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59화 (58/95)

# 59화

59.

블란의 어머니 성함이라니.

베스 노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 이게.”

그록은 입을 열었지만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다시 입을 다물었다. 레온은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툭. 툭.

“멋진 성과를 이루어주어서 고맙네.”

과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 블란이 먼저 떠났을 때 그록의 어깨를 두드리던 그 손길이었다.

하지만 그 손길에 담긴 의미는 그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그록은 고개를 숙이며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 전한 마음에 레온은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아닐세. 내가 더, 아니 우리 부부가…….”

레온의 눈에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록 옆에 서 있는 블란이 보였다. 흔들리는 딸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는 그록에게 마저 전했다.

자신과 지금은 곁에 없는 아내의 마음을.

“우리 부부가 더 고마워. 평생의 소원이었거든.”

그록은 뭐라 답할 수 없는 레온 말의 무게에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고개를 한 번 더 숙였다. 그들 사이로 작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는 오래갈 수 없었다.

“그록!”

“어머니.”

루린과 레간이 졸업식장 앞에 나타났고 그록은 그들을 맞이했다. 레온에게 뭐라 말을 더 하고 싶어 그를 바라봤지만 레온이 먼저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그러곤 그록의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록은 무뚝뚝한 아버지가 레온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그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할 말이 있었다.

순간 아버지 레간의 눈도 그록에게로 향했고 그록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됐다.”

루린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그리며 블란의 팔짱을 꼈다. 움찔하던 블란은 곧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록!”

하지만 그 평화로움을 깨는 이가 있었다. 매튜였다.

“그록의 부모님이십니까? 전 그록 친구인 매튜라고 합니다. 잠시 이 친구 좀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찾는 이가 많아서요.”

찾는 이. 그록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갔다 오겠습니다.”

그록은 양해를 구하고 먼저 졸업식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가족들은 뒤따라 들어올 것이다.

“그록.”

레온의 목소리였다. 그록은 뒤돌아 레온을 바라봤다.

“제대로 밝히도록.”

아.

무엇인지 알아들은 그록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답을 대신하고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야, 그런데 웬일로 순순히 간다고 해?”

매튜의 들뜬 목소리에 그록은 그를 쳐다봤다. 질투와 기대. 상반된 두 가지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졸업식장 안으로 들어선 그록은 많은 이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오, 반갑네. 나 기억하지? 아버지도 오셨는가?”

“네.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연구소 소장의 물음에 답하며 그록은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 사이로 재크 교수는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하하하. 이거 우리 제자 보려고 다들 많이 왔구만.”

“자네 제자 보려고 왔나? 겸사겸사 천재가 있다길래 인사하는 거지.”

친한 이가 장난스레 답하는 말에 재크는 진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는 그록을 마치 귀한 보물을 보듯이 바라봤다. 무뚝뚝한 얼굴의 그록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졸업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록은 담담하게 답하며 재크 교수의 등 너머로 보이는, 한쪽 구석에서 졸업하는 3학년들 몇 명과 대화를 나누는 이를 바라봤다.

그 순간,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록 연구자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 길을 정했는가?”

그 물음에 주위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록은 졸업 후 어디로 갈 것인지 명확히 밝힌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 그의 행보를 상당히 궁금해 했다. 하지만 재크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록 역시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러 연구소 관계자들과 후원자들을 향해 말했다.

“아카데미에 남으려고 합니다.”

아.

누군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위에 있던 외부 관계자를 제외한, 이 곳에 시선을 집중하던 이들도 탄식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최고의 인재가 교수를 한다고?

하지만 그 순간 재크 교수만은 입가를 위로 씰룩이고 있었다.

면담 때 처음 그록이 아카데미에 남고 싶다고 했을 때 재크 교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된다면! 재크 자신이 가질 이득은 어마어마했다.

얼마나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지.

‘될 수 있으면 졸업까지는 비밀로 해두고 싶습니다.’

‘왜? 교수가 되기로 했으면 알리면 되지.’

‘그러고 싶습니다.’

그록의 말만 아니었으면 그는 아는 이들에게 죄다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물론 약초학과 학장과 의학계열 총 학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엄청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입가에 만연히 드리우며 말했다.

“교수 쪽을 원하더군요. 역시 특별한 친구 아닙니까? 앞으로 서 우드 약초학과가 아주 크게 이름을 떨칠 것 같습니다. 하하하.”

몇몇은 묘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이 재크, 여우같은 교수 놈이 빼돌린 건가? 감언이설로?

한 연구소 직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이럴 줄 몰랐구만. 교수라니, 재크 교수님이 어지간히 잘해주었나 보군.”

“하하하하, 그런가?”

재크 교수의 입꼬리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고 닭 쫓던 개가 된 주위 연구소 직원들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은 다른 표정을 지었다. 재크 교수와 친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기회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른 이도 아닌 재크 교수의 밑으로 간다면 박사 과정 동안 겸임 연구원으로 빼돌려서 그동안 투자를 받으면 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재크와 친한 이들 중 한 명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록에게 말했다.

“그러면 재크 교수 밑에서 열심히 배우겠구만!”

하지만,

“아닙니다.”

무뚝뚝하게 답하는 그록의 답에 순식간에 그 미소가 사라졌다.

“재크 교수님 밑에서 배우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재크 교수는 그록의 어깨 위에 올려둔 손을 치우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록은 담담한 얼굴로 재크 교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자연히 그 시선을 따라 다른 이들의 시선도 움직였고 재크 교수도 따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자신의 담당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레이 교수가 보였다.

설마?

재크의 머릿속에 그록의 지금 실험실이 그레이 교수가 내어준 곳임이 떠올랐다.

설마?

힘도 없는 교수 밑으로 들어간다고?

자신이라는, 편한 길을 두고?

황급히 재크는 그록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록은 말했다.

“그레이 교수님께서 이번 연구에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제 연구 성과는 모두 그분 덕분입니다.”

허.

곁에서 듣던 남자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며 재크 교수를 바라봤다.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듯한 재크 교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그록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박사 과정은 그레이 교수님 밑에서 많이 배우며 보내려고 합니다.”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점점 얼굴이 시뻘게지는 재크 교수와 담담한 얼굴의 그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저 멀리 그레이 교수를 바라봤다.

아무리 재크 교수의 힘이 막강하다 해도 서 우드 아카데미 전체에서, 아니 한 학계에서 주목하는 천재인 그록의 앞길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 그리고.”

그록은 흘러가듯이 말했다.

“저 후원자가 있습니다.”

“음? 어딘가?”

후원자가 있음은 눈치채고 있었다. 쉴단 연구는 바서 가문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재력이 필요 했다. 하지만 후원자의 정체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록은 자신을 찢어버릴 듯이 바라보는 재크 교수를 향해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이 자리의 모두가 처음 보는 그록의 미소였다.

“샤를 가문에서 받고 있습니다. 레온 샤를 님께서 제 후원자이십니다.”

재크의 매서운 눈빛에 어떤 당황이 물들었다.

샤를 가문이라고?

연구 쪽에서 많이 들리는 후원자 가문은 아니었지만, 왕립 연구소를 제외하고 그 규모가 최대인 밀러 연구소를 차린 밀러 가문에 비견해도 밀리지 않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레온 샤를은, 현재 가주의 친동생이었다.

“……이런.”

한 사람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는 그록을 바라봤다.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조용히 연구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이 어린 천재는, 생각보다.

세상사에도 똑똑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록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선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지도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레이 교수의 곁이었다.

그들의 눈에 자신들과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환한 표정을 지은 그록이 보였다. 그런 그록의 곁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은 바서 가문의 레간 바서 연구자와 샤를 가문 현 가주의 친동생 레온 샤를이었다.

그리고 곧 잠시 뒤 그록의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표 인사는 수석이자 서 우드 아카데미의 자랑, 올해의 논문 주인공 그록 바서 군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록은 수석 졸업을 했으며 곧 그의 향후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서 우드는 물론 약초학계를 달구었다.

“졸업 축하해요.”

블란이 건네는 인사에 그록은 미소를 그렸다.

그록의 아카데미가 끝이 났다.

돈자팔로 외면 받던 때와는 정반대로.

그리고 그록은 다시 다른 졸업식장에 앉아 있었다.

블란의 졸업식장이었다. 그록의 부모님은 일 때문에 미리 블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돌아갔고 레온과 펠, 그록이 함께 앉아 저 앞에 앉아 있는 블란을 바라봤다.

“이번 졸업식에는 특별상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리 남 우드 아카데미 이름을 알린 졸업생에게 전하는 상입니다!”

사회자의 힘찬 목소리가 졸업식장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그록의 귓가에 닿았다.

“블란 선배 아냐?”

“보나마나, 그 선배겠지. 시 천재잖아.”

“아, 부럽다.”

부럽다.

그록은 묘한 기분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 그런데 그 선배 남자친구도 엄청 능력 좋다며?”

크흠.

레온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렇지. 잘난 두 사람끼리 만난 거지.”

“그런데 블란 선배 병 있지 않아?”

“그거 남자친구가 고치려고 연구 중이라던데? 천재니까 고치겠지.”

“이야. 둘 다 대단하네.”

두 여학생의 속닥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록은 곧 들려온 사회자의 목소리에 단상을 바라봤다.

“그 주인공은 바로, 블란 샤를 양입니다! 우리 남 우드 아카데미의 자랑인, 아주 훌륭한 학생이죠. 블란 양은 단상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록은 단상 위로 올라서는 블란을 바라보았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똑바로 앞을 바라보는 블란이 보였다.

그 모습에 절로 그록은 블란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졸업 축하합니다.”

졸업식이 모두 끝난 후 블란은 그록이 한 번 더 건네는 인사에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고마워요, 그록 씨.”

“크흠. 그록이 찰리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하던데, 그리로 가지.”

“네, 아버지.”

블란은 그록과 레온, 펠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에게로,

“졸업 축하해요, 선배님!”

“우리 동아리 자랑!”

글마음 문학 동아리 회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 어?”

당황한 그녀의 품 안에 졸업 선물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문학 담당 교양 교수와 다른 교수들이 찾아왔다.

“축하해요. 블란 양.”

“감사합니다, 교수님.”

블란은 정신없이 축하 인사에 답을 해야 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쏟아지는 축하 인사를 모두 다 받고 난 블란은,

“하이고, 우리 아가씨 다 들기 힘드실 텐데. 좀 들어드릴까요?”

“아, 네. 감사합니다.”

“뭘요.”

펠과 레온, 그록에게 받은 선물을 나누어 들게 해야 했다.

“그럼 이제 가자구나.”

블란은 어깨를 쫙 펴고 자랑스러움을 얼굴 한가득 담은 레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한 무리가 보였다.

제니와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블란 자신을 매섭게 바라보는 시선이 보였다.

‘네 처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돈혐지면 돈혐지답게 살아야지, 안 그래?’

‘맞아, 주제에 맞게 살아야지. 저건 샤를 가문의 수친데, 그걸 모르나 봐?’

떠오르는 기억에 블란은 이상하게 자꾸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니를 향해 미소를 그려 보이곤 손을 흔들어보였다. 순간 멈칫하는 제니가 보였다.

“신기하네.”

“음? 뭐가 말입니까? 블란 양.”

“아, 아니에요.”

블란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반응하는 그록에게 아니라고 답하고선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제니와 그 무리들의 시선이 보였지만.

글쎄.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블란, 밥 먹고 나면 저택을 둘러보도록 하자.”

“네. 아버지.”

그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크흠, 그록 자네도 가지.”

“네.”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는 레온과 그록을 보며 블란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의 아카데미는 끝이 났다.

그리고 봄이 왔고, 두 사람에게는 힘겹지만 꼭 거쳐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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