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에게 접근하는 이유-17화 (17/95)

# 17화

17.

“뭐? 이 자식이!”

순간 움찔했던 남자는 자신이 멈칫했던 것에 화가 났는지 어깨를 펴고 더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폭발할 듯이 화를 내며 그록에게로 다가왔다.

“헐. 진짜 싸우나?”

“저, 저 남자도 미친 거 아냐?”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더욱더 커져갔다. 그록은 그런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만이 보였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불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 손 안에서 가늘게 떨리는 블란의 손 때문에 그 불길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비실비실한 새끼가! 뭐라고?”

남자는 그록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이 부딪치기 직전,

“야, 야! 그만해라, 그만해!”

일행 중 한 명이 튀어나와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뭐? 지금 이 개자식이 나한테 이딴 소리 했는데 참으라고?”

남자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친구를 향해 날을 세웠다. 그에 친구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를 가리켰다.

“야, 주위 좀 봐라. 너 또 이러면 퇴학이야. 잊었냐?”

그제야 화를 내던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때 다른 일행들도 슬그머니 다가와 남자에게 말했다.

“야. 기분 좋은 날인데 그냥 가자, 가.”

“그래, 인마! 괜히 주먹질해서 뭐 하냐? 그냥 쌩까.”

그록은 순간 기가 차서 그들을 바라봤다.

누가 보면 자신이 시비를 건 줄 알겠다. 자신과 블란을 앞에 두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때 남자를 처음으로 말렸던 이가 그록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쪽도 그만합시다. 싸워봤자 뭐 할 겁니까? 그냥 좋게, 좋게 끝냅시다.”

그 사람의 시선이 힐끗 그록의 옆으로 향했다.

“보니까 여자친구도 지금 많이 떠는 것 같은데. 그만 좋게 끝내죠.”

“무슨,”

소리를 높여 말하려던 그록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블란이 그록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록의 눈에 물기로 가득한 블란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블란은 그록을 향해 계속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록은 순간 마음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전 괜찮아요. 그, 그만해요. 그록 씨 다치면 안 돼요.”

마음속 불길로 인해 타들어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그록의 제 마음속이었다. 그는 블란의 손을 잡지 않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주먹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여자친구도 그렇게 말하네요. 그럼 이걸로 끝냅시다?”

무슨! 이걸로 끝내자니!

그록은 입을 열려고 했으나 다시 옷깃을 잡아당기는 블란의 손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주위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연신 불안해하는 블란의 모습에 그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자신과 블란, 그리고 남자들을 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깃든 호기심과 재밌는 구경거리를 만난 듯한 시선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록의 속은 한줌의 재도 남을 수 없이 타들어갔다.

“자, 자. 그럼 이만 다들 제 갈길 갑시다.”

“야! 난 아직 끝 아니라니까?”

“새끼야, 그냥 가자. 응?”

“아, 진짜!”

남자는 일행들에게 이끌려 그록과 블란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록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말이 되어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에이씨, 너희 운 좋은 줄 알아! 다음에 내 눈앞에 보이면 넌 나한테 뒤졌어!”

“야, 야! 이 새끼 입 좀 막아라!”

남자를 끌고 가던 일행 중 그록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남자를 일행들은 끌고 나갔고, 거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끌려가며 남자는 마지막으로,

“에이씨, 진짜 재수 없게! 퉷!”

침을 뱉고는 그록과 블란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록은 순간 그 모습에 다시 불길이 차올라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그만해요. 우리, 그만해요.”

하지만 말리는 블란의 손길에 그록은 발을 뗄 수 없었다. 순간 깊은 무력감이 그를 감싸 안았다.

“헐. 불쌍.”

순간 들려오는 너무나도 가벼운 목소리에 그록의 눈 속에 불똥이 일었다. 그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과 블란을 보다가 흠칫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불쌍하다고?

그 말이 다시 그록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제대로 보였다.

남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그록과 블란을 여전히 많은 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보였다. 바들바들 떠는 블란이.

그녀의 머리끈이 보였다. 오늘 처음으로 하고 나온 머리끈이 그록의 눈에 담겼다.

오늘 정말 즐겁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록은 울컥 차오르는 것을 꾹 누르며 블란의 떠는 손을 잡은 채 그녀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우선 다른 곳으로 갑시다.”

고개를 끄덕이는 블란의 물기 어린 눈동자를 보며 그록은 중앙광장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그 내딛는 한 걸음이 참으로 무거웠다.

중앙광장에서 멀어지는 두 사람을 사람들은 힐끗힐끗 보았다. 하지만,

와아아아아-

곧 들려오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다들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아, 서커스! 그거 보러 가려고 했지?”

“야, 빨리 가자, 빨리! 그거 맛보기는 공짜라고 했단 말이야!”

다들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빠르게 광장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머릿속에 방금 있었던 일은 작은 다툼 혹은 시비로 남았다가 금세 잊혔다.

***

그록은 중앙광장에서 조금 벗어난 동쪽 거리의 한 벤치에 앉았다. 블란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록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중앙광장의 그 열기는 거짓말이었는지 이 동쪽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고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록은 멍하니 거리를 바라봤다. 지금 그의 마음속은 다른 생각을 하기도 벅찰 정도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 그.”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록은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려 블란을 바라봤다. 순간 그록의 눈이 조금 커졌다. 블란은 한쪽에 주스 통을 둔 채 연신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록에게 뭐라 말을 하려 애쓰고 있었다.

잔뜩 움츠러든 채 연신 손을 가만히 못 두고선. 자신의 눈을 정확히 보지 못한 채 힐끗힐끗 조심스럽게 수없이 바라보는 그 눈짓에서.

그록은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순간 그록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블란이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이 힘겨워 보였지만 그녀는 그록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했다.

“여기도 그, 축제 분위기가 나네요.”

그 말에 그록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중앙광장에 비하면 한산했지만 이곳도 축제라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가게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장식을 단 채 조그마한 이벤트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광장만큼 많지는 않아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록은 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블란을 바라봤다.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록은 블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답했다.

“네. 여기도 축제군요.”

그록의 답에 한시름 놓았다는 듯 블란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록은 그런 블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도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계획서에 적혀 있지 않았던 것을 그록은 제안했다. 그 제안에 블란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네. 여기도 보고 싶어요.”

둘은 의식적으로 중앙광장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록은 블란의 답에 그제야 조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한쪽 속은 타들어갔지만 염려하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길에 멍하니 있을 수 없었다.

오늘은 누가 뭐래도 블란의 첫 축제였다.

그 생각에 그록은 다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록의 물음에 블란은 잠시 멈칫하더니 손수건을 꺼내어 그록에게 내밀었다. 이를 그록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갑자기 왠 손수건?

“갑자기, 손수건은 왜…….”

“그, 옷에.”

블란의 말과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것을 따라 그록은 자신의 흰 코트를 바라봤다.

아.

포도 주스 자국이 얼룩처럼 남아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록은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그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모습에 블란은 이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디 다친 데 없습니까?’

‘주, 주스가 조, 조금 그록 씨 옷에 묻었는데.’

자신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털어내고는 연신 자신을 살피며 그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행입니다.’

블란은 흰 코트에 묻은 보랏빛 얼룩들을 보며 당황한 그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록은 블란이 내미는 손수건을 받아 옷을 닦아내려 했지만 어느새 짙게 밴 얼룩은 지워지지를 않았다. 그록은 그냥 포기한 채 손수건을 내밀려다가 멈칫하고선 블란에게 묵묵히 말했다.

“이 손수건은 제가 깨끗이 빨아서 드리겠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블란은 그록의 묵묵한 눈빛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록은 그 모습을 보고선 주머니에 손수건을 넣었다.

얼핏 다시 본 손수건은 블란을 닮은 것인지 은은한 자수가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록은 손수건을 넣은 후 다시 블란의 손을 잡고서 일어섰다. 주스는 어떻게 된 것인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블란은 얼른 이를 마시고선 그록과 함께 주스 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둘은 중앙광장보다는 한적한 동쪽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여기 조, 좋은 것 같아요.”

블란의 말에 그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독 아까 그 일 이후로 블란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 모습이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분위기를 띄우려 하는 것이 그록의 눈에도 보였다.

“네.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록은 블란이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는 것을 느꼈다.

“조용하면서도 활기찬 분위기가 좋군요.”

그록의 말에 블란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말 그렇다는 듯 한 손으로 꼬옥 주먹을 쥔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록은 이를 보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이구, 오늘은 그래도 축제라고 할인하나 보네?”

“그럼, 해야지! 우리한테도 축제날인데! 그냥 넘어가요?”

편하게 주고받는 말들을 들으며 그록은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힐끗 블란을 바라봤다.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 같았다.

그록은 그녀가 조금 전의 일을 잊길 바랐다.

물론 자신은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음?”

블란을 바라보고 있던 그록은 그녀의 눈길이 계속 향하는 곳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우드 앤 니드 서점]

이런 서점이 있었던가?

아주 오래된 곳인지 낡은 외양의 서점이었다. 마치 활기찬 축제와 조금 동떨어진 세상 속 같았다.

[세월을 새긴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가게 앞 안내판에 새겨진 문구에 묘하게 눈길이 갔다. 그는 블란을 바라봤다. 힐끗거리면서도 계속 보는 것이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록은 흰 코트 안주머니에 있는 계획서를 떠올렸다.

주스를 마시는 것 빼면 어느 하나도 오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록은 블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어떻습니까?”

“네, 네?”

“저 서점 말입니다.”

블란은 그록의 말에 우물쭈물하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 뭔가 조용하고, 저기만 조금 달라 보여서. 자꾸 누, 눈이 갔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록은 다시 서점을 바라봤다.

활기찬 거리와 달리 그 나름의 시간이 조용하게 흐르는 곳 같아 보였다. 그는 툭 내뱉듯이 블란에게 말했다.

“저기 한번 들어가 볼까요?”

블란 역시 묘한 표정으로 서점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긍정을 표해왔다. 그록은 블란과 함께 ‘우드 앤 니드’ 서점의 낡은 문을 열었다.

딸랑.

오래된 종이 울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카운터에 있던 노인이 인사를 건네왔다. 그록은 마주 인사를 하며 천천히 서점 내부로 들어섰다.

“와…….”

블란의 감탄사를 들으며 그록은 감탄했다.

세월을 새긴 공간.

그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오래된 책들이 일자로 된 서점의 양쪽 벽에 배치되어 있었다. 요즘 서점에 비하면 형편없이 좁은 길이었지만 그록은 천천히 블란과 걸음을 옮겼다.

그록과 블란, 딱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을 만한 길이었다.

그 사실이 그록은 마음에 들었다.

“우와! 이, 이거!”

그는 처음 들어보는 블란의 높은 목소리에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책장의 한곳에 시선이 꽂힌 채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록은 그녀를 따라 바라봤다.

[바람을 담다]

오래된 시집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록의 물음에 블란은 화들짝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들떴던 것을 떠올렸는지 살짝 귀를 붉게 물들이며 답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생기가 가득했다.

“엄청, 진짜 예전의 시집인데요. 제가 보고 소장하고 싶었는데, 도, 도서관에서만 봤던 거라.”

“오.”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희귀한 약초를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군요.”

“예?”

블란은 이해했다는 듯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록을 보며 작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록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는 손을 뻗어 시집을 조심스럽게 뽑았다.

“보물을 발견했군요.”

“……맞아요.”

블란은 그록의 손에 들린 시집을 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좁은 통로는 꽤 길었다. 그록은 오래된 책의 향을 맡으며 말했다.

“왜, 세월을 새겼다고 했는지 알 것 같군요.”

“네.”

서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록은 점점 세상과 멀어지는, 아주 오래된 과거로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 그 순간 그록은 시선을 돌렸다. 옆에 블란이 서 있었다.

묘한 안도감과 함께 그록은 편안함을 느꼈다.

둘은 천천히 서점 통로의 끝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일자로 된 길의 끝에 서게 되었을 때.

“아!”

블란은 짧게 감탄을 내뱉었고 그록 역시 눈을 크게 떴다.

좁은 통로의 끝에는, 보이지 않던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

우드 앤 니드 서점은 ㄱ자로 된 구조였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ㄱ자의 그 안쪽 길에 들어섰다. 그 순간,

“와.”

“허.”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록은 비로소.

[세월을 새긴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말이 이해되었다.

첫 번째 통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두 번째 통로로 들어서자, 서점의 온 벽이 모두 수많은 글귀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과 많은 낙서들이 함께 공존했다.

그는 블란을 바라봤다. 둘은 시선을 마주하다가 함께 그 공간 속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이거 재미없음.]

[ㄴ너보단 재미있을 듯.]

[ㄴ그건 인정!]

책에 대한 평가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락방에 숨어든 마녀’ 이 책은 왜 초판만 내고 더 이상 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졸작입니다.]

[ㄴ공감합니다가 아니라 안 공감합니다. 완전 재미있는데요?]

오래전에 새겨졌는지 바랜 낙서들이 보였고 그 위에 새로운 낙서들이 덧씌워져 있었다.

[‘스며드는 마음’ 이 시가 정말 좋더라구요. 그래서 이 시집을 추천합니다.]

우뚝.

그록은 걷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블란을 바라봤다. 의아하다는 시선에 그록은 살짝 손으로 낙서를 가리켰다.

“저도 이 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

낙서를 본 블란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이 골라주었던 시집에 있던 시였다.

그녀는 그 시를 떠올렸다. 스며드는 사랑에 대한, 어느새 돌아보면 심장을 꽉 채웠던 그 마음에 대한 시였다.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그녀는 점점 그록의 귓가 끝이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도. 저도 이 시가 정말 좋았어요.”

“크흠, 그렇다니 이 시가 더 마음에 드는군요.”

블란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록은 이를 모른 척하며 연신 헛기침을 하다가 주머니에서 펜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운터에 있던 노인은 보이지 않았고 이 공간에는 오직 블란과 자신뿐이었다.

그록은 펜을 움직였다.

[ㄴ저도 이 시를 추천합니다.]

블란은 이를 보며 작게 미소를 그렸다. 그록은 그 미소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갑작스럽게 나온 말에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무뚝뚝한 눈빛이었지만 그 속에 든 감정이 보였다.

그록은 자신을 마주하는 블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따뜻하고 상냥했다. 이런 사람에게 왜. 아직까지 그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미안했다.

첫 번째 축제를 즐겁게 보내게 해주고 싶었는데.

함께 하고 싶어서 적었던 목록들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하나밖에 하지 못했는데.

미안했다.

또, 가장 미안한 것은.

그런 소리들을 듣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록은 자신의 탓 같았다.

“아니에요.”

그록은 마치 블란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따뜻하게 포옹을 해주는 것만 같았다.

“제가 미안해요.”

무슨! 그록의 입이 다시 열리려고 할 때 블란이 작게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 휘어진 눈꼬리가 마냥 슬퍼 보이지 않았다. 블란은 다시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고마워요.”

그록은 한참 동안 블란을 바라보다가 여러 감정들을 꾹 누르며 무뚝뚝하게 답했다.

“미안할 일도, 고마울 일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소를 그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록은 블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언뜻 보인 것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벽의 밑 부분. 아래쪽에 적힌 낙서들이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그 낙서들을 읽어 내려갔다.

벽의 중앙과 위에 적힌 낙서들은 책에 대한 감상들이었다면, 아래에는.

[서 우드 최고의 천재 매드 도라가 다녀감!]

[책 하면 바로 나 도귀 레이지 라이! 이 몸이 다녀간다!]

아주 작은 글자로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 우드 최고의 미녀가 다녀가니 다들 알아두도록.]

[메리 ♡ 조단]

그록은 이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힐끗 블란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그록과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록은 묵묵히 펜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쭈그려 앉았다.

그는 벽을 뚫어질듯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그록과 이 다녀갑니다.]

그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블란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그록을 보고 있었다. 그록은 그녀에게 펜을 내밀었다.

“이 사이 채워주십시오.”

우물쭈물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 펜을 쥐여 주었다. 블란은 펜과 낙서를 번갈아 몇 번 바라보다가 쭈그려 앉은 채로 조심스럽게 벽에 글자를 새겼다.

블란.

그리고 완성되었다.

[그록과 블란이 다녀갑니다.]

그록과 블란은 쭈그려 앉아서 한참 동안 이 낙서를 바라봤다. 그때 그록은 흘러가듯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리도 이 세월에 새겨졌습니다.”

크흠. 그 뒤에 이어 헛기침을 그는 몇 번했다. 블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록은 블란을 보지 않은 채 낙서를 보며 말했다.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다음에는, 아니 내일부터는 즐거운 축제가 될 겁니다.”

블란은 귓가를 물들인 채 낙서를 바라보는 그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금도 즐거워요.”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순간 그는 이쁘게 휘어진 그녀의 눈꼬리가 짓는 미소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블란은 미소를 띠며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는 최고의 축제예요.”

그록은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천천히 답했다.

“저돕니다.”

그는 블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블란도 마주 힘을 주었다. 오늘 계획했던 것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그록은 지금 이 순간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조금 더 오래, 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세월에 잊혀 있던 오래된 서점의 한 구석. 그록과 블란은 두 사람의 이름을 세월에 새겨 넣은 채 둘만의 축제를 즐겼다.

그록에게는 잊히지 않을 축제의 첫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