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46화 (45/95)

# 46화

46.

“재밌어.”

“네?”

블란은 고켄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고켄은 블란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블란 양의 시를 보면서 늘 느끼는 거지만 ‘잘’ 쓰려고 하는 게 보이지 않아서 참 좋아요. 그래서 물론 시가 들쑥날쑥하지만 그게 나름의 묘미입니다.”

고켄 작가는 블란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쓰고 마음에 가는 것이 있으면 그 마음을 담는다.

뛰어난 문장을 추구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읊는 것을 시로 표출한다.

“그록 군은 하리안 제국으로 간다고 하던데 잘 도착했다고 하던가요?”

그록에 대해 고켄이 묻자 블란은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어제 도착한 편지에서는 이제 막 산맥 쪽 길을 넘어서 하루 정도 더 가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쯤은, 도착했을 것 같아요.”

“오, 그록 군은 어떤 여행을 할지 참 기대되는군요.”

고켄의 말에 동의하듯 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제 도착한 편지를 떠올렸다.

[여행이라는 것도 신선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여기는 왕국의 북쪽이라 여름인데도 시원하군요. 봄 같습니다. 블란 양과 다음에 한번 같이 오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고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뭔 생각을 하는지, 분명 그록 생각이겠지만. 연신 손을 꼼지락대면서 볼을 붉게 물들인 블란이 꽤 어여뻐 보였다.

외양은 그대로였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아름다워지는 블란이었다.

그 사실이 고켄은 좋았고 또한 조금은 부러웠다.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이.

***

그록은 후회했다.

‘절대!’

절대!

블란 양과 여기에 같이 오면 안 돼!

“어허이! 무슨 노무 머스마가 이리 힘이 없노, 응? 파뜩파뜩 안 움직이나? 허리를 똭! 똭! 굽히가몬서 해야지!”

그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는 자신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는 저 하얀 머리카락의 여인을 보며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독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록은 며칠 전 처음으로 이 하리안 제국 최대 프시아 군락지인 프쉴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와아.’

처음 마주한 프시아 군락지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흐를 만큼 강렬한 붉은색의 초원이었다. 그렇다고 초원을 뒤덮은 불길처럼 파괴의 빛이 아니었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참으로 예쁜 색이었다.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에 대한 모든 감각도 뺏어가 버리는 곳이었다.

코에 닿는 달콤한 향들의 거대한 파도가 그록을 멍하게 만들었다.

‘블란 양과 꼭 한번 와봐야겠어.’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와도.

그렇게 다짐한 순간,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분명 그레이 교수님이 말한 약초꾼 헤리아일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를 본 순간 그록의 얼굴 위로 조금 놀라움이 나타났다.

30년간 쉴단 채취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헤리아는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었고 하리안 제국 북편의 사람인데도 피부에 갈색 빛이 돌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주름진 얼굴과 갈색 빛이 도는 피부. 그리고 기억자로 굽어진 등까지.

하지만 그록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도 헤리아에게 압도되었다.

‘와, 마! 그쪽이 그록 바서입니꺼? 이야, 인물이 아주 좋네! 억수 반갑슴더!’

강렬한 하리안 제국 북부의 사투리가 헤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프렌 왕국 북부와 하리안 제국 북부에서 주로 사용되는 사투리에 그록은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며 그녀와 악수를 했다.

‘반갑습니다. 그록 바서입니다.’

‘그래요, 그래. 이거 아주-’

꽈악.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헤리아는 씨익 웃어 보였다. 60대 여인의 손이라기엔 힘이 넘쳤다.

그록은 왠지 모를 기분에 저도 모르게 뒤통수가 싸했다.

‘제대로 된 노동력이 왔구만! 하하하하하하!’

음.

그록은 며칠 전 처음 만났을 때 그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떠올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와, 어지럽나? 그럼 저 가서 좀 쉬다 온나. 무리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온 헤리아가 건넨 말에 그록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투박한 말투와 달리 다정한 헤리아였다.

그 모습에 헤리아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작업을 했다.

‘연구를 하는 사람이 쉴단을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살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난 네가 이 연구를 꼭 성공했으면 하고 그리고 보여주고 싶다.’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한 후 헤리아 했던 말이 그록의 머릿속에 와 박혔다.

‘얼마나 쉴단이 소중한 것인지.’

머리가 하얗게 샌 여인은 그 주름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겠나?’

맞다.

그록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프쉴의 프시아 군락지.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엔 끝도 없는 붉은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단향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허리를 굽힌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사람들은 허리를 굽힌 채 냄새를 맡으며 다녔다. 그록도 허리를 숙인 채 냄새를 맡았다.

달다.

이것도 달다.

이것도 달아.

단 향들 속에서 그록은 허리를 굽힌 그대로 이동하며 하나하나 향들을 맡았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이미 등은 타는 것 같았고 허리는 아파왔다.

하지만 그록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냄새를 맡았다.

헤리아의 연구 자료를 보고 개인적인 기록을 하느라 그간 이 군락지에서 일해보지 못한 그록이었다.

그는 매일 보았다.

해가 뜨자마자 나가서 늘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향을 맡는 헤리아를. 쪼그리고 앉는 것도 하기 힘들었다. 혹 그렇게 앉아서 움직이다가 프시아의 잎이 떨어지면 또 곤란하니까.

“어디 있을까. 우리 쉬일다안~”

흥얼거리는 헤리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힐끗 옆을 바라봤다. 허리를 편 그녀는 이미 허리가 굽어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30년 동안 얼마나 허리를 굽히고 살았기에, 쉴단만을 찾았기에 그녀는 저런 허리를 가지게 된 것일까?

그레이 교수가 존경한다고 했던 이 약초꾼 여인에게 그록도 작은 존경심이 일었다.

그록은 굽힌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다. 허리가 아파왔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떠오르는 눈동자가 있었다.

가만히 이를 보던 그록은 다시 허리를 굽히고 프시아 속에 묻힌 쓰고 독한 향, 귀하디귀한 쉴단을 찾기 위해 그 향을 찾아갔다.

“쯧쯧. 그라게 힘들몬 좀 쉬라 캐도. 와 그리 고집을 부리노?”

촤악!

“헉!”

“쯧쯧. 머스마, 엄살은!”

그록은 헤리아의 타박과 함께 등에 붙은 약초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싸하게 시원한 듯 뜨거운, 다져진 약초의 기운에 그록은 엎드려 누운 채로 꼼짝달싹 못 했다.

좁은 헤리아의 집 거실 한편에 등을 보인 채 드러누운 그록을 헤리아는 연신 혀를 차며 잔소리를 했고 헤리아의 남편 타코는 허허 웃으며 이를 구경했다.

쏴아아아아-

“이노무 비는 또 왜 이리 온대?”

헤리아의 투덜거리는 말에 그록은 누운 채로 창밖을 바라봤다. 오후부터 흐려지기 시작하던 하늘은 어느새 회색빛이 되더니 저녁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비가 오지 않나? 당신도 얼른 정리하고 들어와. 그록 군도 약초 효과 다할 때까지만 있다가 올라가서 쉬고.”

타코는 그록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록은 그런 타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타코는 이 프시아의 군락지인 프쉴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서 평일 동안 일을 하고 주말이면 이곳으로 돌아와 헤리아와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비가 오면 골치 아픈데.”

“뭐가 골치가 아픕니까?”

그록의 물음에 헤리아는 굽어진 등을 두드리며 그록의 옆에 앉았다.

쏴아아아아-

갈수록 굵어지는 빗방울이 창밖으로 보였다.

“비가 그치고 나면 그때는 잠시 온 사방에 향들이 확 일어나거든. 흙 냄새도, 풀 냄새도. 모든 향들이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니까. 힘들지.”

“아. 그렇군요.”

“‘아, 그렇군요’는 무슨! 어쨌든 내일부터는 무리하지 말아.”

헤리아는 그록을 바라봤다. 그러자 무뚝뚝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말했다.

“그래도 쉴단을 꼭 채취해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 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타닥, 탕, 타닥.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그록은 그 빗소리를 들으며 창밖은 검은 풍경 속에 숨어 있을 붉은 잎들을 떠올렸다.

“그록, 너는 허리를 한 번 숙일 때마다 향을 한 번 맡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노?”

담담한 헤리아의 물음에 그록은 그녀를 바라봤다. 주름진 얼굴의 헤리아는 씨익 웃어 보이더니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는 남편이랑 조금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어. 서른쯤에 했지.”

60대라기엔 너무 많은 주름이 진 얼굴로 그녀는 창밖 어둠을 주시했다.

“놀랍지?”

그녀는 그록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지금도 20대 후반이면 늦는다고 여기는데 헤리아가 젊었을 적이면 상당히 늦은 편이긴 했다.

“네. 조금.”

“하하, 그렇지. 뭐, 그렇게 늦게 결혼을 해서 그런가, 아이는 바로 들어서더구만. 31살에 아이를 낳았어.”

투둑투둑.

비가 창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워보트 병에 걸렸지.”

씨익. 헤리아는 그록을 향해 미소를 그려 보였다. 하지만 그록은 마주 웃지 못한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근데 내가 뭐 배운 게 있나, 돈이 있나. 근데 내 고향이 여기.”

한숨처럼 그녀는 말했다.

“프쉴이야. 그래서 당장 남편이랑 아이랑 함께 이곳에 왔어.”

창밖 어둠과 달리 하얗게 센 헤리아의 머리카락이 그록의 눈에 담겼다. 그녀의 이야기들이 빗소리와 함께 이어졌다.

“그리고 난 쉴단 약초꾼이 되어서 30년을 살았지. 30년 동안 하늘보다 땅을, 저 붉은 잎들을 더 많이 보고 살았어.”

아이의 이야기는 이곳으로 온 이후 더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록은 묻지 않았다. 다만 헤리아의 회한이 가득한 눈빛만을 바라봤다.

어찌하여 저렇게 나이보다 더 늙었을까.

얼마나 쉴단을 찾았길래 허리가 저렇게 굽었을까.

북부 지방 사람인데 왜 피부가 많이 탔을까.

묻지 않아도 답이 다 나왔다.

“그리고 그 30년 동안 글을 배우고 연구를 했지. 쉴단에 대해서 말이야. 그러다가 증오했었지.”

무엇을 증오했습니까?

이것 또한 묻지 않았다. 헤리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을 다니는, 높은 곳으로 향하는 약초꾼들과 달리 늘 땅을 보며 아래만을 보며 살아가는 쉴단 약초꾼.

“그록. 네가 워보트 병을 치료할 수단으로 쉴단을 연구한다고 했지?”

헤리아는 그록을 바라봤다.

“니도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지?”

“네.”

굳은 심지가 보이는 그록의 눈빛에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쉴단을 많이 발견한 약초꾼으로 유명한지 아나?”

헤리아는 쉴단 전문 약초꾼이자 제일 많이 발견한 이로 이름이 드높았다. 그녀는 무엇이 웃긴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고 헤리아는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도하거든. 허리를 한 번 숙일 때마다 기도해.”

그록은 이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와 함께 거실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쉴단을 내게 주이소. 제발, 나에게 주이소.”

헤리아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아들은 이제 없다. 쉴단을 통해서 연명을 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들이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매일 허리를 숙이며 기도했다.

쉴단을 내게 주이소, 제발.

“그라몬.”

씨익 웃으며 그녀는 그록에게 말했다.

“신기하게 나온다. 쉴단이. 어떻노? 내 비결인데.”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록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록의 등에서 약초를 다져 붙인 천을 떼어내며 헤리아는 말했다.

“난 니가 치료제를 개발하기를 바란다.”

엎드린 그록은 헤리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이 한 좀 니가 풀어줬으몬 싶다. 그래야, 내가…….”

내가 하늘을 좀 보고 살 것 같다.

헤리아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그록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초 천을 정리하는 헤리아에게 그록의 목소리가 닿았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꼭 해낼 겁니다.”

이제 18살.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묵묵히 허리를 숙인 채 냄새를 맡던 그 모습을 헤리아는 믿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록의 답에,

짜악!

“악!”

그의 등을 세차게 때리며 말했다.

“하모! 당연히 그래야제!”

그록은 따가운 등을 문지르며 그제야 헤리아를 향해 편하게 미소를 그려 보였고 헤리아도 마주 웃어 보였다.

비 오는 프쉴의 밤이 하루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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