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25화 (25/95)

# 25화

25.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록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실험용 흰 장갑을 낀 손끝이 떨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쥔 채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제야 떨림이 조금 가셨다.

실험대를 바라보며 그록은 예전에 그를 괴롭혔던 쪽지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차피 그 친구는 끝이 정해졌는데. 곧 끝일 텐데 계속 그 옆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빨리 떨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이전까지만 해도 그록은 그렇게까지 연구에 조급하지 않았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보장되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 십 년이라는 시간이 저런 소리를 들으며 보내야 하는 시간이라면, 끊어내는 것이 옳았다.

빨리 해야 한다.

다시 손끝이 떨려왔다.

퍽.

그록은 전보다 조금 더 세게 주먹을 쥔 채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이 실험은 마지막 기회였다.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할 돈이 없다. 그 때문에 그록은 입안이 바짝 말라갔다.

툭. 그런 그의 어깨 위로 손이 하나 올려졌다.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해.”

아스트였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그록의 실험을 보러 왔다. 이전까지 자료는 서로 공유했지만 실험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선배님이 보시고 뒤에 말씀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조언을 해줄 겸 찾아왔다. 하지만 떨리는 그록의 주먹과 그의 얼굴을 보자 아스트의 얼굴도 점점 굳어갔다.

“감사합니다.”

무뚝뚝하게 답하는 그 목소리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아스트는 아무 말 없이 그록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며 꾸욱 쥐었다.

그록의 마지막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아스트는 옆에서 지켜봤다. 연구실은 온도를 서늘하게 유지하도록 장치를 해 놓았음에도 땡볕 아래에 있는 것마냥 그록의 이마에는 땀이 한가득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아스트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이건, 이건 진짜!’

17살의 수준이, 학부생의 수준이 아니었다.

아스트는 자신을 뛰어넘는 그록의 모습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진정한 천재가 여기 있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실험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실패다.

아스트는 허공에서 멈춘 그록의 손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에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사실 놀라움이 더 컸다.

‘한 1년, 아니면 2년이면 되겠다.’

자세한 연구 내용을 모름에도 아스트는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그는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불치병이라 여겨지며 죽는 날만을 기다리던 워보트 병. 그것을 고칠 단서를, 희망을, 고작 17살짜리 연구자 지망생이 이루어낸다면!

아스트는 알 수 없는 심장의 뜀박질을 느꼈다.

“그록.”

그는 허공에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있는 그록에게로 다가갔다. 실패한 것은 아쉬웠지만 이만큼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야,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이 정도까지,”

퍽!

그록이 주먹을 쥔 채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내리치는 모습에 아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내리친 주먹이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스트는 당황한 얼굴로 그록에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야. 뭘 그렇게,”

쿠웅!

그록이 자신의 머리를 세게 책상에 박아버렸다. 그 모습에 아스트는 다시 입을 닫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책상 위의 펜이 덜컹이는 것이 보였다.

그때,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있는 그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록이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아스트는 천재 연구자가 아닌, 죽어가는 눈빛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빛이 없는 동굴의 한가운데에 선 사람 같았다. 그제야 아스트는 체감했다.

이건 연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이구나.

아니. 이건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의 삶이 달린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그록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록은 마지막에서 자꾸만 실패하고 마는 실험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쉴단의 향이 묻은 흰 장갑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더 이상 실험할 돈도 없다.

그리고 시간도 없다. 빨리, 빨리 해야 했다.

노력만으로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 사실에 그록은 한참 동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끊어질 듯 미약한 숨소리가 손 틈새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

블란은 카만의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가에 힘을 주어 작게 미소를 그렸다.

“괜찮아요.”

카만은 블란이 건네는 말에 그녀를 바라봤다. 짓고 있는 미소에서 씁쓸함과 체념을 느꼈다. 그 모습을 더 볼 수 없어 카만은 입을 열었다.

“아직 두 달만 해서 그럴 겁니다. 겨울 방학 때 또 하면 달라질 겁니다. 더 나빠진 부분은 없으니 확실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여전히 블란이 미소 짓고 있었지만 카만은 마음이 꽉 막힌 것마냥 답답했다.

두 달간 집중 치료를 했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독한 약과 치료를 버텨내야 했던 블란에게 정신적으로 힘겨운 나날이 되었을 뿐이었다.

처음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카만은 블란이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종이와 그 위에 새겨진 글자들로 늘 가득했다.

하지만 이도 끝난 것인지 8월부터는 조용히 보내는 나날이 많았다.

그리고 늘 말했다.

“괜찮아요.”

카만은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듯 블란이 작게 읊조리는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에게 괜찮다고 건네는 말이 꼭 블란 자신을 향해 건네는 말인 것 같아 카만은 뭐라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를 모른 척하며 블란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가만히 옷의 주름을 매만졌다. 방과 자신의 몸에서 나는 역하고 독한 냄새가 얼마나 강한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자신에게서도 매번 그 냄새가 맡아졌다.

지금 이 냄새를 다른 이들이 맡는다면. 블란은 괜히 옷 주름 끝을 털어냈다. 하지만 그 냄새는 털어내어지지 않았다.

그때,

똑똑똑

“아가씨. 지트입니다.”

집사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블란의 들어오란 말에 집사 지트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독하고 역한 내가 문 밖으로 흘러나왔다.

“흡.”

지트는 문을 열자 옆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고용인을 쏘아봤다. 그러자 고용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쯧, 지트는 짧게 혀를 차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편지 왔습니다.”

카만은 순식간에 밝아지는 블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집사 지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흠.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아가씨.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아, 네, 네!”

달칵.

문을 열고 나온 카만과 지트는 슬쩍 닫힌 문을 보다가 서로를 보고는 슬그머니 미소를 그렸다.

“또 그 남학생인가 봅니다?”

“네, 의원님.”

둘은 다시 한 번 닫힌 문 너머를 바라봤다. 그 문 너머에서 블란은 편지를 펼쳤다.

[연구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는 힘들지 않습니까?]

무뚝뚝함이 글자에서도 보였다.

[아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안에 따뜻함도 보였다.

블란은 한참 동안 편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되뇌었다.

이겨내자.

참을 수 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달력을 바라봤다. 단 하나 참을 수 없는, 참기 힘든 그리움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

[느리지만 연구는 잘 되어가고 있]

그록은 펜을 움켜쥔 손을 멈췄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명치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속이 쓰렸다.

4번의 실험은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8월의 월급이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한 달 치 월급으로는 그록이 만족할 만한 실험을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는 새삼 돈이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돈에 어떤 가치가 담겼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낼 답장을 멈춘 채 달력을 바라봤다. 곧 블란이 올 날이 멀지 않았다.

그는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유일한 후원자였던 블란이 만들어주었던 그 과거의 연구실과 달리 휑했다. 그록은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행복한 연구자였는지를 매번 느꼈다.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

그는 실험할 것이 없었기에 멍하니 실험대만을 바라봤다.

그때,

똑똑똑!

“야! 그록! 안에 있지?”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아스트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록은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저녁놀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분명 아까는 한낮이었는데. 그는 책상 한편을 바라봤다.

[오늘은 반드시 다 먹어라. 안 그러면 내가 네 연구일지 훔쳐서 토낀다. -아스트-]

[이거 다 안 먹으면 내일 일하러 오지 마! - 누님 릴리-]

커다란 종이에 적힌 큼지막한 글자들과 차갑게 식은 음식들이 보였다.

그록은 갈등했다. 문을 열어주지 말까. 새삼 학생회장 아스트와 찻집 사장 릴리의 잔소리가 귀찮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귀찮아진 그였다.

“야! 안 여냐?”

다시 평소보다 높은 아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덤덤히 듣고 있던 그록은 순간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문으로 돌렸고,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네 후원자가 나타났대!”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록이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뭐, 뭐야? 무슨 소리야!”

아스트는 커다란 소리에 놀라 문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그록을 불렀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고.

“누, 누굽니까?”

아스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록임을 알아채고 할 말을 잃었다.

“너 얼굴이…….”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지막 실험이 실패한 이후 제대로 얼굴을 못 봤는데, 그새 이렇게 되었을 줄이야. 아스트는 눈가를 찡그렸다.

하지만 그록에게는 그런 아스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스트의 팔을 붙잡은 채 물었다.

“진짭니까?”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다급했다.

아스트는 죽은 듯이 살던 놈의 눈동자에서 어떤 빛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록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스트는 그록을 보며 답했다.

“어. 그레이 교수님이 부르신다. 가자.”

그록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났다.

“……그래서 올 가을부터 자네 실험에 대해서 지원을 하신다고 하더군.”

그록은 교수 그레이와 마주하며 그의 말들을 모두 들었다. 그는 후원금의 범위를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 후원금이라면 마음껏, 정말 마음껏 연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저를 아시고 후원을 하시는지…….”

교수 그레이는 그록의 물음에 잠시 오늘 낮의 만남을 떠올렸다.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저희 쪽의 요구 조건입니다.’

그는 그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워보트 병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이시더구나. 그래서 연구하는 이를 찾고 있었고 이를 아카데미에 가면 더 알아보기 쉽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다고 하시더구나.”

두 달. 짧은 여름이었지만 그록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레이는 못내 마음이 쓰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죽어가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눈빛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우리 아카데미에 워보트 병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고. 자네의 연구에 대해서 들으시고는 후원을 결정하셨지.”

그록은 그레이의 말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었다.

보통 후원자는 연구 성공으로 얻을 이익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워보트 병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니. 그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그록에게는 마치 빛과 같았다.

그는 그레이를 향해 천천히 물었다.

“만나는 것은,”

“거부하시더구나.”

다시 한 번 더 확인한 사실에 그록은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후원하시는 분의 성함이…….”

후원자와 만나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 이름은 알 수 있었다.

“베스 노옐이십니까?”

“그래. 그분께서 자네를 후원하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베스 노옐.

그록은 그 고마운 이름을 입안에서 되새겼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박혀서 잊히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다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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