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5)
5.
하지만 마냥 마음이 편안해질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힘겨워졌고 저녁에 잠드는 것이 힘들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하루가 늘었고 평소처럼 움직여도 늘 몸이 무겁고 갑갑했으며, 때로는 온몸이 아팠다.
블란은 자신을 진찰하는 카만 의원에게 툭 지나가듯이 물었다.
“중기에서 이제 말기로 가는 건가요?”
순간 진찰하던 카만 의원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굳은 카만 의원을 보며 블란은 이미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소리 없는 답에 답했다.
“괜찮아요.”
그래, 괜찮아. 이미 알고 있잖아.
블란은 고개 숙인 카만과 자신을 다독였다. 워보트 병 말기. 말기에 접어드는 순간, 블란은 더 이상 지금처럼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본 채 지내야 하는 시간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 전에, 해놓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블란은 나가려는 카만 의원에게 말했다.
“아버지께 가시는 거죠?”
멈칫하는 카만 의원이 보였다. 블란은 늘 자신을 진찰한 후에 아버지에게 가서 보고를 하는 카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편지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이 편지 아버지께 전해주세요.”
카만은 그 편지를 챙기고선 잠시 블란을 바라보며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록 후원에 관한 내용입니까?”
블란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만은 괜히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는 언제나처럼 연구를 하러 가던 그록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만은 그 얼굴 속 그록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블란을 바라봤다.
“아가씨.”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카만은 블란을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그록이랑 아가씨는 닮았습니다.”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는 그 맑은 눈동자가 참 닮았습니다.
카만은 뒷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는 너무나도 깨끗했다.
“그런가요?”
닮았다는 말에 기뻐하는 저 모습을 보며 카만 역시 따라 미소를 그렸다. 블란은 방을 나가는 카만에게서 시선을 돌려 의자에 몸을 기대며 깊은 숨을 내뱉었다.
“후우.”
곧 있으면 식사 시간이었다. 블란은 올 겨울 이전과 달라진 식사 풍경을 떠올렸다. 그녀는 식당으로 가기 전 소파 옆에 놓인 작은 함을 꺼내들었다. 함을 열자 그 안에 작은 천들과 여러 색의 실, 바늘이 있었다. 블란은 천 하나를 집었다. 따라서 바늘과 실도 딸려왔다.
손수건으로 쓰일 천이었다.
하얀 천 위에는 붉은 색의 실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직 완성하려면 한참 멀었지만 블란은 조금씩 그 수를 놓아갔다. 그녀는 수를 놓다가 달력을 바라봤다.
벌써 2월이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2월 10일 꽃날이었다. 블란은 이 날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날이라 생각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꽃날을 기념해 꽃 조각품을 주셨지만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꽃날은 그 사람의 한 해 동안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꽃과 관련된 선물을 주는 날이었다.
연인 사이 혹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 보통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에 블란은 자신과 관련이 없다 생각했다. 그록 역시 한 번도 이 꽃날을 챙기지 않았다. 심지어 아카데미 다닐 때 꽃날에 만났지만 그는 이날을 무심히 넘겼다. 사실 잘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번 꽃날은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블란은 다시 손수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번 카만 의원과 함께 아버지 저택으로 가는 길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쉴단의 잎이 프시아처럼 붉은색인 것을 아십니까? 그 색이 참으로 아름답죠. 가장 달달한 향과 가장 쓴 향을 가진 약초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꽤 장관이라고 합니다.’
블란은 카만이 했던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손수건에 붉은 꽃을 새기자고 마음먹었다. 올해는 꽃날을 기념해서 혼자라도 그록에게 이 손수건을 선물하고 싶었다.
하나라도 더 기억되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중기에서 이제 말기로 가는 건가요?’
자신이 했던 물음이 떠올랐다.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이 끝나고 나서도 그록은 살아갈 것이다. 그에게는 무수히 많은 삶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기억되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해달라고, 나를 잊지 말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혹여나 그 말 때문에 그가 괴로울 수 있으니까. 안 그런 척해도 너무나도 여리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 자신도 모르게 힘겨워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이 손수건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한 번씩 이 손수건을 볼 때마다, 혹은 꽃날이 될 때마다 자신을 떠올려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괜찮아요.’
블란은 자신이 카만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찮긴.”
블란은 작게 웃음을 흘리고선 다시 손수건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갔다. 붉은 잎들이 손수건 위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블란은 영원히 피어 있을 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지 않았다.
똑똑똑.
“마님.”
블란은 시계를 바라봤다.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그녀는 숄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칵. 문을 열자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블란을 그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자신과 그의 사이처럼, 각각 따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블란은 그 두 식탁보다 닫힌 창문을 먼저 눈에 담았다.
‘당신은 춥지 않소?’
‘네?’
‘분명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담요가 한 장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두 장이고 재질도 두꺼워지지 않았소.’
블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나 다 아는 꽃날은 모르는 무심한 남자였지만, 자신의 무릎에 놓인 담요가 작년보다 늘어난 건 알아채는 남자가 그록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되고 싶으면서도 그가 자신을 오래 기억하지 않길 바라게 되었다. 이기적인 마음과 그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을 자꾸만 저울질했다.
블란은 자신의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늘 그렇듯이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록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독한 쉴단의 냄새가 순간 식당을 가득 채웠다.
“미안하오. 연구하다가 급하게 오느라 자꾸 까먹는군.”
정말이지.
블란은 저번 창문을 닫기 시작한 이후로 연구용 흰 코트를 입고 오는 그록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그록이 실험에 있어서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블란은 알고 있었다. 분명 실험용 코트는 따로 실험실에 두었을 것이다. 저 코트는 실험실에 비치된 다른 코트임이 틀림없었다.
블란은 이런 그록의 작은 마음에 설렜고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덕에 웃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블란이 건네는 말에 그록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식사가 시작되었다. 블란은 천천히 수프를 떠서 삼켰다. 먹는 것이 갈수록 고역이 되어갔지만 그녀는 이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양이 줄어감에도 먹기가 힘들어진 블란은 아주 느리게 음식을 먹었다. 어쩔 때는 삼키는 것이 힘들어 잠시 식사를 멈출 때도 있었다.
“으음.”
블란은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리며 잠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손 안에 있던 스푼도 다시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블란은 숨을 고른 후 물을 마시곤 다시 스푼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앞을 힐끗 바라봤다.
스푼을 드는 그록이 보였다.
블란이 식사를 잠시 멈추면 그록도 멈추었다. 그리고 블란이 다 먹을 때까지 속도를 맞춰 같이 먹어줬다. 비록 대화 한마디 없는 식사시간이었지만 블란은 그 무심한 표정으로 하는 작은 행동에 이 시간이 소중했다.
“식사 끝나셨습니까?”
고용인의 물음에 블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 역시 블란과 동시에 식사를 끝마쳤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따로 다른 말 없이 바로 일어서는 그록이 블란은 조금 야속했다. 하지만 분명 다시 실험을 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블란은 붙잡지 않았다.
“네. 나중에 봬요.”
분명 자신과의 식사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실험을 하다 중단하고 내려왔을 그록이었으니까. 블란은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그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더 이상 그록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블란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방으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자 그녀의 방에서도 쉴단을 비롯한 독한 약초들의 냄새가 났다. 분명 자신의 몸에서 나는 병 특유의 냄새도 있겠지만 그녀는 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독한 냄새들만큼 독하리라.
“마님, 차를 가지고 올까요?”
“아뇨. 괜찮아요.”
블란은 고용인들을 밖으로 보내고 홀로 방 안에 남았다. 다시 아까 그 자리에 앉아 손수건에 수를 놓았다. 문득 카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록이 왜 쉴단을 연구하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물음을 던지며 짓던 흐릿한 미소가 함께 블란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때 그녀는 답하지 못했다. 그간 생각을 했었다. 혹시나, 어쩌면. 하지만 블란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의 유일한 후원자이니, 그저 자신의 연구자가 실험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의 길을 믿어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블란은 수를 놓던 손수건을 잠시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녀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약초 관련 책들이 눈에 띄었다. 이 또한 그록과의 시간이 남겨준 기록이었다. 블란은 그 책장의 구석에 있는 자신의 일기장을 꺼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그녀는 옆에 놓인 수를 놓다 만 손수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기장 속에 숨겨진 쪽지에 해보고 싶었던 일을 새로이 한 가지 더 적었다.
[스물네 번째. 기념일 챙기기.]
그녀는 쪽지를 다시 접어 일기장 속에 숨겼다. 그리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는 하얀 페이지를 펼쳤다. 블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은 펜을 쥔 채 일기장 위를 채워나갔다.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간다. 나는 줄어드는 순간순간이 마치 손아귀에 쥐어진 모래처럼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바라본다.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되기를. 그래서 내가 준비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도 준비할 수 있기를.]
블란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그 페이지의 마지막 한 줄을 적어 넣었다.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시간은 블란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음 날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져 블란은 그 해의 2월을 침대에 누운 채 보내야 했다. 결국 처음으로 준비한 꽃날은 겨울이면 존재할 수 없는 꽃처럼 그녀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는 그록에게 그 손수건을 전해주지 못했다.
완성하지 못한 손수건이 그녀의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급속도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끝내 그녀는 그 손수건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알고 있던 미래였지만 실제로 다가온 미래를 겪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과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