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에필로그(5)
67. 에필로그(5)
프쉴에 도착한 날 이후로 이틀이 지났다. 비서 펠은 손에 펜을 쥔 채 굴리며 편지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꼭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하나 다 설명하도록! 무조건 다!’
레온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때문에 펠은 그간 레온의 명대로 사실대로 다 적었다.
“후우. 그냥 적자.”
그는 고민을 뒤로 미루고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편지지에 옮겼다.
[그록 바서 군은 현재 찬 수프 신세입니다.]
그래. 제대로 된 찬 수프 신세지.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따가운 땡볕 아래. 프쉴의 한가운데에 그록이 허리를 수그린 채 쉴단을 찾으면서 프시아 뿌리 채취를 하고 있었다.
‘잘됐어! 요즘 프시아 뿌리까지 찾아서 일이 배로 늘었는데, 우리 연구자님이 같이 하면 좋긋네!’
‘내 말이! 아주 제때 잘 왔어! 하하하하.’
괄괄한 약초꾼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프시아 군락지로 걸어가던 그록의 뒷모습이 비서 펠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는 잠시 그록에게 힘내라고 속으로 응원을 한 뒤, 다시 펜을 움직였다.
[블란 아가씨는,]
잠시 펜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빠르게 적었다.
[공주님입니다.]
그래, 공주님이지. 펠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블란이 담겼다.
프쉴의 한구석에 있는 커다란 아래 시원한 그늘. 각종 음식과 시를 적을 수 있는 책상과 펜, 종이까지 구비된 곳에 블란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연신 그록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자, 이것도 무라!”
“네, 네!”
헤리아가 건네는 파이를 입에 머금어야 했다. 그녀는 헤리아를 바라봤다. 연신 자신을 바라본 채 흐뭇하다는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이것도 물래? 내가 만든 긴데, 무라!’
‘하이고! 일은 무슨 일! 쉬야지! 여기 여행 왔잖어! 쉬어, 쉬어!’
헤리아는 블란에게 온갖 음식을 해주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일손을 도우려고 하면 결사적으로 말렸다. 블란은 그런 헤리아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록의 말을 전해 듣고 이내 감사한 마음으로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아마, 지금 한을 풀고 계실 겁니다.’
헤리아의 사연을 모두 들은 블란이었다. 그록의 담담하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니 조금 과해도 이해해주십시오. 그리고 전 여기에서 받은 도움이 커서 일을 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맛있나?”
“네! 맛있어요!”
헤리아가 내미는 다른 음식도 조심스럽게 받아들며 블란은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다 맛있어요. 감사해요.”
“아이다, 아이다. 많이 먹어. 그래야 얼른 완전히 나을 거 아이가.”
헤리아는 블란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맑고 건강한 하늘색 눈빛이 보였다. 눈동자에서 그 사람이 보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블란. 그록이 있잖아.”
블란은 헤리아를 바라봤다. 헤리아는 뜨거운 태양 아래 허리를 숙인 채 일을 하는 그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록이 일 년 전에 여기 왔을 때. 일을 하는데 참 희한한 게 하나 있었거든.”
“희한한 거요?”
“그래.”
블란을 보며 작은 미소를 입가에 그려 보이더니 헤리아는 다시 그록을 바라봤다. 블란도 따라 그록을 바라봤다.
“보통 말이야. 저리 하루 종일 수그리고 일을 하면 허리가 참말로 아프거든. 처음엔 허리가 아팠다가 나중에는 다리랑 목까지, 만신이 다 아파.”
블란의 눈가에 작은 걱정이 어렸다.
“그래서 약초꾼들은 가끔씩 허리를 펴면서 잠시 쉬지.”
곳곳에서 약초꾼들이 일어서서 허리를 펴고 몸을 풀었다.
“그런데 말이야. 저 사람들을 한번 잘 봐.”
블란은 헤리아의 손가락 끝을 따라 일어선 약초꾼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들 같은 표정으로 허리를 두드리거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다들 표정이 어때?”
“네?”
“일어선 사람들 표정 말이야.”
으음. 블란은 천천히 그들을 시야에 담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허리가 아프시니까, 얼굴을 찡그리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 더 있지.”
하나 더? 블란의 의아하다는 시선에 헤리아는 약초꾼을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늘 아래에 있던 블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햇볕이 너무 뜨겁거든. 그래서 고개를 들어 빛을 보았을 때 다들 눈을 찡그리지.”
아. 헤리아의 답에 블란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헤리아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헤리아는 미소를 그리며 저 멀리, 허리를 펴는 한 사람, 그록을 가리켰다.
“자. 뭐가 희한한지 알겠지?”
블란은 그 손가락을 따라 그록을 바라봤다. 천천히 그록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웃었다.
찡그림이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늘 저랬어.”
담담한 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년 전에도, 허리를 숙였을 때는 온갖 인상은 다 쓰더니 하늘을 바라볼 때면 저렇게 웃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떠올리더구나.”
블란과 헤리아가 서로를 마주했다.
“난 그때 궁금했지. 무엇을 떠올리는 것일까?”
블란은 헤리아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담겼다. 자신의 하늘색 눈이 보였다.
“그런데 블란, 너를 보니, 너의 눈동자를 보니 잘 알겠더구나.”
블란은 다시 그록을 바라봤다. 하늘을 보던 그가 어느새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새삼 그녀는 느꼈다.
그록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그녀는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누르며 그록에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헤리아의 목소리가 블란의 귓가에 닿았다.
“서로 좋은 인연을 만났어.”
인연.
그 단어가 블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
“하이고! 갑자기 이리 꼭 소나기가 한 번씩 온다니까! 퍼뜩 들어온나!”
헤리아의 목소리를 따라 얼른 그록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수건이요.”
“고맙습니다.”
그록은 블란이 내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어내었다. 창문을 보니 거센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옷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헤리아는 주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혼자 남은 블란에게 말하고선 그록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옷을 갈아입은 후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그는 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손에 쥐었다.
“소나기 치고는 빗소리가 거센 것 같아요.”
“프쉴에 소나기는 빗발이 거세더군요.”
그록은 블란의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많은 종이들이 있었고 그 위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록의 시선이 종이들에게로 향한 것을 안 블란은 귓가를 붉히며 팔로 종이들을 가렸다.
“보지 마세요. 아직 다 습작이에요.”
원래 블란은 습작이어도 그록에게만큼은 흔쾌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건 안 돼.’
아까 헤리아가 해주었던 얘기를 듣고 난 후 그록을 보면서 썼던 시였다.
[인연]
이 시는 아직 보여줄 수 없었다. 그록이 자신에게 [방패]를 주었듯이 그녀도 결혼 전에, 언젠가 그에게 [인연]을 주고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안 보겠습니다.”
무뚝뚝하게 답하는 그록을 블란은 힐끗 바라봤다. 그러자 자신을 보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괜히 부끄러워져 시선을 돌리는 블란에게로 그록의 목소리가 닿았다.
“하나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같이 하고 싶은 것? 블란의 얼굴 위로 의문이 나타났다. 그런 그녀에게 그록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투둑투둑.
빗소리가 창가를 두드렸다. 그록은 자신의 안주머니 속 쪽지를 떠올렸다.
[해보고 싶었던 일.]
과거의 블란이 적었던 그 쪽지는 아직 그록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제 그 자리에 또 다른 하나를 더 놓아두고 싶은 그록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에 들린 종이를 블란에게로 내밀었다. 블란은 종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종이에 적힌 딱 한 줄을 읽었다.
“앞으로 함께 할 31가지.”
그녀의 눈동자가 그록에게로 향했다.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이곳에 적어서 하나씩 했으면 합니다.”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해보고 싶었던 일 30가지. 아직 그것도 다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새로이 블란과 함께 정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그 순간, 블란이 배시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말했다.
“하나 마음에 안 들어요.”
음? 그록은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그록의 물음에 블란은 말 대신에 펜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그록이 건네준 종이를 손에 쥐었다.
쓰윽쓰윽.
그녀는 그록이 적은 제목에서 31이라는 숫자를 지웠다.
그러고는 그 밑에 새로운 제목을 적었다.
[앞으로 함께 할 것들.]
새로운 제목이 종이 위에 새겨졌다.
“앞으로 계속 같이 있을 건데, 31가지는 너무 적은 것 같아요.”
그록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곧 그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맺혔다.
“맞습니다. 적습니다.”
이제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길다. 그 속에서 31가지는, 그녀의 말대로 정말 적었다.
“음?”
주방에서 나오던 헤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전 소풍도 가보고 싶어요.”
“저도입니다.”
“정말요?”
그녀는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록과 블란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딱 붙은 채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둘은 무언가 중대한 작전을 짜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속닥거렸다.
하이고. 둘이 하는 기 와 이리 귀엽노. 헤리아는 속의 말을 내뱉지 않은 채 다시 조용히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를 모른 채 그록과 블란은 열심히 종이를 채워나갔다.
“으음. 이제는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아요.”
“우선 이것만 적겠습니까?”
그록은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블란을 바라보다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서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블란 양.”
“네?”
그록은 다른 말 없이 블란의 손을 잡았다. 이끌리듯이 일어난 블란에게 그록은 말했다.
“같이 걷죠.”
블란의 눈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하는 붉은 잎들이 담겼다.
“네. 좋아요.”
둘은 천천히 헤리아의 집을 나섰다.
“와-”
문을 열자마자 블란은 잠시 눈을 감은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비온 뒤 피어오른 생명의 향들이 그녀의 몸 깊숙이 들어왔다. 블란은 물기를 머금어 더 반짝이는 프시아 잎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그록과 함께.
“너무 예뻐요.”
“그렇죠?”
그록은 블란이 연신 흘리는 감탄을 들으며 물방울들이 맺힌 붉은 잎들을 바라봤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1년 전. 그록은 소나기가 지나가고 난 후 외웠던 기도를 떠올렸다. 질척질척한 땅을 밟으며 비릿한 비 냄새 사이를 허리를 숙인 채 걸으며 자신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말했다.
‘블란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는 기도했었다.
‘블란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실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의 끝에,
“그록 씨, 진짜 너무 좋아요! 비 오고 난 후가 특히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녀와 함께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록은 쉴단을 발견했고 지금 이렇게 자신을 보며 웃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짓는 블란을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블란 양.”
“네.”
“하나 더 적을 게 생각났습니다.”
앞으로 함께 할 것들.
거기에 적을 한 가지가 더 생각났다.
“오, 뭔가요?”
한층 건강해지고 밝아진 블란을 향해 그록은 미소를 그렸다. 그 순간, 블란은 작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아! 알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네.”
블란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어렸다. 그록은 이 순간 느꼈다. 정말로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그록은 나직이 물었다.
“그럼 말할까요?”
“네.”
붉은 잎들은 물방울을 머금어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흐린 구름 사이로 드러난 햇빛이 그 물방울 속에서 반짝였다. 그록은 블란과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평생 행복합시다.”
블란은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록의 안주머니.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새로운 쪽지가 하나 자리했다.
앞으로 해야 할 것들.
그 마지막에는 새로운 목표가 적혀 있었다.
행복하기.
- 에필로그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