 9일만 더 기다리면 된다.
기다리고 있으면 그록은 약속한 날짜에 꼭 자신에게 왔다. 조금 늦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꼭 그날 왔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했다.
블란은 오늘도 시선에 힘을 주어 카만을 바라봤다.
“아가씨.”
그런데 힘을 주어도 자꾸만 눈이 감겨 왔다. 카만의 모습이 흐릿해져왔다.
“이제, 7일만 남았……. 오, 아가씨! 이런!”
블란은 눈이 감겨왔다.
아.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구나.
블란은 조금의 시간이라도 남겨달라고 감기는 눈에 힘을 주며 끊임없이 외쳤다. 그리고 세상은 어두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블란은 수많은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 처음으로 시를 읽고 울었던 기억. 처음으로 시를 적었던 때. 아카데미에 가서 힘들었던 순간. 그록, 그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날.
그리고 그와의 결혼식, 그 후 10년의 시간. 수많은 장면들이 그림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환한 빛이 보였다.
블란은 그 빛을 따라 눈을 떴다. 처음에는 세상이 흐릿하다가 점차 조금씩 눈앞이 또렷해졌다. 그러자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버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숨만 흘러나왔다.
“아비다. 여기 아비가 왔어!”
절규하는 아버지가 보였다. 한껏 충혈된 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버지. 블란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불렀다. 그 마음속 소리에 답하기라도 하듯 아버지가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언제나 느껴왔던 따뜻하고 든든한 손길이었다. 블란은 아버지를 눈에 담았다. 그녀는 느꼈다. 자신에게 마지막 시간이 주어졌구나. 이 시간을 울면서, 흐린 눈동자로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눈에 온 힘을 다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록이 보였다.
오, 그록.
블란은 눈에 담기는 그록의 모습에 울고만 싶었다.
왜 이리 볼썽사나운 모습이 된 것일까. 아버지보다 더 충혈된 눈동자와 말라비틀어진 얼굴, 그리고 어두운 낯빛이 보였다. 잘생겼던 사람이, 왜 이리 되었을까.
자신의 손을 잡는 그록의 손이 느껴졌다. 이 손을 처음 잡아주던 순간이 생각났다. 얼마나 설렜던지. 그리고 지금도 설렜다.
아.
이 사람을 어찌 두고 가지?
아버지도, 그록 씨도. 어떡하지?
블란은 그를 바라봤다.
‘식사는 안 하셨어요?’
‘왜 밥을 안 먹었어요.’
‘얼굴이 그게 뭐예요. 아프지 말아요.’
블란은 닿을 길 없는, 소리 없는 말들을 그록에게 끊임없이 건넸다.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연구를 포기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이 성공할 것이라 믿어요.’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당신을 최고의 연구자라 생각해요.’
깜박깜박.
서서히 눈이 감겨왔다.
블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갈길 없이 헤매는 눈동자가 보였다. 이런 그록의 눈빛은 처음 보았다.
‘기다려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이라면 해낼 거예요.’
깜박.
깜박.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눈이 자꾸만 감겨왔다. 아, 살고 싶다.
정말로 더 살고 싶다.
블란은 체념하면서도 이 순간 살고 싶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의 눈동자가 자신만을 온전히 담고 있었다.
“블란, 블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란은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뜨이지가 않았다. 자꾸만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보이고, 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무엇이 무엇인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 순간, 블란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눈을 떠! 더 듣고 싶어!’
귀가 아닌 어딘가로 소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록, 그의 목소리였다.
“블란, 오! 내 딸! 눈을 뜨거라! 어서! 블란! 내 목소리 들리니? 응? 블란!”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자신의 손을 꾹 잡는 그록의 손이 느껴졌다. 블란은 눈을 떴다. 마지막 힘을 내었다. 그러자, 아버지와 그록이 보였다. 블란은 자신의 얼굴을 연신 만지며 울부짖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사랑해요. 아버지.’
블란은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록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그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내뱉었다.
‘사랑해요. 그록.’
진작에 할 것을.
마음속의 이 말은 그록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블란은 그록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은 자신에게 그 어떤 것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몸에 힘이 빠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떠한 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블란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늘 그래왔듯이 블란은 기다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기다림의 시간보다 블란의 시간이 먼저 끝나버렸다.
***
그리고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록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의 손에 원래 들려 있던 것.
[해보고 싶었던 일.]
그 종이 쪽지였다.
그록은 이 종이 한 장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왔다.
아직 그가 처음으로 블란을 보기 그 전으로. 그때로 그는 돌아왔다. 수업을 마친 후 그는 매튜와 함께 남 우드로 향했다. 그의 시야에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블란의 움츠러든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쉴단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충동적으로 세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블란은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다가 갑자기 옆에서 함께 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힐끔 바라봤다. 서 우드의 흰 코트가 언뜻 보였다. 왠지 그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혹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을 향한 구겨진 표정이 보일까 싶어 차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
그런데 그 남자가 한 걸음 더 자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지? 무슨 일이지? 블란은 더욱더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힐끗 옆을 바라봤다. 나란히 걷는 남자의 걸음이 보였다.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블란의 걸음에 맞춰 걷고 있었다.
이상해.
블란은 일부러 멀어지려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남자도 천천히 걸었다. 이번에 빨리 걸었다. 그러자 남자도 빨리 걸었다.
뭐지, 블란은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그 남자와 남 우드 도서관 앞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녀는 도서관 앞에 도착하자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옆을 바라봤다. 그러자 서 우드 교복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블란은 묘하게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그 남자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블란은 얼른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다.
늘 똑같았던 블란의 일상에 생긴 작은 특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특별한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케인 시인도 약한 사람이었다.]
블란은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약함을 드러내었기에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약함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다.]
그녀가 존경하는 케인 시인에 대한 평이 담긴 책이었다. 한창 책에 빠져들 그 순간.
“저기.”
블란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또다. 또 흰 코트였다. 며칠 전에 보았던 흰 코트가 순간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무뚝뚝한 시선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남자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블란은 멈칫했다. 하지만 남자는 한 걸음 더 블란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받으십시오.”
블란은 당황스러웠다.
남자의 손 위에는 고운 하늘색의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 그. 그러니까. 가, 갑자기 무슨. 그, 누구시길래. 왜 이러시는지.”
당황한 블란은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 더듬거리는 말투에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은 채 고민하는 듯 블란을 바라보더니 곧 움직였다.
아.
블란은 너무 놀라서 굳었다.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그런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남자는 편지를 올려두었다.
“편지입니다.”
블란은 멍하니 이를 바라봤다. 남자는 블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럼 오늘은 가보겠습니다.”
블란은 당황한 얼굴로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서서히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려 편지 봉투를 들여다봤다. 묘한 기분으로 블란은 동글동글한 모양새의 편지봉투를 뜯자 안에는 하얀 편지지가 나왔다. 그녀는 편지지를 펼쳤다.
흰 종이엔 세 줄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서 우드 약초학과 2학년 그록 바서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록 바서. 블란은 그제야 이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블란과 그록의 새로운 첫 만남이 시작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