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
장마가 끝나고 나니 어느덧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가장 날씨가 좋은 때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 우드 아카데미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록은 도서관이 아닌 실험실에서 그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안하네.”
그록의 실험실을 찾아온 교수 그레이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록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 그록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교수님.”
그레이는 답하는 그록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더 힘써 보려고 했는데 어찌 안 되더구만.”
그레이 교수가 워보트 병 치료를 위한 쉴단 실험비를 아카데미 측에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쉴단은 아직 그 사용 범위가 작은 것에 비해 실험 비용이 많이 드는 약초라고 판단했습니다. 학과 측에서는 그보다 범용성이 높은 다른 약초들의 실험 지원비를 늘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행정 직원의 말은 그러했지만 그레이는 정황을 대충 짐작했고 그록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분명 재크 교수님이 막았겠지.’
보나마나 뻔했다. 요즘 중급약초해설학을 들을 때면 재크 교수는 그록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학과 안에서 권력이 막강할 뿐만 아니라 발이 넓어 각종 연구지원비를 휩쓸어가는 재크 교수이니만큼 이번 그록이 신청한 지원비도 그가 막거나 그의 다른 연구 분야로 빼돌렸을 것이다.
“내가 조금 더 힘써보겠네.”
“괜찮습니다.”
그록은 묵묵히 답했다. 재크의 눈 밖에 난 자신을 이 정도로 챙겨준 것만으로도 그록은 그레이에게 감사했다.
“아닐세. 나는 자네를 돕기고 했어. 다른 방도를 찾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툭툭.
그레이는 격려의 의미를 담아 그록의 어깨를 두드렸고 그록은 그에 맞춰 짧게 인사를 했다.
달칵.
그레이가 그록의 실험실을 빠져나가고 남겨진 그록은,
“쯧쯧. 그러게 성질 좀 죽이지.”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학생회장 아스트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이미 취직자리가 모두 정해진 아스트는 요즘 학과 내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었고 그 덕에 그록의 실험실에서 살며 그와 함께 연구를 진행했다.
“건들 인간을 건드려야지. 재크 교수가 쫌 밴댕이 소갈딱지냐? 아주 마음이 좁쌀보다 작은 인간인데, 그 인간이.”
“그렇게 교수님 욕을 막 하셔도 됩니까?”
무뚝뚝하게 그록이 묻는 말에 아스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 어때. 난 이제 졸업인데. 난 취직이 됐다고! 겁날 게 없다 이거야!”
자랑스럽게, 하지만 장난스럽게 낄낄 웃으며 말하는 아스트를 보고 그록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지난번 우드 축제 발표회 때 생각했던 학생회장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여하튼 너 이제 연구 어떻게 할 거냐? 돈 꽤 많이 들어갈 건데.”
아스트는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언뜻 얼굴에 걱정이 일었다. 분명 이 목석같은 인간의 성격 상 재크에게 다시 숙이고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고. 뻗댈 것이 뻔한데.
하지만 그 걱정과 달리 들려오는 답은 담담했다.
“일할 겁니다.”
“……어?”
순간 아스트는 멍하니 되물었다.
뭐라고?
일을 한다고?
“아르바이트?”
“네.”
“……여름 방학 때?”
“네.”
“……너 연구자가 아르바이트를 하면 뭔 소리 듣는지 아냐?”
“네.”
허!
아스트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록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록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이 그를 마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아스트는 더욱더 답답함을 느꼈다.
연구자가 연구도 안 하고 일을 하는 순간 평판이 분명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다 알 텐데!
하지만 그는 차마 그록에게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처음 그록과 얘기를 나누었던 첫날. 지금의 이 무뚝뚝한 얼굴로 간절히 내뱉은, 그록이 건넨 그 단 한마디 때문이었다.
‘저는 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연구비를 모으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아스트는 그럴 수 없었다.
“후우.”
아스트는 깊게 한숨을 내쉰 후 그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록의 모습에 아스트는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는 탄식을 하듯이 깊은 한숨과 함께 물어봤다.
“후우. 그록, 너 아르바이트 해본 적 있냐?”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 같은 건?”
“없습니다.”
“……아르바이트 구하는 건 어떻게 하는지 알고?”
“이제 알아볼 겁니다.”
아오!
답만 잘해, 답만!
아스트는 답답함에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록은 연신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절규를 하는 아스트를 덤덤하게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하리안 제국에서 온 자료들이 들려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이를 읽어 내려갔다.
약초꾼이 정리했다는 자료는 대부분 그록이 정리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었고 그것이 그록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를 중점적으로 자세히 연구한다면 현재의 연구에 대한 보완이 가능할 것 같았다.
툭.
그록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손을 힐끗 바라봤다. 아스트였다. 이를 인지한 순간,
“사랑하는 후배야.”
들려오는 아스트의 목소리에 그록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아스트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스트는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그록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꽤 비장했다.
“내가 좋은 자리 하나 소개해주마.”
“……굳이 그러시지는,”
“아냐, 아냐! 내 마음이 불편해서 안 되겠어!”
그록은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아스트를 바라봤지만 그는 혼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가방을 챙겨 실험실을 나갔다. 그는 실험실을 나가며 말했다.
“내가 구해서 돌아올게! 기대해!”
쾅!
세게 문이 닫혔다.
……불안한데.
그록은 닫힌 문을 보며 한참을 찝찝해하다가 다시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 후.
“자, 여기다!”
아스트는 해사한 미소와 함께 그록에게 쪽지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바닥에 놓인 쪽지를 읽었다.
[위스 찻집]
어?
그록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스트는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도 알지? 네가 블란 샤를 양이랑 자주 가는 단골 찻집이잖아. 거기 예비 사장이 내 친구거든. 릴리 스위라고, 남 우드에 다녀. 거기 자리 하나 빈다더라. 가봐.”
그록이 블란과 함께 매번 갔던, 과거부터 쭉 방문했던 그 찻집의 이름이 쪽지에 적혀 있었다. 우드 시에서 유일하게 알트 차를 판매하는 찻집이었다. 한참을 보던 그록은 아스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우선 면접 보러 가봐.”
그록의 첫 아르바이트 면접일이 정해졌다.
***
블란은 말을 모두 마치고 난 후 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그록의 눈치를 봤다. 분명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얼굴인데 미묘하게 분위기가 안 좋았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눈썹이 약간 아래로 처진 것이.
탁.
그록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에 블란은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록은 블란을 보지 않고 찻잔을 본 채 말했다.
“잘하신 선택입니다.”
그록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비록 두 달 동안이지만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면 다음 학기가 훨씬 더 편해지실 겁니다.”
블란은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집으로 돌아가 집중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 때문에 오늘이 방학 전 마지막 만남이다. 이제 기말고사 시험이 끝나면 그녀는 바로 집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록은 입을 꾹 다문 채 생각했다. 의원 카만이라면 믿을 만했다. 그 버티기 힘들다는 워보트 병에 걸린 환자를 30년 가까이 살게 했으니까. 훌륭한 의원이었다.
하지만, 아쉬웠다. 두 달 동안 못 본다.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그, 아, 아직 멀었는데.”
묘하게 블란은 기운이 빠진 것 같은 그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꼭.”
블란의 목소리에 그록은 그녀를 바라봤다.
“꼭 낫고 싶어서. 그래서 열심히 치료 받으려구요.”
블란은 그록의 입가에 서서히 퍼지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록은 가만히 블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 그록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하지만 못 본다니 아쉽습니다.”
아.
블란은 그제야 집에 간다는 자신의 말에 밑으로 축 늘어졌던 눈썹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블란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답했다.
“저, 저도요.”
그록은 블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시험이 끝나고 난 후 두 달 동안은 손바닥이 간질간질 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야! 도서관 가냐? 같이 가서 공부할까?”
매튜가 살갑게 다가와 그록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록은 그런 매튜에게 시선 하나 두지 않은 채 가방을 챙기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도서관 안 간다.”
약 두 달 넘는 시간 동안 블란을 보지 못하는 그록은 전보다 더 바빠졌다.
“그럼 어디 가게? 이야, 이제는 따로 혼자 공부하려고?”
약초학과 학생들의 시선이 은근슬쩍 그록과 매튜에게로 향했다. 그록은 이를 모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부하러 가는 거 아니다.”
거짓말!
모두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삼켰다. 매튜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그록을 향해 말했다.
“너, 지금 니 얼굴 보고 그런 말 하는 거냐?”
“내 얼굴이 어때서?”
무뚝뚝하게 되묻는 그록의 모습에 매튜는 황당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저, 저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록은 매튜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드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강의실을 나갔다.
달칵.
“오, 어서 와.”
그록이 도착한 곳은 실험실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아스트가 여유롭게 앉아서 살랑살랑 손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점이었다.
“후우.”
하지만 그록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로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파트너였지만 이상하게도 아스트는 늘 그록에게,
“먹어.”
뭔가를 먹였다.
그록은 아스트가 입안에 넣어준 빵을 대충 씹어 삼키며 다시 자료들을 정리해나갔다. 실험 기회가 몇 번 없기에 그 준비가 더욱더 철저해야 했다.
아스트는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렇게 하니.”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는 옷에 묻은 빵 부스러기들을 털고 그록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졸업을 하기 전 최대한 그록 이 녀석을 도와 열심히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는 그록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제발 기적이 찾아왔으면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