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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32화 (32/95)

# 32화

32.

기숙사방으로 돌아온 블란은 조심스럽게 일기장 맨 뒷장을 펼쳤다.

[앞으로 같이 할 일.]

그곳에는 첫 번째가 적혀 있었다.

[1.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

그 밑에 블란은 조심스럽게 새로운 글을 채워 넣었다.

[2. 같이 1년 동안 꿈을 위해 준비하기.]

***

“그록 바서.”

창밖을 보며 가방을 챙기고 있던 그록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3학년이었다. 언제 강의실로 들어온 건지, 그는 그록에게 말했다.

“그레이 교수님이 잠시 들렀다가 가라고 하시던데.”

“아,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3학년은 묘한 눈빛으로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은 그런 3학년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말씀 전해주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냐. 아냐.”

3학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그록이 신기했다.

재크와 척을 지고 그레이 교수라. 거기다가 계속해서 매 학기 시험마다 지금까지 약초학과 최고점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야 할까. 아니면 외면해야 할까.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감사합니다.”

무뚝뚝하지만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3학년은 생각했다.

사람은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니 재크랑 척을 졌을라나?

“뭐,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럼 나는 간다. 다음에 보면 인사하고.”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래.”

연을 이어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3학년은 그록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록은 그 모습에 인사를 꾸벅하고는 마저 짐을 챙겨 자신 역시 강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를 수업이 끝났지만 아직 강의실에 남아 있던 동기 몇 명이 바라봤다. 매튜는 옆에 있던 동기에게 슬쩍 다가가 말했다.

“그런데 그록 저놈이 만나는 돈혐지 말이야.”

“그 뚱뚱한 여자?”

매튜의 입으로 시선이 모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 그 돼지 엄청 부자라더라?”

“그래?”

“어. 조금…….”

그는 말을 끌며 흘러가듯이, 하지만 은밀하게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아니, 그냥. 그록 저놈도 연구에 빠져 사는 것 보니까 돈이 많이 필요할 테고. 뭐, 솔직히 돈혐지가 여자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계속 만나는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체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매튜는 눈동자에 어떤 기대를 담은 채, 대화를 하던 동기를 바라봤다.

하지만,

“너 설마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냐?”

동기의 반응은 매튜의 기대와 달랐다. 동기는 피식 웃으며 매튜를 바라봤다.

그 반응에 매튜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아니면, 왜 만나겠냐? 솔직히 돈혐지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동기는 툭 내뱉었다.

“어. 차라리 그게 말이 되겠는데.”

“뭐?”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매튜의 모습에도 남자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야. 그록 바서가 돈이 없어서 저러겠냐?”

“왜? 그록 집안 진짜 가난해. 쟤 방학 때 알바도 했었어. 몰라?”

“아, 그건 그런데.”

매튜의 눈동자를 보던 동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건 뭐, 질투가 그득그득하네. 그래도 사실이 아닌 건 아니지.

그는 매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쟨 천재잖아.”

그 답에 매튜와 동기 남학생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은 지금 마음만 먹으면 후원자도 엄청 붙을걸? 지금까지 세 번의 시험 동안 점수가 다 90점대야. 그건 저놈 실력이란 소리지. 쟨 저 재능이 돈이고 미래야.”

근처에 있던 다른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하긴 우리랑 레벨이 다른 녀석이지. 그런 놈이 뭐가 아쉬워서 돈 때문에. 에휴.”

“아, 부럽다. 어떻게 공부해야 저렇게 되지?”

“야. 나는 그록 저놈이랑 평균 40점 차이야, 40점! 나 아버지한테 맞아서 뒤질 뻔했어! 서 우드 시험이 쉬워진 것 같은데 너는 왜 그대로냐고! 쉬워지긴 얼어 죽을!”

“와, 너희 아버지 우리 엄마랑 똑같은 말 하시네.”

어느 정도 공부를 잘하는 것과 상상 이상으로 공부를 잘하는 것은 그 느끼는 바부터가 달랐다.

동기는 질투심으로 가득 찬 매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러면 지만 손해일 텐데.’

이미 강의실에는 보이지 않는 그록을 떠올리며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좀 친해져 놓을걸.”

재크 교수와는 척을 졌지만 분명 뭔가 하나를 해낼 것 같은 천재라는 느낌이 남자는 들었다.

“쯧.”

체프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짜증이 난 듯한 매튜의 얼굴과 그록의 천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기들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는 며칠 전 재크 교수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체프. 자네, 그록 바서랑 친한가?’

‘네?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입니다.’

‘아, 그래?’

그때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던 재크 교수의 얼굴이 떠올라 체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그록이 떠나고 없는 강의실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그록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자리에 ‘돈자팔’이란 이름은 없었다.

그록은 과거와 분명히 다른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

그레이 교수와의 면담이 끝난 후 그록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11월 초에 들어선 요즘 그록은 늘 남 우드 아카데미로 향했다.

“블란 양.”

“아, 그록 씨!”

매일매일 찾아오는 그록을 블란은 반기면서도 의아했다. 평소에는 그래도 며칠 기간을 두고 봤었는데, 요즘 들어 그록은 매일 찾아왔다.

“저, 그록 씨.”

블란은 하늘을 보고 있는 그록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네. 왜 그러십니까?”

그록은 흐린 하늘을 보다가 블란을 보며 답했다.

“아, 아뇨. 바쁘실 텐데, 이렇게 자주 오셔도 되나 싶어서요. 아, 저, 저는! 너무 좋지만! 호옥시 해서, 그.”

“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단박에 답이 들려왔다. 블란은 흐린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그록을 힐끗 바라봤다.

음식 섭취 보고서 때문인지 살이 오른 그록의 모습은 정말로 멋있었다.

‘흐음.’

하지만 그록은 심각했다.

그는 블란을 힐끗 바라봤다.

가을이 끝난 11월 초. 탄신일이 끼인 이 주에는 겨울이 시작되어 블란이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시선을 돌린 그록은 묵직하게 빵빵한 자신의 가방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열두 번째. 비 오는 날 같이 우산 쓰고 걷기]

그리고 그 밑의 열세 번째.

[같이 첫눈 맞기]

이건 아주 엄청난 난이도의 일이었다.

우산의 길이를 계산하는 것과 비교도 못할 고난도의 과제였다.

그록은 요 며칠간 도서관에서 첫눈이 오는 날에 대한 기상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 결과 79%의 확률로 첫눈이 탄신일이 끼인 11월 첫째 주에 온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까닭에 수도에서는 탄신일이 더욱더 성스럽다고 여겼다.

그록은 진지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환경구조공학과를 다녀왔다. 그들의 판단으로는 오늘 혹은 내일 첫눈이 내릴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 그록 씨?”

“아, 네. 블란 양.”

흐린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록은 블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곤 그녀를 바라봤다.

“찻집으로 가시겠습니까?”

“네.”

익숙하게 손을 잡고 두 사람은 위스 찻집으로 향했다. 탄신일이 있는 11월 첫째 주. 우드 시에서 특별한 행사를 열지는 않지만 왕국민들에게 중요한 날인 만큼 어딘가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와…….”

그 까닭에 상점들은 예쁘게 꾸민 곳이 많았는데, 이를 보며 블란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록은 멍하니 그런 블란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들어갈까요?”

“네.”

찻집 앞에선 그록은 찻집 문을 열었다.

딸랑.

문이 열렸고.

“어? 오랜만이네요.”

예비 사장에서 이제 사장이 된 릴리가 인사를 건넸다.

이에 답하며 들어서려는 찰나,

“우와! 눈이다!”

찻집 안의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에,

훽!

엄청난 속도로 문을 도로 닫았다. 황당한 얼굴의 릴리가 보였지만 그록은 뒤돌아 블란을 바라봤다.

그 엄청난 빠른 속도에 당황한 블란이 작은 실눈을 깜박이며 바라볼 때.

“첫눈입니다.”

그록은 비장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블란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아.”

블란은 거리로 나서자마자 뺨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씩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다. 블란은 설레는 마음에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 씨! 눈이 너무 예뻐요오?”

그리고 당황했다.

그록은 묵직하고 빵빵한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블란은 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블란 양. 잠시 이리로 와 보십시오.”

멍하니 블란은 그록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록은 빵빵하고 묵직한 가방에서 꺼낸 것들로 블란을 완전 무장시켰다.

두꺼운 목도리로 칭칭 블란의 목을 감싸서 조금의 틈도 만들지 않았고, 커다란 털모자를 꺼내서 귀까지 모조리 다 덮어버렸다. 그리고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서 눈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손 좀 주십시오.”

멍하니 손을 내미는 블란의 양 손에 벙어리장갑을 두 짝 끼웠다.

거리를 지나가던 이들이 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찻집 창으로 그록의 모습을 모두 다 보고 있던 사장 릴리와 알바생들은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그록 씨도 대단하네요.”

“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록은 진지했다.

저번 우산 길이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블란이 비를 맞아야 했고 자신이 감기에 걸려야 했지만 연구자로서 다시는 그런 착오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첫눈이 언제 오냐 확률 싸움쯤이야.

미리 준비를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록은 여전히 멍한 얼굴의 블란을 보며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 빼고는 따뜻해 보였다.

그록은 이제 자신을 무장시켰다.

빵빵하던 그록의 가방이 홀쭉해졌고 이제 그록과 블란이 빵빵해졌다.

“갑시다.”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블란은 그 안에 담긴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록은 블란의 손을 잡고 첫눈이 내리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눈이 와 추운 날씨였지만 블란은 그의 옆을 걸으며 추위를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예쁘군요.”

하늘을 보며 그록이 무뚝뚝하게 건넨 말에 블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정말 예뻐요.”

하얗게 내리는 눈들이 블란의 눈에 담겼다.

그때,

“크흠.”

그록이 헛기침을 했고, 블란은 자신을 한 번 보더니 하늘의 눈을 보며 입을 여는 그록을 볼 수 있었다.

“눈은 하얀 게 예쁜 것 같습니다. 크흠.”

털모자로 가려지지 않은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사람도 참 예쁜 것 같습니다.”

깜박깜박.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던 블란은,

“아.”

자신의 필명을 떠올렸다.

눈사람.

그게 맞을까? 이 생각이 맞을까?

그록의 빨간 귀가 눈에 다시 들어왔다.

블란의 귀와 볼이 순식간에 빨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꽁꽁 싸매서 가려진 그 붉음을 그록은 볼 수 없었다.

둘은 손을 잡은 채 하얀 눈 속을 거닐었다. 비록 나중에는 눈이 많이 와 평소보다 일찍 헤어져야 했지만,

“녹겠지만, 받으십시오.”

블란은 그록이 갓 만들어서 건넨 눈사람을 장갑 낀 손으로 받았다.

‘눈사람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블란은 깨달았다.

그록은 만드는 것에 영 재주가 없음을.

울퉁불퉁한 눈사람을 손에 들고서 블란은 작게 눈웃음을 그렸다. 그녀는 그록을 향해 조심스럽게, 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괘, 괜찮아요. 녹지 않는 눈사람이 있으니까요.”

블란의 답에 그록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블란에게 인사를 하고선 서 우드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이를 가만히 보던 블란은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녹지 않는 눈사람 옆에 쟁반을 두고선 첫눈으로 만든 눈사람을 놓아두었다.

“……너 꼬라지가 그게 뭐냐? 어디 대륙 북쪽에 다녀왔냐?”

그리고 그록은 아스트의 황당해하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실험실 책상 앞에 앉아 쪽지를 펼쳐들었다.

[열세 번째. 같이 첫눈 맞기]

[ㄴ공부하고 준비하면 충분히 즐겁게 보낼 수 있음. 비 오는 날 같이 걷는 것도 새로이 도전해보겠음.]

두 사람이 함께 맞이한 따뜻한 첫눈이 밤새도록 두 사람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은 하얗게 변한 아름다운 우드 시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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