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43화 (42/95)

# 43화

43.

그록은 조금 색다른 기분이었다. 시를 듣는 시간은 그로선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이 시는 제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저는 원래 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느 한 시 구절을 보고 난 후로 시에 빠져 살았어요. 그때의 순간을 떠올리며 시를 지어보았습니다.”

단상 위로 올라온 여학생들은 자신이 지은 시를 읊기 전 자신만의 이야기를 짧게 전했다. 이를 귀담아 듣고 시를 들으니 각각의 시를 지은 이들의 생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9번째 사람이 자작시 낭송을 끝내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순간 그록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학 동아리 글마음의 회장 메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마지막 10번째!”

팸플릿에 적힌 순서.

[10. ‘그림자’ -블란 샤를]

그록은 조용하던 공간이 조금 부산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 마지막 무대에 서실 분은 저희 동아리 회원은 아니시지만!”

메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동아리에 있는 동안 초대장을 보내도 한 번도 이 시 낭송회를 들으러 오지 않던 문예창작학과 사람들과 서 우드에서 글을 좀 쓴다고 알려진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이번에는 초대장을 보내지 않아도 왔다.

이를 알고 그녀는 올해 어떤 발표회보다도 열과 성을 다해 준비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만만할 수 있었다. 앞 순서의 시들을 들으며 묘한 빛을 띠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왜? 우리 시도 들으니 좋아서 그러니?

이 말을 내뱉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메리는 입을 열었다.

“작년 서 우드 아카데미에서 개최한 유명한 공모전인 우드 문예 공모전 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하신 분이십니다.”

이번에 발표할 블란의 시.

솔직히 말하면 메리 자신은 뛰어난 것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이 시를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제가 꿈꾸는 제 시의 서툴지만 첫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 답을 들은 메리는 당장 발표회를 추진했다.

꿈꾼다.

그 말에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녀는 목소리를 더욱더 높이며 말했다.

“남 우드 아카데미의 자랑거리이신 분이자, 제가 존경하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비서 펠은 옆을 바라봤다.

“크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입꼬리를 씰룩이는, 블란의 아버지 레온이 보였다.

“오, 나 저 언니 발표 들으러 왔어!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일지 궁금해.”

“나도, 나도. 나중에 엘라 시인처럼 되는 것 아냐?”

“모르지. 그래도 왠지 응원하고 싶다. 여작가는.”

“나도.”

씰룩씰룩.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고.”

“팸플릿 설명 보니까 초기에 쓴 시라던데, 그러면 좀 서툴 것 같은데. 왜 초기 작품을 발표하지?”

“몰라. 그냥 한번 들어보자고.”

“하긴, 너 궁금하다고 보러 가자고 그렇게 닦달을 했으니.”

“야.”

“아, 알았어. 조용히 들을게.”

씰룩씰룩.

펠은 말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입꼬리를 위로 씰룩이는 레온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매서운 질투와 시샘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이곳의 분위기는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히 블란의 시만을 감상하러, 혹은 판단하러 왔다는 사실이 묘하게 비서 펠의 마음에 들었다.

“아이구, 딱 맞춰왔네.”

그때 한 사람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지 않고 맨 뒤에 서 있던 레온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이 커졌다.

고켄 시인이었다.

조용히 들어온 그를 알아본 사람은 아직 없었다. 유일하게 알아본 레온은 몸이 굳었다.

그는 블란과 고켄의 사이를, 시문학계에서 고켄이 어떤 위치인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레온의 입이 살짝 열렸을 때.

“그럼 지금부터 그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남 우드 아카데미 3학년, 필명 눈사람. 블란 샤를 양입니다. 다들 박수로 환영해주시길 바랍니다!”

메리의 마지막 소개 인사에 그는 다시 입을 도로 닫아야 했다.

무대 위로 천천히 블란이 올라오고 있었다. 레온은 처음으로 높은 곳에, 많은 이들 앞에 서 있는 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블란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앞을 보고 싶었지만 떨려서 잘 되지 않았다. 몇 날 며칠 동안 연습했는데. 블란은 연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안녕하세요? 블란 샤를입니다.”

됐어.

그록은 입가에 안도의 미소를 그렸다. 목소리는 정말로 심하게 떨렸지만 더듬지 않았다.

“왜 저리 땅을 보고 한대?”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록의 귓가에 닿았지만 그는 땅바닥을 보는 블란을 응원했다.

더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수십, 수백 번을 연습했다.

블란은 이 자리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이를 그록만큼은 옆에서 보아서 알았다.

“이번에 발표하게 된 ‘그림자’라는 시는 사실 시라고 하기에도 많이 모자랍니다.”

음?

모자라다고?

블란의 시를 들으러 왔던 몇몇 이들의 얼굴을 구겼다. 모자란 것을 왜 발표를 하려는 거지?

“아주 어릴 적 처음 제 생각을 글로 서투르게 담았을 때. 그때쯤 적었던 시입니다.”

첫 말이 끝났다.

블란은 조심스럽게 떨리는 마음을 꾹 누르며 땅바닥에서 시선을 조금씩 위로 올렸다. 이제는 사람을 봐야 할 때였다.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순간 든 생각에 블란은 과거에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도로 내려가려는 고개에 힘을 주었다. 안 돼. 오늘은 해내야 돼. 그녀는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앞을 보게 된 순간, 보였다.

가장 시선이 닿기 좋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록보다도 한 사람이 더 먼저 보였다.

맨 뒤에 서 있는 사람.

레온이었다.

분명 오신다는 말씀이 없었는데.

블란은 자신을 향한 그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이 도는 것을 본 순간 자신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용기가 마음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블란의 눈에 작은 지지대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이 시는 제가 어릴 적 제 그림자를 보면서 지었던 시입니다. “

블란은 이 시를 적었던 때를 떠올렸다.

과거. 너무 힘든 매일매일에 지쳐서 어디에 마음을 풀어야 할지를 몰랐을 때.

대화를 나눌 친구 하나, 사람 하나 없었을 때.

그때 블란은 처음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이 마음의 멍울을 토해내어야 했던 그 순간이었다.

그때. 이 시는.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생각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된 계기였다. 이 시는.

“저는, 이 시를.”

레온은 딸을 바라봤다.

많이 떨었지만 말을 더듬지 않았고, 잠시 감았다가 다시 뜬 눈은 올곧이 사람들을 향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마주한 장면은 그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블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시를 아버지께 바칩니다.”

레온의 눈이 커졌다.

블란은 이를 보며 천천히 시의 제목을 읊었다.

“그림자.”

그녀는 이 시를 지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의 세상에는 어둠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치료는 너무나 힘들었고, 갈수록 살이 찌고 역한 냄새가 났다.

사람들은 자신을 피했고. 저택 안의 사람들조차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자신 몰래 콧가에 대고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 것들을 보며 블란은 마음을 토해내기 위해 시를 썼다.

“빛과 등을 지자, 보인 것은 나만큼의 어둠.

찾아와 사라지는 밤과 달리

나에게 선사된 생만큼 그림자는 자랐다.”

시를 읊으며 블란은 떠올렸다.

어느 날 문득 본 자신의 그림자. 자신이 자랄수록 이 그림자는 커질 것이고 자신이 자랄수록 죽음은 가까워질 것이었다.

“나의 발끝에 맞닿아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림자, 나의 세상.”

떨림을 담았지만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갑게 쏟아지는 빛에

내 그림자는 길어졌고 내 삶은 줄어들어 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블란은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등 뒤로 따갑게 햇볕이 내리쬐었다.

그러던 순간,

“그런 나의 그림자를 감싼

더 큰 그림자.”

자신의 옆에 보였다.

더 큰 그림자가.

아버지였다.

“나만큼의 어둠에 또 다른 절망을 덧댄 그 키에

나는 올려다보아야 했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어째서 나보다 더 클까?

블란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고개를 올려 아버지를 보았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보였다. 자신보다 더 슬퍼 보이는 아버지의 마음이.

“타들어갈 듯 매서운 빛에 맞서는 넓은 그림자의 등.”

블란은 아버지 레온을 바라봤다.

그때 블란은 깨달았다.

“빛과 등을 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빛과 맞닿으며

그림자를 키워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블란은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아버지께.

“평생이 가도 늘 나보다 더 클 그의 그림자를

나는 안았다.”

시는 끝이 났다.

블란은 잠시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그록은 깍지 낀 손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잘했다. 정말 잘해내었다.

“사람들은…….”

블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음?

그록은 연습과 다른 상황에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은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오신다는 말씀이 없어서 발표 연습을 할 때는 하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하고 싶었다. 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어둠이, 아픔이, 그림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본 순간, 그 눈동자를 본 순간.

자신의 마음속 멍울만을 토해내던 블란의 시가 바뀌게 되었다.

“저는 이를 제 시로 안아드리고 싶어요.”

레온은 단상 위의 딸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딸과 보낸 18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모자라고 서툰 시지만, 그때 그 첫 마음을 가졌던 시를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 같아 발표했습니다.”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의 그림자를 감싸고 싶어 하는 그녀는,

정말로, 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블란은 앞을 바라봤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바라봤다. 이 자리가 끝나갔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디어 끝이 났다. 잠시 동안의 정적에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블란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벌떡 일어선 그록이 자신을 향해 미소와 함께 박수치는 모습을.

스승과도 같은 고켄 작가의 환호를.

그리고 아버지 레온의 눈물과 기쁨이 담긴 미소를.

블란은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느꼈다.

해냈다.

블란은 이제 빛이 마냥 아프지 않았다.

***

그림자

빛과 등을 지자, 보인 것은 나만큼의 어둠.

찾아왔다 사라지는 밤과 달리

나에게 선사된 생만큼 그림자는 자랐다.

나의 발끝에 맞닿아 있는 유일한 것은 그림자

나의 세상.

따갑게 쏟아지는 빛에

내 그림자는 길어졌고 내 삶은 줄어들어 갔다.

그런 나의 그림자를 감싼

더 큰 그림자

나만큼의 어둠에 또 다른 절망을 덧댄 그 키에

나는 올려다보아야 했다.

타들어갈 듯 매서운 빛에 맞서는 넓은 그림자의 등

빛과 등을 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빛과 맞닿으며

그림자를 키워왔다.

평생이 가도 늘 나보다 더 클 그의 그림자를

나는 안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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