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외전 1 : 그녀의 이야기(1)
1.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블란은 ‘산다’와 ‘살아간다’, 그 두 단어의 차이를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였다.
워보트 병. 어렸던 블란은 그 병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앓는다는 그 병이 무엇인지 몰라서 물었을 때. 그 순간을 블란은 지금까지 잊지 못했다.
‘아버지. 워보트 병이 무슨 병이에요?’
‘오, 블란.’
무엇이든 다 알고 무엇이든 대답해주시던 아버지는 그때 처음으로 아무 답도 하지 못한 채 블란을 품에 안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품에 자신을 안아주던 아버지는 답했었다.
‘나을 수 있는 병이란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블란은 저택 서재에 가서 워보트 병이 무엇인지 찾았다. 그리고 책에서 발견한 첫 문장은 그녀의 뇌리 속에 깊숙이 박혔다.
[죽음의 상징, 워보트.]
죽음이란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의 블란은 알 수 없었지만 서재 한편에 걸려 있는 어머니 초상화를 한참 동안 봤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고 기억에도 없던 어머니의 죽음이 마음에 와 박혔다.
그때 블란은 ‘산다’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살아간다’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아가씨. 조금만 더 힘을 내야 돼요. 써도 먹어야 합니다. 알죠?’
‘네.’
카만 의원이 주는 쓴 약을 먹는 게 힘들어질 때. 그리고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예전보다 뛰는 게 힘들어져갈 때. 블란은 조금씩 하루의 힘듦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으, 냄새!’
‘너 샤를 가문 사람 맞아? 왜 이렇게 뚱뚱하고 못생겼어?’
‘아, 냄새 진짜 심하다. 같이 못 있겠어.’
코를 막으며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 블란은 몸이 아픈 만큼 마음이 아픈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냄새가 나는 자신이 싫었고 뚱뚱한 자신이 싫었고 못생긴 자신이 싫었고. 아픈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살고 싶었다.
싫은 자신이었지만 그렇게 싫은 자신으로서라도 블란은 살고 싶었다. 그래서 숨어 살았다.
그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과 만나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세상을 알 수 있는 책이 블란은 좋았다. 그렇지만 블란은 외로웠다.
몸과 마음의 아픔. 그리고 외로움.
다가오는 죽음.
블란은 ‘살아간다’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처음 펜을 손에 들었고 시를 써내려갔다. 이 아픔과 외로움, 두려움, 체념. 모든 것을 담아 블란은 시를 써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블란, 왜 밖에 나가지 않니?’
아버지 레온이 블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블란은 그때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아버지가 블란을 품에 안았다. 커다랗고 든든한 품에 블란은 얼굴을 비볐다. 그때,
‘미안하다, 블란. 미안하다.’
들려온 아버지의 말에 블란은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올려다본 아버지의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 블란은 깨달았다.
‘살아간다.’ 그 단어는 나에게만 주어진 단어가 아니구나.
아버지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이후로 블란은 조금 바뀌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에 담았다.
[블란. 몸은 괜찮으냐?]
블란은 늘 텅 비어 있던 자신의 기숙사 우편함을 늘 채우는 아버지의 편지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작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괜찮아요.”
[힘든 일은 없고?]
“네. 없어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려무나. 다 보내주마.]
“괜찮아요. 없어요.”
[늘 사랑한다, 블란.]
블란은 아버지의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답했다.
“저도 사랑해요. 아버지.”
오늘 처음 내뱉어본 목소리였다. 오늘 블란은 아무와도 대화를 하지 못했다. 평소와 같았다. 블란은 다시 편지를 바라봤다.
[힘내자.]
아버지는 편지의 끝에 늘 힘내자고 하셨다. 그래서 블란은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의 편지를 보며 블란은 하루라도 열심히, 무섭더라도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블란은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 공간 덕에 일 년을 버틸 수 있었다.
‘블란, 아카데미는 안 가도 된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사실 아버지 레온은 블란이 아카데미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블란은 남 우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자신의 삶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용기였다. 무엇을 바란 것일까.
“후우.”
블란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방 밖으로 나섰다. 다시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세상은 블란이 바란 것과 정반대였고 용기는 쓸데없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아, 여기밖에 자리가 없어?”
“야, 그냥 뒤에 가서 설까?”
블란은 강의실에 앉은 채 책상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프렌 왕국의 고대 문학]. 꼭 듣고 싶은 교양 과목이었다. 블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통통한 손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아, 저기 뒷자리 있네. 따로 따로 앉자.”
“어. 그러자. 냄새 배면 어떡해.”
짜증에 가득 찬 목소리에 킥킥거리며 비웃는 목소리. 블란은 자신의 옆자리가 텅 빌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책상 위 책만을 바라봤다. 오늘도 역시나 블란은 혼자가 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고. 나는 괜찮아.
블란은 퉁퉁 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오래 살아도 20대 후반이라고 했다. 그녀는 한껏 움츠러든 몸으로 생각했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은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길래 괜찮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야, 쟤 돈혐지 아냐?”
“어머, 너 그걸 말하면 어떡해?”
“뭐, 어때.”
남 우드 도서관으로 향하던 블란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돈혐지. 돈 많고 혐오스러운 돼지. 남 우드 아카데미의 수치. 그녀는 땅을 본 채 그대로 굳었다.
“야, 쟤 지금 들었지?”
“아이 참, 가자. 가.”
“아, 왜 그래?”
동 우드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남 우드 여학생의 손길에 끌려가면서도 블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샤를 가문의 추녀. 어딜 가나 재밌는 이야깃거리였다. 어떤 가문의 힘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는 우드 아카데미. 그 안에서 블란은 견뎌내야 했다.
“괘, 괜찮아.”
오늘 두 번째로 목소리를 내었다. 블란은 자신을 향해 말했다. 그 목소리는 더듬거렸고 떨렸다. 그녀는 다시 땅을 보면서 걸었다. 그 와중에도 주위를 끊임없이 살펴봤다.
혹 땅을 보고 걷다가 남에게 부딪히면 안 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자신의 냄새를 싫어할 테니까. 커다란 덩치가 점점 더 숨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듯이 움츠러들어갔다.
힐끔. 힐끔. 남 우드 도서관으로 향하는 여학생도 많았지만 오늘은 외부인도 많았다. 특히 동 우드 남학생과 서 우드 남학생이 많이 보였다. 블란은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걸었다.
남자. 남자는 블란에게 무섭고 힘든 존재였다. 그 시선은 더 무섭고 가차 없었다. 자신을 여자로 보는 이도 없었고 나쁜 의도로 접근하는 이도 많았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웃고 있지만 자신의 냄새를 역겨워하고 자신을 괴물 보듯이 바라보는 그 시선. 하지만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는 이들. 블란은 이들이 더 무서웠다.
왜냐면 외로웠으니까. 외로워서 블란은 자신이 흔들릴까 무서웠다.
“괜찮아.”
블란은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그래, 아직은 괜찮았다.
아직은.
블란은 남 우드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 그록은 매튜에게 처음으로 돈혐지와 블란에 대해서 들었다.
블란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
글을 읽고 쓰는 것. 오직 그것만이 블란에게서 아픔이라는 것을 잊게 했다.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여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를 할 수는 없었지만 도서관에 오는 일은 블란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와아.”
새로 들어온 신간을 보는 블란의 눈빛이 반짝였다. 늘 땅만 보던 그녀가 고개를 힘껏 들어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높은 책장을 바라봤다. 도서관에서도 구석이라 이곳을 찾는 이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블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살에 파묻힌 작은 실눈에 생기가 맴돌았고 하늘빛 눈동자가 봄 하늘처럼 설렘을 담았다.
[극복의 상징, 고 케인 시인에 대하여.]
오! 케인 시인에 대한 평이 담긴 새로운 책이었다. 블란은 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장애를 극복한 시인, 케인. 블란은 그를 존경했고 그의 시를 사랑했다.
“……대단해.”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처지는 비슷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블란은 케인 시인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아갔다. 블란은 품 안의 책을 대출해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도서관 안에서 책을 읽고 싶었지만 냄새가 난다고 눈치를 많이 주었고 블란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었다. 블란은 평소에 자주 앉는 벤치로 가서 앉았다. 4월이라 그런지 햇볕도 따뜻했다. 물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고 무서웠다.
사실 무섭다면서 이렇게 벤치에 앉아 있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블란은 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왜일까? 어차피 혼자인데?
그래, 혼자니까 괜찮아. 블란은 다가올 이가 없을 것이기에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읽었던 케인 시인에 대한 평이 담긴 책들과 이 책은 달랐다.
[케인 시인도 약한 사람이었다.]
약하다니? 극복의 상징인데?
블란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그 약함을 드러내었기에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약함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다.]
그때,
“저기.”
혼자인 블란의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블란은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시선을 돌리자 잘생긴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어정쩡한 자세로 블란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당황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블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검은 빛깔을 띤 갈색 눈동자가 블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한껏 움츠러들었다. 뭐지? 왜? 갑자기? 답이 없는 남자를 향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이름이 뭐죠?”
너무나도 어색하고 서툴게, 남자는 블란의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블란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또 접근하는 남자인가? 책을 쥐고 있는 블란의 통통한 손이 떨렸다. 그리고 남자는 한 걸음 더 블란에게 다가왔다. 블란은 더 움츠러들었다.
“나는 서 우드 약초학 2학년 그록 바서입니다.”
그록 바서.
그 이름이 이상하게도 블란의 머릿속에 와 박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름을 묻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이에게 하는 답으로 알맞지 않았다.
“왜 그러시죠?”
나는 왜 이럴까. 블란은 자신의 지금 이 떨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보는 남자의 눈동자는 담담했고 맑았다. 남자는 답했다.
“궁금하네요.”
무엇이요? 무엇이 궁금한가요?
블란은 묻지 못했다. 그녀는 대신 그 눈빛을 바라봤다. 차가운 얼굴과 달리 눈동자가 맑아보였다. 왜일까. 블란은 한참을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달싹이다가 겨우 답했다.
“브, 블란 샤를입니다.”
“……그록 바서입니다.”
블란은 오늘 처음으로 다른 이와 대화를 했다. 타인과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고 작았지만 블란의 마음은 묘했다. 당황해서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자신에게서 나는 입 냄새가 심할 텐데 남자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어색한 대화였지만 블란은 이상하게 심장이 떨렸다.
그것이 블란이 기억하는 그록과 블란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