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
4월이 되었다. 그록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째깍째깍째깍.
계속해서 초침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록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달력이 보였다.
오늘로 3주차에 들어섰다. 곧 카만 의원과 함께 치료제의 효용성에 대해서, 블란의 병에 차도가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 달력을 바라보는 그록의 표정은 점점 기묘해졌다.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4월의 달력을 바라보았다.
“벌써 이렇게 되었군.”
과거로 돌아온 지 2년째 되는 날.
블란을 다시 만난 지 딱 2년째 되는 날이 오늘이었다.
그록은 기억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블란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 느꼈던 그 환희를. 그록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점점 일그러져가는 표정으로 그록은 잠시 기도했다.
똑똑똑
“그록, 카만일세. 시간이 되었네.”
시간이 되었다.
그록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문을 여는 그의 표정은 언제 일그러졌냐는 듯 아무 표정 없는 담담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얼른 가세.”
그런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카만 의원의 얼굴에 서린 긴장은 경험이 많은 의원이라도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긴장을 가장 숨기지 못하는 이는 따로 있었다.
“오셨습니까?”
카만의 인사에 레온 샤를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누구보다도 장대한 덩치에 무뚝뚝하며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이 그를 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레온. 그 레온이 지금은, 아주 심하게 떨고 있었다.
본인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뛰어난 무인이 아닌 한 여인의 아버지로서 그는 지금 이 순간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레온의 귓가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무뚝뚝하지만 차갑지 않은 목소리. 레온은 그록을 바라봤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록은 저도 모르게 떨고 있는 레온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믿으십시오.”
무엇을?
되묻지 않은 그를 향해 그록은 답해주었다.
“저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선택한 연구잡니다. 그리고,”
레온 샤를. 자신과 베스 노옐. 사랑하는 아내가 선택한 사람.
“블란 양이 선택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딸이 선택한 사람.
이를 말하는 그록의 담담한 눈빛에 레온은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떨림이 조금 사라졌다.
“그래, 믿지. 믿어야지.”
나와 아내. 그리고 딸과, 자네를.
“후우.”
레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만과 비서 펠, 그록까지.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정신을 차려야 할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레온은 눈앞의 문을 바라봤다. 저 문 너머에는 지금 누구보다도 떨고 있을 한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딸.
아버지는 딸의 그림자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레온은 여전히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록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카만을 보며 말했다.
“들어가지.”
“네.”
달칵. 문이 열리고 카만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록은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독한 향이 코끝에 닿았지만 그록의 눈에는 오직 블란만이 담겼다.
블란은 떨지 않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오셨어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록의 눈에는 보였다. 평소와 같은 미소지만 그 안에 담긴 숨길 수 없는 기대와 떨림, 초조함이.
누구보다도 무서울 것이다.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느꼈을 절망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클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록은 표정에 힘을 주었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당당한 연구자로서 보여야 한다.
“오늘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카만이 검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록이 입을 열었다. 블란은 그렇게 물으며 자연스레 자신의 한쪽 손을 잡는 그록에게 답했다.
“좋아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늘 가장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그록은 그 답과 달리 자신의 손을 꼬옥 잡는 블란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이제야 잡을 것을 하나 찾았다는 것마냥 간절히 매달리는 그 손길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기분도 느낌도 좋습니다.”
그리 답을 하고선 그는 레온을 바라봤다.
블란의 손을 잡아야 할 사람은 레온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선을 마주친 레온은 마치 손을 계속 잡고 있으라는 듯 그록의 어깨를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나도 오늘 기분이 좋구나.”
카만이 말했다.
“다 좋아 보이는군요. 좋습니다.”
그는 잔잔하게 말했다.
“그러면 검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검사가 시작되었다.
원래라면 그록이 옆에서 도와야 했지만 카만은 혼자서도 충분했기에 본인이 모두 맡기로 했었다.
방 안은 정적에 가득 찼다.
블란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이 그록은 느껴졌다. 그 손을 그는 매만졌다.
그록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레온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레온에게 시선을 주며 담담한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는 꼿꼿이 섰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확신에 찬 모습을 자신은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록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처음 블란을 만났을 때.
그녀의 병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녀에게 처음 쉴단에 대해서 배운 것을 말했을 때.
‘부, 분명 그록 씨라면 연구 성공하실 거예요. 분명!’
그녀를 위해 쉴단에 대해서 연구를 다시 이어갔을 때.
‘전 믿어요.’
‘그록 바서라는 연구자를 전 믿어요.’
‘그리고 저는 제 믿음을 믿어요.’
자신을 믿는다며 그녀가 실험에 참가하겠다고 답을 했을 때.
그리고,
‘저 다 나으면요. 여행 가고 싶어요. 같이.’
그녀와 함께 미래를 약속했을 때.
수많은 장면들이 그록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 가지 장면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기다릴게요.’
서서히 감기던 눈.
사라져 갔던 하늘빛 눈동자.
자신의 손에서 떨어져 힘없이 침대에 늘어졌던 손.
‘이, 이럴 수가! 오, 카만! 어서, 다시, 한 번만 더! 오, 블란! 블란! 블라안!’
절망에 가득 찼던 레온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도 어떤 답을 하지 않았던 블란의 감겨진 눈.
그 장면이 그록의 머릿속에서,
결혼기념일 10주년에 차가운 땅에 묻혀야 했던 블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꽉 심장을 조여 왔고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무언가가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록은 꼿꼿이 섰다.
사랑하는 여인의 떨리는 손과 자신을 믿어준 후원자의 떨리는 손.
그 모든 것을 자신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록은 꼿꼿이 선 채 카만의 손끝을.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
째깍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속절없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흡!”
카만이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크게 떴다. 카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록의 눈에 담겼다.
째깍째깍째깍.
빠르게 움직이는 초침 소리처럼 그록의 심장도 쿵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는 블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카만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졌다. 그리고 그는,
모두를 바라봤다.
그록과 카만의 눈이 마주쳤다.
그록은 카만의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 순간 카만의 입이 열렸다.
“차도가,”
그록은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속에서 카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도가 있어. 차도가 있네.”
아.
그록의 귓가로 떨리지만 점점 더 확신에 가득 차서 소리치는 카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보다 좋아졌어. 이건 확실합니다. 효과가 있습니다! 치료제가 효과가, 효과가 있습니다! 오, 아가씨! 오, 세상에!”
아.
꼿꼿이 서 있던 그록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황급히 레온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그록은 몸에 더 이상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 정말.
정말.
그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록은 블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마치 단 하나의 동아줄을 잡듯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블란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가득한 손이었다.
살아 있는 블란의 손이었다.
심장을 조이던, 목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터져나가는 것을 그록은 느꼈다.
아, 정말.
정말-
다행이야.
살았어.
블란은 살 수 있어.
블란의 손을 잡고 있던 두 손의 떨림이 점점 그록의 몸 전체로 퍼졌다. 꼿꼿이 서 있던 그는 이제야 무너진 채,
“그록 씨-”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무언가가 폭발한 것처럼, 이십 년이 넘게 참고 있던 깊고도 깊은 응어리가 터진 것처럼, 그는 그 이십 년을 토해내었다.
아, 블란.
그록은 살아 있는 블란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블란 양.”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록은 블란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블란은 처음 보았다. 아니, 이런 장면은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온통 눈물로 가득 찬 채, 부들부들 떨면서, 그러면서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그록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울고 있지만 행복해 보였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연신 다행이라며 눈앞의 남자는 블란의 손을 잡았다. 눈물로 얼룩진 그록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보다 더 아파 보였던 그 눈동자가 이제 생기로 가득 차 온전히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블란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실감할 수 있었다.
나-
나 살았구나.
“하하-”
블란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는 점점 뿌예져갔다. 나도 이제 더 살 수 있구나.
아, 나도 이제.
그녀는 뿌예진 시야로 한 사람을 바라봤다.
아버지 레온이었다.
아버지도, 울면서 웃고 계셨다.
“블란. 오, 블란.”
그러면서 그저 자신의 이름을 자꾸 불렀다. 웃음소리가 나왔던 블란의 입에서 점차 울음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삶의 시간 속에서 살아왔던 나날들.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살았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끝났다.
꽈악.
조금의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한 남자.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도 블란을 바라봤다.
그록은 지금 이 순간 자신 역시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나도 이제 살아 있다.
째깍.
초침으로 가득 차 있던 블란의 시계에 시침이 생겼다.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도.
이제 우리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다시 그녀를 만난 지 2년이 된 이날, 오늘. 그록은 블란을 향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전했다. 그 목소리는 처음으로 말을 하는 것처럼 떨리고 또 떨렸다. 하지만 기쁨으로 가득했다.
“블란 양.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그녀는 답했다.
“저도요, 고맙고 사랑해요.”
그록의 얼굴 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가,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가 나타났다. 그록은 눈물로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서른 번째. 내가 나아서 같이 오래 살기.]
그 약속도 이제 이룰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