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
고향 집에 도착한 그록은 문을 열자마자 루린을 볼 수 있었다.
“왔니?”
“계셨습니까?”
평소라면 이 시간이 아닌 저녁이 다 되어야 집에 와 있을 어머니 루린을 보자 그록의 표정은 밝아졌다.
“오늘은 마침 쉬는 날이어서.”
답하면서 루린은 힐끗 그록의 손에 들린 커다란 상자를 바라봤다. 분명 우드 시에 잠시 들렀다가 바로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이리 짐이 많지?
그런 그녀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그록이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뭐니?”
별말 없이 그록은 상자에 눈짓했고 루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때 그록은 떠올렸다.
‘내가 어데 무보수로 일 시키는 사람인 줄 아나? 이거 팔면 니 일한 값은 될 기다.’
‘이런 비싼 것들을-’
‘역시 약초학과라서 그런가, 가치는 아나 보네? 내가 이래 봬도 쉴단 전문가라고 오는 약초꾼들도 많고 내한테 오는 선물도 많다. 다 싱싱한 기니까 잘 쓰라!’
헤리아가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좋은 약초들을.
‘후딱 가라, 후딱 가! 아이고, 이제 좀 집이 널찍해지긋네!’
그리고 얼른 가라고 했지만 묘하게 축 처졌던 그녀의 어깨를 그록은 놓치지 않았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소중한 사람이 지금 워보트 병에 걸렸습니다.’
이미 헤리아가 눈치채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록은 다 안다는 듯 말하는 눈동자를 향해 말했다.
‘다 나아서 건강해져서, 같이 오겠습니다.’
그 말에 헤리아는 크게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하모! 당연히 와야지! 안 올 기가? 퍼뜩 온나, 퍼뜩 와!’
그녀를 떠올리며 그록은 어머니 루린이 여는 상자 안을 천천히 바라봤다. 상자가 다 열렸을 때.
“세상에…….”
루린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그록의 귓가에 닿았다. 루린은 상자를 열자마자 보이는 여러 환들에 놀라 그록을 바라봤다.
“여름이잖습니까?”
무뚝뚝하게 그록은 말했다.
“기 보강에 도움이 될 영양 환으로 만들었습니다. 챙겨 드십시오.”
최상급 약초들로 만든 최고의 환들이었다. 환의 형태라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루린은 그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그록은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크흠. 요즘 일은 어떠십니까?”
정말 컸다니까. 이런 것도 묻고.
루린은 입가에 미소를 띠운 채 입을 열었다.
“네가 하도 일 좀 줄이라고 잔소리를 해서 줄였다!”
말투는 조금 투박했지만 그 속에는 묘한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 그록 역시 기뻤다.
학기 중에 생긴 후원자 덕에 그록에게로 들어가는 돈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 덕에 루린은 한결 숨통이 트였다.
“잘하셨습니다.”
좋다는 듯 웃는 그록의 모습에 그녀도 따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아들이 했던 말들을. 그것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머니 자신 생각도 하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아들이 건넨 상자를 보며 밝게 말했다.
“이야, 아들이 만든 것도 먹어보고! 고마워.”
루린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을 볼 수 있었다. 저번에 루린 자신을 챙기라고 말했던 아들이 자신을 생각해 챙겨주었다.
지금은 여름이지만 겨울 내내 아들이 준 외투를 입으면 거울 앞에 섰었다. 오랜만에 서보는 거울 앞이었지만 외투가 너무 예뻐서 거울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때 깨달았다.
자신이 참 많이 늙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들이 그만큼 커서 자신의 미래를 정했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만큼 되었으니 이제 자신은, 조금 짐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는데 버티고 버텼는데 이제는 그 짐을 조금 내려도 되지 않을까.
그 짐이 아들이든, 남편이든.
“어쨌든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아들을 바라봤다.
“제가 곧 돈을 벌 겁니다. 그러니 몸부터 챙기셨으면 합니다.”
루린은 요즘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거울을 보며 잊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어머니라는 이름 때문에 잊고 있던 자신의 이름도 조금씩 떠올랐다.
“아. 환에 대한 설명서는 안에 있습니다.”
말을 하고는 슬쩍 무뚝뚝하게 미소를 그려 보이는 그록의 모습에 루린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 돌아온 아들이 너무나도 반가운 그녀였다.
루린이 상자를 정리하고 나자, 자신의 방에 갔던 그록이 다가왔다.
“아버지는 실험실에 계십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겠니.”
역시.
늘 그렇듯 아버지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곳이 자신의 왕국일까. 아니면 그곳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인 걸까.
그록은 실험실을 향해 걸어갔다. 루린은 이를 가만히 지켜봤다.
똑똑똑
늘 그랬듯이 아들은 노크를 했고 문을-
“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아버지. 들어갑니다.”
실험실 안으로 그록은, 아들은 들어갔다.
달칵.
문이 닫혔고 남겨진 루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닫힌 문을 바라봤다. 무슨 일일까?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서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록의 눈빛에 어린 어떤 확고함이 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저녁 끼니도 잊어버린 채 열리지 않는 문을 들여다보던 루린은 큰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도 묘하게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그리고,
달칵.
다시 문이 열렸을 때.
루린은 볼 수 있었다. 어떤 생기가 가득한 아들 그록의 눈빛을. 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록의 손에는 한 뭉치의 두꺼운 문서들이 들려 있었다.
“저녁은?”
루린의 물음에 그록은 그답지 않게 갈등하듯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에 루린은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방에 빵이라도 넣어주마. 가서 연구하렴.”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록은 인사를 하고선 바로 자신의 방으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그녀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실험실 앞으로 갔다.
똑똑똑.
달칵.
문을 열고 실험실 안을 들여다보자 평소의 멍하니 앉아 있는 뒷모습이 아닌 무언가를 정리하는 남편 레간의 모습이 보였다.
루린은 다시 한 번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 길에 루린은 거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루린은 한 번 더 웃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작은 쟁반 세 개에 세 가족의 늦은 저녁을 준비했고 하나는 실험실, 하나는 그록의 방, 하나는 자신이 옷 수선을 하는 바로 옆, 이렇게 각각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 밤이 끝났을 때. 그록은 책상 앞에 앉아서 주먹을 꽉 쥐었다.
보인다.
조금씩 보인다.
***
[교수님. 저 잊어버리신 건 아니시겠죠? 이 귀여운 제자 아스트가 인사 올립니다.]
내일이면 개학이어서 시끄러워질 복도를 조용히 걸어가며 그레이 교수는 아스트의 편지를 떠올렸다.
자신의 담당 제자가 아님에도 유독 싹싹하고 유쾌한 제자였다.
[그런데 교수님, 혹시 요즘 그록, 이 편지 한 통 먼저 안 보내는 건방진 학생 보신 적 있으십니까? 도통 연락이 없어서 말입니다.]
건방지다고 하면서 챙기긴 엄청 챙기는구만.
아스트의 편지를 떠올린 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냐하면 그리 말하는 자신도 지금 그록의 실험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고향에, 그리고 하리안 제국의 프쉴에 갔다 왔다고 했음에도 도통 서 우드에서 보기 힘든 그록이 어찌 하고 있나 걱정이 되었다.
똑똑똑.
“그록, 있는 겐가?”
작게 문을 두드리며 그레이가 말을 건넸고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곧 열겠습니다.”
무슨 커다란 소리들이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달칵.
“윽.”
그 순간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코를 막으며 고개를 복도 쪽으로 돌렸다. 순간 엄청난 역한 냄새가 실험실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쉴단과는 비교도 안 되는데.
쉴단 냄새만 있는 게 아니야.
도대체 뭐지?
차마 다시 냄새를 맡을 용기가 나지 않아 그레이 교수는 손목 끝 옷깃을 코에 가져다 대며 그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마주한 그록을 본 순간,
“자네! 지금!”
그는 코에 대고 있던 손조차 놓은 채 커다란 목소리로 그록을 향해 말했다.
“지금 몰골이 그게 뭔가! 지금 이 꼴이!”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걱정이 되어서 오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몰골을 볼 줄이야!
그록은 사람 꼴이 아니었다.
분명 블란 때문에 밥은 제때제때 먹는다고 하더니, 도대체 뭘 한다고!
그는 그록의 구겨진 흰 코트와 살이 쫙 빠져서 핼쑥한 얼굴과 퀭한 눈 밑의 다크 서클, 엉망이 된 머리에 할 말을 잃었다.
“자네 도대체 무슨 실험을 한다고 이런 꼴로! 응? 이 냄새는 또 뭔가, 도대체!”
“교수님.”
그록이 불렀지만 그레이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연신 가로저어댔다. 그는 아스트의 편지를 떠올렸다.
[왠지 분명 밥도 안 먹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거의 99% 확률로요.]
설마 그렇겠냐? 무슨 그런 과한 걱정을 하냐?
했는데! 그랬는데!
그레이 교수는 그록을 매섭게 바라봤다.
퀭한 얼굴의 어디 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록이 그 처음 보는 매서운 눈빛에 흠칫했다.
“따라오게.”
아주 낮고 매서운 목소리에 그록은 슬쩍 자신의 실험대와 책상을 바라봤지만.
“따라오도록.”
한 번 더 자신에게 경고하는 듯한 그레이 교수의 목소리에 그록은 실험실 문을 잠그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무 말 없이 웃지 않는 얼굴의 그레이 교수를 그록은 어딘가 멍한 얼굴로 따라갔다.
“먹도록.”
그리고 두 사람은 아카데미 안 식당에 마주 앉았다.
“어서.”
멍한 얼굴의 그록은 그레이 교수의 말에 식사를 시작했고 그레이는 혀를 쯧쯧 차며 자신도 음식을 들었다.
그는 일부러 외부의 좋은 식당이 아닌 개학 전의 한산한 교직원 식당으로 그록을 데려와 창가에 앉았다.
실험실 밖임에도 그록에게서 역한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교수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쉴단 냄새가 이렇게 독했나?”
그러자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 다른 것들도 같이 있어서요.”
음?
순간 그레이 교수의 얼굴 위로 어떤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같이’라니?
“그러면 연구가 잘 되고 있는 겐가?”
타인의 연구이기에 내용은 묻지 않고 진행 상황만 그레이 교수는 물었다.
그 순간, 어딘가 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의 그록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빛에 어떤 빛이 스쳐지나갔다.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모습에 그레이 교수는 다른 말 없이 한마디만 할 수 있었다.
“몸 챙기면서 하게.”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뭘.”
식사를 마치고 다시 실험실 앞에 선 그록은 그레이 교수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내가 다른 건 하나도 염려하지 않아. 하지만 건강이 최고네. 건강이.”
하지만 그록은 그 따뜻함에 잔소리라고 여기기보다는 고마움을 느꼈다.
“자네는 알지 않는가?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압니다.”
“그래. 그러면 더 말 않겠네.”
툭툭.
그록의 어깨를 격려의 의미로 두드린 그레이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고 그록은 그런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실험실 문을 열었다.
순간 확 하고 독한 냄새가 그록의 코에 닿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실험대로 향했다. 그리고 정말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혼자 남겨진 실험실에서 그록은 말했다.
“찾았다.”
찾았다.
고요한 실험실 안에서 그록의 온몸은 전율로 소름이 돋아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그록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