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51화 (50/95)

# 51화

51.

10월 중순. 그록은 평소처럼 기숙사에서 나와 강의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3학년인데도 수업은 여전히 많았다.

그런 그록의 얼굴 위로 깊은 주름이 나타났다.

뭐지?

그록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훽!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요즘 들어서 부쩍 그런 시선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그록. 네가 하는 실험이 있다고 하던데?’

은근슬쩍 매튜가 자신에게 물어보았고 이를 주변의 동기들이 대놓고 뚫어지게 바라봤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설마-

아스트 선배가 말한 ‘릴리의 소문 퍼뜨리기’의 영향일까?

그 힘이 이렇게 큰가?

긴가민가했던 그록은 새삼 돈자팔 소문의 힘을 떠올리며 스스로 납득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타났다. 미소가.

재밌게 돌아가네.

그때, 강의실 문 앞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는 그록과 눈이 마주쳤고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뭐지?

“안녕하세요?”

학생이 아니었다. 흰 코트를 입지 않은, 행정실 직원 같아 보였다.

무슨 일이지?

그록은 의아함을 담아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남자는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른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행정실은 크게 뒤집혔다. 그는 지금 눈앞의 그록 바서를 보면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마도 곧, 정말 곧 아카데미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그록 바서 학생 맞으시죠?”

“네.”

“학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학장?

순간 그록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더 커져갔다.

“뭐야?”

“무슨 일이래?”

그리고 주위에 있던, 요즘 그록의 실험에 대한 소문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수군대며 그를 바라봤다.

학장. 서 우드의 학장은 보통 한 학과의 학장을 말하지 않았다. 서 우드 아카데미는 관련 과들끼리 모여서 작은 규모의 카테고리를 만들었고 그 중에 의학 관련 학과들이 모여 있었는데, 약초학과는 그 중 하나였다.

서 우드 아카데미 의학 관련 학과들의 총 학장이 그록을 불렀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록의 담담한 말에 행정실 직원은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행정실을 찾은 학장은 말했다.

‘그록 바서. 그 학생 좀 불러다주게. 당장!’

‘네? 갑자기 무슨?’

당황한 행정실장을 향해, 학장은 말했다.

‘수도에 갔다 왔는데, 아, 아닐세! 어서 부르게! 이건, 정말이지!’

올해의 논문 10편을 선정하기 위해 수도에서 열리는 약초학 학회에 다녀왔던 학장이었다. 그런데 평소의 잔잔하던 이가 급속도로 흥분한 채 계속해서 그록을 찾았다.

‘그록 바서! 그 학생 좀 모시고, 아, 아니 불러오게!’

그러면서 한마디 말을 남겼다.

‘학회에, 올해의 논문에 18살짜리가 이름을 올린다니! 이건!’

꿀꺽. 그 말을 떠올리며 행정실 직원은 그록을 바라봤다. 담담한 눈빛이었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천재라더니, 이건.

그는 심호흡을 작게 하고선 그록의 물음에 답했다.

“학회 문제인 것 같습니다만.”

“학회?”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한창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록은 그 순간 감이 잡혔다.

‘아스트 선배가 먼저 연락을 준다더니.’

서 우드의 누가 올해의 논문 선정에 심사위원으로 갔나 보군.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그록을 향해 행정실 직원은 어딘가 급박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의 논문에 관련이 되셨다고 하시던데.”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행정실 직원도, 그록도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가죠.”

“아, 네!”

올해의 논문.

11월에 열리는 학회를 중요시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학회에서는 매년 특별하고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논문 10가지를 선정해 커다란 발표회를 열었다.

“지금…… 올해의 논문이라고 했어?”

“……어. 그런 것 같은데.”

하지만 그 10가지는 한 번도 10가지 모두 채워진 적이 없었다.

대부분 평균 5가지 정도 채워졌으며 이를 차지하는 이는 대부분이 연구소장이거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아니면 가끔씩, 아주 가끔씩-

천재들이 그 자리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가져간 천재들은.

그 학문에 한 획을 그었다.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록과 행정실 직원이 지나간 자리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입을 다문 채 멀어지는 그록의 뒷모습과 서로의 얼굴만을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그들의 머릿속에 어떤 한 가지 가정이 새겨졌다.

학장이 찾을 만큼 큰 일이고. 이렇게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일이고.

그리고 그록 바서는 한 가지 연구를 했다고 했고.

올해의 논문이 직원 입에서 흘러나왔고.

“이거 설마.”

한 남학생은 주위의 친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 역시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하고 있음을.

그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리고 행정실 직원을 따라 학장실을 방문한 그록은 들어서자마자 흠칫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학장실의 기다란 소파에 학장을 비롯한 약초학과 교수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재크를 비롯해 그레이 교수까지. 그리고 모두 그들은 놀란 표정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물론 그레이 교수는 조금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지만, 나머지 이들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그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장님. 그록 바서 학생 왔습니다.”

벌떡.

학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약초학과 의학 관련으로 명성이 높은 교수였다. 평소에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한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빠르게 그록에게 다가왔다.

덥석.

그러고는 그록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감동이었네!”

음?

그록은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지만 학장은 쉴 새 없이 그록에게 말했다.

“내 살면서, 이런, 이런! 정말이지!”

그는 그록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리더니 말했다.

“자네는 진정한 연구자일세. 정말로 진정한 연구자야.”

그러고는 말했다.

“축하하네.”

그 말에 순간 그록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어갔다. 그는 얼떨떨하던 기분을 지우고 학장을 바라봤다. 온화하고 조용하다고 알려졌던 그 눈동자에 어떤 감탄과 존경이 드리워 있었다.

그랬다.

올해의 논문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학장의 입이 서서히 열렸고 교수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록 군. 자네의 쉴단에 대한 논문이 약초학 부문에서 ‘올해의 논문’으로 선정되었다네.”

아.

뒤에 서 있던 행정실 직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교수들이 그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학장은 감격에 겨운 듯 혹은 어떤 상상 외의 존재를 보듯 그록을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그록은 아무런 생각도, 정말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그냥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이 올해의 논문은 과거 혼자 블란의 저택에서 틀어박힌 채 10년 동안 했던 그 연구 내용이 전부였다.

돈자팔.

돈에 자존심을 팔아버린 연구자.

그 소리를 들으며 약초학계에서 버려진 채 연구를 했던 자신이었다.

그록의 귓가에 들려왔다.

“축하하네.”

다시 한 번 학장이 말했다. 그리고 학장의 뒤로 보였다.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 엄지를 척하니 올린 그레이 교수의 환한 미소가 보였다.

그록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인정받았다.

“자네는 이미 연구자야, 연구자.”

연구자로.

그록은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교수가 편하게 되기 위해서 한 일이었는데. 막상 닥치니 이건.

조금 많이 달랐다. 아주 많이.

“아카데미에 말하지 않고 낸 것은 조금 괘씸하지만 그게 무어 중요한가? 그리고 내용을 보니 이해가 가더군. 아카데미에 낼 수준이 아니었어. 정말로 대단하네.”

아카데미를 통하지 않고 논문을 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뭐라 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의 학칙을 어긴 것도 아니었고 그냥 말하지 않고 낸 것뿐이니까.

설령 그게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고?

올해의 논문이니까! 그것으로 선정되었으니까!

더 이상 어떠한 이유도 필요치 않았다.

지금 주목할 것은 단 한 가지. 약초학에 한 획을 그을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고 그가 서 우드 학생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수도에 가야 할 걸세. 발표를 해야 하니.”

툭툭.

학장이 어깨를 두드렸지만 그록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록을 보며 학장을 작게 웃음을 흘렸다.

실감이 안 나나 보군.

“이 소식 말해주려고 자네를 불렀네. 발표일은 다음 주지만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해서 말일세. 빨리 말해주고 싶었거든.”

학장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만 나가보게. 더 붙들고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내가 좀 바빠서 말일세.”

학장도, 뒤에 서 있는 교수들도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 우드에서, 그 중 약초학과에서 천재가 나왔다는 것. 약초학 부문 올해의 논문으로 뽑혔다는 것.

그것은 내년 이후 약초학과를 이끌어가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 뻔했고 그들은 이를 제대로 활용할 준비를 해야 했다.

학장이 그록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도 이야기해야 할 사람이 있을 것 아니겠나? 이 기쁜 소식을 나눌 이들 말일세. 그러니 어서 가보게.”

아.

그 순간 그록의 얼굴 위로 어떤 빛이 맺혔다.

이야기해야 할 사람. 순간 그록의 시선이 그레이 교수에게로 다시 향했다. 재크 교수 옆에 서 있던 그레이 교수는 다 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어서 가라는 듯이 손짓했다.

“조만간 내가 또 부르도록 하지.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정말 많거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그럼 다음에 보지.”

그록은 들어올 때와 달리 학장의 배웅을 받으며 학장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학장실을 나오자마자.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무수한 시선들이 그록에게로 향했다. 대부분이 직원들이었는데 그들은 엄청난 것을 보듯 그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강의에 들어가야 했지만 그것보다 먼저!

그는 빠르게 걸었고 결국에는 뛰어갔다.

약초학계에서 돈자팔이라고 불리며 버려진 자신. 그 자신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유일한 후원자였고 지금은 너무나도 자신의 소중한 사람인.

블란.

그녀 덕분이었다.

그록은 뛰어갔다.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블란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드디어.

드디어 당신과 함께한 내 연구가 인정을 받았다고.

그 말이 사무치도록 하고 싶었다.

서 우드 약초학과 건물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그를 모든 학생들이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서 우드 약초학과 3학년 그록 바서.

18살의 천재가 쓴 논문이 약초학 부문 ‘올해의 논문’으로 뽑혔다.

서 우드가 발칵 뒤집어졌다.

하지만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그록에게는 닿지 못한 이야기였다.

서 우드를 지나.

중앙 광장쯤을 벗어나서 남 우드로 향하는 길목에서.

“헉……헉……헉.”

그록은 멈춰선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에 놀람이 나타났다. 그는 멍하니 맞은편 을 바라봤다.

그곳엔 블란이 서 있었다.

블란 역시 멍한 표정으로 그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의는?

강의는 빠진 건가?

그록의 얼굴 위로 의문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그록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본 블란 역시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블란의 손에 들려있었다.

특별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편지봉투가.

그것은 마프렌 왕국의 왕성에서 보낸 편지를 의미했다.

그록은 블란에게 다가갔다. 블란은 처음 보았다. 저토록 환한 미소를 지은 그록을.

블란도 그록에게로 다가갔다. 둘은 마주 섰고 블란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내밀었다.

그록은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블란에게 왕성에서 편지를 보낼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오늘 총장님 뵙고 왔어요.”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은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왕성에서 온 편지라고,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그래서 갔더니!”

점점 울음이 차오르는지 블란은 말을 못 잇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겨우 말했다.

“보세요. 그록 씨가 봐줬으면 좋겠어요.”

그록은 봉투를 열었고 편지지를 펼쳤다. 그러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에서 열릴 탄신일 기념 문예 공모전에 블란 샤를 양을 초대합니다.]

세상에.

그록은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그는 꾹 이를 삼켰다. 그러자 웃음이 나왔다. 오늘따라 웃음이 자꾸 흘러나왔다. 그록은 편지에서 시선을 돌려 블란을 바라봤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그록은 그 기다림에 답하듯 말했다.

“저도 됐습니다.”

오, 정말!

블란은 참을 수 없는 감정에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기쁨이 너무 가득 차 흘러 넘쳤다. 그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정받았습니다.”

그록은 차오르는 것을 누르며 말했다.

“우리 둘 모두요.”

둘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둘이 함께 해냈다.

그 사실에 그들은 행복했다. 한참 동안 서로를 보며 웃던 둘은 서로를 살짝 껴안았다. 다른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 포옹이 끝나고 난 후 둘은 함께 편지를 부치러 갔다. 두 사람에게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인 가족. 그들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둘은 처음으로 강의에 들어가지 않고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홉 번째. 그록 씨랑 같이 땡땡이 치고 시간 보내기(나쁜 행동이지만).]

그록은 의도치 않게 해보고 싶었던 일 또 한 가지를 오늘 블란과 함께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내딛는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그록과 블란. 그들에게 찾아왔다.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 혼자가 아닌 둘에게 왔단 사실이 둘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둘의 결과는 뒤집었다.

서 우드 와 남 우드 아카데미를.

그리고 약초학계와 문학계.

모두를 발칵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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