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58화 (57/95)

# 58화

58.

새해의 아침. 아스트는 이른 시간임에도 실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록 바서]

문에 적힌 이름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분명 어제 교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러 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여기서 밤을 샜을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잠을 자지 못해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을 못난 후배 놈의 얼굴이 그려졌다.

분명 비실대고 있을 것 같은데?

아스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며 외쳤다.

“야!”

그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살아 있냐?”

그러고는 그는 굳었다.

실험실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리고 특유의 쓰고 역한 향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록이 연구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순간 무언가 덜컥하는 기분에 아스트는 빠르게 그록에게로 다가갔다.

설마!

“야, 야. 너 왜 이러고 있냐? 어?”

그는 눈을 감은 그록에게로 다가가 황급히 그의 어깨를 잡고선 흔들었다. 힘없이 그록의 상체가 아스트의 손을 따라 들렸다. 아스트의 얼굴에선 당황스러움과 걱정이 흘러넘쳤다.

“야. 그록! 야!”

그 순간,

“잘 겁니다. 건들지 마십시오.”

눈을 감은 채 그록이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아스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오!”

아스트는 걸레를 패대기치듯이 그록의 어깨를 던지듯 놓았고 그록은 그대로 툭! 하고 다시 연구실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그록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고 아스트는 이를 보며 열을 냈다.

“야! 잘 데가 없어서 연구실 바닥에서 자냐? 어? 사람 놀라게!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가, 이 자식아! 감기 걸리면 너 이제 실험도 못 해! 어? 도대체가 무슨,”

“실험 당분간 안 할 겁니다.”

“어?”

열을 내며 목소리를 높이던 아스트는 굳은 채로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아스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들은 말을 떠올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험대 위가 깨끗했고 그록의 옷은 구겨진 채 엉망이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 가득 피곤이 보였다.

“야. 그,”

아스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땅바닥에 누운 그록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그, 사람이 살다 보면 안 될 때가 있지. 암, 그렇지. 그그럴 땐 잠시 내려놓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충분히 도움이 될 거야. 그, 두 발짝을 뛰기 위한 한 발짝의 어떤 물러섬은 충분히,”

“성공했습니다.”

“……좋은……어?”

아스트는 어벙하게 되물으며 그록을 바라봤다. 껌벅껌벅. 눈을 감았다 뜨던 아스트는 다급하게 그록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뭐라고? 성공했다고? 어?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냐? 내 귀 아직 정상인데? 응?”

눈을 감고 있던 그록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아스트는 아주 상쾌하고 맑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자식, 진짜로!

진짜로!

“네. 제대로 들었습니다. 성공했습니다.”

그록은 다급한 얼굴의 아스트를 향해 한 번 더 답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아스트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갔다. 실험대가 아닌 한쪽에 놓인 책상 위. 유리곽 안에 담긴 어떤 약이 보였다.

다시 그록을 봤다. 그록이 웃고 있었다.

순간 몇 초의 정적이 흘렀고. 그 정적의 끝에서.

“우와아아아아아아!”

아스트는 실험실이 떠나가라 아주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순간 너무 큰 환호성에 그록이 놀라서 아스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스트는 그런 시선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의 연구가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감격에 겨워했다.

“우와! 와, 야! 진짜!”

그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야, 진짜! 야! 너!”

환호를 지르면서도 아스트가 울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록은 실험을 성공했을 때와 다른 묘한 감동이 일었다.

“왜 본인이 그렇게 좋아합니까?”

그록은 무뚝뚝하게 물었지만 아스트를 보는 눈빛에는 고마움이 가득했다.

“인마! 이게 조금 좋을 일이냐? 진짜, 와. 내가 진짜, 진짜!”

아스트는 연신 환호를 하며 그록에게 다가오더니,

“뭡니까?”

와락 그록을 껴안았다. 무뚝뚝한 그록의 말에도 아스트는 그록의 등을 세게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했다. 진짜 고생했어! 진짜 네가 최고다! 진짜!”

“등 아픕니다.”

“아프긴, 아니지! 오늘은 좀 아파도 돼!”

그록은 한참 동안 아스트의 축하 등 때림을 받아야 했지만,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았다. 아스트는 진정을 하자마자 그록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정말 성공한 것 맞지?”

“네.”

“와. 이거 학계가 한 번 더 뒤집히겠네. 진짜 맞지?”

“맞는다고 지금 몇 번 말씀드린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럼 이제…… 한 가지만 남았겠네?”

아스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흐리며 묻는 말에 그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블란 양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나머진 제가 하면 되니까요.”

“그래. 잘 될 거다.”

아스트는 확신했다. 잘 될 거다.

그록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이를 아스트는 멀뚱히 바라봤다. 그록은 아스트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가죠.”

“어딜?”

“배고픕니다. 그리고 편지 부쳐야 합니다.”

“하하하하! 그래, 그래. 내가 쏜다!”

그록은 총 네 통의 편지를 품에 지녔다.

꼭 알려야 될 사람들이었다.

“아, 가기 전에 교수님께도 들렀으면 합니다.”

“그레이 교수님?”

“네.”

“그래, 하하. 아, 진짜 좋네! 새해부터 뭔가 촥촥! 풀릴 건가 보다! 이야!”

들뜬 아스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록은 실험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편지를 부쳤다.

그 편지들은 각각의 목적지로 향했고 주인들에게 전해졌다.

“아.”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집사 지트는 어딘가 멍하게 굳은 채 앉아 있는 블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곧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아, 아가씨!”

블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블란은 다가오는 집사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울면서 미소를 입가에 그려 넣었다.

[완성했습니다.]

단 한 줄에 블란은 울고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줄을 받은 또 다른 사람은,

[베스 노옐 님께. 워보트 병 1차 치료제를 완성했습니다.]

그 자리에 굳어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레온은 한참 동안 편지에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는 그록처럼 두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떨리는 손 틈 사이로 오랫동안 쌓은 절망이 기쁨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레온은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손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편지를 적셨다.

그록의 편지는 두 사람에게 더 전해졌다.

[아버지. 성공했습니다.]

레간의 손에는 처음으로 그록이 보낸 편지가 들려 있었고,

[어머니. 저 실험 성공했습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루린의 손에도 아들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록이 보낸 네 통의 편지는 그의 바람처럼 네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다주었다.

***

겨울 방학이 끝나고 2월이 되어 다시 만난 그록을 보며 블란은 얼굴 위에 걱정을 드리웠다.

“그록 씨?”

“아, 네. 블란 양.”

왜?

블란은 의문을 가졌다.

그록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못했다.

그녀는 그록을 보자마자 성공을 축하하며 함께 기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다시 마주한 그록은 어딘가 망설임을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혹,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블란의 얼굴도 그록처럼 어딘가 흐려져갔다. 그 순간 그록은 입을 열었다.

“방학은 잘 보내셨습니까?”

“네! 치료도 열심히 받았고 약속했던 것들 다 열심히 했어요.”

그녀는 일부러라도 최대한 밝게 답했다. 그록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어렸다.

“아! 졸업식 때 후원자님이 오신다고 했죠?”

“네. 졸업식 때 뵙자고 하시더군요.”

“오. 잘됐어요.”

그록은 기쁘게 미소를 그리는 블란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며칠 동안 다시 만날 블란을 떠올리며 고민했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블란의 선택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록은 점원이 두고 간 알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쓴 향이 입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쉴단과 프시아 뿌리보다는 훨 못했다.

그 역함은.

탁.

찻잔을 차탁에 내려놓으며 그록은 입을 열었다.

“약이 개발되면 바로 상용화하지 못합니다.”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은 블란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는 덤덤하게 지식을 전해주듯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 개발한 치료제가 정말로 효용이 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통 지원을 한 해당 질병의 환자에 의해서 실행되거나 혹은 다른 다양한 경로를 이용합니다.”

담담한 그록의 말이 블란의 귓가에 닿았다.

블란은 그제야 그록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왜 얼굴이 어두웠는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개발자가 100% 확신을 해도 실제로 100% 효능을 보일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과정이고 또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남은 블란의 선택.

그것은 1차로 완성한 이 치료제를 사용할지 안 할지의 문제였다.

“그래서,”

“하지만.”

음?

그록은 자신의 말을 끊고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블란이 보였다. 그녀는 작게 미소를 그리며 잔잔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희귀병 환자들 중에 몇몇 이들은 그 치료제라도 간절히 원하는 것으로 알아요.”

블란의 말에 그록은 이어 말했다.

“그 약이 아주 독합니다.”

블란은 답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주 힘겨운 과정이 될 것입니다.”

“아뇨.”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블란은 그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기쁘고 행복한 과정이 될 거예요.”

아.

그록은 환하게 미소 짓는 블란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주먹을 쥐고선 말했다.

“아직 상용화 전의 약을 완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아뇨.”

블란은 단호하게 답했다.

“전 믿어요.”

또렷한 눈빛이 그록을 향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참으로 따스했다.

“그록 바서라는 연구자를 전 믿어요.”

아무 말이 없는 그록을 향해 블란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저는 제 믿음을 믿어요.”

정말이지, 이 사람은.

세게 쥐고 있던 그록의 주먹이 서서 풀려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블란은 그런 그록을 기다렸다. 그록은 가만히 찻잔을 바라보다가 다시 블란을 보며 말했다.

“힘들고 지칠 겁니다.”

그 말에 블란은 단 한마디만 했다.

“하고 싶어요.”

그 말에 그록은 답했다.

“옆에 있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힘들고 지친 과정.

그 옆에 있겠다는 그록의 말에 블란은 환하게 미소를 그렸고 그 미소를 보며 그록은 다시 한 번 느꼈다.

자신은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록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의 진행과정에 대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네.”

“우선 아버님께 연락을 드려 동의를 받고, 춥고 건조한 때보다는 봄이 신체 활성이 더 좋을 때니 봄이 되면 시작하려고 합니다.”

천천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그록은 말했고 블란은 이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그날 돌아온 블란의 일기장에 한 글귀가 적혔다.

[함께 꼭 이겨내자.]

그록을 가로막던 높디높은 산은 사라졌고 이제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이 함께 오를 마지막 산만이 남았다.

하지만 둘은 그 산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

우드 아카데미에 졸업 시즌이 다가왔다.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의 학창 시절이 끝남을 알리는 날이었다. 블란보다 그록의 졸업식이 먼저 열렸다.

이번 졸업식은 작년과 사뭇 달랐다.

곧 3학년이 될 2학년 두 명은 주변을 둘러보며 졸업식장을 정리해나갔다. 그들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와. 저 사람 왕립 연구소 사람 아냐?’

“이야, 진짜네. 올해 아무도 왕립 연구소에 못 갔다며?”

“어. 딱 한 자리가 나서 그록 바서 선배를 부르려고 했는데 그록 선배는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고.”

“너 그록 선배랑 친하냐? 어찌 그리 잘 알아?”

“안 친해. 그냥 건너 건너 들은 거지.”

작년보다 조금 더 많은 외부 인사가 보였다.

그리고 분위기가 조금 많이 달랐다. 그 색다른 분위기를 만든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 선배는 진로 어디로 결정했대?”

“몰라. 가고 싶은 데는 다 가지 않을까? 좀 있으면 들리겠지. 어디로 가는지. 오, 저기 오네.”

두 남학생은 졸업식장으로 들어서는 그록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록은 들어오다가 말고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블란 양?”

“그록 씨!”

블란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그 뒤로 레온과 비서 펠도 보였고 그록은 그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은 아직 안 오셨어요?”

“네. 좀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록의 부모인 루린과 레간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록은 레온에게로 다가갔다. 찾아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이였는데, 그록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인사를 했다.

“치료제.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레온은 묵묵히 그록을 바라봤다. 블란은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이 가자꾸나.’

‘아버지도요?’

‘그래.’

블란의 졸업식과 그녀의 졸업 후 우드 시에 머물 저택을 구하러 왔던 레온은 블란보다 더 서둘러 그록의 졸업식에 갈 채비를 했다.

블란은 괜히 그 모습이 좋았다.

“결과는 이미 받았네.”

그록은 레온의 말에 그의 눈을 바라봤다. 무인 특유의 매서우면서도 굳건한 눈빛이 보였다. 하지만 그록은 그 눈빛 속에서 블란을 향해 절규하던 그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반갑군.”

음?

갑자기 레온이 건네는 말에 그록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나타났다. 그 순간, 레온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어?”

그록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레온의 손 위에 들린, 편지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자신이 후원자 베스 노옐에게 보낸 그 편지였다.

그 순간 레온이 입을 열었다.

“자네 후원자의 남편이네. 반갑네.”

블란이 이번엔 굳었다.

……엄마?

“베스 노옐. 내 아내의 이름이지.”

담담한 얼굴 위로 레온이 작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은 여전히 굳은 채 레온과 그의 손 위 편지만을 바라봤다.

그록의 후원자가 드디어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 사람은 베스 노옐. 블란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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