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22.
“내 눈앞에서 사라지십시오.”
제니는 그 말에 순간 화가 나 자신도 모르게 표독스러움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녀는 눈에 더 힘을 주며 꼿꼿하게 앉으려 했다.
하지만,
그록의 눈빛에 다리가 떨려왔다.
처음 받아보는 강한 경멸과 혐오, 그리고 분노였다. 그리고 이는 주위의 학생들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명백했다. 그록과 제니.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더욱더 뜨거워졌다.
“지금 무, 무슨 소리를!”
제니는 모욕감에 치를 떨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두 분 지금 도서관에서 뭐 하시는 거죠?”
에이.
구경하던 학생들 몇몇은 혀를 차며 둘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정숙을 지키시길 바랍니다.’라고 적힌 큰 띠를 몸에 두른 사서가 나타나 두 사람을 매섭게 바라봤고 두 사람의 대치는 싱겁게 끝이 나야 했다.
“오늘 두 분 다 퇴장입니다.”
사서의 말에 그록은 묵묵히 짐을 챙겨 도서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남겨진 제니는 다리가 떨려 움직이지를 못했고 한참 동안 책상 위 찢겨진 종잇조각을 바라봤다.
[이거 완전 대박인데?]
[도대체 저 퀸카가 무슨 소리를 했길래, 저렇게 대하지?]
그리고 도서관에 남겨진 수많은 학생들은 수많은 말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 퀸카가 차인 거지?]
[어. 저 약초학과 놈 진짜 대단하네. 나 같으면 화날 일이라도 얼굴 보면 풀릴 것 같은데.]
[돈혐지한테는 쩔쩔매는 것 같던데. 이해가 안 되네.]
[돈혐지가 취향인가 보지. 취향 존중 몰라?]
[저 자식 완전 대단한 놈이네.]
그리고 눈이 삔 놈.
남 우드 아카데미의 3대 퀸카 중 한 명인 제니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그록에 대한 소문이 이전의 어떤 소문보다도 불같이 활활 퍼지기 시작했다.
***
두 가지 소식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첫 번째.
[아들, 다 컸구나. 말만으로도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공부에 신경 쓰려무나. 알겠지?]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두 번째는 자료와 실험실이 준비되었다.
‘쉴단은 내가 연구용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건의를 해보았으니 기다려보게. 아마 다른 말이 없으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허가가 되어서 나올 거야.’
그레이의 도움을 받고 자신이 돈을 벌면 그래도 한 다섯 번 연구할 쉴단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 마음껏 연구할 수 있던 과거와는 달랐다.
쏴아아아아아-
“빗소리가 더 강해지는군요.”
창밖을 보며 그록이 건넨 말에 블란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마라서 그런가 봐요.”
6월에 들어서자 찾아온 장마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블란은 힐끗 그록을 바라봤다.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다. 눈 밑도 거뭇한 것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요즘 공부가 많이 힘드신가 봐요?”
점원이 찻잔을 놓으며 그록에게 말했다. 그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연구를 할 뿐입니다.”
“그러시구나.”
연구. 그 단어가 블란의 귓가에 닿았다. 그록은 알트 차를 마셨다. 비 오는 날의 쓴 향이 더 좋았다.
“저, 무슨 연구를 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블란의 물음에 그록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록의 시선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혹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 건가?
괜히 질문한 것 같아 블란의 어깨가 서서히 굳어갔다.
그때,
“워보트 병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블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록은 묵묵히 블란과 시선을 마주하며 하나하나 말했다.
“쉴단과 워보트 병. 두 가지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하려고 지금 실험실을 구했고 여름방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블란은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왜, 왜?”
그록은 블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아. 블란은 답을 들었음에도 힘이 조금 빠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록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구자는 연구로서 모든 것을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록은 블란과 눈을 몇 초간 마주했다. 그 짧은 순간 블란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 그록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같이 오래 하고 싶습니다.”
아.
블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 말이 진짜일까?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이 그 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내 곁에 있어줄까?
이렇게나,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
블란은 한참 동안 말을 못한 채 그록을 바라봤다. 그녀는 뿌예지는 시야 때문에 몇 번이고 눈가를 찡그려야 했다.
그록은 이를 말없이 바라봐주었다. 그리고.
툭, 툭.
그녀의 손등을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쏴아아아아아-
빗소리가 더욱더 강해지며 창가를 두드렸다. 그 소리가 블란의 귓가를 뒤덮었지만 그 사이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가 더 크게 그녀에게 와 닿았다.
“꼭 나읍시다.”
이날 블란은 바뀌었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바뀌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편하게 보내고 싶다는 마음에서.
하루라도. 하루라도 더 살아야겠다고. 그 마음이 변화했다.
그리고 이날 그록과 블란, 두 사람이 모두 같은 소망을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서른 번째. 내가 나아서 같이 오래 살기.
기적을 향해 두 사람이 같이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이후, 둘의 삶은 전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졌다.
“저, 시 공모전에 작품을 내고 싶어요.”
평소처럼 알트 차를 마시던 그록은 블란이 꺼낸 말에 그녀를 바라봤다. 여전히 말은 조심스러웠고 어딘가 어색했지만 눈빛만큼은 똑바로 그록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과 마주하며 그록은 답했다.
“응원하겠습니다.”
블란은 그 말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그록이 덧붙인 말에 블란의 작은 실눈이 커졌다가 다시 작아졌다. 그녀는 그록의 예상과 달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 목소리는 꽤 씩씩했다.
“저, 저 혼자 해보고 싶어요.”
그록은 그 답에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블란의 표정을 보며 그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내실 겁니다.”
여전히 움츠러들어 있지만 블란의 눈빛이 또렷했다. 그리고 결심한 듯 꼬옥 쥔 손이 꽤 다부져 보였다. 그록은 결심을 한 블란을 기쁜 마음으로 응원했다.
“가, 감사합니다!”
뭐가 고마운지. 그록은 자신에게 인사하는 블란을 바라보다가 들려오는 소리에 창밖을 바라봤다.
투둑, 투둑.
오늘은 해가 떠서 비가 안 올 줄 알았더니 금세 하늘이 흐려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그록은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블란은 오늘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록 자신은 들고 왔다.
오늘이군.
그록은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열두 번째. 비 오는 날 같이 우산 쓰고 걷기.]
창밖을 보니 비는 오지만 바람이 덜 부는 것 같았다. 아주 조건이 좋았다. 그록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블란을 바라봤다. 창밖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같이 쓰고 가면 되겠군요.”
“네?”
“우산 말입니다.”
그록은 자신의 우산을 가리켰다. 블란은 이를 보다가 더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을 그록은 의아하게 바라봤다. 비를 안 맞게 되었는데 어째서 더 안절부절못하는 거지?
“그, 그. 비가 다 그치고 나서 가, 가면.”
다시 심하게 더듬었다. 그록은 답했다.
“돌아갈 시간입니다만.”
“아! 그, 그!”
그록의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 모습에 블란의 시선은 한참 동안 방황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가,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찻집 앞에 선 그록은 우산을 펼쳤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장마 기간 내내 가장 큰 우산을 들고 다녔는데. 잘했다 싶었다. 그는 우산을 쓴 채 거리로 발을 내딛었다.
그러고는 뒤돌아 블란을 바라봤다. 찻집 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그러지?
“오십시오.”
그록은 우산을 블란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흐읍!”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블란이 그록의 옆에 섰다.
뭐지? 그록의 얼굴 위로 의문이 나타났다. 블란은 아예 숨도 쉬지 않겠다는 듯이 통통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록의 의문이 더욱더 깊어졌다.
힐끔
블란은 그런 그록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은 채 웅얼웅얼 말했다.
“비, 비 오는 날은 냄새가 더, 더 심해져서.”
아.
그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블란은 더욱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우산 밖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튕겨서 그녀의 신발에 닿았다.
그 순간,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시선을 드니 그록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연구자로서 그 정도 지식은 있습니다. 비가 오면 지표면의 대기 흐름이 정체될 테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블란은 그록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록은 비 오는 날 지표면 공기의 흐름과 수분, 그리고 냄새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설명해나갔다. 그런 그록을 향해 블란은 띄엄띄엄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록은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블란은 답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했고 이를 보던 그록은 점차 거세지는 빗발에 그녀를 우산 안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우선 갑시다.”
블란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
빗소리를 들으며 그록은 옆을 바라봤다. 손을 잡고 싶은데, 우산 때문에 그러기가 힘들었다. 거기다가 블란은 여전히 두 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은 채 말이 없었다. 그록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나타났다.
투둑, 투둑.
우산이 있음에도 빗방울이 튀어 옷에 닿았다. 그록은 어깨의 빗방울을 털어냈다. 그는 다시 블란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눈이 커졌다.
입을 꾹 틀어막은 채 걸어가는 블란의 어깨 끝이 젖고 있었다. 그리고 블란은 미처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쯧.
그록은 우산을 조금 더 블란 쪽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블란은 더 흠칫하며 두 손으로 입을 더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록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젖은 블란의 교복만이 보였다.
같이 걸을 땐 이게 다르군.
그록은 또 하나를 깨달았다. 그는 손을 뻗어 블란 어깨의 빗방울을 털어내었다.
툭, 툭.
“가, 갑자기 왜, 왜?”
블란이 경기를 일으키듯이 놀랐지만 그 목소리는 틀어막은 입 때문에 웅얼웅얼 튀어나왔고 그록은 듣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의 어깨 위 빗방울을 털어냈다.
블란은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그록의 손이 보였다.
다시 그녀의 몸이 흠칫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젖은 어깨가 보였다.
“몸도 안 좋은데,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처음으로 그록의 입에서 약간 책망과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블란은 흠칫했다가 젖은 어깨를 향한 그록의 눈빛에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그록은 블란의 어깨를 그대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우산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블란은 흠칫했지만 그록은 그보다도 미간을 찌푸린 채 얼른 목적지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해보고 싶었던 일’ 목록은 모두 그록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번 열두 번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그록 씨 어깨…….”
블란의 말에 그록은 블란의 어깨를 바라봤다. 이제는 젖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안 젖습니다만?”
“아뇨, 제 어깨가 아니라!”
가장 큰 사이즈의 우산이었지만 그록과 그록보다 더 면적이 넓은 블란을 모두 다 가리기에는 우산이 작았다.
그록은 블란의 말을 모른 척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연구자로서 기본적인 길이 계산을 못 했다니! 이건 연구자로서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록은 블란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걸음을 바삐 옮겼다.
기숙사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볼을 붉게 물들인 채 그록의 어깨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블란을 기숙사 안으로 들여보낸 후, 그록은 자신의 기숙사로 빠르게 돌아왔다. 그록은 방 안에서 흰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따로 세탁할 필요가 없겠군.”
기숙사 방 한편에 코트를 걸어놓은 채 혹 습한 날씨 때문에 내일 다 마르지 못할까 싶어 코트 앞에 앉아 부채질을 해댔다.
그 와중에 그는 쪽지를 펼쳐 그 밑에 적었다.
[열두 번째. 비 오는 날 같이 우산 쓰고 걷기.]
[ㄴ감기에 걸릴 확률이 높음. 장마에는 특히 안 됨.]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록은 감기에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