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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50화 (49/95)

# 50화

50.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 우드 시는 다시 활기에 가득 찼다. 그리고 위스 찻집 점원들은 전보다 늘어난 손님들로 가득 찬 홀의 한곳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봤다.

“바, 밥만 챙겨먹고 얼굴이 이 꼴이면!”

그록은 음식 섭취 보고서 노트를 제출했음에도 더욱더 슬퍼져가는 블란의 모습에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공을 배회했다.

“보고서를 쓰면 뭐해요! 이, 이건 건강하자는 의도인데!”

작은 실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고 하는 모습에 그록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얼굴은 저번 그레이 교수를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심하게 찌들어 있었다.

밥만 잘 챙겨먹었는지 살만 조금 덜 빠졌을 뿐 눈 밑이나 전체적인 안색이 상당히 창백했다.

“그록 씨가 이러면, 전! 진짜! 이럴 때마다 저는…….”

어깨를 들썩이려고 하는 블란의 모습에 그록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를 위스 찻집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특히 둘이 익숙한 사장 릴리와 점원들, 그리고 단골들이 특히 그러했다.

“역시 한 소리 들을 줄 알았어요.”

혀를 차며 점원이 하는 말에 릴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이야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록은 무슨 여행을 다녀온다고 한 것 같았는데 어디 깊은 산에 가서 고행을 하고 온 사람마냥 폐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 가까이 있던 단골이 혀를 차며 말했다.

“저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서 우드 사람들도 저렇지 않아요. 무슨 꼴이.”

서 우드 남학생이 하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 남학생은 릴리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그록 씨랑 친하지 않아요? 졸업한 아스트 선배랑.”

약초학과는 아니었지만 의학 관련 학과에 다니는 그 손님의 물음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많이 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그러면…….”

남학생은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 남학생의 일행들이 테이블에 앉은 채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방학 동안 무슨 연구를 하셨는지 아시겠네요?”

아.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랬나 했더니.

릴리의 얼굴 위로 작게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타인의 연구 내용에 대해서 묻는 것은 일종의 실례로 본인이 말하기 전까지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걸 뻔히 앎에도 자신에게 둘러 물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록의 행보에 관심이 많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이 서 우드에서 약초, 의학, 간호 쪽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릴리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쉽게도 저는 무슨 연구인지 잘 모르네요. 묻지 않았거든요.”

“아, 그렇군요. 저는 릴리 씨한테 말했을 줄 알았는데.”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남학생의 모습을 보며 릴리는 속으로 짙은 미소를 그렸다. 그녀는 잘은 모르지만 대충 알고 있었다.

졸업식 이후 아스트, 그록, 블란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그들은 허심탄회하게 미래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도 하나 주어졌다.

아스트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아쉬워하는 남학생에게 말했다.

“하지만 조금 획기적이라는 것은 알아요.”

“오! 그렇습니까?”

위스 찻집. 우드 아카데미 학생들이 많이는 아니지만 꽤 찾아오는 곳이었다.

‘릴리. 네 역할이 하나 있어. 별것은 아니고 말이지. 2학기가 되면,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그록도 준비를 해야 하는 기간이니까 안 되고.’

아스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었다.

‘2학기! 딱 그때부터 사람들이 궁금해 하면 그것 좀 더 키워줘. 무슨 말인지 알지?’

알지.

당연히 알다마다.

논문 준비가 대략 끝났을 무렵인 2학기 초부터 슬슬 미끼를 풀어달란 소리였다. 그때쯤이면 그록과 아스트, 둘 모두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을 때니까.

아스트의 친구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유쾌한 성격인 릴리는 눈을 빛내는 남학생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저도 자세히는 몰랐는데, 아스트 아시죠?”

“네! 알죠. 제가 약초학과는 아니었지만 작년에 졸업하신 저희 선배님 아니십니까.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죠. 제가 아스트와 친하지만 그도 뛰어난 사람이죠. 그 아스타가 그록 씨의 연구를 보고 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릴리는 마치 저 멀리 커다란 산이라도 하나 있는 것마냥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고 남학생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록 바서. 어쩌면 서 우드 아카데미에 다시없을 천재가 등장한 것이라 불리는 이. 평점 100점을 이루어낸 인간. 그에 대해서 학문을 탐구하는 서 우드의 누구나 관심이 많았다.

릴리는 아련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넘을 수 없어.”

아.

남학생은 아스트 말의 의미를 알았다. 후배의 연구를 보고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니.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연구이기에, 만만찮은 인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트는 또 말하더군요.”

꿀꺽.

남학생은 다시 한 번 더 침을 삼켰다.

“어쩌면 우리는 위대한 연구자와 동시대에 살게 될지도 몰라.”

허-

남학생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란 말인가?

전 학생회장인 아스트의 안목이 절대 낮지 않았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는 남학생이었다.

“뭐, 그렇게 말하기는 했어요.”

릴리가 다시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학생은 그 미소에 따라 얼떨떨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렇군요. 그럼 전 일행들에게 가보겠습니다.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곤 황급히 일행들에게로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재밌어라.

릴리는 저 남학생을, 저 손님을 알고 있었다. 굉장히 소문을 잘 내고 다녔다. 아마 곧 퍼질 것이다.

학생들 사이로 은밀하게.

그리고 그 은밀한 소문이 표면에 나타나 교수들이 관심을 가질 때쯤이면 준비가 모두 끝나 있을 것이다.

원래는 10월쯤에 아스트를 통해 낼 논문이라 소문을 조절해서 내었어야 했지만.

‘네? 다 하셨다구요?’

‘네. 저도, 블란 양도 미리 끝이 나서 오늘 차 마시고 나서 둘 모두 보내기로 했습니다.’

‘오! 축하해요!’

두 사람은 계획보다 조금 더 빨리 논문과 시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제야 릴리는 그록의 몰골이 이해되었다.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어진 그록의 말에 심장이 조금 뛰었다.

어떠한 기대로.

‘그리고, 빨리 그 논문을 작성해야 했거든요.’

‘왜? 급히 안 하셔도 될 텐데?’

‘아뇨. 빨리 해야 했습니다.’

그록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지막 산을 오르려면 그것에만 집중해야 하거든요.’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었지만, 릴리는 그 눈빛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구나 싶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다시 그록과 블란이 앉은 테이블을 바라봤다. 그리고,

“음?”

저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좀 전과는 다른 분위기인데?

“블란 양도 조금 피곤해 보이십니다.”

움찔. 블란이 움찔했다.

“잠은 제대로 주무신 겁니까? 살도 빠지신 것 같은데?”

순간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손님이 블란을 바라봤다. 그대론데?

“볼에 살이 많이 빠졌는데요?”

블란이 한 번 더 움찔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그, 시를 쓰다보니까 요즘 부쩍, 그게 잘 써져서…….”

그녀는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그록을 못 쳐다봤다.

‘새벽’, 그 시를 지은 이후 블란은 무언가 깨우친 것을 느꼈고 그 이후로 시에 몰두했다. 그 때문에 카만 의원과 아버지 레온의 걱정을 받아야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그.”

힐끔. 블란이 올려다본 그록은 무뚝뚝하지만 매서운 눈빛이었고 블란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네. 저도 미안합니다.”

호오.

어찌되었든 훈훈한 마무리군. 릴리는 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록은 미안하다고 하고선 배시시 웃어 보이는 블란을 보며 가방 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건?”

뭐예요? 라고 묻는 블란의 눈빛에 그록은 상자를 열었다.

“어?”

블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놀라서 그록을 바라봤고 그록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처음으로 캔 쉴단의 한 뿌리입니다.”

쉴단의 독하고 쓴 향이 상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위의 이것은 쉴단의 줄기와 잎입니다.”

블란은 상자 속을 바라봤다.

정말 프시아랑 똑같구나.

프시아의 붉은 잎과 똑같은 잎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잎에서는 쓴 향이 났다.

그록이 천천히 그 상자를 블란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물었다.

“연구에 안 쓰시고? 그 때문에 가신 것 아닌가요?”

그록은 작게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블란 양 덕분에 캘 수 있었던 쉴단입니다. 그러니 블란 양이 가지고 계셨으면 합니다.”

“저 덕분에요?”

“네.”

블란을 위한 기도의 끝에. 그리고 허리가 아플 때면 고개를 들어 보았던 그 맑은 하늘빛이 그려주는 블란의 눈동자 덕에.

그록은 이 쉴단을 캘 수 있었다.

블란은 그록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네. 제가 소중히 가지고 있을게요.”

그래서 나중에 연구에 성공하시면 다시 돌려드릴게요.

뒷말은 잇지 않은 채 상자를 품에 안았고 그록은 만족의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예전보다 부쩍 많이 웃는 그록이었다.

차를 다 마신 후 두 사람은 함께 자신들의 결과물을 부치러 갔다. 평소 같으면 보통 우편으로 부쳤겠지만, 이번에는 중요한 물품이라 특별히 안심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상단을 찾아가 의뢰할 생각이었다.

안전과 비밀 유지로는 상당히 믿을 만하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내일 출발할 테니 대략 4일 안으로 완전히 배달될 겁니다. 그러니 일주일째 되는 날에 경과보고를 편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접수처에 있는 안내원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영수증을 가지고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저 물건들은 아스트에게 전달될 것이고 아스트가 논문과 시를 제출한 후 그 인증서를 보내줄 것이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기겠군요.”

그록은 그렇게 말하며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이 손으로 가린 입가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록에게는 그 모습이 보였다.

아직 그록은 여유가 생겼다고 하기에는 넘어야 할 마지막 고비가 있었다.

논문은 그 마지막 고비를 넘기 전, 그러니까 그록이 과거 돌아오기 전 10년이 넘었던 시간의 연구 결과를 담은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스트는 경이를 표했고 그록 역시 그만하면 충분하리라 보았다.

본래라면 그 고비를 넘기 위해 연구에 빠져야 했지만 조금, 잠깐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그러면 이제 데이트 합시다.”

블란과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그록은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함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데, 데이트라니!

블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이런 직접적인 말이 그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처음 들어봤다.

그 붉어진 볼을 위에서 보던 그록은 손으로 가려 살짝 보이는 블란의 입술로 절로 시선이 향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 그, 집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볼을 붉게 물들인 채 블란이 물었다. 그록은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입술에서 시선을 떼고선 답했다.

“네. 좋았습니다.”

그록은 순하게 웃는 블란을 보며 어머니 루린을 떠올랐다.

이상하게 블란 양에 대해서 물으실 때면 어머니는 장난기가 넘쳤다.

‘성격이 어떠니?’

‘최곱니다.’

‘그래? 결혼할거니?’

‘네.’

‘그래. 궁금하구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블란에 대해 궁금하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던 그록은 워보트 병과 쉴단, 블란에 대해서 말했다.

그 말들을 가만히 듣던 어머니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 갔고 그록의 말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계셨다.

그 모습에 그록은 묘하게 긴장했고 그 정적의 끝에,

‘그래. 꼭 네가 낫게 하거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어머니가 미소와 함께 건넨 말에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해주셨다.

‘너를 이리 바꾼 아가씨이니, 너도 바꿀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그록은 진심으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다시 한 번 더 감사했던 그록이었다.

“좋았다니, 다행이에요!”

본인이 더 기쁘다는 듯 웃는 블란을 보며 그록은 생각했다.

역시 블란과 어머니는 닮았다. 그 마음이.

그는 문득 안주머니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쪽지에 적혀 있던 ‘해보고 싶었던 일’ 한 가지가 떠올랐다.

[스물아홉 번째. 그록 씨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기.]

새삼 느끼지만 블란은 늘 좋은 사람이었다.

***

일주일 뒤 영수증이 각각 그록과 블란에게로 전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록은 편지를 받았다.

아스트에게서 온 편지였다.

[접수 제대로 했다. 수고했어. 역시 넌 천재다, 이 자식아. 그리고 블란 양도 대단하신 것 같다. 이상 보고 끝!]

맨 밑에 아스트가 덧붙인 글에 그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10월 말에 보자. 이 건방지고 똑똑해서 보고 싶은 후배 놈아.]

그록은 아스트의 편지를 서랍 속에 넣었다. 달력을 바라봤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10월이 되었고.

발표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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