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47.
“니는 내랑 다르길 바란다. 니는 원하는 걸 이뤘으면 좋긋다. 내 진심이다.”
방으로 향하는 그록을 향해 헤리아는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그록은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인사를 하고선 다른 말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달칵.
문이 닫혔고 그록은 헤리아의 연구 자료가 산처럼 쌓인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는 방금 전 헤리아의 말에 말하고 싶었다.
‘이미 같은 결과를 겪어봤습니다.’
그렇기에 알았다.
지금이 얼마나 귀한 기회이고 무엇이든지 걸어야 하는 순간임을. 그록은 옷 안주머니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해보고 싶었던 일.’ 그 쪽지가 그록에게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고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록은 잠들지 못했다. 그는 헤리아가 정리한 자료들을 펼쳐들었다. 그녀는 필요 없다고 여겼던 자잘한 자료들이 그록에게 새로운 정보들을 많이 전해주고 있었다.
하리안 제국 북쪽 프쉴의 밤에는 여름비가 내렸다.
그리고 마프렌 왕국에도 오늘밤은 여름비가 내렸다.
“설계도는 여기 있습니다.”
레온 샤를은 비서 펠이 건네는 설계도를 받아들었다. 블란을 위해 지은 저택의 옆 넓은 부지. 그곳에 대규모의 건설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비서 펠은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흩날리는 비가 얼핏 보였다.
“비가 그치고 나면 시작되겠군.”
“네.”
레온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설계도와 관련 문서를 바라봤다. 곧 건설할 연구소.
희귀병 치료약을 개발할 연구소.
블란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워보트 병에 걸렸고 이를 알게 되었을 때, 레온은 블란을 고치기 위해 근 10년간 마프렌 왕국은 물론 하리안 제국의 유명 연구자들과 연구소들을 찾아갔다.
정말 피가 마르는 10년이었고 절망의 10년이었다.
매번 기대하고 또 절망하는, 그런 시간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에는 수긍을 하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딸의 병에 대해.
‘저는 이 짧은 시간을, 초침을 분침으로 그리고 시침으로 만들고 싶어서 워보트 병의 치료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이 삶의 시간을 늘리는 것만큼이나 그 시간이 행복한 것 또한,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록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
짧게 웃음인 듯 한숨인 듯 알 수 없는 것을 토해내는 레온을 펠은 의아함을 담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레온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더니 설계도를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비용은 얼마든지 들여도 좋으니 제대로 진행하도록.”
“당연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레온은 툭 내뱉듯이 펠을 향해 물었다.
“바서 가문에 대한 조사는?”
“곧 서류로 올리겠습니다.”
“알겠네.”
레간 바서가 프시아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소리를 들은 후 레온은 바서 가문에 대해서 조사를 명했다.
혹시 미래에 어떻게 엮일지 모르니.
“아.”
서류를 챙겨 나가려던 펠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레온을 바라봤다. 묘하게 펠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블란 아가씨께서 내일 뵐 수 있냐고 물으시던데요?”
“블란이?”
“네.”
펠은 우물쭈물 말하던 블란을 떠올렸다.
‘그냥 요즘 그, 뵙기가 힘드셔서.’
지금처럼 밤늦게까지 일할 만큼 레온은 바빴고 그 때문에 블란이 시를 쓰는 그 창가를 지나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때문에 블란은 걱정이 되어 비서 펠을 찾아왔다.
펠이 블란의 방문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 뵙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블란 아가씨께서 뵙고 싶어 하신다고 전하겠습니다.’
‘어, 어, 그게.’
‘아닙니까?’
장난스러운 펠의 말에 블란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답했다.
‘맞아요.’
자신한테 말 한 번 먼저 걸지 않았던, 자신의 의사 표현을 못하던 아가씨였는데 많이 변했다. 좋은 쪽으로.
“요즘 자주 못 뵈어서 보고 싶으셨나 봅니다.”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입꼬리를 씰룩이는 레온의 모습에 펠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내일 시간 비워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이미 알고서 비워둔 펠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레온은 펠이 나가고 혼자 남은 집무실에서 자신의 책상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움직여서인지 곳곳에서 연락이 왔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갔다.
그럼에도 피로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비가 조금씩 그치고 있었다.
7월. 진정한 여름이 찾아왔다.
그록은 쉴단을 찾으며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힌 채 보냈고 가끔씩 허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늘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고마, 오늘 햇볕이 진짜 따갑네, 따가버!”
헤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록은 허리를 숙였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2주가 지나갔고 갈수록 햇볕은 따가워져 갔다.
그리고 헤리아의 말대로 오늘따라 유독 햇볕이 셌다.
“이런 날은 꼭 비가 내리든데. 안 그런교, 할매?”
“누가 할매고! 아직 팔팔한 60 청춘이구만!”
프시아를 주로 채취하는 약초꾼이 헤리아에게 장난을 걸었고 헤리아는 고함을 빽 지르면서도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흐음. 그런데 이런 날 비가 오기는 오던데. 소나기.”
헤리아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록은 그제서야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보려 했다.
“윽!”
하지만 허리의 통증 때문에 그록은 다시 땅을 봐야 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근처의 몇 없는 약초꾼들이 혀를 찼다.
“쯧쯧쯧. 저래 요령 없이 하니까 저렇지. 좀 쉬래도. 이게 쉬운 일인 줄 아나.”
“내비두소. 뭐,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더만. 그리고 보니까 갈수록 잘하던데.”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칭찬하는 사람도 눈가에 얼핏 호감이 맴돌았다.
그록은 정말 쉬지 않았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체격임에도 어찌나 독한지 늘 냄새를 맡고 다녔다.
단 향이더라도 계속 맡으면 머리가 아플 것인데.
참으로 대단했고 그들은 그 서툰 끈기에 그록 바서라는 사람을 인정했다.
“그래도 좀만 더 힘내라이. 그 할매가 쉴단 나온다고 해가지고 안 나온 적은 읎어. 그르니까 좀만 참으이.”
그록 역시 그 말을 믿었다.
처음에 헤이라의 자료들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추측이나 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자료를 본 순간 알았다.
나름의 기후와 온도. 토양. 모든 자료들에게서 어떠한 흐름을 헤이라가 발견해내었음을. 그록은 그 흐름이 뭔지 몰랐지만 30년 그 시간이 그녀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따.
그렇기에 그록은 헤이라를 존경했다. 그레이 교수 말대로 존경을 받아도 될 사람이었다.
“잘하는 아한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렁 일이나 해!”
“아이고, 할매 무서브가지고 무슨 말도 몬하긋다! 알겠소! 그록, 쉬엄쉬엄해.”
약초꾼은 헤이라의 호통에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으며 그록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록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펴 하늘을 바라봤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조금씩 보였다.
저 멀리, 아주 저 멀리서 조금씩 회색빛으로 하늘이 물들고 있는 것이.
진짜 소나기가 올 것 같은데?
그록의 생각은 맞았다.
“하이고마, 점심 때 되니까 딱 비가 내리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제.”
처마 밑에 선 그록은 살짝 젖은 머리를 털었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헤리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점심 채릴 기니까. 얼른 들어와.”
“네.”
그록은 헤리아의 말에 답하고서 처마 밑에서 서 있다가 자리에 앉았다.
쏴아아아아-
하리안 제국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비였다. 그는 젖어가는 붉은 잎들을 바라봤다. 헤이라는 말했다.
‘단 향들 속에서 희미하게 쓴 향이 나. 그 순간은 정말 감동이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
솔직히 말하면 조바심이 일었다. 7월 말이면 떠나야 하는데 어떠한 수확도 없이 떠나게 될 까 봐.
쏟아지는 비가 바닥에 튕겨 그록의 신발 앞을 적셨다.
하지만 지금 이 경험이 큰 보탬이 될 것 같았다. 다시 연구실에 가도 이전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햇볕 아래에 허리를 숙이며 냄새를 맡는 동안 그록은 쉴단에 들어간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블란에 대한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내리는 비에 붉은빛을 더 생기 있게 머금어가는 프시아들이 보였다. 순간 그록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비 냄새. 비를 머금은 흙냄새.
어떤 꿉꿉한, 더위를 날려버리는 냄새. 온갖 냄새가 흘러 넘치는 그 순간, 그록의 코 끝에 묘한 향이 닿았다.
왠지 어떤 쓴 향이 코끝에 머무는 것 같았다.
멍하니 그록은 그 향을 맡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나지 않았다.
환상인가?
투둑투둑
어느새 짧은 소나기가 그쳤고 처마 밑으로 물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아직 흐린 구름이 사라지지 않은 하늘이 보였다.
그록은 뭐에 홀린 것마냥 프시아의 군락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허리를 숙였다.
단 향이었다. 흙 냄새와 비 냄새와 함께 단향이 났다.
그는 단 향으로 가득 찬 곳을 한 걸음 한 걸음 허리를 숙인 채 내딛었다.
헤리아는 허리를 한 번 숙일 때마다 바랐다고 한다.
‘쉴단을 내게 주이소. 제발, 나에게 주이소.’
그리고 며칠 뒤 말해주었다. 냄새를 한 번 맡을 때마다, 그 냄새에 머리가 아플 때마다 바랐다고.
‘고칠 수 있게 해주이소.’
워보트 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그록은 허리를 숙였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냄새를 맡았다.
‘블란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그록은 2주를 버틸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모를 기도를 계속 했다. 그러면 허리도, 머리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뭐에 홀린 것마냥 허리를 숙이며 냄새를 차분히 맡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블란 양이 나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실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로지 허리를 숙인 그록만이 붉은 잎으로 가득 찬 초원 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와 함께 오래 살고 싶습니다.
그녀가 아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너무 숙여 부서질 것 같은 허리를 그록은 더욱더 수그렸다. 땅바닥에 닿을 듯이 코를 대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기도했다. 붉은 초원 위에는 오로지 소리 없는 그록의 기도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록은 그대로 멈췄다.
달칵.
“어디 갔노?”
헤리아는 식사 준비를 해놓고 문을 열었다가 그록이 보이지 않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비도 덜 그쳤구만, 뭐 해! 얼른 들어와서 점심 먹어!”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한곳에서 허리를 굽힌 채 움직이지 않는 그록을. 마치 조각상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헤리아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뭐 하는 기고? 안 오나? 냄새도 맡기 힘든,”
하지만 그녀는 하던 말을 멈췄다.
순간 코에 닿았다.
희미한 쓴 향이.
그 순간 그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헤리아는 그록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온갖 감정으로 소용돌이치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가만히 그런 그록을 바라보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찾았나 보구나.”
그록은 발견했다.
첫 쉴단을.
“네. 찾았습니다.”
답하는 그록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프시아와 똑같은 붉은 잎이지만 쓴 향을 조금씩 풍기는, 아직은 작은 쉴단이 자라나고 있었다.
주위의 다른 프시아들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고 여린 쉴단에서 쓴 향이, 그토록 찾던 독한 향이 흘러나왔다.
그록은 눈을 감았다.
순간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블란. 눈을 떴다. 흐린 소나기구름이 지나가고 맑은 하늘이 다시 떠올랐다. 블란의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다.
드디어 해냈다.
처음 마주한 쉴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그록에게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