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70화 (69/95)

# 70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3)

3.

투둑투둑.

비가 내렸다. 블란은 비 오는 날이 싫었다. 자신의 역한 냄새가 어느 때보다도 티가 많이 나는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비 오는 날일수록 몸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그런 이날이 설렜다.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나니 주체할 수가 없었다. 블란은 자신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혼자 하는 것이기에, 앞에 놓인 것은 완전한 행복이 아님을 뻔히 알기에 슬프고 또 슬펐지만 설렜다. 특히 지금처럼 그록 그를 기다리는 이 순간은 이상하게 심장이 더 뛰었다.

투둑투둑.

땅에 튄 빗방울이 신발에 닿았다.

“쟤는 저렇게 매일 기다리는 것도 안 힘들까?”

“야. 들어, 들어.”

“들으면 어때. 바보 같아.”

블란은 순간 시선이 마주치며 지나가는 여학생의 표정에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안다. 자신도 자신이 바보 같은 것을 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블란은 먼저 와서 그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록은 제때에 오지 않았다. 제때 올 때도 있었지만 요즘 들어 늦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저들은 모른다.

그록 그 사람은 그래도 왔다. 늦어도 꼭 왔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언제 만나고 싶으십니까?’

‘네? 그록 씨 편할 때로.’

‘블란 양이 정하십시오.’

‘그러면 사, 삼 일 뒤에.’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록은 그렇게 답하고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늦게 오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님을 블란은 안다.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그 사람을 기다리고, 그리고 기다리면 만날 수 있고.

이 과정 자체가 블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바보 같아도 즐겁고 설렜다.

“블란 양.”

“그록 씨.”

“갑시다.”

그리고 냄새가 심한 비 오는 날에 만나도 이 사람은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블란은 그록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갔다. 같은 우산 아래에 있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면 그 옆에 그록의 얼굴이 보였다.

딸랑. 두 사람은 늘 오는 찻집에 들어서고 자리에 앉았다. 그록은 점원에게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알트 차 두 잔 부탁합니다.”

블란은 점원과 이야기하는 그록을 바라봤다. 비 오는 날이면 그록은 늘 하던 똑같은 주문에 한 가지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차 나오기 전에 따뜻한 물 한 잔 먼저 부탁합니다.”

손으로 가린 블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점원은 곧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가지고 왔고 이를 별다른 말 없이 블란 앞에 두었다. 그러면 그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선 그걸로 속 데우십시오.”

블란은 그 컵을 손에 쥐었다. 따뜻했다. 비 오는 날 만나면 그록은 이렇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더 주문해 블란에게 주었다. 그리고 눈 오는 날이면 점원에게 수건과 담요를 부탁해 블란에게 주도록 했다.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그리고 블란이 고맙다고 하면 그는 영문을 몰라 했다.

“아, 아니에요.”

이래서 기다리면서도 그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을 빼고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이렇게 먼저 따뜻한 물 한 잔 주는 이가 없었다.

“비 오는 날에 잘 자라는 약초들이 있습니다. 수분은 모든 생물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에, 비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비 오는 날 성장이 잘 이루어지는 약초들이 있지요.”

또 약초 얘기다.

블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았다. 따뜻한 물컵을 꼭 손에 쥔 채 블란은 그록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투둑투둑.

찻집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낮은 그록의 목소리가 노래같이 블란의 마음에 닿았다. 그녀는 가만히 그록을 눈에 담았다. 졸업 논문이 힘든지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 보였다. 괜히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약초 이야기를 하는 그 생기 가득한 눈동자에 심장이 뛰었다.

언제쯤 이 뛰는 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말해도 될까?

“블란 양.”

“네, 네?”

“차 나 왔습니다만.”

“아, 아!”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던 블란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선 손에 쥐고 있던 물컵을 점원에게 내밀었다. 블란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역시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저 말하겠습니다. 대나무 밭에 가면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퐁트 약초는 비의 영향을 조금 특이하게 받습니다.”

다시 약초 이야기를 하는 그록을 보며 블란은 생각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다고 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씁쓸한 알트 차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지만 블란의 입가에는 자그맣게 미소가 어렸다. 이를 보는 그록은 그녀가 왜 웃는지를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작은 웃음도 그는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온 그날, 블란은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그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야.”

블란은 미소를 그렸다.

삼 일 뒤에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 시간 정도면 충분히 감기가 다 나을 것이다. 블란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기숙사에 혼자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아플 때면 외롭고 힘들었다.

안 그래도 늘 아픈데 거기에 더 아프니,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무너졌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럴 때면 카만 의원과 아버지에게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외로워서 누구라도 찾게 되었다.

지금도 힘들고 외로웠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네. 그때 봅시다.’

블란은 옷을 두껍게 입고 이불로 꽁꽁 싸맸다. 빨리 이 감기가 나아야 한다. 혹 다른 병까지 같이 오면 안 된다. 그녀는 이불로 꽁꽁 싸맨 채 침대에 누워 일기장을 펼쳤다. 그러자 작은 종이쪽지가 일기장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블란은 조심스럽게 그 종이쪽지를 펼쳤다.

[해보고 싶었던 일]

그록을 만나면서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적어놓은 쪽지였다.

첫 번째. 같이 손잡고 걷기.

두 번째. 맛집 다 둘러보기.

세 번째.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

네 번째. 우드 축제 함께 보내기.

다섯 번째. 같이 여행 가기.

.

.

.

벌써 열두 번째를 적을 차례였다. 블란은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그록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조금 아쉬운 게 하나 있었다.

나란히 걸었지만. 같이 걷지는 않은 것 같았다.

블란은 조심스럽게 쪽지 위에 글자를 새겼다. 꾹꾹,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적는 그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어떤 기대가 담겨 있었다.

[열두 번째. 비 오는 날 같이 우산 쓰고 걷기]

언젠가 이룰 수 있지 않을까. 블란은 다시 종이쪽지를 접어서 일기장 속에 숨겼다. 빨리 낫기 위해 잠드는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픈 밤이 마냥 괴롭고 외롭지 않았다.

삼 일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록을 마주한 블란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드디어 오늘 아침 아버지로부터 허락의 편지를 받았다.

[정 그렇다면 자리를 마련해두도록 하마. 어차피 네 앞으로 되어 있는 저택이니 네 편한 대로 해야 맞겠지.]

아버지께는 죄송했다. 네 뜻이니 편히 하라고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버지의 염려와 걱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오, 오랜만이에요.”

얕은 감기로 아픈 동안 아버지 다음으로 많이 생각난 이가 그록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삼 일 만에 만난 지금 너무 반가웠다. 그록은 블란이 건네는 인사에 무뚝뚝하게 답했다.

“삼 일 만인데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 듯합니다.”

“하하, 그, 그런가요? 어쩐지 오랜만 같아서요.”

블란은 자신 혼자 괜히 들떠서 인사한 것 같아 부끄러움에 손을 꼼지락거렸다. 역시 나만 이런 마음이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지만 블란은 이내 우울한 생각을 지웠다. 남은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좋은 기억을 쌓아야 했다.

블란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연구는 잘 되시나요?”

“졸업 논문 말씀이십니까?”

“네.”

그녀는 그록이 졸업 논문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카만 의원에게 많이 들어왔기에 쉴단이 얼마나 신비로운 약초인지도 잘 알았다.

“엉망입니다.”

“네?”

“아무래도 하려는 연구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라. 이번에는 가설만 제시할 것 같아서 과연 논문이 통과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 그런가요?”

블란은 어려움을 토로하는 그록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쉴단 연구가 그렇게 어려울까? 어려운 연구에 지치지 않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멋있으면서도 안쓰러웠다. 블란은 자신이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네도 될까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그록 씨!”

그록이 블란을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동자에 블란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록 씨라면 자, 잘 해낼 거예요! 그, 미래의 후원자로서 응원할게요!”

순간,

“하하.”

그록이 웃음을 터트렸다.

블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짧지만 환하게 웃는 그록의 모습은 정말로, 멋졌다. 쿵쿵쿵. 심장이 뛰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주먹이 쥐어졌고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마음이 주체가 안 되어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블란은 알 수가 없었다.

“블란 양.”

그록은 겨우 웃음을 가다듬으며 블란에게 말했다.

“응원 감사합니다.”

웃음기가 머문 미소와 곱게 접힌 눈꼬리. 그리고 담담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아, 정말.

“저, 그록 씨.”

충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블란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내뱉었다.

“저, 그 조, 졸업하시면 그, 예정이 있으시나요? 연구소라든지.”

“없습니다. 졸업 후에 어떠한 예정도, 계획도 없습니다. 아마 연구를 하겠죠.”

“그, 그러면요.”

“혹시 저, 저희 가문에 가셔서 연구를 하실, 그, 하시려는 생각이 있으신지. 그러니까 그 제안을 하, 한번 해보면, 그 생각을 그록 씨가 해보시면 어떨까 하는, 그런.”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 역시 블란을 바라봤다.

“그, 하, 한번 생각을 해보시라는 의미에서.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 한번 말씀을 드려보는 건데. 그, 아버지께는 허락을 받아서요, 아! 허락이 아니라, 투자를, 후원을 하신다고 해서요.”

“좋습니다.”

“그, 예. 예?”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생각해보도록 하죠.”

“아, 네, 네!”

블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힘차게 답했다. 그리고 이내 그런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가 무엇을 위해 접근했는지 뻔히 알고, 그가 원하는 것을 자신이 먼저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인데. 왜 이다지도 자신이 기쁜 것일까.

자신은 정말 바보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자꾸만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도 그록과 함께할 시간들이 그려졌다. 그 시간들은 죽음을, 끝을 상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블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째깍째깍째깍. 찻집의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흘렀고 앞으로 흐를 시간도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졸업 후 블란은 그록과 함께 자신의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서 우드의 남학생 그록 바서, 남 우드의 여학생 블란 샤를이 아닌.

연구자와 후원자라는 새로운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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