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19화 (19/95)

# 19화

19.

그록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을 느끼다가 블란을 바라봤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동안 그록은 고민했다.

“이 차는 새로 나온 차인데 쓴 차를 즐기시는 것 같길래 조금 시식해주시라고 서비스로 드립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야말로 매번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죠.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점원과 블란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 찻집에만 들어서면 블란의 얼굴이 살아났다.

흐음.

그록은 점원이 사라지자, 긴장을 푼 듯 어깨를 펴는 블란을 보며 주머니에 있던 것을 툭 내밀었다.

“이, 이게?”

접힌 종이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블란을 향해 그록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냥 생각나서.”

답지 않게 그록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 쓰는 걸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한번 보시면 좋지 않으실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블란은 눈을 깜박이며 그록을 보다가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아.”

[가을 우드 문예 안내문]

종이의 상단에 적힌 글자가 또렷하게 블란의 눈에 담겼다. 그록은 블란의 시선이 종이에서 떼어지지 않은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신청자에 따로 제한이 없더군요. 그리고, 크흠.”

블란이 빤히 쳐다보자 그록은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꼭 본명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필명으로, 익명으로 내어도 된다고 합니다. 사서의 말로는…….”

그는 일주일 사이 사서를 붙잡고 이 안내문에 대해서 몇 번이나 물었었다.

이제 막 문학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여성 작가들에 대해 어떤 이상한 벽을 두는 대회는 아닌지.

혹은 서 우드 문예 관련 특정 과 사람들이 주로 신청하는 대회인지.

그간 수상한 사람들의 시가 대체로 어떠했는지.

“누구든, 어떠한 틀도 없이, 자신이 자유롭게 창작한 작품을 제출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더욱더 빤히 바라보는 블란의 시선에 그녀를 바라보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블란 양 생각이 나서 가져와 봤습니다.”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시. 좋아하십니까?’

‘그, 네. 조, 좋아합니다.’

무수히 많은 표정들이 그녀의 얼굴 위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때 블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록이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제가, 이, 이런 걸 해도 될까요?”

차마 블란은 그록을 바라보지 못한 채 물었다. 그리고 답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로 들려왔다.

“당연한 말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블란의 시선이 그록에게로 향했다. 그록은 그녀와 마주보며 묵묵히 물었다.

“해서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올곧은 눈빛을 마주하다가 블란은 천천히 답했다.

“……없어요.”

해서 안 될 이유는 없다.

블란은 자신의 내뱉은 답을 한참 동안 되새겼다. 그때 그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연구를 좋아합니다. 물론 이제는 연구 말고도 좋아하는 것들이 많지만. 아무튼 연구를 좋아해서 많이 했습니다.”

그는 종이를 꼬옥 잡고 있는 블란의 통통한 손을 보며 말했다.

“그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행복한 것 같습니다.”

블란은 문득 책장에 끼워두었던 편지가 떠올랐다.

[환희]

그 편지 속 시가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내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블란은 한참 동안 안내문을 보다가 그록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안내문은 제, 제가 가져도 될까요?”

그록의 무뚝뚝하던 얼굴이 묘하게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히 됩니다.”

블란은 종이를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그녀는 조금씩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알트 차를 마셨다. 쓴 향이 입안에 감돌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은 뛰었다.

그록은 그런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흐응.”

그런 둘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제니는 블란이 아닌 그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재밌겠는데?

제니는 케이크에 든 딸기를 입에 머금으며 무뚝뚝한 그록의 얼굴을 바라봤다. 묘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

그록은 오늘 아침 배달된 편지를 가만히 읽어 내려갔다.

[아들, 잘 지내니?]

어머니의 편지였다.

[미안하다. 연구를 하려면 돈을 더 보내줬어야 하는데. 이번에 아버지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많이 못 보내주게 되었어. 엄마가 더 열심히 해서 돈이 마련되는 대로 보내줄 테니, 조금만 힘을 내렴.]

빌어먹을.

저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록은 과거로 돌아와 딱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이것임을 깨달았다. 그간 편지가 오지 않아 잊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분명 아버지라는 작자는 또 연구에 빠져서, 그 고고한 자존심으로 인해서 사고를 쳤을 것이고. 어머니는 그 수습을 한다고 고생을 하실 것이고. 그 고생 때문에 어머니는 더 일을 하실 것이고. 그런 어머니 앞에서, 그 인간은.

당당하겠지.

그 뻣뻣한 고개를 남들보다 가족들 앞에서 더 내세우는, 어머니 앞에서 더 치켜드는 인간이니까.

‘남자가 하나의 목표를 두고 일을 하는데 여자가 그걸 도우지는 못할망정, 뭐라고? 나보고 고개를 숙이라고? 어떻게 그딴 말을 하는 것이지?’

언젠가 아버지라는 인간이 어머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드 아카데미 입학금이 없었던 그록은 어머니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렇게, 애들 앞길마저 막을 순 없잖아요. 당신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허! 어디서 여자가 지금 남자가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끼어들어!’

그록은 뒤이어 들려온 아버지라는 인간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었다. 하지만 아무 힘이 없던 자신은 아카데미를 입학하고 싶어서 입을 꾹 다문 채 숨죽여야 했다.

비겁했다.

[그러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하거라.]

[사랑한다. 아들.]

마지막에 쓰여 있는 문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닮기 싫었다.

처자식 내팽개치고, 어머니를 막 대하고, 자식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연구에만 빠져 사는 그 인간이 싫었다.

증오스러웠다.

그록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아닌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하.”

그록은 저도 모르게 탄식과도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아버지랑 똑같이 살았군.

자신은 아버지와 닮았음을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연구를 위해 블란에게 접근했고 가족인 어머니와 연을 끊어서 어머니가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인 블란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나와 아버지는 다른 게 없군.’

새삼 깨달은 생각에 그록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되새겨보니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인간을 닮아선 안 돼.’

자신에 대한 어떤 지독한 분노가 그록을 덮쳐왔다.

그록은 저도 모르게 안주머니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안주머니에는 늘 있었다.

‘해보고 싶었던 일.’

그록이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힘이 늘 그 안에 있었다. 그는 다시 편지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분명히 일을 더 늘릴 것이다. 연구자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안 된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아버지라는 인간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실 것이다.

자신을 위해.

그록은 새삼 자신이 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는 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사랑한다. 아들.]

그는 이를 한참 동안 보다가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일을 해야겠어.”

연구자를 지망하는 학생이 일하는 것은 우습게 여겨졌다.

재능이 없어 후원자를 찾지 못하거나 혹은 집안이 못 사는, 연구를 할 능력이 못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록은 지금 이 순간 생각했다.

그런 남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하겠나.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일을 하자.

다 바꾸자.

그록은 다시 눈을 뜨며 책상으로 가 편지지를 한 장 꺼내들었다. 그는 답장을 써내려갔다. 처음으로 그는 어머니에게 긴 답장을 했다.

[……어머니,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앞길은 제가 알아서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을 더 늘리지 마세요.]

여기까지 쓴 그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펜의 잉크가 번져 커다란 점을 그릴 때쯤 다시 펜을 움직였다.

[제가 얼른 성공해서 어머니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한 번 움직인 펜은 거침없었다.

[저도]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멈췄다. 그록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썼다.

[저도 사랑합니다. 어머니.]

그록은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렸다. 처음 써본 글자라 낯설었다. 하지만 이 낯설음이 맞는 것 같았다.

그록은 다 쓴 편지를 든 채 방을 나섰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그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로 그록은 지도 교수를 만나러 왔다. 중급약초해설학 교수인 재크와 그록은 마주 앉았다.

“나는 알고 있었지!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네!”

재크는 연신 그록의 중간고사 점수에 대해서 칭찬의 말을 쏟아 부었다.

“세상에, 내 자랑스러운 제자가 99점이라니! 하긴 내 제자니까 그럴 거야? 하하!”

‘이런 치욕스러운 놈이 내 밑에 있었다니. 정말이지 끔찍하구나.’

과거 돈자팔이었던 그록 자신에게 했던 말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말에 그록은 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한창 흥에 겨워 그록의 칭찬인지 재크 자신에 대한 찬양인지 모를 말을 해대는 재크를 보다가 그록은 말을 꺼냈다.

“교수님.”

“그래, 그래! 내 자랑스러운 제자의 말도 들어야지!”

“제가 실험실을 하나 배정받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흐음. 실험실?”

“네.”

그록의 끄덕임에 재크는 잠시 소파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선 생각에 잠겼다. 언제 칭찬을 했냐는 듯 그는 약간 고민을 하더니, 톡톡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그 워보트랑 쉴단에 대한 연구 말인가?”

그록은 의외로 재크가 기억을 하고 있자, 조금의 희망을 담고서 힘차게 답했다.

“네. 좋지 않은 곳이라도 배정만 해주시면,”

“그록. 그런데 말이야.”

갑자기 재크는 그록의 말을 끊고선 그를 바라봤다. 재크의 표정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자네가 모르겠지만, 자네 정도의 인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많아. 지금 이 세상에 연구해야 할 약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그록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다른 연구는 어떤가?”

재크는 굳어진 그록의 표정을 안타까이 쳐다보며 말했다.

“워보트와 쉴단은 연구를 해내도 실질적으로 손에 쥐어지는 게 없어. 모름지기 세상사라는 게, 특히 자네 같은 인재라면 조금 더 이름을 알리고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해야 하지 않겠나?”

순간 그록은 테이블 아래 주먹을 꽉 쥐었다.

실질적으로 손에 쥐어지는 것. 그것은 돈과 권력이었다. 재크는 선언하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워보트에 대한 연구는 가치가 없는 연구야, 가치가.”

자신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재크를 그록은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재크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가치는 누가 따지는 겁니까?”

차분하지만 한껏 날이 선 목소리였다. 재크는 그제야 그록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어느새 그록의 눈동자는 어떤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도 따져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건 가치가 아니라,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 아닙니까?”

그록은 재크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게 연구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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