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
그록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 역시 축제날이 되니까 좋네!”
“와, 아침부터 다 준비해놨어! 저쪽에 가보자!”
중앙광장은 오전임에도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이런 일을 처음 겪어보는 그록은, 어색함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그 주름은 사라졌고 그는 중앙광장의 시계를 힐끗 바라봤다.
올 시간이 됐다.
그록은 남 우드 아카데미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러뜨린 채 블란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땅을 보던 그녀의 시선이 힐끗 앞으로 향했을 때 둘은 눈이 마주쳤고 그록은 블란에게로, 블란은 그록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블란 양.”
“네. 그록 씨.”
그록은 가만히 블란을 바라봤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그록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져댔다. 그 이유를 그록은 몰랐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예쁘군요.”
“예, 예?”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드는 블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록은 덤덤하게 말했다. 사방은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둘은 서로의 목소리가 정말 잘 들렸다.
“머리끈 말입니다. 처음 보는군요. 예쁩니다.”
블란의 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록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블란이 보기 싫었던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저 머리끈을 하고 다시 풀기를 반복했는지. 혹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 봐 그를 만났음에도 눈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을.
그록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블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정말요?”
“네. 잘 어울리십니다. 눈 색이랑 같아 예쁘군요.”
그록은 블란의 붉게 물든 볼을 보며 더운 건가 생각하며 주스를 가장 먼저 사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갑시다.”
그록은 블란의 손을 잡았다. 순간 블란이 흠칫 몸을 떨었지만 그록은 눈앞의 광경을 보느라 알지 못했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저 속을 헤치며 걸어가려면.
꾸욱. 그록은 블란의 손에 힘을 살짝 더 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를 따라 블란도 걸음을 옮겼다.
“우와.”
힐끗. 그록은 옆을 봤다. 조심스러운 눈길이지만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블란은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록은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카데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우드 시는 평소에는 아주 조용했고 어딘가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와.”
블란의 감탄 소리를 따라 그록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는 색색으로 단장을 했고, 공연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주변의 도시에서 온 사람들까지 합쳐져 사람도, 구경거리도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록은 힐끗 옆을 바라봤다.
블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진작에 한번 같이 와볼걸.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면서도 그록은 반짝이는 블란의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제 주스부터 마시러 가보겠습니까?”
[첫 번째 축제 보내기 계획서]
[축제 특제 주스 같이 마시기(딸기는 제외).]
그록은 계획서 목록에 적힌 것들을 블란과 함께 하나씩 해나갈 계획이었다.
“아!”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있던 블란은 살짝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네.”
그록은 어젯밤 외웠던 축제 안내도를 떠올리며 블란을 이끌었다. 그는 앞으로 걸으면서도 연신 블란을 살폈다. 가끔씩 자신을 바라보면서 주위를 연신 둘러보는 눈빛과 얼굴 가득 생기가 넘쳐 보였다.
그록의 얼굴에도 서서히 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자, 오직 우드 시 축제 기간에만 파는!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주스입니다! 이름하여 우드 특제 주스! 그 맛 또한 수십 가지! 마음껏 골라주시길 바랍니다!”
젊은 상인의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주스 가게 앞에 모여 있었다. 그록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보고 블란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많아서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전. 그록 씨가 괘, 괜찮으시면…….”
“전 괜찮습니다. 그러면 기다리죠.”
그록은 줄의 맨 뒷줄에 블란과 함께 섰다. 그는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뒤돌아보더니 흠칫하고선 눈가를 찡그리며 일행과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은 채 블란을 바라봤다.
그녀도 그록을 보고 있었던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록의 물음에 블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가로젓더니 살짝살짝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따뜻하고 편안했지만 어딘가 들떠 있었다.
덩달아 그록도 들떴다.
“축제가 이렇게 화, 화려하고 신기한 곳일 줄 모, 몰랐어요! 정말 멋져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선 주저하는 듯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록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록 씨.”
그록은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잘 몰랐으나 자신 역시 고마운 것이 있었기에 묵묵히 답했다.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블란 양.”
블란 덕분에 축제에 와본 그록은 또 다시 하나를 알아갔고 하나를 더 경험해나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긴 기다림 끝에 그록은 주스를 주문할 수 있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점원의 물음이 떨어지자마자 그록은 바로 답했다.
“사과 하나와 포도 하나 주십시오.”
“오, 저는 이렇게 주문을 바로 해주시는 손님이 좋더라구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블란에게 말했다.
“미리 정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블란은 뿌듯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록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록은 블란만큼 워보트 병에 대한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먹을 수 없는 음식들도 잘 알았다. 마치 미리 공부라도 한 것처럼.
블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옷을 꾸욱 잡았다.
“자, 나왔습니다, 손님!”
“우아.”
“허.”
블란은 물론이거니와 그록조차도 손에 들린 주스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특제라고 하길래 얼마나 크겠나 했더니.
“엄청난 크기입니다.”
“그렇네요.”
둘은 가게 옆 한쪽에 서서 손에 들린 멍하니 나무통을 바라봤다. 순간 그록은 생각했다. 이거 다 마시면 밥은 못 먹을 것 같은데. 그리고 그것보다.
그록은 블란을 바라봤다. 통이 큰지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빈 한 손을 바라봤다.
손은 못 잡을 것 같군.
그는 묘한 아쉬움이 들었지만 신이 난 것이 얼굴 표정에서 느껴지는 블란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흐음.”
그는 천천히 다음 구경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중앙광장의 특별 행사 구역을 도는 거였던가.
그록은 블란을 보며 말했다.
“블란 양. 이제 중앙광장 구경을 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네!”
그록은 블란과 함께 천천히 중앙광장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이야말로 축제의 절정이 펼쳐지는 공간이자 수많은 사람의 환호와 즐거움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록은 우드 시 시청에서 발간한 책자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모든 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입니다! 함께 즐기실 마음으로 구경 오세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록은 천천히 블란에 맞춰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록의 눈에 움츠러들어 있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 펴진 것이 보였다.
그때,
우와아아아아아!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고 그록의 귓가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셋째 날에 할 서커스 맛보기 보여준다는데! 그건가 보다!”
“야, 빨리 가자. 얼른!”
비슷한 대화 내용들이 들려왔고 갑자기 사람들이 빠르게 중앙 광장의 중심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록은 아차 싶어 고개를 돌리며 블란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
“아!”
그록은 블란이 뒤에 있던 사람에게 밀쳐져 살짝 앞으로 휘청하는 것을 보고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 그는 놀라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로 세웠다.
“괜찮습니까?”
그 순간,
“아씨. 뭐야?”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는 빠르게 아무 다친 곳이 없는 블란을 보고선 시선을 그리로 돌렸다.
“아, 더럽게.”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채 블란을 내려다보며 구시렁거리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록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남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한쪽 팔과 어깨를 연신 털어대며 그록의 품속 블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였다.
그록이 몇 번이고 되새기던 그 사람이었다.
‘야, 우드 시 물 좋다더니, 순 거짓말 아니냐? 진짜 최악이네. 최악.’
언젠가 찻집에서 블란을 향해 비난의 말을 하던 남자였다. 그록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가만히 그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동 우드 교복을 입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있었던 건지 일행을 향해 말했다.
“아씨. 이거 비싼 옷인데 더럽게, 진짜. 기분 구려졌어.”
그에 일행들은 낄낄거리며 웃다가 그록의 시선을 발견하고는 움찔하더니 친구의 옆구리를 쳤다. 그러자 블란과 부딪쳤던 남자가 뒤돌아 그록을 힐끗 봤다. 그러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뭘 쳐다봐?”
그록은 묵묵히 그 시선과 마주하다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블란이 자신의 옷깃을 잡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친 데 없습니까?”
“괜찮아요. 그, 그런데 그,”
당황스러움과 혼란을 담은 목소리로 블란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평소보다 더 당황한 채 말했다.
“주, 주스가 그록 씨 옷에 조, 조금 묻었는데.”
블란의 포도 주스가 그록의 흰 코트에 튀어 얼룩을 만들었다. 그록은 옷을 대충 털어내더니 블란을 품에서 떼어내고선 그녀를 다시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다행입니다.”
“아주 꼴값을 떠네.”
뒤이어 들려온 말에 그록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고 비웃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뒤에 있던 일행 중 한 명은 그만하라고 남자를 툭툭 쳤지만 다른 일행들은 같이 낄낄 웃어댔다. 순간 주위의 시선들이 힐끔거리며 그록과 블란, 그리고 그 남자들을 향했다.
그록은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그는 남자 앞으로 한 발 다가가 섰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록보다 덩치가 훨씬 더 컸다. 그록은 그 남자의 눈을 보며 묵묵히 말했다.
“사과하십시오.”
“뭐?”
순식간에 상대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블란은 이 모든 걸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이 떨리고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블란은 그록을 바라봤다.
“진짜, 살다 살다 별 이상한 소릴 다 들어보네. 내가 사과를 왜 해? 어? 왜 하냐고?”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고 얼굴이 험상궂게 변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그들에게로 향했다. 중앙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록은 그 시선들에 시선 한 번 두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쪽이 먼저 사람을 뒤에서 밀쳤잖습니까?”
“허!”
탄식을 내뱉으며 기가 차다는 듯이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그록은 말했다.
“사람이 다칠 뻔했습니다.”
그록은 아까 블란이 휘청거린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블란은 아픈 사람이었다. 그록은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아파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내려 그록을 본 남자는 순간 상상 이상으로 분노에 가득 찬 눈빛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가 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다쳐? 큭, 야, 야. 딱 봐도!”
그는 일행들에게 손짓을 하며 블란을 가리켰다. 그는 블란을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어디 치인다고 밀릴 덩치로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부딪친 내가 안 나가떨어진 게 다행인 것 같은데? 안 그래? 웬만한 사람이었으면 도리어 다쳤을걸?”
비웃음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와 혐오를 담은 눈빛에 블란은 주체할 수 없이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록의 옷깃을 잡으며 움츠러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귓가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너무 안 어울린다. 저렇게 사귀는 건가?”
“에이. 설마. 남자가 아까운데?”
블란은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제야 잊고 있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늘 들었을, 신경 썼을 목소리들을 축제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블란은 눈을 꾸욱 감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에 그녀는 눈을 떴다.
“여자가 돈이 많나. 너무 안 어울리는데.”
“남자 취향이 좀 이상한 거 아냐? 크큭, 아니면 어디 하자가 있나?”
그녀는 눈을 뜬 채 차마 소리가 들려오는 곳들을 바라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재미난 구경을 하듯이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내뱉는 그 말들은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날카로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댔다.
마치 그래도 되는 이에게 하는 것마냥.
“멀쩡하게 생겼는데?”
“어찌 알아? 저런 돼지 만나는데, 아까 주스 가게 앞에서 봤는데 여자가 냄새도 심하더라고. 남자 후각이 맛이 간 건가?”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녀는 땅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블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이전보다 더 심장이 크게 뛰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자신이 욕을 먹는 건 괜찮다. 어차피 평생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평생 들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그록은.
절대 그런 소릴 들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사람은!
블란은 순간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왜, 자신 때문에.
갑자기 일주일 간 기다리던 이 중앙 광장이 너무나도 무섭고 차가운 감옥처럼 느껴졌다.
[모든 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한 곳입니다! 함께 즐기실 마음으로 구경 오세요!]
책자에 쓰여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하지만 저 모든 이들에 블란 자신은 포함되지 않았다.
축제에 괜히 왔다.
자신은 여길 와서는 안 되는 존재였는데.
수많은 시선들이 심장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 순간 떨리는 그녀의 손을 누군가 잡아왔다. 블란은 시선을 들었다.
역시나, 그록이었다.
여전히 남자와 그록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고 분위기는 험악했다.
“진짜 더럽게. 별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블란은 차마 그록을 더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커다란 덩치의 블란이 어느 누구보다도 작아져 갔다.
그때,
“세상은 생각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만.”
무뚝뚝한 그록의 말에 블란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남자는 더욱더 깊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지금은 그 말이 너무나도 잘 믿기는군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 그 상황과 그 대상이 누구인지, 그록은 남자를 타오를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답을 대신했다.
작아져가던 블란의 눈에 그록이 누구보다도 커 보였다. 순간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더 커져갔지만 블란은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것마냥 잘 들리지 않았다.
그록만이 보였다.
“하! 진짜, 이 자식 웃긴 놈이네. 별거 아닌 일로 시비를 걸고.”
시비라.
먼저 사람을 밀쳐놓고. 먼저 사람에게 상처 받을 말을 해놓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놓고.
시비라.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그록은 마음속에서 불길이 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의 남자를 향해, 그 남자와 함께 비웃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시리지만 한편으로는 활활 타오르는 목소리로 그는 짓씹듯이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당장.”
그록은 그들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 순간 마주보던 남자는 다시 한 번 더 흠칫했다. 덩치는 남자보다 훨씬 더 작았지만.
발을 내딛는 그 모습은 마치 산과 같아 보였다.
우직해서 무너뜨릴 수 없는 그런 것을 닮아 있었다. 그록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블란은 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블란은 흠칫 놀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때, 블란은 깨달았다. 자신의 손만 떨리는 줄 알았는데.
그록의 손이 블란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우직한 산과 같은 모습과 달리, 든든한 등과 달리.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블란은 이전과 다른 의미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그녀는 그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그록이 마주 힘을 주어 잡아주었다.
두 손은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에게만 온전히 의지했다.
그록은 다시 한 번 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사과하십시오. 그게 옳은 겁니다.”