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
블란은 힐끗 그록을 바라봤다. 어딘가 뿌듯해하는 것이 표정에서 보였다. 그녀는 그록에게서 시선을 돌려 본래의 시선이 닿아 있던 곳을 보았다.
[7일차 음식 섭취 보고서]
“으음.”
“무슨 문제 있습니까? 보고서가 불만족스럽습니까?”
“아, 아뇨, 아니에요! 조, 좋아요!”
그록은 블란의 답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일까요?
블란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보고서를 바라봤다.
[조식 : 하루 한 끼 권장량에 해당하는 탄수화물을 섭취함(일일 권장량은 보고 노트의 가장 앞에 적혀 있음.), 삶은 달걀 2개 섭취로 단백질 12.9g 섭취, 비타민…….]
일주일째 이어져온 보고 시간은 늘 블란에게 여러모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블란은 어색하게 노트를 덮었다. 그러다가 보인 단풍잎 책갈피에 작게 미소를 그렸다.
자신의 일기장에도 그 노란 잎이 담겨 있었다.
“공모전 발표는 일주일 뒤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록의 목소리에 블란은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일주일 뒤를 떠올렸다. 갑자기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그록은 별다른 말 없이 손을 꼼지락거리는 블란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블란이 입을 열었다.
“그, 혹시 그때 시간이 되신다면 그,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그록은 긴장감으로 가득 찬 블란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호, 혼자 갈 수 있는데, 그, 많이 떨려서. 바쁘시면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혼자 갈 생각이었습니까?”
“예?”
그록은 묵묵히 말했다.
“오후 4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남 우드 앞으로 가겠습니다. 그때 같이 가죠.”
빠른 답이 들려왔다. 블란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록이 다시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분명히 떨어질 것이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어요.”
“결과가 발표 났습니까?”
바로 이어진 그록의 말에 그녀는 그록을 바라봤다. 그록은 블란의 움츠러든 어깨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매번 실험할 때마다 이번에는 성공하겠지 하면서도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패하겠지 하면서도 성공할 때도 있었습니다. 결과는 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무뚝뚝하게 건네는 말에 블란의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가 조금 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나도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떠, 떨어져도 괜찮겠죠?”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어딘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그록은 답했다.
“안 괜찮습니다.”
아.
블란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저는 천 번이 넘게 실험에서 실패를 해보았습니다.”
블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그록을 바라봤다.
천 번이라니. 이번 여름방학에 쉴단과 워보트 병 연구를 시작하면서 실험도 처음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블란의 표정이 순식간에 여러 가지 표정을 담았다.
그록은 이를 묵묵히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실패를 할 때마다 괴롭고 힘들고.”
그록은 실험에 실패했을 때를 떠올렸다.
결혼 10주년을 앞둔 그 두 달의 시간. 그때는 실패를 할 때마다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름방학 마지막 실험에서는 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실패는 언제나 힘들고 두려운 일 같습니다.”
말과 달리 그록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평온했다. 블란은 이를 가만히 듣고 보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 같습니다.”
그록이 실패를 겪으며 깨달은 것은 적어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내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매번 힘든 일 같습니다.”
그리고 그록은 천 번이 넘게 실패했고 그때마다 힘들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몇 없는 것 중에 하나였다.
그록은 블란을 바라보았다. 공모전은 첫 도전이라고 했다. 그록은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을 했다.
“실패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블란은 아무 말 없이 그록을 바라봤다.
자신은 아직 겪어보지 않은 이 한 번에 대한 생각으로도 벅찬데, 이 사람은 천 번이 넘었다니.
블란은 차마 아무 말을 할 수 없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이어 들려온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때 옆에 있겠습니다.”
블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그록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록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블란은 단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록의 답은 늘 그랬듯이
“당연한 겁니다.”
같았다.
그록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블란은 그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또렷하게 말했다.
“저도, 옆에 있을게요.”
그록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블란의 움츠러들어 있던 어깨가 펴졌고,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잔잔한 온기가 맴돌았다.
*
실험실에 앉아 그록은 펜을 들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편지를 써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록은 편지를 써내려갔다.
[서 우드 약초학과 2학년 그록 바서라고 합니다. 제 후원자이신 베스 노옐 님께 실험에 대한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레온 샤를이었다.
비서는 아까부터 말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편지를 읽고 있는 레온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블란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레온은 마음이 넓지 못했다.
“흐음.”
작게 한숨처럼 튀어나온 신음에 비서는 더욱더 레온의 안색을 살폈다. 레온의 눈동자는 편지에 박힌 채 떠날 줄을 몰랐다.
[제 연구에 후원을 결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구자로서 꼭 결과물을 만들어 보여드리겠습니다.]
[베스 노옐 후원자님 덕분에 저는 제 평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5번이 적혔군.
짧은 축에 드는 편지글에는 ‘감사합니다’가 총 15번이 적혀 있었다. 편지에 능한 이라면 이렇게 적지 않았을 터.
레온은 가만히 편지를 내려다봤다.
평생의 목표.
그 짧은 말이 눈에 밟혀서 더 이상 편지가 읽히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놈이군.
레온은 이 편지에서 그것 하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트.”
그는 비서의 옆에 선 집사 지트를 향해 말했다.
“네.”
집사 지트는 착 가라앉은 레온의 목소리에 바짝 긴장한 채로 답했다.
그런 그에게 레온은 천천히 물었다.
“자네 글씨 예쁜가?”
“예? 아, 아니요. 예쁘지 않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지트는 빠르게 답했다.
흐음. 레온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비서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안 되겠고, 어디 글씨가 예쁘고 분위기 있는 이가 있나? 될 수 있으면 여성이었으면 하는데.”
비서는 레온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레온은 편지를 들어보였다. 그의 손끝에 편지가 살랑 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답장을 써야 해서 말이야.”
씨익 레온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록과 레온. 두 사람의 인연이 과거와 달리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베스 노옐, 블란의 어머니가 함께했다.
* * *
“음?”
매튜는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옆에서 걷던 체프 역시 걸음을 멈추고선 매튜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헐.”
체프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찌푸려졌다.
“세상에.”
매튜는 저 멀리 서 우드 정문에서부터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단풍거리를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진짜 저 자식이 미쳤나.”
중급약초해설학 교수인 재크의 담당 제자 중에 한 명인 체프는 미간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표정에는 묘한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단풍거리를 걸어가는 그록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 자식은 지 복을 지가 걷어차네.’
아무리 뛰어난 천재이면 뭐하나. 권력의 눈 밖에 났는데. 운 좋게 후원자를 구했을지는 모르나 앞으로 어떤 상을 받거나 연구소 취직 혹은 자격 수여에 있어 그록 바서의 앞날은 깜깜해질 것이다.
재크 교수의 눈 밖에 났으니까.
‘그리고 그 덕을 내가 많이 받게 될 것 같고.’
체프는 힐끗 매튜를 바라봤다. 황당하다는 표정이 보였다.
그는 매튜를 잘 알았다. 사려 깊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굉장히 질투심이 많고 얍삽했다.
‘이놈을 잘 구슬리면 꽤 재밌는 게 나올 것 같은데.’
체프는 매튜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저거 그록이랑 돈혐지 아니냐?”
“그러니까. 와, 저놈이 진짜 눈이 삐었나.”
“흐음.”
체프는 매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궁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삔 게 아니라 돈에 빠진 거 아닐까?”
“뭐?”
“아니, 그냥. 레온 샤를은 광산을 소유하고 있잖아. 그래서 뭐, 그냥 해본 말이지.”
매튜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는 것을 보며 체프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하긴, 그렇긴 하지만.”
매튜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체프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얼른 가자. 너 오늘 재크 교수님 면담 같이 하고 싶다며.”
“아, 어, 어! 가자.”
매튜는 체프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다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그록과 돈혐지가 함께 손을 잡고 단풍으로 물든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거리를 걷고 있는 블란은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록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녀를 서 우드 학생들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달리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꼈다.
수군거리는 이도 없었고, 자신을 위아래로 쳐다보기는 했으나 딱히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쯧쯧.”
그록을 보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뭐지? 블란은 남 우드나 중앙광장에서 느껴지던 시선과는 다른 서 우드의 시선들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단풍 괜찮습니까?”
“아, 네. 네!”
블란은 그록의 말에 고개를 들어 단풍잎으로 물든 서 우드 거리를 바라봤다. 우드 시에서 가을 풍경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누구나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곧 있으면 발표 날 ‘가을의 낭만을 담은, 우드 문예 공모전’ 결과를 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도서관 벽보에 그 수상자와 작품 제목이 발표될 것이고 수상자는 집행처인 ‘문예창작학과’를 방문해야 했다.
블란은 도서관이 가까워져 오자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그녀는 그록을 따라 천천히 서 우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진짜 저 커플처럼 안 어울리기도 힘들단 말이야.”
“내 말이. 퀸카인 제니를 걷어차고 저 돼지라니. 그록 저놈도 취향이 독특하단 말이야.”
“근데 제니랑은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주 그록 저놈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던데.”
도서관으로 자주 가는 서 우드 학생들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록을 그나마 제일 가장 자주 보는 이들은 서 우드 도서관 단골 이용자들인, 이 거리 위의 사람들일 것이다.
“모르지. 보기에는 제니 그 여자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던데.”
“에이. 그 단아한 사람이? 설마.”
“뭐, 모르지. 돈혐지. 그러니까 저 블란 샤를도 아파서 저런 거라더만.”
“그래?”
“어. 워보트 병이래.”
“아, 그건 몰랐네. 근데 워보트가 뭐야?”
타인의 시선에 익숙해진 그록과 블란은 그 대화 내용은 모른 채 도서관 벽보 앞에 함께 다가갔다. 하지만,
“자, 잠시만요!”
그록은 블란이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멈춰 그녀를 바라봤다. 블란은 그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록은 손바닥에 가득 찬 땀이 느껴졌다. 블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게, 잠시, 마음의 주, 준비를!”
블란은 심호흡을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록은 이를 옆에서 바라보다가 말했다.
“제가 먼저 보고 말씀드릴까요?”
“아, 아뇨! 같이 보, 보고 싶어요!”
블란은 몇 번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곧 그록의 옆에 서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가문도, 돈도, 무엇도 아닌 자신의 힘으로 하는 일이었고 그 결과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가요!”
그 목소리는 꽤 비장하고 컸다. 그록은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 귀여워 살짝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천천히 도서관 알림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알림판 앞에 섰을 때.
“아, 씨. 떨어졌다.”
“아. 아깝네. 역시 문예창작학과 애들이 다 싹 쓸어가네.”
벽보 앞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블란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깨의 힘이 빠졌다. 저 사람들 엄청 잘 할 것 같은데, 저런 사람들도 떨어지는데. 역시 이런 건 문예창작학과나 국문학과 사람들이 다 받는 거겠지?
그때,
“블란 양. 오십시오.”
앞에 서 있던 그록이 블란의 어깨를 잡고는 그녀를 앞으로 이끌었다.
“어, 어?”
블란은 그 힘에 이끌려 순식간에 그록의 앞에 섰다. 그러자 벽보에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의 낭만을 담은, 우드 문예 공모전]
블란은 저도 모르게 그록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록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천천히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갔다.
[시 부문]
[대상 : 츠코췹 ‘손 안에 든 그리움’]
[최우수상 : 크쿠스다 ‘부서짐’]
그리고 우수상 한 작품이 그 밑에 있었다.
“이거 짜고 치는 것 아냐?”
“에이. 아닐걸? 우수상 한 명은 처음 들어보는 사람인데?”
블란은 아직 자신의 시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안 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쿵. 쿵. 자꾸만 심장이 뛰었고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이 벽보의 아래쪽을 향했다.
그 순간.
툭!
그록의 손이 블란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쥔 그록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블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야, 그런데 장려상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그러게. 하나는 필명 같은데, 저게 뭐야?”
“그러니까. ‘눈사람?’ 유치한데. 시는 잘 썼나 보네?”
블란은 눈을 크게 뜬 채 벽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려상 : 눈사람 ‘환희’]
마지막은 블란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