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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56화 (55/95)

# 56화

56.

오랜만에 아버지와 마주한 그록은 한참 동안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레온, 블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소리가 그들에게서 들려왔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부자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이거 받거라.”

레간은 그록에게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록은 순간 멈칫했다가 이를 받아들었다. 그의 눈에 손끝이 시꺼멓게 물든 아버지의 손가락이 보였다.

뭐지?

그록의 얼굴 위로 작은 의문이 스쳐갔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봐라.”

그 말을 하고서 레간은 그록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오, 레간! 오랜만이구만.”

한 연구자가 레간에게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상당히 반가워하는 표정의 얼굴이었지만 레간은 담담하게 악수를 나누며 답했다.

“졸업 후 처음이구만.”

순간 그 말에 다가온 이는 어색하게 미소를 그려 보였지만 곧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만! 벌써 이십 년도 더 전이구만! 하하, 내가 자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피식. 그록은 웃음을 흘렸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이의 시선이 한 번씩 그록에게로 향하며 미소를 씨익 지어 보였다.

벌써 몇 번이나 그록에게로 향했던 꾸며진 미소였다. 무언가를 노리는 시선들이었지만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아쉬움이 담긴 시선들.

어리다고 막 대하기에는 그록이 이룬 성과가 너무 크고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도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끈을 만들려고 했고 그 끈으로 다가간 이가 레간이었지만.

“쉽지 않을 텐데.”

자신보다 더한 이가 아버지임을 아는 그록은 작게 중얼거리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자, 저쪽에 동기들이 있다네! 다들 레간 자네와 오랜만에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가세!”

레간은 별다른 말 없이 연구자의 손짓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선 뒤돌아 그록을 향해 말했다.

“네 마음대로 써라.”

그러곤 연구자를 따라 그록에게서 떨어져 다른 연구자들 사이로 들어갔다.

무엇을?

그록은 묻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바라봤다.

무엇일까? 아버지의 새까맣던 손끝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록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우리 아들. 뭐 해?”

어머니가 다가왔다.

“별거 안 합니다.”

“그래?”

그록은 환하게 웃고 있지만 조금 빨갛게 물든 눈가를 보며 따라 미소를 그렸다. 루린은 평소처럼 덤덤한 아들을 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 우리 아들이 최고야.”

그록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쑥스러우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과거에는 어머니에게서 이런 칭찬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어머니와 웃으며 대화를 할 일도 없었다.

“어머니 덕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순간도 없었다.

루린은 그록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덕은 무슨, 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뛰어난 아들이 그간 집안 형편 때문에 그 재능을 못 피운 것인가 싶어 자랑스러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러니 제 걱정은 이제 조금도 안 하셔도 됩니다.”

매번 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며 루린은 생각했다.

참, 내가 힘들게 살긴 한 건가?

그녀는 장난기를 담은 미소를 그리며 아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엄마 이제 조금 편해져도 되는 건가?”

“당연합니다.”

그록은 조금의 틈도 없이 바로 답했다. 그의 답에 어머니 루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그록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우리 아들도 엄마 걱정 말고 편하게 지내.”

순간 그록이 멈칫했다. 그는 루린을 바라봤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록은 뭐라 답을 하지 못했다.

“응? 알았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루린의 재촉에 겨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

그제야 루린이 편하게 미소를 그려 보였고 그록 역시 편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블란과 레온, 그리고 비서 펠이 둘에게 다가왔다.

루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블란의 손을 잡고선 팔짱을 꼈고 블란은 수줍어하면서도 옆에 붙어 있었다.

“아, 그런데 그록. 후원자분께서는 안 오시니?”

루린의 물음에 순간 비서 펠은 레온을 바라봤다. 연신 그록을 보며 입꼬리를 위로 씰룩이던 이가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으음.

이러다가 영영 밝힐 타이밍을 놓칠 것 같은데.

비서 펠은 뜻하지 않은 고민이 생겼다.

“오신다고 하셨는데. 안 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정말 아쉽네.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크흠.

레온이 헛기침을 했다.

“저, 저도요! 저도 꼭 뵙고 싶었는데.”

크흠, 큼!

루린을 뒤이은 블란의 답에 레온은 더 크게 헛기침을 해댔다. 비서 펠만이 그 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 웃음을 참았다.

그때 그록이 입을 열었다.

“졸업하고 나서 꼭 찾아뵈러 갈 생각입니다.”

이번 생을 살면서 감사한 이들이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그 중에서도 베스 노옐은 조금 더 특별한 이였다.

레온은 그록을 빤히 바라봤다.

“졸업 전에는 보지 않겠습니까?”

펠이 불쑥 끼어들어 그록에게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답하는 그록을 보며 레온은 미소를 그렸다.

“자, 그러면 이제 모두 함께 가시지요.”

시원한 미소를 지은 펠의 말에 다들 긍정을 보였다. 그록은 저 멀리 아버지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만나는 이들마다 붙들고 프시아 연구의 가능성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말을 하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소만 말해두면 나중에 오실 거다.”

그록은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 루린은 레간에게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나름대로. 아마 너네 아버지도…….”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으셨지만 그록은 알 것 같았다.

“가자꾸나.”

“네.”

그록은 홀을 벗어났다. 그런 그를 향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시선을 두었다. 홀의 한구석에 서 있던 매크니 심사위원장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연구자가 물었다.

“심사위원장님은 아까 그록 연구자와 대화를 나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비상한 친구던가요?”

은근하게 건네오는 물음에 매크니는 그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단상을 내려온 직후 대화를 나눈 그록은 단 한가지 만큼은 분명한 사람이었다.

“비상하기보다는.”

매크니 심사위원장은 그록의 뒷모습을 향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천상 연구자더군.”

하나를 알아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은 분명히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다.

“아마 조만간 저 친구는 한 번 더 이름을 알릴 거야.”

매크니는 멀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한 번 더 그록 바서를 보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질투, 동경, 존경, 호기심, 회유. 이미 사람들의 수많은 시선이 그 미래를 예견했다.

***

“저 선배님이십니까?”

“어. 그렇대. 이야, 걷는 것부터가 다르네.”

그록은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막 우드 시로 돌아온 그는 실험실로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며 서 우드 아카데미 학생들은 입을 열었다.

“올해의 논문 시상식에서 돌아온 건가?”

“시간을 보니까 그런 것 같은데. 근데 주제가 뭐였대?”

“몰라. 이제 탄신일 기념주가 끝났으니까. 다음 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한 남학생은 옆에 친구를 향해 물었다.

“야. 그런데 체프, 너 쟤랑 친하지 않냐?”

체프는 친구의 물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다른 남학생이 물었던 친구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역시, 그록은 될 줄 알았지. 우리 그록이 얼마나 성실한가? 암, 역시 연구자라면 그런 뚝심이 필요하지. 천재성은 그런 데서 나오는 거지!’

재크 교수가 다른 이들 앞에서 하던 말이 떠오른 체프는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안 친해.”

“아. 어. 뭐, 그럴 수도 있지. 같은 과라고 다 친한 건 아니잖아? 하하.”

같은 지도 교수 밑에 있는 사이임을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은 말을 돌렸다. 체프는 그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

매튜가 그록에게 다가가 반가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는 질투를 해서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아주 기어 다니네.

하지만 체프는 그런 매튜를 마냥 비웃을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그록을 깎아내릴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록 바서.

그의 세계는 이제 체프와 아예 그 궤가 달랐다. 잘못 건들다가는 자신이 추해지기 쉬웠다.

“……가자.”

그렇기에 체프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록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저 선배, 여자친구도 엄청나지 않아? 탄신일 기념 문예 공모전 수상자라고 들었는데?”

“어. 거기서 최우수상이래.”

“헐. 둘 다 사람이야? 어떻게 만나도 그렇게 만났대?”

“내 말이. 남 우드 지금 발칵 뒤집혔다던데. 기대해봤자 장려상인 줄 알았는데 최우수라고 말이야.”

그록이 없는 자리에서도 계속 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미 우드 아카데미의 모든 곳에서는 그록과 블란. 둘 중 누구 하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고 결국에는 둘 모두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졌다.

어린 두 천재가 동시에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 둘이 연인 사이이니 당연히 더 많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음?”

서류 봉투를 든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그록은 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언뜻 눈에 들어온 포스터를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우드 아카데미를 빛낸 자랑스러운 문인 블란 샤를 작가님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하하…….”

그록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서 우드 아카데미 도서관이었다.

그는 다시 포스터를 바라봤다.

[우드 아카데미 도서관 일동]

그록은 떠올렸다. 1년 전 도서관 행정실에 찾아가 그 직원들에게 따졌던 기억을.

그리고 그들이 했던 말을 그는 떠올렸다.

‘그 시상식에 유명한 문인들이 얼마나 많이 오시는 줄 아십니까? 그런 자리에. 그런 명망 높은 자리에! 남 우드 여학생이라니요! 아카데미의 다른 높은 분들 보시기에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본인에게는 이 장려상을 탄 것만으로도 다시는 없을 행운일 테고. 솔직히 정체를 다 밝혔으면 상을 타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장려상은 감지덕지라고 했던 이들이 이렇게 태도가 바뀌다니. 그 사실이 화나기보다는 우스웠다.

그로선 이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포스터에 잠시 시선을 두던 그록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가지고서 빠르게 실험실로 향했다.

그리고,

달칵.

실험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오랜만에 맡는 쉴단의 향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다른 짙은 향들도 많았지만 그 속의 쉴단은 그록에게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서류 봉투를 열었다.

아버지 레간이 주었던 서류 봉투였다.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보라던 그 봉투.

봉투를 뜯자마자,

“흐음.”

그록은 쏟아져 나오는 단 향에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해졌다 해도 여전히 달달한 향은 그에게 어려운 향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 있는 문서를 꺼냈다. 장수가 꽤 많았다.

맨 앞장에는 하얀 여백에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네 마음대로 써라.]

‘네 마음대로 써라.’

똑같은 말을 하셨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록은 천천히 맨 앞장을 넘겼다. 그리곤 그대로 굳었다.

그는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그 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선 시선을 돌렸다. 떠나기 전까지 실험을 진행했던 실험대가 그록의 눈에 담겼다.

쉴단을 비롯한 다른 약초까지 함께 실험하느라 역한 내가 이전보다 더 심해진 그곳이었다.

그록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손끝이 떠올랐다. 새까맣게 물들어 있던 손 끝.

“하…….”

그록은 탄식하듯이 웃었다. 그는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맨 위에 제목이 적혀 있었다.

[프시아의 뿌리에 대해서]

붉은 잎과 달리 독이라 불리는 프시아의 뿌리.

심각하지는 않지만 복용할 시 복통은 물론, 자잘한 증상을 동반하는 독성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록은 자신의 실험대 위 장갑을 바라봤다.

장갑의 손끝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프시아의 뿌리를 가공하는 실험을 하다가 물든 자국들이었다.

“……진짜.”

그록은 종이 위에 얼굴을 묻었다. 단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하지만 프시아의 뿌리는 역한 내를 풍겼다. 쉴단과는 다른 역한 냄새. 그래서 둘이 함께하면 아주 독한 냄새를 만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한 냄새.

그록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천천히 한 장 한 장을 읽어 내려갔다.

사락사락.

실험실에는 오직 그록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에 왔을 때. 그록은 한참 동안 마지막 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됐어.”

이제 다 되었다.

그는 감히 예견했다.

길어봤자 세 달.

그 안에 만들 수 있다.

워보트 병의 완전한 치료제를.

그록은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마지막 장에 머물러 있는 문서를 잡고 있었다.

그 문서의 마지막에는 단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성공을 빈다.]

그록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문서를 다시 봉투에 넣고선 실험대로 향했다. 그는 손끝이 새까맣게 물든 장갑을 다시 끼며 실험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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