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6)
6.
끝이 다가온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서서히 알 것 같았다.
블란은 하루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앉아서 그와 마주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워보트 병 환자에 비해서 오래 살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체념하자고 세뇌를 해왔지만 그럼에도 미련이라는 것이 자꾸만 생겨났다. 아직 완전한 끝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미안해요.”
블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을 향해 말했다.
실험 중에 유일하게 쉬는 시간일 텐데, 그런 시간에 이런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해요.
블란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흉한 모습인지 알고 있었다. 돈혐지. 돈 많고 혐오스러운 돼지라고 불릴 때보다 지금이 더 흉측했다. 자신의 손을 잡는 그록이 보였다. 통통하던 자신의 손은 이제 말라서 힘 하나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다시 그록을 바라봤다. 무뚝뚝한 얼굴이 보였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마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미안해요, 그록.”
미안했다.
모든 것이.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록의 답에 블란은 울컥 올라오는 것을 꾹 누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이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요. 뭐가 미안한지 저도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다.
미안하긴 다 미안한데 정확히 무엇이 미안한지, 꼬집어 말할 것이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한지.
함께 차를 마셔주지 못하고 누워 있어서 미안한지.
혹은, 이 연구밖에 모르는 바보 같은 남자를 혼자 남겨두어야 해서 미안한지.
이 남자는 자신이 떠난다고 해서 아쉬울 것이 없을 텐데.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연구를 할 텐데. 그럼에도 블란은 계속 미안해졌다.
분명 이런 순간이 오리라 그녀는 예상했고 그에 대한 마음의 정리도 끊임없이 해왔었다.
오래 살아봤자 20대가 끝인 워보트 병. 그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 남자와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함께 살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이 남자의 꿈과 바람을 들어주리라 다짐했다.
“제가 없어도, 아버지가 계속 후원해주시기로 했어요.”
블란은 얼마 전 저택에 방문했던 아버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사람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원하는 만큼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너, 정말. 그렇게까지 연구를 위해 네 옆에 붙어 있는 그놈이 좋으냐?’
아버지의 눈빛에 담긴 마음을 블란은 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 홀로 아픈 자신을 이만큼이나 키워주셨다. 블란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아카데미조차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버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죄송했다. 반대하는 남자와 만나 결혼을 하고 그 남자의 미래를 부탁한다는 게 아버지에게 어떤 느낌일지 블란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 슬픔은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블란은 희미하게 웃으며 아버지 레온에게 말했었다.
‘저는 정말로 어릴 때 제가 생각했던 제 미래보다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 말에 레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그녀에게 답해주었다.
‘네 부탁 들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때 블란은 덧붙였다.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아버지에게 그녀는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다.
‘모든 건 아버지가 곁에 계셔서 가능했어요.’
‘블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얼굴을 딸인 자신은 누워서 올려다봤어야 했다. 그렇기에 더 그 주름이 눈에 잘 담겼다. 어쩌면 좋을까.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을 볼 때면 블란은 떠나기가 싫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아버지의 입술 끝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정말, 다른 것들은 남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지만 아버지만큼은 제가 세상에서 최고의 아버지를 두었다고, 그래서 행복한 딸이라고 생각해요.’
‘블란.’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버지를 안아주었었다. 진심으로, 자신은 아버지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멋진 분을 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꽤 멋진 연구자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블란은 그록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저택도 그대로 두기로 했구요.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당신은 그대로 연구하면서 살 수 있을 거예요.”
꼭 그렇게 해줄 것이다.
“그렇군.”
무뚝뚝하게 답하는 모습에 블란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는 지금 약초학계에서 외면을 당함에도 티를 내지 않았고 어디 교류를 나눌 연구자 하나 없음에도, 믿고 의지할 가족 하나 없음에도 그저 이렇게 무뚝뚝하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이 연구자의,
“제가 당신의 유일한 후원자잖아요.”
유일한 후원자다.
“당연한 소릴.”
다시 한 번 무뚝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블란은 기분이 좋아졌다. 유일한 후원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블란은 자신도 모르게 드는 생각에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갔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네. 연구하셔야죠.”
“그럼.”
그록은 늘 그래왔듯이 차를 다 마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입안에서 말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지금 안 가면 안 되나요?
말이 맴돌았지만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록은 연구를 위해 자신의 곁에 왔다. 그런 이의 연구를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와 딱히 오랫동안 나눌 이야기도 없었고. 함께 할 것도 없었다.
달칵. 문이 닫혔다.
블란은 닫힌 문을 바라봤다. 저 문은 다시 또 언제쯤 열리게 될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차올랐다. 요즘 들어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힘들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조용한 방. 블란은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록이 있을 때 일어나고 싶어도 힘들어서 안 되더니, 혼자가 되니 움직일 힘이 났다. 그것 역시 우습다 느끼는 블란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 옆 협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꺼냈다. 이제 그녀가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펜을 쥐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일뿐이었다.
처음에는 유언장을 미리 적어둘까 싶었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미 자신의 사후에 남을 그록과 아버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두었기에 따로 유언장까지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아니지.”
유언장. 그 이름이 싫어서, 무서워서 적지 못했다.
대신에 블란은 일기장을 채웠다. 혹여나, 혹여나-
그가 보지 않을까.
얄궂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블란은 이 작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블란은 오늘도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적었다.
“몇 장 안 남았네.”
띄엄띄엄 적었는데도 어느새 일기장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얼마 남지 않은 하얀 종이들을 보며 블란은 묘한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블란의 건강은 더욱더 나빠져만 갔다.
블란은 오랜만에 그록과 마주 앉았다. 어느새 그와 결혼을 한 지도 9년째가 되었다.
비록 그록은 의자에 앉아있고 자신은 일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시선이 마주한 것에 블란은 기분이 조금 좋았다. 하지만 이내 그 기분은 속상함으로 바뀌었다.
“자꾸 식사를 제대로 안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게 점점 더 심해진다고 들었는데.”
그록의 얼굴이 형편없었다. 눈 밑은 검었고 얼굴에 살이 많이 빠져 홀쭉했다. 도대체 얼마나 연구에 몰두하기에 이렇게 건강이 상하는 것인가. 자신이 아프기에 블란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소중한 이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걱정을 담아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그록의 답은 담담했다.
“연구의 성과가 보이오.”
연구.
또 연구였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연구보다 당신의 건강이 먼저인데, 그걸 왜 모를까.
블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 한마디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자신이 없으면 이제 누가 그를 챙길 건가. 하지만 이어진 말에 블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나를 후원하기로 했던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을 거요. 그러니 지금은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연구에 매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내가 곧 결과를 가져다주리다.”
정말이지.
블란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녀는 요동치는 마음을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블란은 한참 동안 그록을 바라봤다. 무뚝뚝한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다. 그리고 그 안의 절박함이 보였다.
무슨 절박함일까? 나에게 결과를 보이고픈, 그 절박함일까?
아니면 다른 것이 있는 것일까?
블란은 울컥 차오르는 것을 꾹 누르며 애써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정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그렇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오.”
그 말에 블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다리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잘하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블란의 눈에 앙상하게 마른 자신의 손이 보였다. 잘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럼 이만 가겠소.”
“그, 연구를 하러 가, 가야 하나요?”
하지만, 시간이 자신을 기다려줄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블란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그록을 바라봤다. 한 번쯤은 자신의 눈빛을 알아채주지 않을까.
“당연하지 않겠소.”
“……그렇군요.”
블란은 처음으로 그록이 야속했다. 이런 그의 모습에 그를 만났지만, 이렇게 한 가지만 바라보는 남자가 조금은 미워졌다. 블란은 오늘도 닫히는 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일기장을 펼쳤다. 이제 딱 한 장이 남았다. 블란은 그 한 장을 채워나갔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그래서 함께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함께하지 않은 것 같아 너무나도 슬프다.]
한 번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자신을 바라보지 않더라도 곁에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기쁘진 않았다.
블란은 잠시 펜을 멈춘 채 한참 동안 일기장을 바라봤다. 이제 딱 한 줄 적을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그런 작은 기대를 그 사람과 함께 할 때면 난 늘 가지게 된다.]
블란은 그 마지막 한 줄을 채웠다.
지금도 기다리며 기대한다.
혹시, 어쩌면.
그도 알아주지 않을까.
혹시, 그도-
같지 않을까.
그리고 이 일기를 끝으로 블란은 더 이상 일기를 적지 못하게 되었다.
***
“블란.”
블란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이는 그록이 눈에 담겼다. 이제 그녀는 몸에 힘이 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그록의 눈동자 속에 비쳤다. 블란은 이어질 그록의 말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것은 늘 잘하는 자신이었다.
“연구의 결과가 얼마 남지 않았소. 마지막 문턱만 넘으면, 제대로 된 마지막 가공 방법만 찾으면 아주 길이 남을 약이 탄생할 것 같소. 그래서 그런데, 괜찮다면 당분간 이 시간을 잠시 뒤로 미루어도 되겠소?”
블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 시간. 그와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늘 그와 함께 마셨던 알트 차가 지금도 입안에 맴도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 맛을 기억할 수 없지만 그때의 추억과 그가 잊히지 않았다.
블란은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천장에 흐릿하게 그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약초 이야기를 하며 순수하게 기뻐하던 학창시절 그록이 보였다. 블란은 다시 그록을 바라봤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이 사람은.
“그럼요. 되죠.”
블란은 살짝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기다릴 수 있어요.”
“고맙소.”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는 그록을 바라봤다.
늘 마시던 알트 차를 오늘 그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정말로 급해 보였다.
그렇게, 그렇게 성과를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저 옆에만, 옆에만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블란은 이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 가겠소.”
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그는 또 방을 나갈 것이고 자신은 혼자 남겨질 것이다. 블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늘 그래왔듯이.
음?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문을 열고 나가리라 여겼던 그는 걸음을 멈춘 채 다시 자신을 바라봤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결과를 가져다주겠소.”
어정쩡한 자세로. 평소와 다른, 무뚝뚝하지 않은,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그록은 말하고 있었다.
“그, 연구자로서 내 유일한 후원자에게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미안하다는 말. 처음 들어보았다. 블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니다. 그가 미안할 것은 없었다. 모두 자신이 알고 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곧 보여주겠소.”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이었다.
“두 달 뒤, 결혼기념일 10주년이라고 알고 있소.”
블란은 이어진 그록의 말에 눈동자가 커졌다. 그록이 결혼기념일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안에는 반드시 가져오겠소.”
블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록이었지만 지금 그록의 형편없는 표정과 그의 몸짓에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나름대로, 그 나름대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했다. 그게 느껴졌다. 블란은 입술 끝이 떨려왔고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달칵.
그록이 나갔다.
그리고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블란은 오늘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정말로 늘 그래왔듯이.
그녀는 그록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것을 확인했다.
블란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달력으로 시선을 두었다.
이제 두 달.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