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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44화 (43/95)

# 44화

44.

시 낭송회가 모두 끝나고 무대 뒤편에서 나온 블란이 제일 처음 마주한 사람은 아버지 레온이었다.

“아버지.”

블란의 부름에 레온은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블란을 바라봤다.

딸이 자신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이야.

마냥 약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인 베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고 블란이 태어나 자라온 시간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제 엄마를 빼다 박은 그 눈동자에 레온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로 블란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아버지의 앞에 서서 입술을 달싹였다.

제 시가 어떠셨나요?

저 잘했어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블란은 망설였다. 그 순간,

“아.”

레온이 천천히 블란을 품에 안았다. 놀란 블란의 등을 레온은 살며시 토닥였다.

“잘했다. 정말 잘했어.”

그리고 고맙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블란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그런 그의 어깨에 블란은 고개를 묻었다.

두 사람은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을, 추억들을 떠올렸다.

이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던 펠은 옆을 살짝 보고는 흠칫했다. 자신보다도 더 흐뭇한 얼굴의 그록 바서가 보였다.

“흐음.”

이상하네.

보통 여자친구의 아버지 앞이면 조금 굳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록의 표정은 너무나도 흐뭇했고 심지어 평온해 보였다. 비서 펠은 얼굴을 요상하게 구기며 레온을 바라봤다.

잘생긴 외모보다 중년임에도 장대한 기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록을 봤다. 전형적인 비실비실한 연구자 체형이 보였다.

겁 안 나나?

“아버지. 이분은,”

포옹을 하고 난 후 블란은 그록을 바라보는 레온의 눈빛에 당황했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만 점점 빨개져가는 블란의 얼굴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고 있었다.

“자네가 그록 바서인가?”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레온은 그록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딸한테 수시로 편지를 보내던데.”

방학 때면 늘 오는 편지의 봉투 앞에는 떡하니 ‘그록 바서’라고 적혀 있었다. 블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그록은 묘하게 밝은 얼굴로 레온에게 답했다.

“네. 반갑습니다.”

장인어른.

그록은 뒷말은 전하지 않았다.

레온은 그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을 향한 호의 가득한 그록의 시선에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록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반갑네.”

꽈악.

레온이 짙은 미소를 그리며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비서 펠은 당황했다. 딱 보기에도 레온의 손에 잡힌 저 가냘픈 손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그는 블란을 바라봤다.

오, 아가씨.

두 사람의 악수가 감동적인지 두 손을 모든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불쌍한 마음으로 그록을 바라봤다.

……어?

“반갑습니다.”

그록의 얼굴은 밝았다.

건강하신가 보군.

과거 매번 악수를 할 때면 느껴졌던 그 힘을 느끼며 그록은 레온이 건강함에 기뻤다.

비서 펠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언젠가 한번 보고 싶었었네.”

레온은 묘한 질투와 못마땅함을 얼굴에 담아 그록을 바라봤지만 그 눈빛에는 얼핏 고마움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그록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헐!”

“야, 저, 저!”

“대박! 진짜야?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것 맞아?”

레온의 손을 놓으며 시선을 돌린 그록은 입가에 작게 미소를 그렸다.

모자를 벗으며 다가오는 고켄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록은 이 소란이 이해되었다.

이곳은 문학 동아리의 시 낭송회장. 그들에게 고켄은 엄청난 인물이었다.

“야. 진짜 저 블란 언니랑 고켄 작가님이랑 친한가 봐.”

“너 언제 봤다고 블란 선배한테 언니라고 해?”

“몰라, 얘. 그런 게 중요해? 이야.”

뒤편에 서 있던 동아리 회장 메리는 눈빛을 번뜩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녀는 감격스러운 와중에도 힐끗 다른 한쪽을 돌아보았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문예창작학과 몇 명과 연신 이쪽을 보며 계산하는 듯한 몇 사람이 보였다. 아직 나가지도 않고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들이었다.

이거, 이거.

메리의 입꼬리가 씰룩씰룩했다. 하지만 그 씰룩임은 곧 커다란 미소가 되었다.

“블란 양. 오늘 정말 좋았어요.”

“고켄 작가님.”

고켄이 블란과 악수를 하며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이거 완전히 대박이구만! 메리는 미소를 짓다 못해 입꼬리가 한없이 위로 향했다.

“많이 서투른 시였는데.”

블란이 우물쭈물 부끄러워하며 건넨 말에 고켄은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은 서툴고 잘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쓴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잘했습니다. 정말.”

수줍게 블란이 미소를 지었다.

고켄은 그런 블란을 흐뭇함을 담아 바라봤다. 마음을 담아 쓰는 것. 그것이 가장 잊어버리기 쉬우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야, 진짜 고켄 작가님 밑에 들어간 건가?”

“돈혐지 출세했네.”

문예창작학과 학생은 친구가 툭 내뱉는 말에 그의 옆구리를 퍽 치며 말했다.

“쉿! 너 미쳤냐?”

그는 친구에게 윽박지르듯이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들은 이는 없어 보였다. 그는 친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여기가 어딘 줄 잊었냐? 여기 남 우드 문학 동아리야. 여기 애들이 저 블란 샤를한테 얼마나 매달리는 줄 알아? 너 고켄 작가님 밑에 들어가고 싶다며? 입 조심해.”

“흥. 그렇든 말든.”

친구의 답에 남자를 혀를 찼다. 딱 보니 눈에 부러움이 한가득 보였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켄 작가를 바라봤다.

고켄 작가.

이상하게도 어떠한 명확한 지위에 오르지 않으려고 하는 인물이었다. 특별직이나 임시직은 늘 잘 받았지만 한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극복의 상징인 케인.

그리고 그의 손자인 고켄.

그는 파괴의 상징이었다. 혹은 선구자.

“여하튼 바꿔야겠네.”

블란 샤를에 대한 판단을.

그는 생각 이상으로 고켄이 아끼는 듯한 블란을 보며 자신의 태도를 조금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시도 나쁘지 않았고.’

태도도 좋았고.

묘하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귀를 열게 만들었던 그 낭송회를 떠올리며 문예창작학과 남학생은 블란 샤를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블란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렸다.

“고켄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짧게 인사를 나눈 레온과 고켄은 어째서인지 점점 대화가 요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하하하. 제 딸이 역시 착하고 하는 짓이 참으로 이쁘지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더군요. 참으로 블란 양은 시만큼 마음도 아름답고 또한 시의 성장 가능성이 엄청난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블란의 칭찬을 해대었다. 본인들은 칭찬인 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비서 펠은 벌겋게 물든 블란의 얼굴과 주위 사람들의 약간 질려하는 모습에 자신의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록은 고켄과 레온처럼 연신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사람도 장난이 아니야.

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의 삼각형이 블란을 중심으로 구축된 것 같았다.

“크흠.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그렇군요. 작가님, 오늘 많이 바쁘십니까?”

순간 레온의 눈빛이 변했다. 이를 마주보고 있던 고켄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 엘라 시인으로부터 받았던 연락이 떠올랐다.

‘요즘 샤를 가문에서 여성 작가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거기에 합류했구요.’

그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고켄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광산에서 벌어들인 돈을 쓰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던 레온 샤를은 요즘 들어서 샤를 가문의 힘을 받아 커다란 일을 두 가지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저야 늘 시간이 됩니다.”

“하하. 그러시군요. 그러면…….”

레온은 고켄과의 만남에서 이끌어내어야 할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블란이 보였고 그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블란을 보는 그록 바서, 저놈이! 보였다.

고켄은 그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크흠. 그러면 지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고켄이 흔쾌히 답하자 레온은 슬쩍 그록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은 그록은 무덤덤했다. 과거 분노와 경멸이 가득했던 그 눈빛에 비하면 너무나도 다정한 눈빛에 그록은 마음이 편안했다.

비서 펠이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잡아서 엎어치기 할 것 같아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블란.”

움찔하며 블란이 레온을 바라봤다. 하지만 레온은 블란을 불러놓고선 그록을 바라보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늦지 않게 아버지가 있는 숙소에 오거라. 잠시 저택을 하나 빌려두었다. 펠에게 기숙사에 연락해놓으라고 할 테니 오늘 밤은 숙소에서 자고 내일 함께 점심을 들자구나.”

블란은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록을 향해 말하는, 명백한 의도가 보이는 레온의 모습에 얼굴이 다시 벌게져갔다.

“그러니, 늦. 지. 않. 게. 돌아오도록.”

“네에.”

블란이 답했지만 레온은 여전히 그록을 바라봤다. 그 매서운 눈빛에도 그록은 생각했다.

과거와 많이 달라졌구나.

자신에 대한 시선이 과거와 달리 많이 따뜻해졌음에 그록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가족도. 블란의 가족도.

모두 앞으로 갈 길이 멀었지만 과거보다는 모두 다 나아질 것 같았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막강하군.

펠은 담담하게 레온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록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마음 한편으로 인정했다.

“그러지.”

레온은 그록의 무뚝뚝한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며칠 전 그 ‘잔혹한 시선’에 대한 발표를 떠올렸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으니까. 여러모로.”

베스 노옐로서든.

레온 샤를로서든.

뒷말은 하지 않았다.

고켄과 레온, 펠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곤 멀어져갔다. 순간 블란의 손을 잡는 그록을 보던 레온의 눈빛이 매서워졌지만 이를 둘은 느끼지 못했다. 펠만 조금 안쓰럽게 레온을 바라보았을 뿐.

“가시겠습니까?”

“네.”

“아, 잠시만요! 선배님!”

메리가 블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어딘가 속 시원한 표정으로 블란에게 말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에이, 선배님이 최고였어요! 그래서 저희가 따로 드릴 건 없고.”

메리는 블란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블란은 이를 받아 열었다.

“저희 문학 동아리 ‘글마음’의 상징입니다. 선배님이 가입은 하지 않으셨지만 특별회원이 되어주세요. 저희가 가고자 하는 길의 자랑스러운 선배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펜 모양의 작은 배지였다.

“받아주실 거죠?”

메리가 애교 있게 물었고 블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뒤편에 메리와 함께 있는 문학 동아리 학생들이 보였다. 자신을 향한 호의 가득한, 어쩌면 동경까지 담긴 눈빛에 블란은 마음이 이상했다.

“배지를 달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가 정말 감사해서. 사실 저희 동아리 행사에 글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이 오긴 이번이 정말 최대였거든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요.”

진지한 얼굴로 건네는 메리의 말에 블란은 가만히 배지를 손에 쥐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메리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네!”

씩씩하게 답한 메리는 씨익 웃으며 음흉한 미소를 매단 채 말했다.

“그럼 두 분 즐거운 데이트 시간 보내십쇼!”

블란과 그록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갈까요?”

“네.”

둘은 시낭송회장을 빠져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록과 블란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걸었다.

걷다보니 중앙광장이었다. 그록은 순간 바뀐 풍경에 블란을 바라봤다. 작년 중앙광장에서 겪었던 안 좋은 일이 떠올랐다.

그 때문에 블란은 중앙광장에 가기 힘들어해 결국 축제 동안 외곽을 돌았던 두 사람이었다.

“일 년 만이네요.”

하지만 드물게 먼저 입을 연 블란은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움츠러들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또렷하게 그녀는 말했다.

“작년에 불꽃놀이 정말 이뻤는데. 그렇죠?”

그렇게 말하며 블란이 곱게 눈웃음을 그려 보였다.

순간 그록은 멍해졌다.

블란은 작년 그록이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함께 불꽃놀이를 보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두 볼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그록은 더욱더 멍해졌고 심장이 뛰었다.

붉게 물든 두 볼과 짓고 있는 밝은 미소.

그 순간,

“이번 우드 축제의 대미를 장식할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와아아아아!”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수많은 폭죽들이 하늘로 향했다.

막 노을이 지고 밤이 된 하늘 위로 수많은 색들이 가득 찼다.

“아…….”

블란은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작년처럼 중앙광장의 끝이 아닌 중앙광장의 한가운데에서 블란은 불꽃놀이를 바라봤다.

그록은 여전히 블란을 바라봤다. 하늘빛 눈동자 속에서 불꽃들이 여러 색들로 터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올해도 예쁜 것 같아요.”

블란이 다시 한 번 곱게 눈웃음을 지으며 그록에게 말했다.

그 순간 그록은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블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록의 입술이 블란의 입술을 덮고 있던 손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하고 싶었다.

그록은 떨리는 입술을 그 손 위에 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로 향했다.

밤하늘은 수많은 색들로 채워졌고 폭죽 소리는 커졌으며 사람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지금 두 사람의 머릿속은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록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굳었다.

블란도 굳었다.

둘은 불꽃놀이보다 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불꽃놀이가 끝이 났고 축제가 끝이 났다.

그날 블란은 자신의 입을 가리던 그 손을 씻지 못했다.

그록은 방 거울 앞에서 멍하니 자신의 입술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축제의 마지막 날 밤을 잠들지 못한 채 보냈다.

하지만 최고의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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