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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26화 (26/95)

# 26화

26.

두 달 만에 만난 얼굴은 다행히 나빠져 있지 않았다. 그록은 그 덕에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블란에게 그간의 이야기들을 했다.

“그래서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이제 연구를 잘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모두 끝낸 그록은 기다렸다. 분명 블란은 웃으며 함께 기뻐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정적이 찾아왔다.

오히려,

‘뭐지?’

자신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눈빛에 망설임이 보였고 눈꼬리가 한없이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입술이 평소보다 더 불퉁 튀어나와 있었다.

“블란 양?”

“네에.”

이제는 입술을 삐죽여댔고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꼭 울기 일보 직전처럼.

그록은 가만히 블란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 얼굴이…….”

“네?”

작게 튀어나온 목소리에 그록은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러자 블란은 입술 끝을 파르르 떨어대며 울 듯한 얼굴로 외쳤다.

“얼굴이, 볼이…….”

“네?”

“몸도, 손가락도 다!”

“……네?”

“다 너무 사, 살이 빠졌어요!”

툭!

블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록은 굳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그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최대한 안 굴러가는 머리를 쓰며 그록은 물었다.

“누, 누가 말입니까?”

누가 살이 빠진 겁니까?

그록의 되물음에 블란의 표정이 더욱더 흐려지며 대성통곡하기 직전이 되었다. 그록은 몹시 당황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지? 블란 양이 울 정도로 마른 사람이?

샅샅이 살펴본 위스 찻집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그록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굳은 채로 자신을 바라봤다.

설마.

설마 난가?

내가 언제 이렇게 살이 빠진 거지?

그록은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때, 다시 바라본 블란이 두 주먹을 꽉 쥐고선 뭔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그록에게 말했다.

“아무리 여, 연구가 중요하다고 해도 얼굴이 이 지경이 되실 때까지, 연구를 하시면, 그 동안 편지에서 자, 잘 지내신다고 해서 그래서, 저, 저는 믿었는데!”

말을 할수록 벅차다는 듯 블란의 어깨가 들썩거렸고.

“이렇게 되신 것도 모르고, 바, 바보같이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동글동글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그록은,

세상 살면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도달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브, 블란 양?”

“저, 저 때문에 이게 다!”

말을 붙이자 블란이 더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렇게 울고 이렇게 격렬하게 표현하는 블란은 처음이었다. 그록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공에서 맴도는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툭.

블란의 어깨에 그록은 손을 올리며,

“블란 양. 잠시 진정을…….”

달래기를 시도했지만.

“정말 저는, 정말, 전 이렇게 바보 같고, 진짜 미, 미안해요!”

더 심해졌다.

그록은 그대로 굳었다. 어깨 위에 올려둔 손도 떼지 못한 채 그록은 어정쩡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손님에게 차를 건네는 점원이 보였다.

‘블란 양한테 이 차를 끓여주면 좋아하겠죠? 심신안정에 특효인 차니까.’

이거다!

그록은 벌떡 일어섰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블란에게 벼락같이 큰 목소리로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서 아주 빠른 속도로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 소리에 놀라 블란은 멍하니 이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그의 빠른 걸음이었다.

그록은 위스 찻집의 주방 안으로 들어가며 블란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주방 안으로 들어선 그록은,

“얼굴이 왜 그리 다급해요?”

“사장님.”

예비 사장이자 실질적인 사장인 릴리 스위를 바라보며 묵직하게 말했다.

“차 좀 끓이겠습니다.”

“예? 갑자기 무슨!”

그록은 묵묵히 손을 씻고는 앞치마를 두르고선 차를 끓여나갔다. 집중을 하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하나둘 맺히고 있었고 연신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 심각해 보였다.

릴리와 알바생들은 멍하니 이를 바라봤다. 릴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뭐, 무슨 인생의 역작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쪼르르르르륵!

마치 그림의 마지막 점을 찍어 내리듯이 그록의 손길이 멈춘 순간. 차는 완성되었다. 그는 묵묵히 이를 챙기고선 주방을 홱 나갔다.

“저, 저! 앞치마는 벗고!”

앞치마를 두른 채로.

“알트 차입니다.”

블란은 멍하니 있다가 그록이 테이블에 놓아둔 찻잔을 바라봤다. 알트 차 특유의 쓴 향이 올라왔다.

그녀는 다시 그록을 바라봤다. 위스 찻집에서 일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보니, 저 몰골로 방학 내내 일했다는 생각에 블란은 자신에 대한 화와 속상함으로 마음이 아려왔다.

“그…….”

답지 않게 그록은 말을 끌며 말했다.

“제가 끓인 찹니다. 방학 동안 배웠습니다.”

그록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블란을 힐끔힐끔 보면서 말했다.

“마음에 안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효능이 있습니다.”

블란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신 지가 몇 년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블란은 마치 처음 보는 차인 것마냥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블란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한 모금을 마신 후 그록을 향해 말했다.

“엄청, 엄청 잘 끓이셨어요!”

그록의 입꼬리가 쓰윽 2mm가량 올라갔다.

쯧쯧.

대충 사건의 전말을 가늠한 릴리는 그록과 블란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인생의 역작이 필요하긴 했겠구만. 알바생도 릴리와 비슷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를 다른 이들도 힐끗힐끗 쳐다봤다.

“어머, 완전 돼지랑 말라깽이다.”

“완전 극과 극으로 어울리네.”

“그러니까! 못 본 새에 남자 얼굴이 왜 저리 됐대?”

“몰라. 완전 꼴이 웃기네.”

블란은 놀란 얼굴로 찻잔을 보다가 소곤소곤 들려오는 말들에 눈빛이 어두워져갔다. 그때 그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습니다.”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저런 표정의 그록은 처음 보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려둔 채 허리를 똑바로 펴고 정자세로 앉아 그록은 블란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한 손을 움직여 볼을 긁적이고 눈이 마주칠 때면 눈꼬리를 낮추며 눈치를 봤다.

블란은 손 안을 가득 채우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나직하게 말했다.

“전 제 곁의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요.”

그록은 블란의 눈을 바라봤다. 살짝 웃고 있었지만 마냥 그래 보이지 않았다.

“아픈 건 아픈 거니까요.”

그록의 시선이 점차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새삼 꺼칠꺼칠한 피부와 도드라진 턱뼈가 만져졌다.

그는 시선을 들어 블란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순간 심장 근처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블란 양.”

그록은 진지한 눈빛으로 블란에게 말했다.

“연구자로서 약속을 하겠습니다.”

블란은 그록의 담담하면서도 깊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잠시 마주하던 그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식 섭취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겠습니다.”

“……예?”

블란은 멍하니 되물었다. 그록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방법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실험일지 형식처럼 음식 섭취 일지를 작성해서 만날 때마다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연구자로서 한 약속이니 꼭 지키겠지만 그 증거를 보여드리면 더 확신이 커지겠지요.”

블란은 그록의 눈빛이 왠지 반짝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눈빛을 하며 그록은 말했다.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블란은 멍하니 있다가 띄엄띄엄 답했다.

“네, 네. 조, 좋은 것 같아요.”

“그러면 그렇게 실행하겠습니다. 내일 만남 때 1차 보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블란은 잠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지만.

“식기 전에 드십시오. 연습 많이 했습니다.”

묵묵히 그록이 건네는 말에 블란은 멍하니 차를 다시 마셨다. 그록은 블란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찻잔을 들었다. 쓴 향을 맡으며 그록은 편안함을 느꼈다.

***

그록을 찾아 헤매던 아스트는 눈에 보이는 광경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프렌 왕국은 가을이 일찍 찾아오고 길게 이어졌다. 9월 초가 되면 단풍이 하나둘 들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아스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화이트로우 자료를 넘겨주려고 그록을 한참이나 찾았건만.

정작 교정 한편에서 찾아낸 그록은 단풍나무를 멀뚱멀뚱 보며 서 있었다.

“야. 너 뭐 하냐?”

“오셨습니까?”

여상스럽게 인사를 건넨 그록은 다시 단풍나무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러고는 땅 바닥을 또 멀뚱멀뚱 내려다보았다.

뭐야? 가을이 되어서 미쳤나?

아스트는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선 해괴한 표정으로 그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나무와 땅바닥을 번갈아 바라봤다.

“야! 연구 관련 얘기니까 빨리 실험실 가자!”

아스트의 말에 그록보다 지나가던 이들이 더 집중했다.

서 우드 아카데미 약초학과 역사상 유래 없는 천재. 거기다가 실험실까지 받은 그록. 수재인 학생회장 아스트와 함께 연구를 논하는 2학년.

모든 조건들이 두 사람의 대화에 촉각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질투와 관심을 담은 채 그록을 바라봤다.

“잠시만요.”

하지만 그록은 이를 모른 채 연신 땅바닥을 바라봤다.

“뭐야? 도대체 너 뭐 하냐?”

아스트가 한숨을 내쉬며 그록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잠깐!”

그록이 큰 목소리로 아스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아스트는 당황해서 그대로 멈췄고 그록은 그런 아스트의 두 발자국쯤 앞으로 가더니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단풍잎을 하나 주웠다.

“허. 뭐야?”

그러고는 아스트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그 옆으로 한 발자국 움직여 단풍잎을 하나 더 주웠다.

그록은 이를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리더니 흰 코트 주머니 안에서 자를 꺼냈다.

“……너 지금 뭐 하냐?”

“길이 잽니다.”

“길이를 왜?”

그록은 아스트를 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연구자에게 길이 계산을 정확히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장마 때 작은 우산 덕분에 그 소중함을 깨달은 그록이었다. 아스트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해괴해졌을 때 그록은 그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단풍 예쁩니까? 크기는 똑같습니다만.”

아스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어. 예쁘긴 한데 이걸 왜?”

그록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책갈피 만들어야 합니다.”

“책갈피?”

“네. 커플 책갈피.”

그 순간 아스트를 비롯한 주위에 있던 학생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21번째. 단풍잎으로 책갈피 만들어서 하나씩 가지기.]

그록은 쪽지 내용을 떠올리며 만족스러웠다.

단풍잎 크기의 오차가 1mm 미만인 것을 찾느라 눈이 많이 아팠었다.

블란을 닮은 샛노란 낙엽의 색이 마음에 들었다.

“……미친놈.”

아스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지만 그록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노트 속에 단풍잎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를 보며 아스트는 툭 내뱉었다.

“진짜 내가 별꼴을 다 본다.”

그록을 제외한 모두의 마음이었다.

그록은 아무 말 없이 두꺼운 노트를 툭툭 쓰다듬었다.

[음식 섭취 보고 일지]

노트의 제목을 본 아스트의 얼굴은 더욱더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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