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57화 (56/95)

# 57화

57.

마지막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블란은 조금씩 찬바람이 세어 들어옴에도 창가에 서서 떠올렸다.

‘당분간은 편지를 자주 못 쓸 수도 있습니다. 조금 늦게 답이 갈지도 모릅니다. 이번 방학 동안에는 연구에만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생각입니다.’

고향의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그록이 건넨 말이었다.

예전 끼니도 거르면서 매달린 적이 많은 그록이기에 블란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을 열려고 했지만.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잘 겁니다. 하지만 한 곳에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해서 그렇습니다.’

그 다짐에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록의 얼굴은 이전에 보였던 어떤 절박함 대신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블란은 강하게 느꼈다. 그록 씨에게 정말 중요한 순간이구나. 그렇기에 블란은 답했다.

‘네. 기다릴게요.’

순간 그 말에 놀라며 다급하게 뭐라 말하려고 하던 그록에게 블란은 덧붙였다.

‘제 할 일 하면서요.’

블란은 그 순간 묘한 표정을 짓던 그록이 떠올랐다. 그런 그에게 블란은 자신의 겨울 방학 계획을 말했었다.

‘치료도 열심히 받을 것이고. 끼니도, 잠도 다 제대로 지킬 거예요. 그리고 시를 열심히 쓰려고 해요. 그래서-’

자신의 말에 편안한 표정을 짓던 그록이 떠올랐다.

‘저는 제 시집을 준비할 거예요.’

가만히 있던 그록은 블란의 말에 답했다.

‘응원하겠습니다.’

‘저도 응원할게요.’

블란은 진심으로 기도하고 응원했다.

하지만 이를 많이 티 내지 않았다. 그록의 연구에 부담을 주기는 싫었다. 그가 연구를 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말 대신에 최대한 잘 지낼 것이다.

가끔씩이라도 오는 그의 편지에 즐겁게 답할 수 있도록.

‘그래서 시집 완성하면 그록 씨에게도 꼭 드리고 싶어요.’

블란은 자신의 말이 끝났을 때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분명 편안하게 웃고 있었던 그록이었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 기쁨과 슬픔이 같이 보였었다.

하지만 이내 슬픔의 기색은 눈동자에서 서서히 사라졌고 그록은 블란에게 답했다.

‘네.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블란은 그 말에 환하게 웃었던 기억이 났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블란은 창가에서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아버지 레온이었다.

“네.”

블란은 답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 뒤에 서 있는 비서 펠의 품에 안긴 수많은 문서들과 편지들이 보였다.

“이, 이게 다 무엇인가요?”

얼떨떨한 얼굴로 묻는 블란을 향해 레온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게 말이지.”

레온은 헛기침을 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블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블란, 너를 후원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친 사람들이 보낸 문서와 각종 문인 관련 협회에서 보낸 초대장들이다.”

“저, 저한테요?”

눈을 크게 뜨는 블란을 향해 비서 펠이 대신 답했다.

“네, 아가씨. 아가씨께서 샤를 가문 출신임을 알면서도 보내는 걸 보니까 어지간히 후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왕국에서 알아주는 무예 가문인 샤를 가문은 그 권력도, 재력도 훌륭한 편이었다. 그런 가문의 직계는 아니지만 직계와 아주 가까운 편인 블란에게 후원을 하고 싶다는 말은,

‘샤를 가문과 연을 닿길 원하거나 아니면-’

앞으로 얼마나 그 재능을 펼칠지 모를 시인의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컸거나.

후원자로 나선 이들의 목록을 보며 비서 펠은 후자의 경우가 반 이상은 되리라 짐작했다.

아직 블란은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자그마치 고 케인 시인 이후로 시부문 최연소 수상자였다. 그런 이를 후원하고 싶어 하는, 시를 사랑하는 이들은 왕국 내에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이 후원자 목록에는 블란이 깜짝 놀랄 만한 사람도 있었다.

비서 펠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편지는 나도 겉만 보았는데, 크흠.”

멍한 표정의 블란과 달리 레온은 눈을 빛내며 점점 짙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유명한 문인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더구나. 그리고 팬이라는 이들도 편지를 보낸 것 같은데.”

팬?

순간 블란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유명한 문인들의 편지도 놀라웠지만 팬이라니?

팬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나를? 내 시를?

촤르르륵.

멍한 표정을 한 블란에게 비서 펠이 다가와 문서와 편지들을 탁자 위에 펼쳐놓으며 말했다.

“아가씨, 힘드시겠습니다.”

“네?”

여전히 멍한 블란을 향해 펠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다 읽어보려면 오늘 하루 종일 붙들고 있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크흠,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네. 이야, 이거 편지만 읽기도 힘들 것 같은데. 후원자들도 다들 쟁쟁한 것 같고.”

블란은 자신의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레온과 펠의 모습을 보며 차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점차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점점 레온과 펠의 대화가 블란 자랑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크흠, 능력이 되니 이리 오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기야 하죠. 우리 아가씨가 조금 뛰어나신 분이십니니까? 자그마치 탄신일 기념 문예 공모전에서 최. 우. 수. 상을 받으셨는데요.”

“그렇지. 암, 대단하지. 우리 샤를 가문에서 무가 아닌 문으로 이렇게 뛰어난 사람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하하하하, 그렇죠!”

벌써 몇 번째 듣는 이야기인지 모를 둘의 대화에 블란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말릴 순 없었다. 요즘 아버지는 늘 웃고 다니셨다.

“크흠, 그럼 이만 갈 테니 천천히 다 읽어보거라.”

“네, 아버지.”

비서 펠은 레온을 힐끗 쳐다봤다. 레온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블란에게 말했다.

“그리고 후원을 하고 싶다는 이들에게서 온 서류들은 특히 세세하게 읽어보도록 해라. 빨리 결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이니,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네, 아버지.”

비서 펠은 블란의 책상 위 후원자 관련 서류를 살펴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그러면 이만 가마.”

펠은 레온을 따라 블란의 방을 나왔다. 그는 은근슬쩍 레온의 옆에 서며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 말 안 하십니까?”

“무엇을 말인가?”

크흠!

레온은 답을 회피하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펠은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대하는 레온의 표정을 보고선 잠시 뒤돌았다. 닫힌 블란의 방문이 보였다. 아마 저 방문 너머의 아가씨는 지금쯤 놀라고 있으리라.

묘한 즐거움이 그의 눈가에 머물렀다.

그리고 펠의 시선이 닿은 그 문 너머 방 안에 혼자 남은 블란은,

“어?”

놀라고 있었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얼떨떨한 마음으로 제일 위에 놓인 후원자 관련 서류들 이름부터 대충 훑어보려던 그녀는 네번째 서류에서 멈춘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이게 무슨!”

그녀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닫힌 문이 보였다. 블란은 한참 동안 그 문을 보다가 다시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봤다.

[샤를 가문의 레온 샤를이 블란 샤를 작가님을 후원하고자 합니다.]

레온 샤를.

그 글자에 시선이 박힌 채 떠날 줄을 몰랐다.

블란은 이럴 때마다 느꼈다. 시를 쓰기 정말 잘했다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선 아버지가 보낸 후원 제안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집무실로 향하던 비서 펠은 레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록 씨에게는 언제 밝히실 겁니까?”

레온은 흘러가듯이 편하게 답했다.

“졸업 때 말하려고.”

“오! 밝히긴 밝히실 건가 봅니다?”

“당연한 소릴.”

비서 펠은 블란의 졸업식뿐만 아니라 그록의 졸업식 날짜도 미리 알아두어 스케줄을 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뭇 기대되었다.

입학식과 다를 블란 아가씨의 졸업식 풍경이.

그리고 지금 최고로 이목을 끄는 또 다른 인물, 그록 바서의 후원자가 미리 정해져 있음을 안 연구소와 후원자들의 얼굴이 어떠할지.

집무실로 향하는 펠의 걸음은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 꽤 가벼웠다.

하지만 다른 한 곳에서는 한숨을 깊게 내쉬는 사람이 있었다.

“야, 야. 너 진짜.”

아스트는 오랜만에 찾은 서 우드 아카데미임에도 기쁜 기기색을 띠기는커녕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이고, 내가 진짜 무슨 전생에 네 엄마 였던 것도 아니고!”

그록의 무뚝뚝한 물음에 아스트는 더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그록의 실험실 앞 편지함을 열었다.

그 순간.

촤르르르르르륵.

수많은 편지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에 아스트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오자 마자 네 편지부터 정리해야 하냐? 너 편지 안 봐?”

“바쁩니다.”

“허이구!”

그록은 별다른 답 없이 문을 열고선 혼자서 자신의 실험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 이!”

아스트는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곧 한숨을 내쉬고선 떨어진 편지를 주웠다. 조금 전까지 그록의 실험실 앞 작은 편지함을 폭파해버릴 것처럼 꽉 차 있던 편지의 수는 꽤 많았다.

그 편지들을 아스트는 정리하며 무심한 얼굴로 발신인을 봤다. 하지만, 점점.

“오.”

밀러 연구소는 역시 연락을 했군.

“이야.”

베어 가문이면. 이야, 여기 진짜 돈 많은 덴데 웬일로 연구자 후원을 다 한대?

“……헐?”

아스트는 한 편지를 보고선 입을 벌렸다. 이, 이건!

[매키니 재단.]

“미친.”

현존하는 약초학계 최고의 권위자 매키니가 설립한 재단으로, 그 재단은 연구소 하나를 만들어 운영 중이었다.

약초학 연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었다.

물론 돈이야 왕립 연구소가 더 많이 받았지만, 매키니 연구소를 높게 쳐주는 이유는 경력이 10년 이상 된 연구자들 중 그 업적과 실력을 인정받은 소수의 인물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이 때문에 천국이냐?

돈 신경 안 쓰고 자신이 하고픈 것을 한다는 점에서 천국이었다.

‘아스트 연구원. 서 우드에 간다고 했던가?’

‘네. 소장님.’

‘그러면 이것 좀 부탁하네.’

아스트는 자신의 안주머니에 있는 왕립 연구소 소장이 건넸던 제안서를 떠올렸다. 그록을 신임 연구원으로 모셔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흐음.”

아스트는 묘한 표정으로 매키니 재단에서 온 편지를 비롯한 모든 편지들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다들 안 됐네.”

그록은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쉴단을 연구하는 동안에는 이미 베스 노옐이라는, 어찌 보면 정말 그록에게 딱 맞는 후원자가 있었고. 교수가 되기 전 박사 과정을 밟을 때에도 연구소 생활을 겸할 수 있지만, 그록은 전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쯧쯧. 다들 괜한 짓을 하네.”

하지만 혀를 차는 아스트는 그 말과 달리 입꼬리를 위로 씰룩이며 올리고 있었다. 그는 방금 그록과 대화하면서 그가 흘러가듯이 한 말이 떠올랐다.

‘재크 교수는 어떻던?’

‘……너무 잘해줍니다.’

‘자기 밑에 들어오라는 사랑의 신호인가?’

자신이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그록은 답했다. 아주 단호하게.

‘그런 신호 필요 없습니다. 절대 밑에 안 들어갑니다.’

“흐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가 아스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이고, 재크 교수 나중에 물 먹을 생각 하니까 왜 이리 웃음이 나오지, 아이고.

아스트는 혼자서 편지를 정리하며 실실 웃었고 곧 정리를 모두 끝내고 그록의 실험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윽.”

독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연구자인 그로서도 참기 힘든 향이었다. 혹 들어올 먼지를 염려하는지 창문조차 닫혀 있어 역한 냄새가 더 심했다.

“쓰십시오.”

아스트는 그록이 던지는 마스크를 받아 코와 입을 가렸다. 한결 나아진 그는 편지를 한쪽 구석에 올려두며 물었다.

“야. 그런데 너 블란이랑 부모님, 그리고 후원자 편지는 어떻게 하냐? 저렇게 쌓아두면 다 못 받을 텐데.”

“그 편지들은 기숙사로 옵니다.”

“아.”

역시.

아스트는 그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실험을 준비하는 그를 지켜봤다.

“실험 시작 전에는 나갈게.”

“보고 가셔도 됩니다만.”

“됐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 텐데. 옆에서 알짱거리기 싫다.”

아스트의 답에 그록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계속 좀 보여 달라고 보채는 매튜나 은근슬쩍 참관을 원하는 재크 교수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스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한쪽에 서서 실험을 준비하는 그록을 지켜봤다. 그 시선은 연구자로서 한 연구자에게 보내는 존경을 담고 있었다.

“다 된 것 같네.”

“아직 조금 멀었습니다.”

“에이, 거의 다 됐구만. 난 간다. 그레이 교수님 연구실에 있을 거니까 생각 있으면 와. 교수님하고 같이 나중에 저녁이나 먹자. 바쁘면 말고.”

“네. 보고 시간이 되면 가겠습니다.”

“그래. 아.”

아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요새 밥은 잘 챙겨먹지?”

“보면 아시잖습니까?”

그록을 찬찬히 살펴본 아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괜찮네.”

이전보다 연구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도 그록의 모습은 평소와 같이 깔끔했다. 아스트는 실험실 문을 열고 나서며 말했다.

“어쨌든 저녁엔 보자. 그래도 올해 마지막 날인데 무리하진 마라.”

“네.”

달칵.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그록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선 한쪽 구석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아스트에게 보여줄 용의가 있었지만 어찌 안 것인지 미리 나가버린 그였다.

“후우.”

쉴단과는 다른 실험용으로 그록이 자체적으로 가공한 프시아 뿌리의 독한 향이 그의 코를 찔렀다.

익숙해지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쉴단처럼.

그록은 달력을 바라봤다.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

그는 한쪽 구석 책상을 바라봤다.

[그록. 엄마랑 아버지는 따뜻하게 한 해를 마무리할 것 같구나. 네가 없어서 엄마도, 그리고 아버지도 많이 아쉬워. 그래도 졸업 때 보겠지? 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졸업 때 뵈었으면 해요. -베스 노옐]

혼자만 남겨진 실험실이었지만 책상 위의 편지들 덕에 외롭지 않은 그록이었다.

[저도 다음에는 꼭 새해를 같이 보냈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어요. -블란]

나도 보고 싶다.

앞으로 계속. 오랫동안.

그록은 다시 실험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실험을 시작했다. 올해의 마지막 실험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덜 긴장이 되었다. 묘한 느낌이 손끝에 감돌았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말해주었다.

‘지금 실험을 해라.’

쉴단의 뿌리를 손에 쥐며 그록은 간절히 바랐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실험 때마다 담아왔던 그 마음을 담아 실험을 진행했다.

쉴단의 독한 향과 프시아 뿌리의 역한 내가 실험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록은 얼굴 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실험을 이어나갔다. 그의 이마에는 점차 땀방울이 맺혀 갔다. 그록은 혹 실험이 잘못될까 봐 땀을 닦아가며 조심스럽게 연구를 진행했다.

마지막 남은 산.

그 산을 넘어야 했고, 넘고 싶었다.

‘기다릴게요.’

블란이 기다린다고 했고.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자신도 기다린다고 했다.

블란이 저 말을 내뱉고 자신이 저렇게 답을 한 순간 그록은 느꼈었다.

과거와 달라졌구나.

우리 사이의 기다림의 의미가 달라졌구나.

그렇기에 그록 자신도, 앞으로의 미래도.

달라져야 했다.

그록은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른 채 연구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찌나 정신을 쏟는지 그의 등에는 땀이 한가득했다. 마치 마지막 남은 심지를 태우는 촛불처럼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째깍째깍째깍.

작은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록은 독하고 역한 냄새들과 함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째깍째깍째깍.

그리고 마침내.

“아…….”

그록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새까맣게 물든 장갑의 손끝이 보였다.

째깍째깍째깍.

시계 소리만이 들리는 정적으로 가득 찬 실험실에서,

그록은 주저앉았다.

쾅!

덩달아 뒤에 있던 의자가 넘어지며 큰 소리를 냈지만 그록은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는 온몸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됐어.”

됐어.

완성했어.

성공했어.

그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됐어. 성공했어.

힘이 다 풀린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록의 온몸도 힘이 빠진 채 떨고 있었다.

째깍째깍째깍.

“……으윽.”

괴로움의 호소인지 혹은 기쁨의 환호일지 혹은 무엇일지 모를 것이 그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짧은 소리 외에는 더 이상의 어떤 소리도 그록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수많은 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아, 네. 그, 내, 냄새 심하죠?’

‘당연합니다. 쉴단은 원래 냄새가 독한데 약용으로 재가공하면 더 그 향이 진해지니까요. 좋은 약을 쓰나 보군요. 쉴단은 좋을수록 향이 강하지요.’

쉴단을 알게 되고.

‘그, 그록 씨! 그록 씨라면 자, 잘 해낼 거예요! 그, 미래의 후원자로서 응원할게요!’

연구하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분명히 결과를 가져다주겠소.’

‘그, 연구자로서 후원자에게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또 기약 없는 연구를 계속하고, 그리고 마침내.

‘네. 기다릴게요.’

성공했다.

그는 한참 동안 혼자서 주저앉은 채로 얼굴을 가리고선 가만히 있었다. 아주 한참 동안.

째깍째깍째깍.

시계 초침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초침이 마침내 실험실에 0시를 알렸다.

그 순간.

딩- 딩- 딩-

실험실 밖에서 0시를 알리는,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드 시 중앙 광장에서 열띤 환호와 함께 종소리가 그록의 귓가에 닿았다.

실험대 위에는 가공까지 모든 것을 끝마친 워보트 병 치료제가 놓여 있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이자 과거의 10년을 넘어.

18살의 마지막 날. 그리고 19살의 시작.

끝과 시작의 사이에서 그록은 맞이했다.

미래라는 이름의 선물을.

하지만 아직 그 선물을 받으려면 넘어야 할 고비가 하나 있었다.

그록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블란의 편지가 놓인 책상을 바라봤다.

이제 남은 것은 블란의 선택과, 블란과 자신이 함께 헤쳐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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