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4)
4.
블란은 같은 듯 다른 듯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연구자와 후원자. 후원자가 되어 그록을 바라보는 것은 같은 학생일 때와 달랐다.
“아가씨,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블란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가족과 다름없는 의원 카만이 진찰 내용을 기록하며 블란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네고 있었다.
“글쎄요.”
블란은 대충 답하고선 다시 카만을 바라봤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카만이 보였다. 유일하게 그록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카만이었다. 그렇기에 블란은 물었다.
“연구자에게 후원자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록에게 자신은 무슨 의미일까요?
블란은 물었다. 요즘 들어 그녀는 그록을 바라보며 많은 의문이 일었고 또한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궁금했다. 카만은 그녀의 눈빛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함께해주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함께해주는 사람. 그 말이 블란의 귓가에 닿았다. 카만은 블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나지막이 덧붙였다.
“돈을 떠나서 말입니다.”
블란의 표정이 웃는 듯 찡그린 듯 묘하게 변해갔고 카만은 그런 블란의 손을 잡고선 다독여주었다.
아카데미에서 잠깐씩 만나던 때와 한 집에 사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블란은 그록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그리고 점점 더 깨달아갔다.
이 사람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바보가 아닐까 하고.
“감사해요. 조금 알 것 같아요.”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이건 답이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다르게 답이 나올 문제지요.”
누구에게나 다른 답이 나올 문제라면, 저와 그록 씨는 어떤 후원자와 연구자 사이일까요?
블란은 이를 묻지 않았다. 다만 진찰을 끝낸 카만을 배웅하고선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자신의 저택 복도를 거닐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지어주신 저택이었고 이곳에 그록의 실험실이 있었다.
블란은 그록의 실험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틈 새로 쉴단 향이 희미하게 퍼져 나왔다. 블란은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그 앞에 서 있었다.
‘약초학계의 현재 흐름과 그록 씨에 대한 평판입니다.’
아카데미를 졸업 후 정식으로 후원자가 된 블란은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약초학계에 대해서 조사를 했고 그록이라는 연구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타난 결과에 블란은 놀랐었다.
돈혐지.
자신이 졸업한 후 그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물론 자신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았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돈자팔.
돈을 위해 연구자로서의 자존심을 팔아버린 사람. 그 오명은 지금도 존재했고 점점 더 그록을 억눌렀다.
비서 펠 씨에게 그록의 상황을 모두 들은 후 블란이 처음으로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그녀는 닫힌 연구실 문을 보며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혼자군요.’
‘그렇습니다.’
그록은 아카데미 내에서 똑똑한 인재였지만 한 해에 다섯 명은 있을 법한 인재로 그렇게 대단한 인재는 아니었다. 그는 동기나 선후배 사이에서 평판이 최악이었고 지도 교수에게도 버림받았다. 이미 서 우드 아카데미에서는 설 곳이 없는 상태로 졸업했다.
그런 그를 학회에서 받아줄 리 만무했고 연구소에서도 특별히 원하지 않았다.
또한 가문에서도 가주에게,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
그록은 외톨이 연구자였다.
블란은 그 외톨이 연구자의 유일한 후원자였고 그의 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닫힌 문 너머의 쉴단 향을 삼켰다가 뱉어내었다.
“……무엇이.”
블란은 뒷말을 잊지 못했다.
무슨 질문을 던지고 싶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닫힌 문을 보다가 뒤돌아섰다.
아마 그록은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이 닫힌 문을 열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보다가 돌아가는지. 그리고 이 닫힌 문을 보며 어떤 다짐을 하는지.
그녀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주먹을 쥐었다.
연구자와 후원자.
블란은 생각했다.
자신과 그록. 우리 둘은 어떤 사이일까. 그에 대한 한 가지 확실한 답은 자신에게 유일한 연구자는 그록이며 그록에게 유일한 후원자는 자신이라는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 가지가 두 사람에게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 그거야.”
블란은 저 바보같이 연구만 하는, 세상과 단절된 남자를 영원히 후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포테 씨.”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전 집안의 재무를 관리하는 이에게 먼저 갔다.
“아가씨.”
“아, 안 일어나셔도 돼요. 그록 씨의 후원 비용 목록을 볼 수 있을까요?”
“네. 아가씨.”
블란은 포테가 내미는 후원금 지출 관련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록은 돈을 노리고 접근했으면서 집안의 돈 관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신기하리만큼 블란의 돈을 탐하지 않았다. 물론, 실험에 필요한 비용은 정확하게 청구했지만.
그래서 더 신기하기도 했다. 그녀는 힐끗 포테를 바라봤다. 어쩌면 카만 다음으로 그록에 대해서 호의적인 이였다. 아니, 중립적인 사람이었다. 정말로 그록은 연구비 빼고는 자신의 옷 한 벌조차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쉴단을 조금 더 추가로 구매하기로 하죠.”
“아가씨.”
나지막하게 포테가 부르는 이유를 알았지만 블란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돈을 아껴봤자 뭐하겠어요.”
포테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차마 블란 앞이라 찡그리지 못해 더 이상해진 표정이었다. 블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자신의 앞에 놓인 재산들은 자신이 다 쓰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 사람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포테 씨, 부탁드릴게요.”
“후우. 네 알겠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포테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블란은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짓고선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아가씨.”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블란은 뒤돌아 포테를 바라봤다. 그는 망설이는 듯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더니 웃는 듯 혹은 다른 표정을 짓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록 씨에게 돈 관리를 맡기면 연구하느라 다 날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 오래, 오랫동안 관리해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블란의 표정도 웃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으로 바뀌어졌다. 포테는 나지막이 덧붙였다.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포테가 하는 말의 의미를 블란은 충분히 잘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집안의 재무를 관리해달라, 그 말은 곧 오래 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새 포테는 그록을 이 집안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아직 후원자와 연구자 사이일 뿐인데도.
블란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냥 슬프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포테 씨.”
블란은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마냥 슬프지는 않은데 얼굴에 담기는 감정은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블란은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달칵.
탁.
방으로 돌아온 블란은 문에 등을 기대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선 책장으로 다가갔다.
[산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약초 모음]
[일반인을 위한 약초 사용법]
수많은 약초 관련 책들이 블란의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록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고 말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어 읽기 시작한 약초 책들이 꽤 많아졌다.
그녀는 그 책들을 훑어보다가 책상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블란은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반으로 접힌 잡지가 있었다. 그녀는 그 잡지를 꺼내 펼쳤다.
[여성 문인들의 도전]
여성 시인으로 유명한 엘라 시인와 다른 몇몇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여성 문인들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블란은 그 기사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를 모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조금씩 마음을 풀기 위해 시를 써왔던 블란이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시들이 그녀의 노트를 채우고 있었다. 그록과 함께 있지 않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녀는 책과 시와 함께 보냈다.
[여성 문인들의 도전은 점점 더 커질 것이며 이제 막 시작 단계지만 앞으로 더 활발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도.”
아.
블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내뱉은 말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방 안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없음에도 절로 몸을 움츠러트렸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 그때처럼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냐, 나는 아냐.
다시 고개를 든 블란은 잡지를 다시 서랍 속에 넣었다. 그녀는 서랍을 닫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노트를 꺼냈다.
곧 차를 마시러 올 그록을 기다리며 블란은 오늘도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그리고 3년 뒤, 블란은 그록과 부부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사이가 되었다.
다시 같은 듯, 다른 듯 둘의 사이가 달라졌다.
***
가끔 블란은 생각한다.
이 사람도 참 특이하구나, 하고. 아니면,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다녀올게요.”
올해도 블란은 아버지 레온의 생신을 기념하는 식사자리에 혼자 가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떠날 때면 그록은 늘 일찍부터 마차를 정리했다. 이날은 아침에 실험도 하지 않았다.
반나절. 같은 지역 안이었기에 반나절이면 닿을 거리에 레온의 저택이 있었다. 하지만 그록은 그 짧은 거리를 지나 저택 안에 들어서본 적이 없었다.
“여기.”
블란은 그록이 건네는 무릎담요를 받아들었다.
“오늘은 예년보다 기온이 더 떨어진 것 같소. 춥소.”
그록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무릎 담요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이지, 이러니 자신은 어쩔 수가 없었다. 블란은 그록이 마차 문을 열자 그의 손을 잡고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오시오.”
무뚝뚝하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블란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떠났다가 돌아오면, 그록 이 사람은 어떻게 아는 것인지 딱 도착하는 그 시간에 다시 이 자리로 나와서 자신을 맞이할 것이다.
결혼 후, 5년간 늘 그랬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년에는.”
블란은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에 맞은편을 바라봤다. 마차에는 또 다른 한 사람, 카만 의원이 타고 있었다.
“내년에는, 같이 갈 수 있으실 겁니다.”
위로하듯이 그가 건넨 말에 블란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이 말을 벌써 다섯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시간 동안 그록에 대한 미움을 지우지 않았다. 어쩌면 그 미움은 자신의 만류에도 결혼을 강행한 딸인 자신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카만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 블란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무릎 위를 덮은 담요를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블란은 카만을 바라봤다.
“그 무릎담요에서 나는 향이 무슨 약초의 향인지 아십니까?”
향? 약초?
블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담요를 바라봤다. 그제야 코끝에 단 향이 맴도는 것 같았다. 처음 깨달았다. 희미한 향이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다.
“프시아라는 약초의 향입니다.”
카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쉴단과 함께 자라는 약초지요. 쉴단에 지지 않을 만큼 강한 향으로 유명한데, 그 잎의 향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단 향. 그록은 달달한 향을 좋아하지 않았다. 블란은 묘한 표정으로 담요를 매만졌다. 보드라운 천의 느낌이 손 안에 맴돌았다.
“그리고 5년째 매년 받으시는 그 담요에서 나는 향이기도 하지요.”
아. 블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하염없이 두 손으로 담요를 매만졌다.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카만은 그 모습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어찌,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셨습니까?”
블란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네. 조금 나아졌어요.”
이 향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요.
블란은 미소를 그리며 눈을 감았다.
희미하게 코끝을 감싸는 단 향 사이로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