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69화 (68/95)

# 69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2)

2.

그록 바서.

이 사람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접근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잘생겼다. 그리고 서 우드 약초학과 차석이라고 한다. 능력도 있다. 이 사람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 많이 달랐다.

매일 만나면 약초 이야기를 했다. 할 줄 아는 이야기가 약초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쉴단이란 약초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블란은 무섭지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생각을 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 그래요?”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고 말도 더듬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는 혹 착각인가 했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게, 블란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뭐, 그렇게 흔히 쓰이는 약초는 아닌데, 위에 좋은 약초입니다.”

블란도 그 약초를 알고 있었다.

쉴단. 정확한 효능은 알 수 없는 비싼 약초지만 유일하게 워보트 병의 진전을 느리게 하는 약초라고 했다. 자신처럼 독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약초. 그 약초는 블란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쉴단은 그래도 귀했다. 자신과 달랐다.

“블란 양에게서 그 향이 나길래 말해봤습니다. 늘 항시 복용을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순간 블란은 그록의 말에 입을 가리고 있던 손끝이 떨려왔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블란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입을 가리지 않는 손으로 옷을 잡았다. 그래, 나한테서는 역한 냄새가 나. 그건 내가 입을 가린다고 해서 숨겨지지 않아.

숨길 수 없어.

“그, 내, 냄새 심하죠?”

블란은 평소보다 더 더듬었다. 무슨 답을 듣게 될까? 그리고 자신은 왜 이런 것을 물어봤을까? 냄새가 나지. 당연히 나잖아. 냄새가 안 난다는 소리를 듣고 싶기라고 한 거야? 블란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당연합니다. 쉴단은 원래 냄새가 독한데 약용으로 재가공을 하면 그 향이 더 진해지니까요. 좋은 약을 쓰나 보군요. 쉴단은 좋을수록 향이 강하지요.”

남자. 그록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당연하다.

그 말이 블란에게 와 닿았다. 떨렸던 손끝에 힘이 쭉 빠졌다. 그녀는 그록을 바라봤다. 무뚝뚝한 검갈색 눈동자는 지식을 말하듯 평온했다.

아무도 블란에게 당연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조차도 독하지만 참으라고 했고, 병이 나으면 이 냄새도 사라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들 이 냄새는 사라져야만 옳다는 듯이 말했지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할 말이 있습니까?”

“아, 아뇨!”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고 있던 블란은 황급히 그록의 물음에 아니라고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힐끔 그를 바라봤다. 무뚝뚝한 얼굴에는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어떠한 것도.

혐오도 동정도,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블란은-

좋았다.

그녀는 빠르게 걷는 남자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옆에서 걸어도 아무 말이 없는 이 남자는 확실히 다른 이들과 달랐다. 드디어 다른 사람을 만났다. 블란의 심장이 조금씩 뛰었다.

그리고 이 날 블란은 그록과 헤어진 후 돌아오는 길 서점을 들렀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서점 안으로 들어선 블란은 평소와 달리 문학 코너가 아닌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흰 코트를 입은 남학생들이 몇몇 서 있었고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거나 혹은 인상을 찡그린 채 비켜섰지만 블란은 꿋꿋이 책장 앞에 섰다.

약초학 코너. 블란은 그곳에 서서 책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보였고 어려워 보였다.

“아.”

블란은 찾던 책이 보였다.

[기초 약초 입문학]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자신은 혼자였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가고 없었다. 블란은 그게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초 약초 입문학 책을 꺼냈다. 두꺼운 책 두께에 블란은 저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블란은 책을 구매하러 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책이 하나 더 눈에 보였다.

[위에 좋은 약초 해설서]

쉴단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한 남자. 그록이 떠올랐다. 블란은 그 책도 품에 안아들었다.

딸랑. 서점을 나오는 블란의 걸음은 꽤 가벼웠다. 그녀는 기숙사로 돌아와 자신의 방 책장에 새로이 놓이게 된 책 두 권을 바라봤다.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일기장을 펼쳤다. 조심스럽게 펜을 적어 내려갔다.

[그록 바서.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블란. 그녀의 일기장에 처음 그록의 이름이 적힌 순간이었다.

*

블란은 그록이라는 사람에게 궁금증이 생김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을 알아감에 따라 신기한 것들을 많이 발견했다.

“오늘은 바이올렛이라는 약초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기본적으로 두통 환자들에게 자주 쓰이는 약초로서 그 외양이 언뜻 보면 이끼와 비슷하지만 색이 조금 다르다고 하더군요. 습한 지대에서 주로 발견된다고 합니다.”

약초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남자는 순수했다. 그래, 순수했다.

그래서 그록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유가 블란에게는 명확히 보였다. 약초 연구를 후원할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해서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싫지가 않았다.

자신의 순수한 열정을 말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빛. 그 눈빛은 지금 블란 자신과 약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자신도 덩달아 신이 난다는 사실이었다.

“바, 바렛이라는 약초가 그러면 바이올렛인가요?”

“맞습니다. 약자죠. 아시는군요.”

공부한 게 나왔다. 블란은 조금씩 공부해두었던 약초 이야기가 나오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답하자 블란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에 두었던 한 손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이 사람과는 평범한 대화가 되었다.

블란의 마음은 블란이 잡을 수 조차 없이 자꾸만 커져갔다. 그렇기에 말했다.

“제가 꼭, 꼭! 후원자를 하고 싶어요! 그록 씨가 하고픈 연구들 꼭 다 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록 씨라면 다 해내실 거예요!”

정말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다 쥐어짜내서 한 말이었다. 아카데미에 오겠다고 결정했을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블란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록을 바라봤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에 어떤 묘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느껴졌다. 그게 무엇일까.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이것 때문에 접근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어째서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그록 이 사람에게서 순수한 기쁨이 보이는 것일까.

“크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보죠.”

헛기침을 하며 답하는 그의 귓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블란은 이를 보지 못한 채 미소를 그렸다.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지어진 미소는 어여뻤고 어느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까지 곱게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갈 수 없었다.

제니가 블란의 앞에 나타났다.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블란은 손이 떨려왔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제니.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블란에게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블란. 넌 샤를 가문 사람이 맞니? 정말 신기해.’

‘난 네가 더 눈에 들어오더라. 너희 가문 사람들은 다 아름다우니까. 그 사이에서 너는……. 무슨 뜻인지 알지?’

‘워보트 병은 아직까지 나은 사람이 없다더라. 어머, 어떡하니.’

그녀가 하는 말들은 늘 블란에게 상처가 되었고 그녀의 시선은 블란을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 조금 다른 무서움이 생겼다. 제니가 활짝 웃으며 그록에게 인사를 건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안 돼.

무엇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안 되었다.

블란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제니, 이쁘죠?”

“그렇죠.”

아. 바로 들려온 그록의 답에 블란은 왠지 모르게 허탈해졌다. 무슨 답을 바란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블란은 입을 열었다.

“그, 전 모, 못생겼죠?”

“그렇죠.”

이번에도 답은 바로 들려왔다. 다시 허탈했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블란은 왠지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맑았다. 그리고 그 맑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은 못생겼다. 그래, 사실이었다.

블란은 딸기를 못 먹는 자신을 대신에 단 케이크를 먹는 그록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시선이 투명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 담았다.

또 배려가 없는 것 같지만 배려가 몸에 배인 사람이었다.

또, 자신의 말에 늘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자신의 냄새에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많다.”

“네? 무슨 말씀하셨습니까?”

“아, 아뇨!”

블란은 그록의 시선에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록은 다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고 블란은 그를 위해 알트 차를 주문한 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많다.

마음이 가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다.

블란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블란 샤를. 그녀의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다른 이들도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었다.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있을까. 하지만 그 사람만큼 표 나게 다가온 이도 없었고, 접근하면서도 나에게 못생겼다고 말한 이도 그가 처음이었다.]

블란은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적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못생겼다는 말에서 환희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고 거울을 볼 줄 알았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이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그리고 나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던 그 남자들의 눈동자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밤하늘을 닮은 검갈색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떨림은 처음이었다. 블란은 눈을 떴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기장에 적었다.

[그랬기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

혹시나-

혹시.

나도 어쩌면.

블란은 뒷말을 차마 마음속으로도 읊조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17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한 소녀의 마음에 어떤 큰 파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블란은 시계를 바라봤다.

째깍째깍째깍.

자신의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블란의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과 다른 이들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얼굴 위로 어떤 결심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결심은, 늘 그래왔듯이 먼저 나와 그록을 기다리던 날 확실해졌다.

“그러면 돈혐지 남친은 돈자팔이야?”

“그렇다니까. 돈에 자존심 다 팔아버렸다고 서 우드에서 엄청 욕 듣는대. 소문 다 났다던데?”

고개를 숙이며 그록을 기다리던 블란의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 비웃음과 악의가 담긴 그 목소리에 블란은 평소와 다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갔다.

돈자팔.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혔다. 여학생들은 스쳐지나가며 나누는 대화가 블란의 귓가에 박혔다. 꽤 많은 이야기가 그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록 씨가 돈자팔이라고?

블란의 손끝이 떨려왔다. 자신과 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건가?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돌 때까지 난 몰랐지?

내가 돈혐지라서, 그는 돈자팔인 건가?

그때.

“블란 양.”

기다리고 있으면 늘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블란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맑은 검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분명 서 우드에서 소문으로 인해 혼자가 되었다고 들었다.

“갑시다.”

무뚝뚝하게 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평소와 같았다.

블란은 이 순간 결심했다. 그래, 하자.

이날 그녀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후원하고 싶은 연구자분이 계신데, 제가 연구할 곳을 마련해드리고 싶어요.]

블란의 마음은 확고해졌다.

째깍째깍째깍. 그녀의 시간은 줄어들어갔지만 블란은 다른 이의 미래를 준비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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