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28화 (28/95)

# 28화

28.

[장려상 눈사람 ‘환희’]

“축하합니다! 블란 양!”

그록은 저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쫙 펴졌다. 여전히 벽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블란은 멍하니 그록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장려상이라니!

블란은 ‘환희’ 제목이 보였고 그와 동시에 환희가 찾아왔다. 긴장이 사라진 심장은 다른 의미로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 겪어보는 감정이었다.

“가서 확인 받읍시다.”

“아, 네, 네!”

각 상을 수상하게 된 이들은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응모했더라도 도서관 행정실에 가서 본인 확인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후 이 주일 뒤에 열릴 작은 시상식에 참여해 이 문예 공모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상패를 받게 된다.

‘진짜로 상을 받을 줄이야.’

조심조심 걸어가는 걸음과 달리 블란의 마음속은 마치 걷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그록의 눈에 보였다. 평소와 달리 내딛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별로 없었다.

“집에 편지 부쳐야 되지 않습니까?”

“네? 아, 네!”

그록의 물음에 블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한다면!

아마 엄청 좋아하실 것이다. 당장에라도 달려오려 하지 않으실까. 블란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록은 이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블란은 힐끔 그록을 바라봤다.

‘환희.’ 그와의 추억을 담은 시였다. 시상식에서 그록 앞에서 이 시를 읽게 된다면, 소감문을 말한다면!

생애 처음 해보는 상상에 블란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행복했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이룬 첫 일이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그록은 문을 열고 도서관 행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옆에 블란이 따라 들어섰다. 그녀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내가 눈사람이라고 말하면 되려나?

설렘과 긴장으로 블란은 얼굴빛이 상기되어갔다.

내가 어떻게 상을 받게 되었는지도 물어볼까?

이게 가장 궁금했다.

‘환희’의 어떤 면을 보고 나를 뽑은 것일까? 블란은 조금씩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가 펼쳤다.

처음이었다. 인정을 받은 것은.

“무슨 일로 오셨죠?”

서있던 직원의 물음에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떨리는지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느라 말하지 못하는 블란을 향해 그록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낯이 익은 사서가 둘에게로 다가왔다.

“혹시 문예 공모전 일로 오신 겁니까?”

그록과 눈이 마주친 사서는 씨익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번에 저한테 그 대회 일정에 대해서 물으셨어서.”

아.

기억났다. 그록은 그제야 늘 도서관에 가면 마주쳤던 그 사서임을 알 수 있었다. 사서는 어딘가 들뜬 얼굴로 그록을 바라봤다.

“진짜 그 일로 오셨습니까?”

다시 한 번 묻는 말에 그록은 사서에게서 시선을 돌려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은 볼을 붉게 물들인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록은 사서에게 답했다.

“네. 그 일로 왔습니다.”

“오, 이런!”

생각보다 사서의 반응은 과했다. 그는 떨린다는 표정으로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혹시, ‘환희’?”

블란의 얼굴이 부끄러움과 기쁨으로 붉게 물들었다. 사서는 블란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로 조금 더 다가가,

“역시! 그랬군요!”

아주 격렬하게 기쁨을 표했다.

사서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섬세하고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요즘 규칙을 벗어난 자유로움과 새로운 감성! 그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어서! 제가 심사위원은 아니었지만 정리하다가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서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비록 장려상을 받으셨지만 제 기준에서는 최고였습니다! 최고!”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블란의 귓가가 아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록은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그는 사서를 당당히 보며 입을 열려고 했다.

“역시 그록 씨라면 잘 쓰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록은 굳은 얼굴로 사서를 바라봤다.

“역시, 어디의 누굴까 했는데! 약초학과 천재라고 하시더니, 문학 분야에도 그 천재성을 보이셨군요! 역시 서 우드 학생분답습니다!”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록은 이 사소한 오해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크으! 제가 진짜, 감동을 있는 대로 받아가지구요. 솔직히 본명으로 내셔도 인정 받으셨을 텐데,”

“제가 아닙니다.”

“그렇군요. 예? 아니시라구요?”

사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멍하니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은 그 시선과 마주하며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움직인 사서는 블란을 볼 수 있었다.

블란은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비록 그록이라고 오해를 했지만 자신의 시에 대해서 말하던 그 말들로 머릿속이 꽉 차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참을 느끼게 해주었다.

마주친 사서의 눈을 마주하며 블란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 시의 주인이 바로 저예요.’

하지만,

“……아…….”

사서는 탄식을 내뱉었다. 당황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블란은 뛰던 심장이 서서히 멈춰갔다.

사서는 아주 빠르게 위아래로 블란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다시 평소의 표정을 그렸다. 그 모든 것들이 블란의 눈에 보였다.

“아, 어, 그러니까 이 여자분이?”

사서는 물었고 그록을 향해 그록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에 사서는 블란을 보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아, 그렇군요. 하하하.”

그는 둘을 향해 어색하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 수상 확인하려 오셨죠?”

“아, 네. 네!”

블란은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손바닥에 땀이 차기 시작했고 서늘한 돌이 얹힌 것처럼 어깨가 차갑고 무거웠다.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아, 그러면 이분만 이쪽으로 오셔서, 서류에 서명을 해주시면 됩니다.”

블란은 잠시 그록의 손을 놓고 사서의 뒤를 따라 행정실 제일 안쪽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록은 문 옆에 서서 이를 지켜봤다.

“이야. 남 우드에서, 여자가 시라니.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네요. 여자분이 쓴 시가 상을 탈 줄이야.”

사서가 문서들을 뒤지며 흘러가듯이 하는 말에 블란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문득 뒤에 서 있을 그록이 보고 싶어졌다.

사서는 블란에게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입가에 매단 미소는 꽤 상냥했다.

“블란 양은 특이하신 분이네요.”

하지만 블란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특이하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마치, 꼭 자신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소는 상냥했지만 그 눈동자는, 블란이 지금껏 마주했던 그 눈동자들과 닮아 있었다. 마치 함께 있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여기 세 군데 빈칸 보이시죠?”

펜과 함께 서류를 내밀었고 블란은 얼떨결에 펜을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사서는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블란은 왠지 듣기가 무서웠다.

“자, 여기다가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네, 네.”

“좀 조용한 분이신 것 같네요? 그, 워낙 별명으로 조금 유명하신 분이시니까.”

블란은 머릿속으로 한 단어가 나타났다.

돈혐지.

돈 많고 혐오스러운 돼지.

블란보다 자신을 더 많이 가리키는 그 단어가 이번에도 블란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앞에 섰다.

“지나가다가 몇 번 보기는 했었는데. 하하하.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날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웃는 소리가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블란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어쩐지 자유롭다고 여겼던 게 시 공부를 안 하셔서 그랬던 것 같네요. 남 우드에서 문학에 대해 제대로 가르칠 일도 없고. 가끔 그런 근본 없는 자유로움이 특이하긴 하죠.”

블란은 사서의 말에 점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자신의 서명을 넣어야 할 하얀 빈칸이 너무나도 커 보였다.

“역시 아직 제가 모자란 것 같네요.”

사서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는 뭔가 스스로의 안목에 대해서 변명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심사위원분들 눈이 정확하기는 하네요. 저는 독특함에 이끌렸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너무 공부를 해서 그런가? 가끔씩 그렇게 틀어지기도 하네요.”

블란은 펜 끝이 떨려와 서명을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사서에게 티를 낼 수 없어 하얀 빈칸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록 씨인 줄 알았을 때는 그렇게, 그렇게 좋다고 하더니. 왜 나라고 하니까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지?

결국, 생각은 한 곳으로 갔다.

역시,

난 안 되는 걸까?

블란은 이 빈칸에 서명을 하기가 무서워졌다.

“네. 모자라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그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블란은 늘 그렇듯 목소리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블란 양은 저보다 더 문학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고 많이 아시는 분입니다.”

어떤 화가 그 무뚝뚝함 속에 담겨 있었다.

“심사위원분들의 눈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고개를 든 블란은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자신의 옆에서 사서와 눈을 마주하며 말하는 그록을 볼 수 있었다.

“오로지 시는 시로서 바라보실 줄 아시니까요.”

상냥하게 웃던 사서의 얼굴 위로 약간의 불쾌함이 담겼다. 하지만 그록은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더 말하고 싶었지만, 문 앞에서 듣다가 도저히 못 참아서 왔지만 더 이상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 때문에 블란이 처음으로 이룬 결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블란 양, 서명하셔야죠.”

“아, 네, 네.”

블란은 그록의 말에 홀린 듯이 서명을 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칸에 서명을 마쳤을 때, 블란은 그제야 자신의 이름이 제대로 보였다.

수상자 명단에 뚜렷하게 자신의 서명이 남겨져 있었다.

그때 그록은 사서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중에서 서 우드 학생을 제외하고 남 우드, 동 우드에서 최초로 문예 공모전 수상자가 나온 것 아닙니까?”

“그, 그렇죠.”

사서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대단합니다, 블란 양.”

온전히 블란 자신에게로 향한 그 눈동자는 말과 똑같은 감정을 담아 블란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이 사람은 블란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뿌듯함과 기쁨이 여실히 그 무뚝뚝한 얼굴에서 보였다.

아무 말이 없는 블란의 손을 다시 잡으며 그록은 사서에게 말했다.

“그러면 후에 시상식 때 오면 되는 겁니까? 그건 어떻게 안내가 되는 겁니까?”

“아, 그건 말이죠.”

사서가 답을 하려는 찰나, 그들 사이로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행정실 직원으로 보이는 이였다.

“아, 잠시만요.”

그는 사근사근한 미소와 함께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사서에게 잠시 귓속말을 했다. 이를 그록은 무뚝뚝하게 바라봤다. 블란이 불안함 때문인지 그록 자신의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사서는 그록을, 정확히는 블란을 힐끗 보더니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여보 였다. 그는 다시 상냥한 미소로 그록에게 답했다.

“시상식은 아직 정확한 일자가 나오지 않았고 그 내용을 어떻게 진행할지도 확실치 않아서요. 나중에 편지로 안내문을 발송할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네. 그렇죠.”

사서는 블란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블란은 왠지 모르게 더 움츠러들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블란은 그 미소와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손으로 가려져 사서는 볼 수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녀의 뒤를 이어 그록은 사서에게 인사를 한 후 블란과 함께 행정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달칵. 문이 열렸고 블란은 먼저 나간 그록의 뒤를 따라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후우. 골치 아프네.”

행정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깊은 한숨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그록에게 어색하게 답한 블란은 행정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닫힌 행정실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록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에이. 설마 저 여자가…….”

“행정실에서 나오는데, 진짠가?”

블란은 행정실로 다가오는 학생들 몇몇과 지나치며 들려오는 말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 뜀박질은 그때의 설렘과는 달랐다. 블란은 자꾸만 어깨가 겨울이 온 것처럼 추웠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록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하지만 미소 짓고 있는 블란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애써 밝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블란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시선이 팔렸다. 그는 그녀가 내민 편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올해 문예 공모전 시상식은 축소하여 진행할 예정입니다. 우수상까지 수상을 하며 장려상을 수상하신 분께는 안타깝게도 상장만이 우편으로 전달됨을 안내드립니다.]

시상식도.

문예 공모전의 상징인 상패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록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채 블란을 바라봤다. 그러자 블란은 작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상장은 내일 온대요.”

편지를 잡고 있는 그록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블란과 편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조금 빨리 헤어져도 되겠습니까?”

“예?”

“제가 해야 할 실험이 있습니다.”

“아, 네. 네.”

그록은 평소보다 일찍 찻집을 나와 블란을 남 우드에 데려다주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꽉 쥔 주먹에 핏줄이 선명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달칵.

“어? 아.”

그록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사서의 놀란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의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록은 블란과 헤어지고 서 우드 도서관 행정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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